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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여행 장두이 문화국장(연극배우)
[미술여행=장두이 문화국장]Summertime and the Livin' is easy
Fish are jumpin' and cotton is fine
Oh your daddy's rich and your ma is good looking
So hush little baby, don't cry.......
One of these mornings
You're going to rise up singing
Then you'll spread your wings
And you'll take the sky...........
미국 불멸(不滅)의 작곡가 'George Gershwin(1898.9.26.-1937.7.11.)은 ‘Rhapsody in Blue(1924)’, ‘An American in Paris(1928)’, ‘I got rhythm(1936)’ 등을 만든 미국 음악계의 거장(巨匠)!
그의 <포기와 베스>는 'Musical'이라고도 불리지만, ‘Folk Opera’라고 통칭되기도 한다. 뮤지컬이 오페라와 다를 것 없다는 격상(格上)이자 찬사(讚辭). 뮤지컬 프로덕션으로 제작되기도 하지만, 지금도 많은 오페라단에서도 제작되는 {명품음악뮤지컬 연극/‘포기와 베스’}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1
‘듀보스 헤이워드(DuBose Heyward)’와 ‘아이라 거쉬윈(Ira Gershwin)’이 대본을 쓰고 거쉬윈이 작곡을 한, 100년 넘는 미국 뮤지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품명작. 본래 원전(原典)은 1925년 듀보스 헤이워드가 쓴 소설 “Porgy"를 각색한 것. 브로드웨이 연극 역사학자 Robert Kimbell은 말한다. "<포기와 베스>는 뮤지컬, 오페라, 재즈 세 장르를 하나의 용광로에 주물러 녹아 낸, 미국 음악극 사상, 가장 미국적이며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작곡가 _죠지 거쉬윈_(왼쪽)
전설의 작곡가 ‘죠지 거쉬윈’은 재즈, 대중음악 그리고 클래식까지 섭렵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말 그대로 음악의 달인(達人)이다. 거쉬윈의 부모는 리투아니아에서 꿈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집안이었다. 어머니 ‘로자 브루스키나’는 본래 러시아 쌩페테즈브루크에서 태어난 유태인 집안 출신. 리투아니아에서 만나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버지 ‘MOISHE’는 영국식 이름 거쉬윈으로 개명했고, 어머니 로자는 ‘ROSE’란 이름으로 개명, 두 사람은 1896년 첫 아이 IRA GERSWIN을 낳았고, 1898년 9월 26일 브루클린 스네디커 애비뉴 아파트에서 둘째 ‘죠지 거쉬윈’을 낳았다. 이어 아들 아서 거쉬윈과 딸 프란시스 거쉬윈을 잇따라 낳는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2
어려서부터 아이라 거쉬윈과 죠지 거쉬윈은 집 근처 극장을 자주 찾았는데, 특히 죠지 거쉬윈은 어렸을 때,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08년까지 죠지 거쉬윈은 음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열 살 때, 친구가 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음악에 대한 흥미를 갖기 시작. 마침 그 무렵 부모는 아이라 거쉬윈을 위해 피아노를 사줬는데, 죠지 거쉬윈은 피아노를 마치 장난감처럼 즐겨 연주하며 놀았다고 한다. 누나 아이라 거쉬윈과 동생 아서 거쉬윈 역시 노래, 뮤지컬, 그리고 짧은 피아노곡 등을 죠지 거쉬윈처럼 작곡하는 등 말 그대로 음악가족으로 지내게 된다. 그 와중에 죠지 거쉬윈은 1911년부터 2년간 챨스 햄비쳐(Charles Hambitzer)선생을 만나 음악멘토링 선생으로 피아노 테크닉과 유럽 고전 전통클래식을 수학(受學)한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3
1916년 죠지 거쉬윈은 첫 번째 노래, ‘When You Want'em, You Can't Get'em, When You've Got'em, You Don't Want'em’을 작곡 17세 나이에 50센트의 수입을 거두기 시작. 이어 뉴욕 'Aeolian Company'와 스탠더드 뮤직 롤즈에서 녹음과 편곡을 담당, 수십 편의 음악에 관여, 1917년 마침내 'Rialto Ripples'로 성공을 거두고 브로드웨이에 'Making of a Girl'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거쉬윈은 지휘자이며 편곡자, ‘윌리엄 댈리(William Daly)’를 만나, 본격적으로 'Piccadilly to Broadway(1920)', 'For Goodness' Sake(1922)', 'Our Nell(1923)' 등에 공동작곡자로 등재,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4
1920년대 중반 죠지 거쉬윈은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고전클래식을 섭렵하고자 당대 유럽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쇤베르그’ 그리고 ‘모리스 라벨’과 교유(交遊)하며 클래식과 재즈의 비교학적 연구를 해, 더욱 확고한 죠지 거쉬윈만의 독창적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당시 모리스 라벨이 말했다. "죠지 고쉬윈 음악을 통해, 난 비로서 재즈음악이 리듬과 멜로디에서 매우 독특하고 동시에 탁월한 음악이란 걸 알았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5
