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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갖추어야 할 12가지 요소
우리는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리더로 살아가게 된다. 또래 집단에서 리더로, 학교 혹 회사에서,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리더로 살아간다. 왜 우리는 리더십에 대해 배워야 할까? 그 해답을 빈스 롬 바르디의 말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리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십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민을 해야 한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리더로 섬긴다. 세상에서는 리더로 서 보지 못한 사람도 교회 안에서는 리더로 섬기는 쉬운(?)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막상 섬길 자리에 그냥 앉아만 있다면 아주 곤란하다. 이런 경우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있다. “말아 먹는다.” 지금 조국 교회의 문제는 리더가 아닌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리더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고, 역량이 부족한 자가 그 자리에 있는 자체가 아주 큰 문제다.
리더를 세울 때는 억지로 세워서는 안 된다. 정말 섬길 마음이 있고, 겸손히 자신을 부인하는 자를 선택해야 한다. 리더를 세울 때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다 세우면 곤란하다.
나는 “저, 리더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지체들을 세우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하고 싶은 사람보다 리더를 해야 할 사람을 찾아서 세우려고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본인이 하고 싶다고 아무에게나 CEO 자리를 내 주지 않는다. 주요 임원 자리에도 아무나 앉히지 않는다. 그만큼 리더 한 명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리더를 돕는 부 리더 한 사람을 뽑을 때도 아주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은 부 리더로 세워져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부 리더가 리더가 된다. 그리고 리더들을 섬기고, 대표하는 탑 리더가 된다. 따라서 부 리더 한 사람을 선정할 때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는 정말 끔찍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
부 리더 때는 몰랐던 모습이 리더와 탑 리더로 섬길 때 드러난다. 잘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으면 좀 더 큰 리더십의 옷을 입을 때 여실히 그 허점과 부족함이 드러난다. 한 리더의 미성숙함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해야 할 공동체가 악취가 가득한 곳이 되게 만든다. 그래서 부 리더를 한 명을 뽑을 때도 신중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기도하는 가운데 뽑아야 한다.
대구동신교회에서 청년부 리더와 섬김이를 450여 명가량 세웠다. 그때 청년부를 함께 섬겼던 교역자가 목사님 5명, 풀타임 전도사님 3명, 그리고 함께 섬기는 2명의 풀타임 간사님, 3명의 파트 타임 간사님과 같이 리더십을 세웠다. 그때 리더를 세우는 원칙은 교역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리더 혹은 섬김이로 뽑지 않았다. 부 리더를 뽑을 때도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선정했다. 그런 뒤 리더로 세울 때 다시 점검하고, 탑 리더로 섬길 때 조금이라도 시비가 있으면 뽑지 않았다.
디렉터로 섬길 초반에 탑 리더로 세워도 될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세우려고 했는데 반대하는 교역자가 있었다. 디렉터가 얘기했으니 통과 시켜 줄 법도 한데 안 뽑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예전과 달라졌으니 예전 모습을 염두에 두지 말고 탑 리더로 한번 세워보자고 했다. 디렉터가 그렇게 하자고 하니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아... 그런데 몇 개월 지난 뒤 문제가 터졌다. 그 탑 리더로 인해 리더들이 힘들게 되었다. 함께 동역하는 지체들이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 뒤로 아무리 디렉터라 할지라도 누군가 아니라고 하면 세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리더를 세웠느냐는 그 한 사람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호수 전체를 다 구정물로 만들 듯한 사람이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것은 한순간이다.
한 선교단체 전국 캠퍼스 간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Time을 Timing으로 만들라!”특강을 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한 캠퍼스 간사님이 다가와 질문을 하셨다. “캠퍼스에 한 지체를 세우려고 하는데... 이 지체가 섬겨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세우기에 힘들 것 같기도 해요. 목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절대 뽑아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캠퍼스 간사 한 명이 50명, 100명을 책임지고 리드할 수 있다. 많은 리더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캠퍼스 간사님 자신도 확신이 없는 사람을 세워서는 안 되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인재(人材)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힘들게 할 인재(人災)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혼자 섬기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드렸다.
리더 한 사람의 역량은 10명이 아니라 사실은 50명, 100명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생각보다많은 사람들을 잘 케어할 수 있다. 그러나 리더로서 역량이 부족한 섬김이에게 50명 혹 100명을 맡기면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5명 혹은 10명만 간신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차라리 캠퍼스 리더 한 사람이 50명, 100명을 맡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리더가 아닌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있는 것은 바르지 않다. 함께 하는 공동체 지체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그들의 성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오히려 리더 한 사람이 여러 명을 케어할 수 있다. 그러나 마구잡이식으로 맡기면 좋지 않다. 일단, 리더를 양성하고, 이양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절대 맡겨서는 안 된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교육과 훈련을 더 받고 성숙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좋다.
어린 자녀에게 불을 주는 부모가 없다. 그랬다가는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전체가 불탈 수도 있다. 또한 아직 어린 자녀에게 부엌에서 요리하라고 칼을 주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아무에게나 불을 주고, 칼을 사용해 보라고 할까? 멀리 내다보지 않고,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리더로 사용하기보다 리더로 준비시켜야 한다.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이 교육을 받지 않고, 훈련을 받아야 할 사람이 훈련을 받지 않고, 섬기는 것은 결코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리더로 쓰임 받고, 이미 현재 리더로 서 있더라도 리더십에 대해 더 숙고해야 한다. 지금부터 다룰 12가지 리더십 요소를 균형 있게 가지고 있다면 더 건강한 리더로 공동체를 잘 리드하게 될 것이다.
1. '기획력'을 갖춰라.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먼저 전체 그림을 그리고, 방향성을 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획력’이다. 리더는 멀리 내다 보고, 어떻게 그 길을 가야할 지 고민하는 자이다. 리더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하면 공동체는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교회 내 작은 공동체를 맡았을 때는 기획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L.T.(Leadership Training)를 가야겠다. 비전 트립은 어디를 가야겠다. 멤버들과 교육과 훈련은 무엇을 듣게 해야겠다.’이런저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구상해야 한다.
나는 젊은이 목회를 하면서 다음 해 사역 기획을 보통 가을쯤인 9월부터 시작한다. 10월이면 어느 정도 윤곽을 잡는다. 11월이 되면 교역자들, 부장단들, 임원단들과 함께 마무리 정책 회의를 한다. 마지막으로 12월 초 담임 목사님께 보고를 드리고, 수정 보완할 사항이 있는지 검토한다.
이렇게 하면 그다음 해 사역의 모든 그 일정들이 픽스된다. 다음 해 일정이 담긴 달력을 만들고, 이것을 통해 다음 연도 7월, 혹 8월 언제 비전 트립을 가고, 수련회를 가는지 멤버들이 볼 수 있도록 한다. 홈페이지에도 공지하여 다음 해 일정을 참고해 휴가를 쓸지 알도록 한다.
