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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게 때문이리라.
1932년생, 올해 95세이신 우리 어머니의 가족을 위한 축복기도는 예전보다 많이 짧아졌다.
하지만 짧아진 기도 속에는 여전히 자식들과 손주들을 향한 사랑, 그리고 가족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깊게 담겨 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우리 온 가족들이 모여서 즐거움으로 이러고 하나님 주신 음식을 잘 먹고 정말 기쁘게 지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집안에는 미너리들이 잘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좋은 미너리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우애 있게 즐겁게 잘 살아서 항상 어려운 가정 돕고 살게 해주세요.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날씨도 화창한 5월 16일 토요일, 우리 박가네 서울 가족 29명이 1박 2일 일정으로 연천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펜션에 모였다.
3년 전 미국에 사는 막내 가족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양평 펜션에 모두 함께 모였었는데, 이번에도 막내 가족이 들어여면 온 가족이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한 시간 속에 어머니의 기도가 있다.
어머니의 짧은 기도를 듣는데, 오히려 긴 말보다 더 깊게 마음에 남는다.
가족끼리 우애 있게 살라는 말씀, 어려운 가정을 도우며 살라는 말씀 속에는 어머니 평생의 삶과 믿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얼마 안 있으면 미국 막내 와!"
"막내 언제 온다냐?"
"조끔만 기다리면 와!"
"막내 언제 온다냐?"
"쪼끔만 기다리면 와!"
"어머니 혹시 막내 아들 못 알아보는 것 아니야?"
"어떻게 아들을 다 못 알아본다냐."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 살고 있는 우리 6남매의 막내가 5월에 온다고 했다.
아마도 6개월 전쯤 미리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올해 95세이신 어머니는 그 뒤로 거의 만날 때마다 물으신다.
"막내 언제 온다냐?"
하긴 자식이 미국에 살면 한국 사는 것과는 다를 것 같다.
다른 자식들처럼 명절이나 어버이날, 생일, 추도예배 때도 오는 것도 아니고 주말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올 때도 올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머니 마음속에는 이미 몇 달 전부터 '막내 오는 날' 달력이 걸려 있는 것이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특히 시골에서는 지금처럼 피임을 할 수 없었다.
생기면 낳고, 낳고, 또 낳고,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6남매는 어느 집에나 흔했고, 형제들 나이 차이도 3~4년씩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큰딸이 스무 살이 넘어 시집갈 나이에 막내가 태어나는 집도 적지 않았고, 어떤 집은 조카가 삼촌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다.
우리 큰집의 경우도 막내딸보다 조카가 나이가 많았고 다른 조카는 고모와 함께 중학교 한 반에서 남자인 조카가 반장을 하고 고모는 부반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집도 그랬다.
맏인 누나가 시집갈 나이쯤 어머니는 막내를 낳았다.
그래서 그때는 동네 창피하다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막내는 이후 부모님에게 평생 이런 말을 들고 있다.
"그때 막내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그 말 속에는 사랑도 있고, 대견함도 있고, 자랑스러운 마음도 담겨 있는 것 같다.
막내는 어려서부터 참 유순하고 심성도 반듯해서 시골에 스님들이나 동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엄마가 집에 있다고 데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스님들과 동냥 얻으러 온 사람들은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중에 잘되라!"는 말을 해주곤 했단다.
그래서 그런지 막내는 신기하게도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일이 잘 풀려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 잘하던 바로 위 누나 덕도 많이 봤다.
선생님들이 "누구 동생"이라면 예뻐해 주셨고 자연스럽게 사랑도 많이 받았단다.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 온 뒤 대학입시에 한 번 실패하고 재수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오히려 잘된 일이 되었다.
덕분에 자기 적성에 잘 맞는 영문학과에 가게 되었고, 성적보다는 낮은 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부터 영어연극반 단원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막내는 언어 감각도 타고났지만, 바로 위 누나 덕분에 영어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영어에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과목보다 영어를 유난히 잘했던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 시골에서 버스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광주에 사시던 영어 선생님 댁까지 중학생 막내를 데리고 가 아이스크림도 사주시고 옷도 사주셨다고 하니, 얼마나 예뻐하셨는지 짐작이 간다.
