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기사
브나로드라는 말의 어원은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층에서 "민중속으로"(В Народ)라는 구호를 외치며 민중계몽운동을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민중계몽운동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는데 하필 러시아어라 공산주의 운동으로 오해받기도 해서 단어만 차용했다고 누누히 강조하기도 했다.이미 1920년대부터 지식인 계층과 종교계등에서 농민들을 상대로 계몽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이라 칭하는 운동은 동아일보의 주도로 일어났다. 한편으로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과 학생운동이 어려워진 학생들도 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고 민중들을 계몽하는 쪽을 선택하면서 운동에 호응하게 된다.1931년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명칭아래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민중계몽운동을 독려했다. 구체적으로 여름방학기간중에 농촌으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하고 야학을 만들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한글을 교육한다는 내용이었다.동아일보는 의욕적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해 야학을 통해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시국강연, 위생강연등의 강연활동도 진행되었으며 이런 활동상을 수기와 기사등으로 알리는 학생 기자들도 활발하게 활동했다.1931년부터 34년까지 진행된 브나로드 운동은 1,320처에서 5,751명의 학생이 참여하여 97,598명에게 강습을 진행했다.특 히 1934년에는 만주·일본 등 국외까지 이 운동이 확산되기까지 했다. 배부된 교재는 무려 210만 부나 되었다.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에는 명백한 한계도 있었다. 애당초 한글을 가르치는것에 일제는 의심의 눈으로 이 운동을 주시했다. 한편 일제가 브나로드 운동을 일시적으로 용인한건 학생운동의 힘을 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이 운동을 통해 농민의 계몽 뿐 아니라 학생들의 사상 선도도 꾀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편집장이었던 이광수의 주의사항에서 볼수있다. 지방에 있는 동지들과 협력하여 이 운동을 건실하게 할 것.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지방 지국의 알선을 받아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 할 것.동포에 대한 봉사이므로 품행에 주의할 것.건강에 유의할것. 이런 당부는 브나로드 운동을 철저히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지않으려는 의도였다지만 한편으로일제에 순응적인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공식적인 브나로드 운동은 4년만에 막을 내렸지만 지식인층의 민중계몽운동의 전통은 계승되어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에는 쇠퇴했지만 대학생들의 여름방학 기간의 농촌봉사(농활)이 브나로드 운동을 계승했다 볼수있다.소설가 심훈 은 브나로드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브나로드 운동의 장려를 위해 소설을 집필했는데 그것이 바로 상록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