이렇게 사역 기획을 미리 하면 좋은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 비전 트립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유럽 비전 트립을 준비할 때 티켓을 일찍 구매하면 저렴하게 예매할 수 있다. 그러면 유럽 비행기 티켓을 80만 원대에 구매할 수 있다. 필리핀 같은 경우는 20만 원대에도 가능하다. 그런데 출발하기 한두 달 전에 예매하려면 2~3배는 더 지불해야 티켓을 끊을 수 있다. 가까운 중국 연길도 100만 원 혹은 120만 원을 주어도 티켓 구매하기가 어려워진다. 사역 기획을 통해 준비를 미리 하지 않으면 그만큼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리더가 기획을 안 하거나 느리게 하면 팔로워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늦게 준비하다 보니 20만 원이면 되는 경비가 100만 원이나 들게 된다. 그러면서도 가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것이라고 한다.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리더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복잡하고 어렵게 표를 구하고는 이렇게 간증한다. 기도 제목이 이루어졌습니다! 기적적으로 간신히 표를 구했습니다! 주님이 도우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니다. 이것은 완전 ‘놀렐루야!’다. 왜 그런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값을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사역 기획을 미리 해야 한다.
방향성도 미리 잡아야 한다. 내년은 성경 읽기에 주안점을 둘 것인지, 특별새벽예배는 언제, 얼마 동안 할 것인지 미리 정해야 한. 특별한 일정은 없는지, 먼저 고민하고,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리더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어야 기대감도 있고,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동참하게 된다.
기획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브레인스토밍이다.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는 대략적으로 어떤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육과 훈련을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떤 교육과 훈련이 공동체 지체들에게 필요한지 떠올려 보는 것이다. 성경적 상담학교가 필요할지 고민해 보는 것이다. 정말 필요하다면 어느 분야의 어떤 전문 강사분을 모시면 좋을지 그려 보는 것이다.
주위 사람과도 이런 생각을 나누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얘들아, 얘들아, 내년에 이거 하면 어떨까?”, “우와~”. 공동체 또한 정말 필요로 하면 반영하여 계획을 잡는 것이다. 물론, 항상 지체들이 좋아하는 것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리더의 생각을 공동체 일원들과 나누며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브레인스토밍이 되면, 그 다음 단계는 기획의 단계이다. 그것을 언제쯤 할지 연중 계획을 짜는 것이다. 브레인스토밍만 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년 계획을 구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에서는 꼼꼼하고 디테일하게 계획을 잡는 것이다. 이렇게 자세히 몇 주에 걸쳐서, 어느 장소에서, 어떤 강사를 모시고, 무슨 내용을 중점적으로 할지 세부적인 계획을 구상해야 한다.
그냥 뭉뚱그려서 생각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년에 섬겨 줄 강사에게 연락하고, 가능한지 체크해 봐야 한다. 그리고 강사에게 교회에서 잡은 방향성을 나누어 드려야 한다. 다른 강사분들은 어떤 강의 중심으로 하는지 미리 파악하고, 통화하는 강사님은 어떤 강의를 집중적으로 해 주시면 좋을지 알려 드려야 한다. 그리고 강의 일정이 가까이 오면 다시 연락을 드리고 리마인드 시켜 드려야 한다.
이런 브레인스토밍, 기획, 세부적인 계획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다 필요하다. 각자 생활하고, 일하는 곳에서도 요구된다. 심지어 개인적인 삶에도 적용하면 좋다. 각자의 인생에서 40살까지는 무엇을 하고, 60살까지는 이런 것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80세까지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22살 때 신학교 도서관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앞에 흐르는 남한강을 보고 있었던 날이 있다. 길게 쭉 흐르는 강을 보면서 ‘아, 인생의 40살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생각해 봤다. 그냥 문뜩 그런 질문에 스스로 이런 마음을 먹었다. ‘아, 공부를 해야겠다. 국내에서도 하지만 외국에서도 공부를 하면 어떨까?’ 사실 그 당시에는 유학을 가는 게 흔하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유학 가는 선배들이 많지 않았다. 특히나 나는 그럴 가정 형편도 아니었다. 신학교를 입학하는데도 집에서는 반대를 심하게 하였다. 신학교를 가면 호적에서 파 버린다고 하셨다. 집을 나가라고 하셨다. 유학을 생각해 본 뒤 영어 공부를 좀 더 성실히 하게 되었다. 영어 성경책만 읽었다. 채플실에서 기도할 때 떠듬떠듬 영어로 기도를 했다.
당시 학교에 외국 분들이 한 4~50명 계셨는데 그분들과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먹었다. 주말에도 학교에 남아서 그 외국 목사님들 라이드도 해드리고 같이 이야기도 나누었다. 식사뿐만 아니라 기숙사에서도 같은 방을 썼다.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 얼굴도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외국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일부러 외국인 무리 속에서 그분들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그분들이 한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외국에 가면 느끼고 경험하게 될 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시는 것 같아서 섬겨 드리고 싶었다.
외국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니 외국인 같이 되었는지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친구 전도사님 집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전도사님을 잠시 따로 부르시더니 속삭이셨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전도사님은 아주 크게 웃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셨길래 그렇게 크게 웃냐고 물었다. 전도사님은 어머니께 들은 얘기를 나에게 했다. “동남아에서 오신 분이시냐?”.
유학이라는 단어를 브레인스토밍하고 난 뒤 내 삶은 많은 부분 바뀌었다. 40살까지 공부를 어떻게 할지 기획을 해 보았다. 한국에 구약학 교수가 없는 것을 알고는 언어를 많이 공부하기로 하였다. 신학교 때 모든 선택 과목을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독어로 했다. 총신대학원을 가서도 언어만 선택과목으로 택해서 들었다. 히브리어, 헬라어, 독일어, 영어 그리고 라틴어 수업까지 들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는 영어 공부에 매진하려고 아예 헤드셋을 끼고 학교에 다녔다. 졸업하고 나서야 내 별명이 ‘노란 헤드셋’이었다는 것을 들었다. 24시간 헤드셋을 끼고 도서관에 가고, 길을 다녔다. NIV 영어 성경을 들으면 영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기숙사에서 잠잘 때도 들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외국 방송을 틀어 놓았다. 그 당시는 영어 프로그램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영어를 배울 인터넷 매체도 없었다. 공영 방송 외에 주한미군을 위한 AFKN 채널 하나뿐이었다. 이 AFKN 방송을 보다가 틀어놓고 잤다. 그런데 어느 날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니 문장이 들렸다. 새벽에 미국 사람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크리스천 법률대학원에서 영어로 메시지를 전했다. 대구동신교회에서 5년 동안 영어 예배 디렉터로 영어 설교를 했다. 유학할 때도 많은 어려움 없이 수업과 과제를 했다. 유학 가기 전에는 학원에서 1년 동안 영어 강사를 하기도 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의 15배 많게는 20배 정도 벌었다.
영어를 준비하여 유학을 가니 성서학에 깊이 뛰어들 수 있었다. 영어 공부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집중하고, 더불어 고대 근동어인 시리아어와 아람어를 공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리아어 교수님한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교수님의 해석이 틀릴 수 있습니다.” 교수님도 이렇게 말했다. “학생도 틀릴 수 있다.” 서로 해석이 맞지 않을 수 있다고도 했다. 물론 배우는 나 자신이 틀렸을 수 있다. 나중에 그 과목의 교수님이 A+을 주셨다. 영어 자체가 어려울 수 있었지만, 유학에 대해 브레인스토밍하고, 어학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해 세부적으로 기획했던 것이 삶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사실 브레인스토밍, 계획, 세부적인 기획만 잘한다고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섭리해 주시고, 역사해 주셔야 한다. 신학생 시절,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외국에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서 북미 사람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한 신학 대학교에서 아는 전도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학교 교수님이 외국 교수님 커플에게 서울 가이드를 시키셨는데 본인은 영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내가 영어를 곧잘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켄과 엘리 교수님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교수님 부부가 나중에 북미로 유학을 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셨다. 개인적으로 캐나다 부모님이 되어 주셨다.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유학할 때, 금요일마다 근처 한인 금요기도회를 참석했었다.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감사해 매번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유학 생활을 보냈다.