그렇게 영어와 인연이 깊어졌고, 대학 졸업 후에는 당시 잘나가던 휴대전화 회사와 여러 회사에 합격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시절엔 이름도 낯설던 반도체 회사를 선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택이 신의 한 수였고 중문학과와 영문학과 사이에 고민하다 영문학과를 선택한 것도.
지금 돌이켜 보면 모든 선택이 최상의 선택이 된 것이다.
이후 미국, 대만,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 오래 근무했고, 결국 미국 반도체 회사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이제는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자기 삶을 단단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95세 어머니 마음속에서 막내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이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어머니는 물으신다.
"막내 언제 온다냐?"
아마 막내가 한국에 오는 날까지 계속 물으실 것 같다.
막내를 제외한 우리 형제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돌아가며 어머니를 찾아뵌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막내만은 쉽게 볼 수가 없다.
그러니 95세 어머니 마음속에 쌓인 막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얼마나 크시겠는가.
가끔 영상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더 애틋하다.
휴대폰 화면에 막내 얼굴이 나타나면 어머니는 꼭 화면을 손으로 쓰다듬듯 만지신다.
한 번 만지고, 또 만지고.
마치 "거기 잘 있냐..."하며 얼굴이라도 어루만지는 것처럼 말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면 사람은 손끝부터 먼저 움직이는가 보다.
우리 형제는 4남 2녀, 모두 여섯 남매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다.
딸 둘은 당연히 "엄마"라고 부르고, 나와 형, 그리고 아래 동생은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유독 막내 아들만은 여자 형제들과 같이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그 한마디에 막내 특유의 살가움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도 막내에게 유난히 더 마음이 쓰시는 것 같다.
올해 95세인 우리 어머니는 치매 초기 증상이 있다.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다시 물으실 때가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딱 하나, 막내가 미국에서 온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으신다.
“막내 언제 온다냐?”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신다.
처음엔 "몇 달 있으면 와요."
또 어느 날은 "석 달 있으면 와요."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는 그 시간을 더 길게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조금만 있으면 와."
그 말이 제일 좋다.
그 말에 어머니 얼굴도 환해진다.
아마 마음속의 '조그만'은 날짜가 아니라 기다림을 견디게 하는 위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막내 가족이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한 달 반 정도 남은 시기가 되었다.
이쯤 되니 가족들 마음도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디서 모일까?”
지난번에는 30여 명 되는 가족들이 양평 펜션에서 1박 2일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펜션 마당에 가득했고,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밤늦게까지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양평은 가기 편한 곳이기는 하지만 펜션 비용만 140만원이 넘게 들었다.
거기에 날짜 맞추랴, 방 잡으랴, 예약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30명 넘는 가족이 움직이는 건 거의 작은 워크숍 수준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형님네 둘째 조카와 질부가 본격적으로 장소 물색에 나섰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검색도 빠르고 예약도 야무지게 잘한다.
우리는 "좋은 데 없나?" 하고 말로만 찾는데, 젊은이들은 이미 후기 비교를 끝내고 할인까지 적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곳이 연천군 임진강가에 있는 펜션이었다.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고, 서울에서도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괜찮은 장소였다.
역시 이런 건 젊은 사람들이 잘한다.
그리고 지난 3월 말, 미리 예약까지 끝냈다.
가족 모임을 준비하면서 또 하나 의논할 일이 있었다.
바로 95세 어머니를 모시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연세도 워낙 많으시고, 차를 오래 타시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괜히 무리하셨다가 힘드실 수도 있으니 처음에는 모시고 가지 않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대신 문제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평소에는 자식들이 돌아가며 챙기는데, 그날은 가족들이 모두 연천으로 가게 되니 저녁 시간을 누가 돌봐드릴지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결국 매일 아침 어머니를 돌봐주시는 보호사님께 부탁드리기로 했다.
“그날 저녁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하고 말이다.
그렇게 거의 정리가 되는가 싶었는데, 큰아들인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래는 큰누님이 시골 동창회가 있어 가족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일정이 바뀌어 그날 오후 늦게라도 연천 행사장에 왔다가 잠은 안자고 집에 나오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형님이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를 누님 오는 차편에 맞춰 모시고 나오면 되겠네."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래, 그러면 어머니도 같이 모시고 가자."
결국 가족 모두의 마음은 처음부터 같았던 셈이다.