이어 1929년 재즈음악의 획기적인 성공작으로 널리 알려진 ‘Rhapsody in Blue’를 작곡,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한 시그니쳐 스타일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이어 본격적으로 작사가(作詞家) '버디 드실바(Buddy DeSylva)'와 해후하며 'Oh Kay(1926)', 'Funny Face(1927)', 'Strike Up the Band(1930)' 그리고 1931년 ‘Of Thee I Sing’으로 권위의 퓰리처상 '베스트 뮤지컬드라마부분상'을 받는 쾌거를 만들어낸다. 마침내 1934년 여름, 소설 <Porgy>를 저술한 작가 DuBose Heyward의 제안으로 오랜 고심 끝에 흑인 커뮤니티의 사랑과 삶과 우정과 애환을 그린, 스펙타클 뮤지컬 <Porgy & Bess>를 작곡, 이듬해 1935년 발표한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6
<포기와 베스>. 이 작품은 캐롤라이나의 가난한 흑인 거주 지역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삶과 뼈에 사무친 애환을 그린 명작이다. 지금도 인종 차별이 여전히 심한 미국에서 흑인들이 대거 출연하는 흑인만을 위한 뮤지컬을 감히 만들려고 했던, 죠지 거쉬윈의 담대한 인본주의(人本主義)와 도전은 당시 시대상(時代相)으론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엄청난 시도. 그것도 흑인이 아닌 유태인이..... 아니나 다를까? 1935년 첫 공연은 참담한 실패였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7
충격은 거쉬윈을 캘리포니아로 가게 만들었고, 영화음악 작곡에 전념하게 한다. 그래서 탄생한 뮤지컬 영화가 전설적인 ‘프레드 애스타이어(Fred Astaire)’와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 두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Shall We Dance'다. 죠지 거쉬윈은 이 영화에서도 특유의 재즈 선율로 발레 움직임을 도입한 귀재(鬼才)의 분별과 선택이었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8
“진정한 음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사람들의 열망, 꿈, 그리고 생각을 반영하는 예술행위라고 생각한다. 난 미국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음악은 미국에 기초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곧 내 음악의 배경인 셈이다. 미국 흑인 사회에서 발전하고 꽃을 피운 재즈음악이야 말로, 미국 음악의 또 하나 중요한 뿌리라고 믿는다.(죠지 거쉬윈의 말)”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9
당연히 명작 <포기와 베스>도 이러한 그의 음악적 사념(思念)과 철학(哲學)에서부터 기초한 뮤직씨어터, 음악극이었다. 이러한 불멸의 국민음악가 죠지 거 쉬윈의 업적에 2007년 “죠지 거쉬윈 음악상”이 제정됐고, 그 첫 수혜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El Codor Pasa'의 ‘사이몬&가팡클’의 멤버 ‘Paul Simon’이 선정되었었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0
1937년 전부터 뇌염을 앓아오며, 고무 타는 냄새를 맡는다고 술회하기도 했던 죠지 거쉬윈. 운명의 날 1937년 7월 11일. 'The Goldwyn Follies' 작곡을 하던 도중 쓰러져, 뇌종양 진단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1
작곡가로서의 유산(遺産), 그의 뮤지컬 작품만 해도 <Crazy for You>, <My One and Only>, <Show Girl>, <Oh Kay>, <Tell me More> 등 15편이 넘고, 그의 클래식~재즈 음악만 해도 수 십 편에 이른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의 음악이 연주되어, 사후(死後)에도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곡가로 남아있는 ‘전설 가운데 전설’이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2
필자가 귀국 후 서구 뮤지컬에 反해, 國樂뮤지컬 '한강수야', '흐르는 강물처럼', '영평팔 경가', '제비의 노래'등을 쓰고 연출한 바 있지만, 유독 필자가 공감하는 거쉬윈의 말, "나는 미국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음악은 미국을 기초로 한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3
한국 뮤지컬에도 "나는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음악은 한국을 기초로 한다!"를 다시 되새기어 취합해본다!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4
사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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