2018년 8월 말 10년 동안 섬긴 대구동신교회를 사임하고, 3주 동안 캐나다에 다녀왔다. 가서 켄과 엘리 교수님 부부를 뵈었다. 연세가 많이 드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건강하고, 은퇴 후에도 협력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계셨다. 그분들은 나의 캐나다 부모님 같은 분들이시다. 지난번에는 나의 두 딸 하음과 주예의 캐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 주셨다. 호텔을 잡아 주시고, 큰 쇼핑몰의 놀이 공원에서 하루 종일 놀아 주셨다. 젊은 사람도 아이들과 함께하면 피곤한데 두 분은 피곤한 내색도 없이 신나게 놀아 주셨다. 천사와 같은 이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안 날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두 분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한다.
유학을 가고, 좋은 분들을 만난 것도 사실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준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받게 된 축복이다. 이를 위해 기도도 했고, 주님께서도 선하게 역사해 주셔서 기대하지 못한 더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주님 앞에서 기도하며 부어주실 은혜를 바라보고 큰 틀을 잡아보라. 그리고 그 틀 안에서 세부적인 그림을 그려나갈 때 각자에게 주실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게 될 것이다.
2.‘추진력’을 갖춰라.
추진력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다 갖춘 다음에 추진하려고 한다. 제대로 준비된 다음에 펼치려고 한다. 기획하고, 다시 하고, 완벽하게 갖추고 난 후에 진행하려고 한다.
책 <아포슬>을 읽고, 다음 세대 사역에 도전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도전받은 내용대로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도전을 받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피곤하기도 하고, 힘들 것 같아 주저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다 따라 하려고 하는 사람도 문제다. 벤치마킹할 때 자신의 상황과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카피하려다가는 큰코다치게 된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각자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에 맞게 적용하며 시도해야 한다.
나는 유학 후 한국에 들어와서 대구에서 영어 예배부를 5년 동안 섬겼다. 그런 뒤 청년부를 5년 섬기게 되었다. 2013년 9월 16일 갑자기 청년부를 맡게 되었는데, 10여 년 정도 정체된 전통적인 공동체였다. 그런 청년부를 맡기 시작하면서 사실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새벽 한 두시에는 눈이 번쩍 떠졌다. 마치 주님이 새벽 한 시, 두 시에 깨우시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주시는 듯하였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 S다이어리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 기획을 하고, 실행해 나갔다. 첫해에는 많은 것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5가지 정도만 했다. 양육, 제자훈련, 단기선교, 성경베스트, 결혼학교를 시작했다. S다이어리에 더 많은 것들을 적어 두었지만, 처음부터 다 하지 않았다. 점차 늘려가면서 많은 것을 하였다. 그래서 5년째 섬길 때는 한 학기에 35가지 정도를 하였다.
청년부이다 보니 인생에 큰 계획인 결혼에 대한 것을 마련했다. 결혼학교를 시작으로 아직 결혼하지 못한 지체들을 위한 결혼예비학교를 했다. 그 다음에는 막 결혼한 커플들을 위한 신혼부부학교, 마지막으로는 부모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예배부모학교를 진행했다. 처음부터 결혼과 관련된 것 4가지를 준비하고 한꺼번에 시작하지 않았다. 한 가지를 오픈하고, 진행하다 보니 다른 것들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더 오픈하게 되었다.
꼼꼼하게 그림을 그리고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고, 출발하는 것이 추진력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출발 자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다 갖춰지지 않아도 작은 것부터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접목하려고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교회와 공동체의 특성과 필요를 고려하여 시작해야 한다. 혼자 하는 것은 추진력이라고 할 수 없다. 같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새벽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선포하고, 나아가는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면 기획력은 있을 수 있으나 추진력이 없는 것이다. 기획력이 뛰어난 리더들은 많다. 웬만하면 교회 혹은 기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구상한다. 그러나 정작 바로 적용을 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그냥 탁상공론으로 보기 좋은 서류는 만들었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이 추진력이 있는 리더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자신의 옆과 뒤를 돌아보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에서 그리고 뒤에서 따라 오려고 하고, 따라오고 있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추진한 것을 제대로 가게 하려면 리더 혼자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얼마든지 혼자서도 추진할 수 있지만 멀리 갈 수 없다. 행여 멀리 가더라도 그 영향력이 크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추진력이 강력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추진할 때 그 타이밍을 잘 기다려야 한다. 예전 스타일에 이미 굳은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추진하려면 서로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김상철 목사님을 만나 뵙고, 몇 시간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리더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미 있는 판에서 놀다가 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판을 짜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새롭게 판을 짜는 스타일입니다.” 나 자신도 나에 대해 잘 몰랐던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틀을 만들고 그 틀을 계속 진화시키고 진행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제대로만 되면 파급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판을 잘 짜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찢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가려면 새 틀을 짜고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도 추진할 때 어떻게 하면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얻을 수 있을까? SNS에 자신의 결단을 선포하면 된다. 그러면 추진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저, 새벽을 깨웁니다!” 이러면 안 나올 수가 없다. 뒤에서 욕이 들리는 것 같다. 새벽 예배에 안 나가면 자신의 마음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지속해서 추진할 수 있도록 그 틀 안에 자신을 넣는 방법이다. 섬기는 자리로 가면 더 그런 사람이 된다.
나는 청년 때 새벽 예배에 나오고 싶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규칙적으로 나오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차량 운전이었다. 그 당시 담임 목사님께 새벽 차량 운전을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권사님들, 집사님들 차 라이드를 해드렸다. 새벽예배 후에도 라이드를 하고, 집으로 갔다. 그렇게 하니까 새벽 예배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기도를 드리고, 다 마친 뒤 운전을 하니 기도 시간을 일정하게 갖게 되었다. 더 감사한 것은 차가 한 대 생긴 기분이었다. 목사님이 새벽예배 후 라이드를 하고 다시 교회로 오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갔다가 새벽예배 올 때 타고 오라고 하셨다.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포하고, 그다음 자신이 정말 그 일을 계속하도록 자신을 그 틀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같이 동참할 사람들도 붙는다. 비전을 나누고, 자신을 그 틀에 넣을 때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이와 같이 추진력은 나 혼자의 힘을 되는 것이 아니다. 혹 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힘이 든다. 함께 해야 한다. 어떤 지체는 새벽 예배에 늘 친구들을 태우고 나왔다. 그 지체는 자신이 그 친구들을 태우러 간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 알게 되었단다. 그들이 자신을 깨웠고, 새벽 예배에 참석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혼자 새벽을 깨우면 지속해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새벽을 깨우다 보니 더 잘 참석하게 되었다. 추진력은 혼자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중도에 포기하기 쉽기 때문에 같이 해야 한다.
리더의 특권은 섬김을 통해 자신이 더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섬김을 받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섬김이들은 착각한다. 자신이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사실 리드하면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제대로 성숙해져 가야 하는 것이다. 리더는 어떤 섬김을 추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깨어있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리고 내가 깎이고 있구나’ 이렇게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를 더욱 교육하고 훈련하려고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막상 나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고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 맞는 말이다.