'힘드실까 봐' 망설였을 뿐, 사실은 다들 함께 모시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오는 막내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아무리 영상통화가 좋아졌다 해도, 직접 얼굴 보고 웃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막내 언제 온다냐?”
그 말씀을 수없이 하셨던 어머니인데, 정작 막내가 왔을 때 가족들 속에 함께 계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했다.
그리고 이동은 셋째 아들네 차로 맡기로 했다.
아마 차 안에서는 또 같은 질문이 여러 번 나올 것이다.
"막내 언제 오냐?"
"조금만 있으면 와요."
그 대담을 듣고 또 잠시 웃으실 우리 어머니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둘째 딸인 여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미국 막내 가족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에는 장시간 비행 끝에 조금은 피곤해 보이면서도 반가운 얼굴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짧은 글 하나.
“진서네 잘 도착해서 식사하고 디저트 타임입니다.”
그 한마디에 조용하던 단톡방이 갑자기 살아났다.
기다렸던 사람들이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는 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환영 메시지들이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가운 얼굴들 환영합니다.”
“미국 가족 무사하게 도착해서 감사. 이번 모임 때 봐.”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주말에 얼굴 봅시다. 반갑습니다~~”
“반가운 사람들 다 왔네. 토요일에 보자.”
“모국 방문을 축하한다.”
“환영합니다~^^”
“먼길 오느라 고생했네. 토요일 보자구~♥”
단톡방 분위기만 봐도 이미 가족 모임은 절반쯤 시작된 느낌이다.
그리고 저녁 무렵, 이번에는 치킨 사진이 올라왔다.
미국에서 막 도착한 가족들과 둘째 딸 가족들이 둘러앉아 치킨을 먹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아래에는 “치킨은 못 참죠 ㅎㅎ” 라는 한 마디가 달렸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형님네 둘째 질부가 예약해 둔 펜션 주소를 단톡방에 올렸다.
이제 정말 가족 모임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몇 시 출발?”
“누구 차 타요?”
“고기는 누가 사 가?”
단톡방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 9시쯤 또 사진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고깃집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미국에서 이제 대학생이 된 남자 조카가 술잔을 들고 있었다.
어릴 때 한국에 와서 장난감 들고 뛰어다니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고기집에서 어른들 틈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으니 세월이 참 빠르다.
사진과 함께 둘째 딸이 올린 글.
“진우 한국식 주도를 배우는 중!”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아내와 함께 수유시장에 갔다.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날이라 장보는 일도 작은 행사가 된다.
첫째, 둘째, 셋째 3동서가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되어 있다.
큰며느리는 고기 담당.
셋째 며느리는 술과 음료 담당.
그리고 우리 둘째 며느리는 찰밥, 김치, 홍어무침, 수박, 참외, 체리, 방울토마토, 식해까지 준비했다.
이 정도면 거의 작은 마트 하나 차린 수준이다.
장바구니마다 음식이 가득 담기고, “이건 애들이 좋아하겠다.” “수박은 큰 걸로 2개 사자.”
이런 말들이 오가니 명절 전날 시장 분위기 같았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조금 무거워진다.
둘째 아들네 손녀가 열이 난다는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온 가족이 이렇게 다 모이는 것도 거의 3년 만이다.
그 사이 아이들은 훌쩍 컸고, 어른들은 그 세월만큼 나이를 더 먹었다.
어제만 해도 아들네에서는 “아무래도 못 갈 것 같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내도 “그럼 참석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아픈 아이 데리고 억지로 오는 건 부모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을 보던 중 아내 마음이 자꾸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아들 부부에게 전화를 건다.
“아기는 어떠냐?”
어제보다는 좀 괜찮아졌다는 말을 듣자, 그 순간 욕심이 생긴 것 같았다.
“지금 이 나이에 못 보면 언제 또 전체 가족이 다 모이겠어…”
“이럴 때 얼굴 보여줘야 하는데…”
손녀를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할머니 마음이었다.
사실 아이들은 금방 큰다.
지금의 이 모습은 딱 지금뿐이다.
다음에 보면 말도 더 늘고, 얼굴도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필 토요일이라 소아과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대기번호가 무려 60번.
결국 병원에 들렀다가 상태가 괜찮으면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뒤 전화가 왔다.
“갈게요.”
그 말에 아내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우리도 큰아들과 함께 셋이서 오후 1시에 출발했다.
연천군 백학면 펜션에 거의 도착할 즈음 작은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점심을 먹이며 손녀에게 약도 먹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아이들이 있는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평소 그렇게 뛰어다니고 재잘거리던 손녀가 오늘은 엄마 품에만 안겨 있다.
평소 같으면 의자 사이를 뛰어다니고, 낯선 사람에게도 금방 다가가던 아이인데, 오늘은 조용히 엄마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만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아픈 것이다.
조금 후 형님네 부부가 펜션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우리도 바로 출발해 4km 정도를 달려 연천군 백학면 펜션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펜션 거실도 넓고, 주차 공간도 넉넉하고, 무엇보다 바로 앞에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멀리 보이는 풍경도 한적해서 서울의 복잡함이 금세 잊혀지는 곳이다.
"여기 잘 잡았네..."
다들 한마디씩 할 정도로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다.
그리고 잠시 후부터 가족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느라 고생했어~”
“차 안 막혔어?”
“덥지?”
더운 날씨에 오느라 고생햇다고 도착하는 사람마다 시원한 식혜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침내 여동생네 가족과 미국에서 온 막내 가족이 도착했다.
순간 펜션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다.
“왔네! 왔어!”
“어휴, 진짜 오랜만이다!”
“애들 엄청 컸네!”
3년 만에 만나는 가족들이라 반가워하는 목소리도 자연히 커졌다.
특히 어릴 때 미국으로 가 미국 시민권자가 된 이제 19살 남자 조카가 식혜를 마시더니 웃으며 말한다.
“이거 옛날 할머니가 해주던 그 식혜 맛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른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사람 기억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한데, 어릴 적 먹었던 할머니 식혜 맛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후.
95세 어머니를 모신 셋째 아들 가족도 도착했다.
“어머니 오셨어!”
순간 다들 밖으로 나갔고, 어머니는 차에서 내리시며 가족들을 둘러본다.
특히 미국에서 온 막내 얼굴을 보시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그토록 기다리셨던 아들이 눈앞에 서 있으니 얼마나 좋으시겠는가.
다들 시원한 수박 한 조각씩 먹은 뒤 가족 전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역시 젊은 조카들은 다르다.
예전 같으면 “누가 찍지?” 하다가 사진 찍는 사람 한 명은 꼭 빠졌는데, 이번에는 자동 설정으로 딱 맞춰 놓고 찍으니 모두 사진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 둘~ 셋!”
사진도 얼마나 잘 찍는지, 단체사진인데도 다들 얼굴이 환하게 잘 나왔다.
사진 속에는 95세 어머니의 웃는 얼굴도, 멀리 미국에서 날아온 막내 가족도, 오랜만에 다시 모인 형제들과 조카들 웃음도 모두 담겨 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이들이 우리 나이가 되었을 때 이날 이 가족 사진을 보며 이 행복한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우리가 잘 살아왔듯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다음 주 음력으로 4월 5일은 아버지 기일이다.
부처님 오신날 4월 초파일 3일 전.
그래서 오늘 이렇게 온 가족이 다 모인 김에 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순서는 간단하게 하기로 했다.
찬송가 한 곡 부르고, 둘째 사위가 대표기도를 하고, 그리고 6남매가 돌아가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3~5분씩 이야기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43년 전 첫째 딸 하나 시집보내고 저 세상으로 주소를 옮기셨다.
그래서 첫째 며느리부터 넷째 며느리까지, 그리고 둘째 사위 역시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물론 손주들과 증손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참 의미 있는 일 같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었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참 형제들이 우애가 좋으셨다.”
그런 이야기들이 결국 한 집안의 뿌리가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 가족이 추도예배에 늘 부르는 찬송가가 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악보는 단톡방에 올려진 것을 보면서.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펜션에서 온 가족의 찬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강바람이 불어오고, 아이들은 잠시 조용해지고, 어른들은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저마다 마음속으로 지나온 세월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말 찬송가 가사 그대로다.
우리 박가네 서울 가족은 예수 믿고 참 많은 복을 받은 집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웃으며 모일 수 있는 ‘즐거운 동산’ 같은 가족이다.