리더는 무엇인가를 추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더 깎이고 성숙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성숙한 리더일수록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섬김을 통해서 깎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일수록 남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리더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못 해 먹겠다고 한다. 힘들어 죽겠다고 한다. 자기가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인 줄은 모른다. 자신이 성숙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 이런 리더는 추진력을 가지고 앞으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그냥 중도에 포기한다. 자기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니까 낙담하고 실망하고, 결국은 포기한다.
앞서 리더가 아닌 사람은 절대 리더로 세우면 안 된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리더가 아닌 사람도 시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중도에 하차 선언을 한다. 끝까지 추진력을 낼 수 있는 엔진이 없다. 조금만 경사진 곳이 나타나면 그냥 어렵다고 포기한다. 리더가 팔로워를 맞추어 주고, 섬겨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 전혀 자신이 깎일 생각이나 수고하고 애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희생, 수고, 헌신을 하려니 부담스러운 것이다. 얼굴에 오만 가지 인상을 다 쓰고 다닌다. 세상 근심 걱정을 얼굴에 담고 다닌다. 이런 사람의 얼굴은 보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밝고 건강한 추진력보다는 어둠의 그늘이 임재해 있다. 결국엔 스스로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 넣을 수 있다.
이런 리더는 추진력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통해 공동체를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한다. 두 진영이 축구 시합을 할 때 상대편 진영에 가서 골을 넣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진영에 골을 넣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추진력은 있지만, 공동체의 전체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는 섬김이가 있다.
리더라면, 셀 그룹에, 사랑방 안에, 구역 안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서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파악하고 추진해야 한다. 리더는 먼저 보고,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가만히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고, 방관하는 자가 아니다.
아주 멀리 타 도시에서 새벽예배를 나오는 리더가 있었다. 그 지체에게 물었다. “너는 왜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나가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새벽예배를 오니?” 지체는 이렇게 얘기했다. “목사님, 제가 와야 누가 왔는지를 체크 할 수 있잖아요. 사랑방 멤버 중에서 누가 새벽예배를 왔는지 알면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을 수 있잖아요.” 마인드 자체가 굉장히 달랐다. 스스로 은혜받으려고 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거기에 사랑방 멤버들을 케어 하기 위해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까지 오는 것이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챙겨 주기 위해서 리더는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리더가 ‘귀차니즘’에 빠지면 자신도 죽고, 구성원들도 죽는다. 추진력의 반대가 ‘귀차니즘’이다. 귀찮아서 사양하고, 귀찮아서 거절한다. 귀찮아서 회피하고 포기한다. 이것은 결코 바르지 않다.
추진력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새벽 예배에 못 나오는 이유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멀어서, 밤에 늦게 자는 올빼미형이라서가 아니다. 마음이 없어서다. 청년부를 섬길 때‘대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대희는 새벽예배에 늘 지각을 했다. 늘 6시 15분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그 시간에 오는 이유가 있었다. 대희는 새벽 4시면 일어났다. 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온몸이 뒤틀렸다. 그래서 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런데“새벽 예배 나옵시다. 밤의 문을 접고 새벽을 깨웁시다!” 외칠 때 대희가 반응을 했다. 4시에 일어나 한 시간을 걸려서 옷을 입고, 첫 지하철을 타고 오면 제일 이른 시간이 6시 15분이었다. 그래서 늘 새벽예배 설교 중에 들어왔다. 그렇게 대희가 새벽을 깨우니까 집 근처, 교회 근처에 있는 지체들은 할 말이 없었다. 사지 멀쩡한 지체들이 도전을 받았다. 추진력은 외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반응해 주는 지체들이 있을 때 더 강력해진다.
추진할 때 어떤 리더는 탱크처럼 혼자 하는 사람이 있다. 가능은 하다. 그러나 지칠 수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만 할 수 있다. 추진력은 기러기처럼 되어야 한다. 기러기가 편대로 갈 때 리더 기러기는 선두로 맨 앞에 선다. 제일 먼저 바람을 맞는다. 그러면 뒤에 있는 기러기들은 30% 이상의 바람이 감소한다. 70%의 바람만 맞으면서 가게 되어 편하다. 그러나 뒤에 기러기들은 “꾸우 꾸우” 울어 댄다. 앞에 선두가 지치지 않도록 격려의 메시지를 날리는 것이다. 이렇듯 진짜 추진력은 리더 혼자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팔로워들이 함께 동참해 주어야 한다.
추진력이라는 것은 솔선수범에서 나온다. 그런데 더 큰 추진력을 가지고 가려면 반응을 해 주는 멤버들이 있어야 한다. 대구에 있으면서 반응이 정말 느리고 없어서 2018년 표어를 “반응하라! 2018!!!”이라고 했다. 대구에서 사역할 때, 청년부의 부흥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고전했다. 얼핏 보면 쉽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이끌고 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엇보다 무반응이었다.
아무리 오리데이, 볼링데이, 영화데이 행사를 해도 참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수백 명인 청년 공동체에 오리 배를 태워주고, 오리고기를 먹여 준다고 해도 신청자가 없었다. ’볼링은 좋아하겠지, 영화는 괜찮겠지’ 시도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반응이었다.
추진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다. 같이 할 때 극대화된다. 로켓을 쏴 올릴 때 연료가 언제 제일 많이 필요한지 아는가? 처음 떠오를 때이다. 장시간 움직일 때 많이 들어갈 것 같지만 제트 기류를 타기 때문에 오히려 연료가 거의 안 든다.
청년부를 섬길 때 세팅을 하고, 소통할 채널을 만들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페북과 인스타로 소통하기, 문자로 말씀 나누기 등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감사하게도 함께 뛸 리더들이 거의 다 세워지게 되었다. 연말이나 혹은 부임한 공동체 초반에 설교할 때 비전을 나누고, 동기 부여를 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메시지를 나눈다. 그런 후 추천을 받아 리더로 함께 하자고 하면... 추천받은 사람들 거의 100%가 다 같이 뛰겠다고 한다. 정말 큰 격려가 되고, 감사하다.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리더들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런데 그 섬김이들이 세워지게 되어 감사할 뿐이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그랬는데, 비로소 되는 것을 경험한다. 풀어야 할 과제가 없겠는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같이 소통하면서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처음에 추진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이걸 어떻게 띄울지는 리더에게 어려운 난제이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한 번 발동이 걸리고, 출발하면 굉장히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는 이 난제를 잘 풀어내야 한다.
모든 리더는 넘어서야 할 언덕이 있다. 조금 부흥을 해도 더 나아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턱에 걸려서 못 갈 때가 있다. 그 때 부모가 뒤에서 살짝 밀어주면 그 턱을 넘어선다. 그러면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간다. 밀어주는 아빠와 엄마를 돌아보지도 않고 전진한다.
리더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둔 턱을 넘도록 ‘톡’하고 밀어주고, 같이 달려가게 하는 것이다. 추진력은 리더 혼자 해서 잘 나가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웅덩이 혹 넘어야 할 둔 턱을 넘어서 같이 달리게 하는 것이다. 추진력은 그래서 리더십의 요소 중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이다.
3. ‘결단력’을 갖춰라.