돌이켜 보면, 그 어렵던 시골 골짜기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도 있었고, 서울 올라와 고생하던 시간도 있었고,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허리 휘던 날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에서도 오고, 서울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웃고 있으니,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 큰집 장손인 광주 큰형님은 서예를 하시고 불교를 믿으시는데, 가끔 어머니를 만나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작은어머니는 예수 믿고 축복받으셨습니다.”
종교는 달라도 삶을 보면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식들 잘되고, 손주들 잘 자라고, 95세가 되도록 가족들의 사랑받으며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시는 듯하다.
순서대로 큰딸부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누님이 손사래를 치며 "나는 안 하겠다"고 한다.
괜히 시작했다가 눈물부터 날까 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장남인 형님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형님은 이번 가족 모임을 계획하면서, 아버지 추도예배 날짜도 며칠 앞당겨 드리기로 했는데 그 무렵 꿈에 아버지를 봤다고 한다.
그런데 꿈속에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형제들이 우애 있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
확실히 장남은 부모를 생각하는 깊이가 다른 것 같다.
차남인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딱 한 번 꿈을 꾸었다.
그것도 군대 제대하고 공무원 시험은 보고 난 뒤였으니 1984년, 지금부터 42년 전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꿈속 아버지 모습이 평소 농사짓던 모습이 아니라 머리에 갓을 쓰신 모습이었다.
하지만 장남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느꼈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1960~70년대 시골에서는 어느 집 제사를 지내고 떡을 조금 가져다 주면 형제들은 둘러앉아 그 작은 떡을 나눠 먹었었다.
그때 나는 한 손에 떡을 들고 빨리 먹고 하나라도 더 먹을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 형은 부엌문을 열고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엄마도 묵어~~”
그러면 어머니는 늘 같은 대답을 하셨다.
“나는 아까 많이 묵었다. 너희들 많이 묵어라.”
나는 그때 정말 어머니가 이미 떡을 드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와 겨우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형은 어떻게 어머니가 안 드셨다는 걸 알았을까, 지금도 참 궁금하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장남은 하늘이 낸다”는 말을 했나 싶다.
그리고 셋째,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결혼하셨습니다.
그 시절은 전국 어디나 다 그랬듯이 먹고사는 것 자체가 희망이던 시대였지요.”
하지만 그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큰집에만 가면 참 행복했습니다.
아버지 삼형제는 정말 우애가 참 좋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켜봤지만 단 한 번도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말다툼하는 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흠이라면 세 분 다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키가 가장 크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회관에서 모시고 오라고 하면, 아버지가 마을회관에 계신지 알기 위해서는 신발만 보면 되었습니다.
제일 큰 신발만 찾으면 됐으니까요.
그렇게 삼형제가 의좋게 지내다 보니 근동에서는 “저 집안은 참 형제 우애가 좋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버지 삼형제 후손들은 광주, 부산, 서울에 흩어져 살면서도 한식이나 벌초 때면 꼭 모입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크게 다툰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게 우리 밀양박씨 규정공파 금성리 박가네 전통이고 가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도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넷째이자 셋째 아들 차례가 되었다.
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따뜻했던 장면을 이야기했다.
가을이면 겨울 동안 소 먹일 풀을 베어 말려야 했는데, 아버지는 산에서 풀을 베고 내려오실 때 꼭 그 위에 까맣게 익은 머루나 얼음 열매를 얹어 오셨다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먹이려고 말이다.
시골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늘 몸으로 자식 사랑을 보여주셨다.
말없이, 묵묵하게, 평생 그렇게 사셨던 분이었다.
다섯째이자 둘째 딸인 여동생 차례가 되었다.
여동생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우리 집이 가난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아니, 그 시절 우리 집 형편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동생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큰집은 엄청 잘사는 집인 줄 알았어요.”
왜 그랬냐고 하니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큰집에만 가면 큰어머니, 큰아버지가 늘 반겨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사랑을 참 많이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에게 ‘잘사는 집’이라는 건 사실 돈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제삿날이나 명절 때 큰집에 모이면 늘 행복했습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웃음소리, 부엌에서 나는 음식 냄새, 어른들이 건네주는 떡과 먹을 것들.
그 기억이 어린 시절 자기 마음속에 아주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내가 어려움을 견디게 해준 큰 힘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미국에서 온 막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막내는 특유의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막내로 태어나서 그런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친구들은 지게 지고 일하고, 소풀 베어오고, 소 먹이고 했는데 아버지는 유독 자기에게는 그런 일을 잘 시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아이스크림콘이에요.”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벌초 가는데 같이 가자며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하셨답니다.