결단력 있게 나아가려면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가지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리더로서 공동체를 세워 갈‘우선순위’를 정하고, 단순화해야 한다.
바울도 방향성이 없는 싸움은 무의미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고린도전서 9:26).
우선순위란 어떤 목표를 향해 먼저 집중해야 할 것을 결정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공동체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그 일을 해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이런 목표와 목적이 있을 때, 어디에 재정, 인사, 시간을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리더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리더십은 축복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끊임없이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아무리 위임을 하고 공동체를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리더로서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때로는 곤욕스럽기도 하다.
사람은 B에서 D의 인생을 산다고 한다. 즉, Birth와 Death, 그 사이에 Choice를 하면서 산다는 말이다.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잘되든 못되든 그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감수해야 한다.
리더가 결단력이 있다는 말은 단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을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 어떤 쪽으로 결단을 하였는지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진행 과정 중에 단계별로 진행되는 과정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진행하면서 변경되거나 수정 보완되는 부분도 소통해야 한다.
결단력이 있다고 독불 장군식으로 자신만 알고, 자신의 방법대로만 밀고 나가는 것은 문제가 된다. 반면에 팔로워들도 수동적으로 방향성과 진행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들리기만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 리더에게 물어봐야 한다. 같이 만들어 가려고 해야 한다. 성숙하지 않은 멤버는 리더에게 묻지 않고 알려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멤버로서의 역할 중 하나는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같이 동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소통은 때론 시간이 걸린다. 맞춰가는 과정에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계속 나누고 고민하면 무성했던 가지들이 사라지고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할 일만 주고 그 결과만 받기보다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서로 챙겨야 한다.
리더는 생각하는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 멤버들의 생각과 진행 사항들을 서로 심도 있게 나눠야 한다. 정말 어떤 일에 미쳐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는 일과 앞으로 할 일을 나눈다. 제정신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하는지를 나누기를 소원한다.
이렇게 리더는 가야 할 방향을 알고, 그 길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혹 다른 길로 가면 멈추고 다시 원점으로 와서 목표에 맞게 다시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공동체의 사명은 바뀌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명을 이루어 가는 비전은 단계별로 바뀔 수 있다. 확고한 공동체의 비전이 없이 이렇게 저렇게 공동체 멤버들을 몰아간다면 지칠 수 있다. 1년만 진행할 무브먼트는 힘이 없어진다. 무브먼트는 평생 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계속 우선순위 없이 이렇게 저렇게 진행하면 어느 순간 가야 할 방향이 사라진다. 리더는 결단해야 하고, 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깃을 들어야 한다. 이럴 때 힘이 실리고, 역동성이 생긴다.
운동할 때 중요한 것은 다양한 기술도 중요하지만 오래 운동하면서 갖게 되는 구력도 중요하다. 한 방향으로 밀었을 때 거기에 힘이 실리는 구력은 상당한 파워를 갖게 한다. 한 방향으로 가지만 거기에 엄청난 힘이 실릴 때 강하게 뚫는 저력이 나온다. 이쪽으로 조금, 저쪽으로 조금 움직이면 힘이 빠지고 구력도 생기지 않는다. 한 목표와 목적으로 강하게 끌고 가야 한다.
리더는 과감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소심하게 고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진짜 리더인지 아는가? 안 좋은 쓴소리를 해놓고 밤에 집에 들어가서 고심하는 자이다.‘아, 괜찮을까? 너무 세게 말한 것은 아닌가?’
이렇게 고민하는 리더가 공동체 멤버들을 잘 돌볼 수 있다. 진리라고 쓴소리를 하고, 그냥 이렇게 다짐하면 안 된다.‘아,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진리를 강력하게 전하고 말겠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전해야 한다. 흐트러짐 없이 방향성을 정하고 가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듬으면서 가야 한다.
리더에게 공의만 넘치고 사랑이 빠지면 폭군이 된다. 또한 사랑만 넘치고 공의를 가르치지 않으면 버릇없는 무리를 만드는 꼴이 된다. 그러나 공의와 더불어 사랑으로 품으면 다른 영혼을 사랑하는 제자를 양성하게 된다.
폭군과 리더는 완전히 다르다. 폭군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만족한다. 거기에 그냥 감사하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리더는 자기가 잘 이끌고 있으면서도 다음 스텝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다.‘올해에는 이렇게 너무나 잘했지만 내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걸 고민하는 게 리더다. 리더는 스스로 자족하고 자화자찬하는 자가 아니다.
대구에서 청년부를 섬겼을 때 첫해에는 10%, 그 다음에 20%, 그 다음에 30%, 그 다음에 40% 성장했었다. 2년 6개월 만에 1,000명이 넘었다. 1년에 초신자가 태신자 초청예배를 통해 700여 명이 왔다. For You 예배(태신자초청예배)가 1월, 3월, 5월, 7월, 9월, 11월에 6번 있었다. 복음 초청 잔치를 통해서 계속해서 새가족들이 왔다. 학교와 직장을 대구로 오는 지체들과 수평 이동하는 지체들이 800여 명이 되었다. 정착률은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초신자 중 12주 새가족 과정을 수료하고 정착한 초신자만 1년에 120~150명가량 되었다.
처음에는 우선순위를 기존 신자들에게 두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고 부흥하면서부터는 전적으로 초신자 혹 태신자에 집중했다. 처음에 예배할 때는 설교를 한 시간 정도 하고, 설교 후 결단 기도를 15분에서 20분 이상하였다. 나중에는 설교한 후 30분이 지나면 반주가 들어와 설교 마무리를 하고, 기도 시간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청년부 예배는 초신자가 지치지 않고, 더 잘 정착하도록 우선순위를 두었다. 하지만 기존 신자들은 말씀과 기도, 찬양을 더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주일 저녁 7:30분에‘밤에 뜨는 별’예배를 만들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가 공동체 성격을 바꾼다. 그 우선순위에 따라서 개인의 삶이 바뀌고,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도 변한다.
처음에 새가족팀은 하나였다. 기신자와 초신자를 같이 교육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처음 교회에 온 사람들과 기존에 교회를 10년 이상 다닌 사람이 같은 교재를 가지고 교육을 받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놀랐다. 그래서 내가 과감하게 새가족 담당 교역자에게 리더 5명만 달라고 했다. 선발된 5명 리더와 같이 기신자들을 섬겼다. 처음에는 작은 방에 열 명 정도 모였다.
한두 달이 지나니까 30명, 6개월이 지나니 50명, 1년이 지나나 100여 명이 되었다. 나중에는 기신자 리더를 45명 세웠고, 초신자 리더는 30명이 세워졌다. 그리고 처음 등록하고, 교회를 소개하고, 안내를 담당하는 웰컴팀을 따로 10명으로 구성했다. 웰컴팀은 아무것도 안 하고 예배 들어갔을 때 등록 부스에 쭉 서서 화장실 못 찾는 사람, 어리바리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새롭게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안내해주는 웰컴팀 멤버들은 항상 처음 온 사람들만 섬기게 하고, 예배가 끝나면 새가족 환영실에 온 사람들에게 교회를 소개했다. 떠나기 전에 복음 메시지를 10여 분 듣게 하였다. 기존 신자라 할지라도 교회에 한 번 온 후 다시 안 올 수도 있다. 마지막이 될 수 있기에 10분의 복음 메시지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도록 하였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였다.
이렇게 우선순위가 결정되면 방향성과 흐름이 생기고, 섬김이들이 그 우선순위에 따라 차근히 세워지고, 섬기게 된다.
4. ‘위임력’을 갖춰라.
각 부서 혹 공동체를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섬길 일을 잘 분배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 한 사람만 녹초가 된다.
수학에 이런 공식이 있다. “직각 삼각형의 빗변은 세변 가운데 가장 길다.” 그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한 가지 있다. 빗변을 아무리 길게 그려도 두 변의 합보다는 결코 길 수는 없다. 위임해야 하는 원리도 이와 같다. 삼각형의 긴 빗변에 해당하는 리더가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각 구성원의 합보다 더 길지 못하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힘을 합치면 긴 빗변보다 더 길게 만들고, 공동체를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다.
분명 리더 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탁월하기도 하고, 존경할만한 대상이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모든 일을 움켜잡고 할 수는 없다. 건강하고 생명력이 있는 공동체라면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큰 틀 안에서 기획, 계획,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공동체는 화석화되고, 메말라 버린다. 결국엔 사막화가 된다.
위임은 단순히 구성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리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모세는 수많은 사람을 재판하고, 아주 큰 이스라엘 전체를 인솔하였다. 리더십이 있었지만, 체력적인 한계도 있었고, 사람들을 케어하는 데도 힘든 부분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일하도록 조언해 주었다.
각 부서 혹 공동체 그룹이 작더라도 각자 할 일을 주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랑방 혹 셀 모임에 결석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임에 대한 사랑과 기대감이 늘어난다.
실제로 주님의 교회에 와서 각 셀 모임에 작은 부분이라도 담당자를 세우도록 했다. 각 사람을 간부화하도록 권했다. 한 리더가 이런 간증을 나누었다. 간식을 담당할 사람을 세워야 하는데 결석을 자주 하는 사람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간식 담당이 되고 나서부터는 빠지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의 사비로 간식을 제공하여 아주 풍성하게 소그룹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그룹 인원이 몇 명 되지 않더라도 각 사람에게 섬겨 줄 자리를 위임해 주어야 한다. 한 사람은 기도제목 모으기 담당, 한 사람은 출석부 챙기기, 한 사람은 모임 장소 가서 자리 잡고 준비하기, 한 사람은 찬양 담당, 한 사람은 예산 및 회비 담당을 부탁하는 것이다.
비전트립 혹 단기선교를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각 사람에게 섬길 역할을 주면 좋다. 중보기도 담당, 찬양 담당, 선교사님과 연락 담당, 모일 시간과 장소 담당, 간식 담당, 다녀와 간증 할 담당, 영상 및 사진 담당, 가야 할 곳의 리서치 및 준비 모임 담당자를 세우는 것이다.
리더는 자기 혼자서 뛰는 사람이 아니다. 리더는 팔로워들이 알아서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다 간부화시켜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이 기도 담당이라면 이렇게 부탁을 해야 한다.“너는 기도 담당을 해 줘! 선교지를 위한 기도 제목을 모아 주고, 리더인 나와 각 지체를 위해 서로 기도하도록 기도 제목을 좀 모아서 나누어 줘!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도록 단체 카톡 창에 업데이트해 주고, 기도 인도도 부탁해~*”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 제목을 모으고 더 열심히 선교 혹 비전트립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수동적으로 따라오는 팔로워는 비전트립 혹 단기선교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 다녀와서는 준비 모임도 그렇고 현지에서도 별로 배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 리더가 아니다. 리더는 어떻게 하면 각 지체가 잘 섬길 수 있는지, 어떤 섬김이 적합한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 지체들과 함께 어떤 공동체를 세워갈지 고민하고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위임하고 배치하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단기선교를 갈 때 나 혼자서 기도회를 준비하고, 찬양하고, 설교를 했다. 어디로 오라고 문자도 보내고 간식 준비도 했다. 혼자 바쁘고 혼자 분주했다.
리더는 함께 뛰는 사람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주도하지 말고 함께 호흡하며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위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어떻게 할지를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함께 하다가 다른 팔로워에게 위임해야 한다. 위임을 받은 사람이 리더의 책임을 맡았을 때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해 주어야 한다. 잘 설 수 있을 때까지 리드해 주어야 한다. 위임하고서는 그냥 알아서 하라고 일만 주면 안 된다.
또한 리더는 아무것도 안 하고,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그냥하라고 지시하면 안 된다. 리더는“나를 따라오라!”고 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위임받은 지체가 리더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고, 따라갈 수 있도록 보여 주며 섬기도록 해야 한다.
리더라고 전부 리더십이 생기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리더십이란 리더가 “돌격, 앞으로!”를 외칠 때 얼마나 그 옆과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느냐이다. 혼자서 앞으로 전진만 하는 자는 영향력이 없는 리더이다. 솔선수범하지 않으면서 팔로워에게만 나아가라고 하는 리더는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다. 팔로워들과 옆에 서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면, 리더십이 세워지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착한 사람 중 의외로 위임을 못하는 리더가 있다. 팔로워가 힘들고 고생할 것 같아서 맡기지 않는다. 또, 완벽주의이기 때문에 위임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위임을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리더는 고립이 되고 팔로워와 갭이 만들어진다. 그 갭은 서로 건너지 못할 강이 흐르게 하고,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리더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팔로워와 공동체가 건강하도록 적절하게 위임하는 위임력이 있어야 한다. 혼자서 잘하면 작은 공동체는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규모 있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존립하려면 각 구성원이 뛰고 섬길 일이 잘 위임되어야 한다
5. ‘행정력’을 갖춰라.
리더가 기획을 잘하고, 공동체를 한 방향으로 잘 이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행정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을 진행할수록 잡음이 생긴다.
따라서 행정력은 갖춰져도 되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행정력은 리더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자신이 이 부분에 약하다면 옆에서 도울 자를 꼭 세워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가 행정적으로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시험에 들 수 있다.
행정력에 필요한 것이 일관성, 통일성, 그리고 기준이다. 예를 들어서 “15일까지 신청하는 겁니다”라고 했는데, 16일 혹 17일에 신청했는데도 “괜찮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 이렇게 행정적인 선이 없이 누구나 받아 주다가 갑자기 18일 신청한 멤버에게 “당신은 안 됩니다.”라고 하면, 큰 상심을 주게 된다. ‘어? 저 사람은 되고 왜 나는 안 된다고 하지?’라고 의문을 품게 된다.
유학 시절에 같이 예배했던 지체를 10년이 지난 뒤 만난 적이 있었다. 원주민 선교를 하러 갔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주민 선교는 그 당시 매년 갔던 은혜로운 단기선교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함께 하는 인원이 많았던 선교였다.
그때 단기선교 모집을 할 때 내가 모집 기간이 지났는데 2명을 더 받아 주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받아 주지 않았는데 그 2명은 받아 주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은 신청 인원 그리고 모집 기간을 철저히 지킨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구나...’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공동체 지체 중 얼마나 상심하고, 왜 저렇게 차별하는지 생각했을 지체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행정적 처리가 잘 되지 않으면 공동체에 어려움을 준다. 대부분은 교회에서는 은혜롭게 해야 한다며 모집 기간이 지나도 받아준다. 엄연히 규칙이 존재하는데 지켜지지 않는다. 이것은 문제의 발단이 된다. 공동체 안에는 소문이 돌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그리고 통일성 있게 처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15일 이후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조건 안 받아 주는 것이 더 은혜롭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되지 않으면 공동체 멤버 중 상당히 상처를 받게 된다.