막내는 그때까지 아이스크림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벌초하러 가던 곳은 보성, 지금의 서재필 박사 생가가 있는 가네 동네 뒷산입니다.
원래 우리 선조들이 그 마을에서 서재필 박사 외가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집에 살다가, 농토가 좀 더 넓은 외서면 금성마을로 이사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산은 여전히 그 산속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동네에서 두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10km 정도 가서 내린 뒤, 다시 산길을 4km쯤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나도 어릴 때 가을 추수를 끝내고 산소를 찾아 시제를 지낼 때 많이 따라다녔던 곳이고, 이후 현재의 가족묘를 만들기 전까지 사촌 형제들이 여름에 모여 벌초를 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드디어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답니다.
“처음 먹어봤는데 너무 너무 맛있었어요.”
막내 얼굴에 아직도 그 맛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는 막내를 동네 회관 앞에 기다리게 해두고 혼자 산으로 벌초하러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계도 없던 시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답니다.
어린 막내는 겁이 나 울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달래주었다고 합니다.
한참 뒤에야 아버지가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막내는 성인이 된 후 형님들과 함께 벌초를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산소가 한두 군데도 아닌데 아버지가 그걸 혼자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깊은 산속에서 혼자 풀 베고, 묘 돌보고, 낫질하고, 땀 흘리며 하루를 보내셨을 아버지 모습이 이제야 보였다는 것입니다.
“외롭고 무섭기도 하고 힘드셨을 것 같아요…”
막내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처음에는 절대 이야기 안 하겠다던 큰누님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앞으로 나왔습니다.
동생들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참았던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큰누님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아부지 생각하면 나는 제일 생각나는 게… 저녁이면 엄마가 나한테 아부지 소 받으러 가라고 했던 거야…”
아버지가 오시는 길은 멀리 공동묘지가 있는 산길이었다고 합니다.
어른들도 무서워하던 길인데, 어린 누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면, 누님은 멀리 공동묘지 너머로 아버지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못 기다리면 무서움을 참고 아버지가 오는 길 쪽으로 걸어갔다고 합니다.
공동묘지를 지나고, 벅수골을 지나고, 어린아이가 혼자 어둠 속을 걸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저 어둠 속에서 아버지 기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에헴…”
그러면 누님은 반가워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아부지!”
그러면 저 멀리서 아버지가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선예냐?”
그 한마디만 들리면 그렇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누님은 아버지가 지게에 몸도 제대로 못 펼 만큼 풀을 가득 지고 오시면, 아버지 손에서 소를 받아 앞장서 집으로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늘 지게 초깔 위에 머루나 다래 같은 산열매를 얹어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려고…”
큰누님은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아마 그 순간 가족들 모두 자기 마음속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제들이 돌아가며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시절 장면들이 마치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공동묘지 길을 지나 아버지를 마중 나가던 어린 누님의 모습도 보이고, 머루를 지게 위에 얹어 오시던 아버지 모습도 보이고, 작은 떡 한 조각 앞에서도 자식부터 챙기던 어머니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 하나 휴지 없이 버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이야기 듣다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습니다.
정말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형제들보다 아버지를 더 잘 알고, 더 깊은 정으로 평생을 함께 살아오셨을 95세 어머니가
우리 이야기를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계신는 모습이 참 뭉클했습니다.
아마 어머니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장면들을 마음속에서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산골짜기에서 자식들 키우던 시간, 남편과 함께 논밭 일하던 날들, 그리고 먼저 떠나보낸 남편 생각까지.
그 모든 세월이 어머니 마음속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참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버지 추도예배 자리에 우리 6남매뿐만 아니라 자식들, 그리고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함께 모여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아이들은 지금은 웃고 떠들며 듣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오늘 이야기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자기들끼리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겠지요.
“우리 아부지 형제들은 정말 우애 좋게 지내셨어.”
“우리 가족들 모이면 진짜 행복하고 좋았어.”
아마 지금 우리가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추도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95세 어머니의 축복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우리 온 가족들이 모여서 즐거움으로 이러고 하나님 주신 음식을 잘 먹고 정말 기쁘게 지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집안에는 미너리들이 잘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좋은 미너리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우애 있게 즐겁게 잘 살아서 항상 어려운 가정 돕고 살게 해주세요.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전, 코로나 이전만 해도 어머니의 가족 축복기도는 10분이 넘곤 했습니다.
자식들 이름, 손주들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가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기간 2년 동안, 매일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던 교회를 가지 못하게 되었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머니에게도 조금씩 치매가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아침이면 주야간보호센터에 가셨다가 저녁이면 돌아와 주무시고, 일요일이면 바로 앞 교회에도 나가십니다.
95세 연세를 생각하면 아직도 참 건강하신 편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어머니 마음속에는 아직도 가족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 늘 기도하시다가, 마치 잠드시듯 평안하게 하나님 나라로 이사 가셨으면 좋겠다고.
추도예배가 끝난 뒤에는 아이들이 미리 준비해 둔 숯불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숯불 냄새가 피어오르고, 여기저기서 “고기 뒤집어!”, “안 타게 봐!”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여러 가지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습니다.
찰밥, 김치, 홍어무침, 식혜,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 체리까지.
먹을 것이 넘쳐납니다.
인원이 무려 29명이다 보니 한 번에 다 같이 앉아 식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몇 차례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누구는 먼저 먹고, 누구는 고기 굽다가 나중에 먹고, 아이들은 중간에 또 과일 먹고 뛰어다니고.
하지만 그런 정신없는 분위기마저 참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준비한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던지.
수박은 어찌나 시원한지 입안에서 바로 여름이 터졌고, 참외는 달고, 방울토마토와 체리는 손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현석이 어렸을 때 개다리 춤 기억나냐?”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어릴 때 둘째 딸의 아들 현석이가 가족들 앞에서 곧잘 개다리 춤을 추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현석이에게 나와서 시범을 보이라고 합니다.
현석이가 앞으로 나와 개다리 춤 시범을 보이는데, 그 순간부터 펜션 거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먼저 미국 조카와 현석이, 그리고 셋째 아들의 아들 서진이 남자 셋이서 춤을 췄습니다.
춤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설프고 우스운 동작인데, 그게 더 웃겼습니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쏟아졌습니다.
95세 할머니도 너무 즐거우신지 웃고 또 웃다가 박수까지 치셨습니다.
다음 순서는 조금 더 나이 많은 아이들 셋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현석이가 나와서 시범을 보입니다.
이번에는 약간 손을 아래로 흔드는 변형 버전입니다.
그 모습에 또 난리가 났습니다.
“아이고 배야!”
“그게 뭐야!”
다들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다음은 미국 조카와 서영이, 여자 조카 두 명 차례.
젊은 애들은 또 리듬감이 다릅니다.
같은 개다리 춤인데 어쩐지 세련돼 보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형제 넷과 둘째 사위까지 다섯 명.
이쯤 되니 거의 장기자랑 수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님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음은 며느리들 나오세요!”
거기에 여동생까지 합류해 다섯 명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다들 조금 어색해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환호성이 가장 컸습니다.
“잘한다!”
“앙코르!”
웃음소리가 펜션을 흔들었습니다.
다음은 조카며느리들과 우리 집 며느리, 그리고 아직 두 돌도 안 된 손녀 차례였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답게 전혀 빼지 않고 분위기를 참 잘 맞춥니다.
아기까지 흉내 내며 몸을 흔드니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큰딸 부부 차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옆 소파에 앉아 계시던 95세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도 손을 흔들며 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모두 웃음이 터졌습니다.
정말 그날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누가 잘 추고 못 추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같이 웃고, 같이 박수 치고, 같이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습니다.
다음 날이 주일이라
교회 성가대 대장, 반주자, 교회학교 교장 직분 맡은 식구들이 펜션에서 자지 못하고 다들 서울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형님의 손자 손녀가 부모들이 가는데도 펜션에 남아 자겠다고 합니다.
어린애들이 즐거운 가족 분위기와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엄마 아빠가 집에 가는데도, 행복한 이곳에 남고 싶었던 겁니다.
정말 너무나 행복했던 1박 2일 가족 모임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박가네 서울 가족은 이날 웃고 나눈 사랑의 힘으로 또 살아갈 것입니다.

첫댓글 행복이 넘쳐나는 모임이 눈에 보입니다. 어머님 내내 건강하시다 하나님 부름 받으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