그래서 청년 목회를 할 때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진행한다. 그리고 다 신청제로 받는다. 홈페이지에 선착순 인원 제한과 기한을 표기한다. 그리고 기한이 지나면 받아주지 않는다. 덜 모이면 덜 모이는 대로 진행한다.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원이 안 될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60%가 되지 않으면 그 훈련과 교육은 다음 시즌에 개설하면 된다.
행정적 처리는 빠를수록 좋다. 어떤 지체가 헌금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면 바로 대처를 해 주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는 회계와 바로 연결을 시켜 준다. 카톡 창에 문의한 사람과 그 부분을 명확히 알려 줄 사람을 초대한다. 그래서 서로 묻고, 답하게 해 준다. 내게 전문적인 지식이 없거나 잘 모르는 경우는 해당 사람을 연결해 준다. 내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니 알려 줄 수 없다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문의한 지체의 마음을 결국엔 상하게 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리더 혹 섬김이라도 행정력이 떨어지면 실족하게 한다. 성경은 소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지라고 하였다. 행정력이 리더십에 있어 작은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세워가는 리더라면 이런 작은 행정력도 갖추어야 한다.
행정력을 위해서는 소통을 해야 한다. 리더가 담당하는 섬김이들과 소통을 해야 한다. 공동체 멤버들이 무엇으로 힘들어하는지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듣고, 소통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선점을 마련해야 한다.
누군가가 어떤 것을 부탁할 수 있다. “저, 이것 좀 신청되었는지 알아봐 주실래요? 저 이것 좀 궁금한데...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런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으며 “아. 알아봐 줄게요. 알아보고 있어요...” 이렇게 거듭 말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그 담당자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행정적 처리를 위하여 담당자와 연결해 주어야 한다. 또한 그 일이 잘 처리되었는지 체크하고 신경 써야 한다.
작은 일 같지만 이런 일련의 행정처리가 미숙하고 반복되면 큰 시험에 든다. 공동체 멤버는 리더의 말을 더는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메신저가 이렇게 했다면 메신저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어떤 행정적 부탁을 들으면 마치 빛의 속도처럼 처리해 주어야 한다. 중간 리더도 마찬가지로 행정적 일 처리를 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지 부탁이 오면 공지를 해야 한다. 자신에게서 끝이 되면 안 된다. 리더가 “공지해주세요~*”부탁을 하는데 자신은 아는 것이니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중간 리더의 행정력은 꽝인 것이다.
리더는 빛의 속도로 탑 리더 혹은 그 일의 담당자가 부탁한 것을 팀원에게 전해야 한다. 또한 젊은 청년들의 사회적 이슈에 찬성도 하고, 반대도 하면서 적극적인 사회참여도 해야 한다. 나는 메인 리더들 20명이 있는 카톡 창에만 글을 올린다. “각 사랑방에 그리고 각 팀에 공지해주세요.” 그러면 각 사랑방과 각 팀의 공지 방에 순식간에 내용이 뜬다. 이렇듯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되느냐가 행정력이다.
사회 참여만이 아니라 긴급한 사항을 전달받지도 못한다. 또한 어떤 긴급 기도 제목도 공급받지 못한 셀 혹은 팀이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랑방 혹은 팀은 공동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점점 섬처럼 고립되어 갈 것이다.
공동체를 섬기고 생활할 때는 무엇보다 부족한 행정력으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공지를 잘하고 알려주면 된다.
나 같은 경우 소통하기 위해 유튜브, 블로그, 페북, 인스타, 홈페이지를 사용한다. 이런 여러 매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젊은이 중 상당수가 SNS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SNS를 사용하지 않는 지체들도 있기에 다른 루트들을 통해 나누고, 함께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소통하려고 해야 한다.
주보를 활용해 공지해야 한다. 행정 달력을 만들어 어떤 일을 진행하는지 알려주는 것도 좋다. 홈페이지를 통해 앞으로 어떤 행사나 교육이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문자를 통해 알려주는 것도 좋다. 나의 경우 일주일에 1~2번은 말씀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꼭 알아야 할 공지사항은 행정담당자에게 부탁해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 주에 한 번은 꼭 공지될 수 있도록 한다. 행정력은 단순히 어떤 일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소통하고, 멤버들에게 알아야 할 것을 공지해 주는 것도 포함한다.
행정적 처리를 위해서는 수많은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게을러서는 제대로 할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 소통해야 하나?’라고 생각이 들더라도 될 수 있으면 하는 방향으로 잡는 것이 좋다. 공동체를 위해 더 다양하게 소통의 창구를 만들고,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더 세심하게 섬겨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좋다.
6. ‘영력’을 갖춰라.
우리는 세상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사실 영적인 멘토, 영적 부모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영력은 공동체 멤버와 동떨어진 수직적 리더십이 아니라 함께 하는 관계적 영성을 말한다.
21세기 리더는 공동체 지체를 잘 챙겨야 한다. 섬기고 있는 멤버들을 겉으로 봤을 때는 건강하고 아주 괜찮아 보인다. 행복한 것 같고 힘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상담을 하고 일대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청년을 만날 때 카페에서 일대일로 만난다. 이른 아침에 만나야 할 때는 주로 맥도날드에서 일대일로 만난다.
여러 사람이 있으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그리고 단체로 만나면 아무리 만났어도 자신을 만나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 시간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 참 많은 간증과 고백을 듣게 된다. 때로는 강단에서 설교한 내용을 다시 듣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커피잔 너머로 기가 막힌 이야기, 삶의 깊은 골짜기에서 건져 올린 간증,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삶의 이야기를 건네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일대일로 만나야만 들을 수 있다. 또한 섬기는 자도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 부족함을 나누어야 들을 수 있다.
젊은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면 리더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단에서의 설교도 달라진다. 또 리더가 공동체에서 메시지를 나누고, 교제할 때도 피상적이지 않게 된다. 꼭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그룹의 리더라면 멤버를 개인적으로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왜 예배에 나오지 않느냐? 왜 교육과 훈련받지 않느냐? 왜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느냐?” 묻기 전에 한 영혼이 어떤 인생의 고통과 고난으로 피눈물을 흘리는지 들어야 한다. 청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법정투쟁 중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자식을 신용불량자로 만들기도 한다. 가족 중에 자살한 사람도 있다. 커피가 더 쓰게 느껴진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다 각박하게 살아간다. 공동체 모임에 와 있는 사람들도 인생이 녹록하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그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품을 수 있는 영적인 멘토이자 아비인 리더가 절실한 것이다.
한 영혼을 담당하는 리더는 반드시 1:1로 섬기는 영혼을 만나야 한다. 청년들은 아무리 열 번을 만나도 무리로 만난 것이라면 자신을 케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같이 먹고 논 것이지 개인적 케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30분, 10분을 만나더라도 “정말 기도 제목을 듣고 싶어! 아픔과 상처를 듣고 싶어!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주고 싶어!” 이런 1:1 케어를 짧게라도 하면 일 년 동안 다시 만나지 않고, 문자만 나누어도 영적 교감이 있다.
리더는 영적인 부모가 되어야 한다. 나는 대구에 있을 때 약 1,850명에게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말씀 문자를 보냈다. 지금 주님의 교회에서는 약 500명에게 교회에서 일어나는 행정적인 일보다 그냥 말씀 문자만 보낸다. 힘겨울 때 위로가 되는 말씀, 삶에 도전이 되는 말을 밤 21시 21분에 보낸다.
말씀 문자를 보내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삶을 문자로 보내오는 것이다.
“오늘 아빠랑 엄마랑 이혼했어요.”
“지금 엄마가 세 번째 암이 재발하여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목사님, 사실은 제가 창업을 해서 경제적으로 괜찮아지고 있지만 제 두 여동생은 다 지체 장애가 있고,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아버지는 식물인간으로 몸을 못 움직이세요.”
“저는 집에 부모님이 계시지만 가정을 다 책임져야 해요.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헌신도 못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에 있어요.”
“목사님! 저는 지금 법정 시비가 있어서 지금 3년째 법정 투쟁을 하고 있어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영혼을 케어 하면 그 영혼이 마음의 문을 연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나누기 시작한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을 얼마나 케어 하려고 하는 사람인지 판단한 후에 마음 문을 연다.
몇 번을 만났느냐?, 밥을 몇 번을 먹었느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몇 번을 놀러 갔느냐?,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조용하게 30분이라도, 10분이라도 진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런 사람하고는 마음이 통한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다.
“법정 시비가 이번에 이렇게 되었어요, 목사님!”
“이번엔 이렇게 되었어요.”
“이렇게 수술비가 들어가는데 기도해주세요.”
계속해서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다. 여러분 중에서 주위에 기도 제목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해 주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여러분이 그 사람의 영적인 부모이다. 그런데 누구도 나에게 지속적인 기도 제목을 주지 않고 있다면 정말 영적 목양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여러분은 정말 리더인가? 정말 리더가 되려면 영적 부모가 돼라! 영적 부모가 아닌 리더에게 사람들은 절대 자기의 마음의 문을, 수치스러운 과거를 나누지 않는다. 병원에 가면 의사 앞에서 옷을 벗는다. 왜 그런가? 검진받고 수술도 받는다. 왜 그런가? 의사이니까 그렇다. 신뢰하니까 다 맡기는 것이다.
“어, 안 돼요, 왜 이러십니까? ” 이런 사람 없다. 의사가 “진찰합시다, 수술합시다.” 하면 그렇게 한다. 영적인 아비고 영적인 어미이면 “나 힘들어요. 정말 죽고 싶어요. 이번에 또 떨어졌고 이번에 또 안 되었고 미치겠어요. 자살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영적인 멘토 혹은 아비가 된다는 것은 축복의 자리이지만 분명 부담스러운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담스럽다고 피하면 안 된다.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교제는 달걀과 같다.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은 딱딱한 껍데기만 부딪치며 이야기한다. “안녕! 잘 지내지? 밥 먹었어? 다음에 보자!” 이런 대화가 달걀 껍데기 교제이다. 진짜 교제는 껍데기를 딱 깨고 흰자는 흰자끼리 노른자는 노른자끼리 섞이도록 해야 한다. 흰자 대화는 기쁜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사실은 있잖아. 내가 이런 좋은 일이 있었어!” 그리고 노른자 대화는 가슴 아픈 상처까지 꺼내는 것이다. “정말 이런 사고로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너무 힘든 것 같아!” 이게 노른자를 나누는 그런 교제인 것이다.
대구에서 10여 년의 사역을 하고 아쉬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열심히 한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청년들 만나고 사역하였다. 한 텀에 35가지 교육과 훈련을 하였다. 양육 기초만 해도 12개 반이 진행되었고, 양육 고급반은 8개 반이 진행되었다. 제자반이 7개, 그리고 사역반만 해도 8개 반이 있었다. 그 35가지의 교육과 훈련 중에 수많은 가지가 거기서부터 뻗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 하면서 뭔가 아쉬웠다. 대구동신교회 아포슬 청년 공동체를 떠나면서 함께 뛴 교역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바로 같이 동역하였던 교역자들과 ‘얼마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했는가’이다. 1:1로 얼마나 각 교역자의 눈물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후회가 되었다. 사역한다고 청년들은 정말 많이 만났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만났지만, 동역자들은 얼마나 챙겼는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 자리에서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사역 재미있었고,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 관계도 사실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 마음속에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정말 청년들 많이 챙긴다고 뛰어다녔는데... 진짜 우리끼리도 따뜻한 커피를 놓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그런 시간을 조금 더 가졌어야 했는데... 저는 그게 진짜 후회가 됩니다. 미안합니다...”
리더로 섬기면서 같이 뛰는 동료를 챙기는 것도 멤버를 챙기는 것만큼 중요하다. 좋은 리더는 자신의 주위부터 가장 잘 케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리더는 가정 공동체를 더 잘 사랑하고, 돌봐야 한다. 영향력 있게 사역을 하고, 섬기려면 가정이 건강해야 한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영성이라고 하면 일만 많이 하고, 많은 사람을 챙겨야 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 있는 리더는 자기의 가족을 챙긴다. 예전 베이비붐 시대 교역자들은 가족이 너무 희생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 교역자들은 너무 가족만 챙긴다. 가정 중심적인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 혹 공동체보다 가정이 더 중심이고, 섬김이 뒷전인 경우도 많다.
적절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 영성 있는 리더는 사랑을 줄 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안다. 균형이 잡혀 있다는 말이다. 리더도 사랑을 받아 봐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나는 젊을 때 나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잘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치킨도 잘 사 먹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 멤버들을 사 줄 때는 아깝지 않았다. 어느 날 이것도 문제라는 자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물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사랑을 베풀어 주고, 선물을 주어도 잘 받을 줄 몰랐다. 서울에서 사역하는데 예전 교회에서 함께 섬겼던 지체가 올라왔다. 같이 대화를 나누는데 처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나에게 간식을 챙겨 주었는데...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을 받는 것이 나에겐 익숙하지 않아 거부했었는데 그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단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 본 만큼, 사랑을 베푼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받는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베풀어야 한다. 다른 지체에 흘려보내야 한다.
많이 어려운 집사님이 있었다. 내가 섬기는 분은 아니었다. 직접 그분에게 주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흘려보냈다. 다른 교회의 교역자분, 선교사님에게 다른 나라에 가서 쉬고 오시라고 항공권을 보내 드리기도 하였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 동안 책을 10권 정도 썼다. 감사하게 모든 책이 괜찮게 나가고 있다. 2018년 주님의 교회를 오기 전에 잠깐 안식 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8월~9월은 제주도와 해외에 갔다가 10월 한 달만 집회를 스무 번 정도 섬겼다. 강사료는 필요한 곳에 흘려보냈다.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을 해 주시는 이유가 있다. 계속해서 흘려보내라고 주시는 축복임을 알기에 그렇게 했다.
리더는 자신과 함께 하는 리더들을 잘 챙겨야 한다. 보통은 잘 안 나오는 사람에게 진액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정말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 잘 나오고, 많은 일을 감당하는 리더들을 만나야 한다. 맛난 것도 사주고, 교제해야 한다. 이들이 회복되고, 행복하고, 재미있으면 섬김을 받는 멤버들이 힐링을 받는다.
목회자끼리도 행복하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한 지체가 이런 말을 건네 왔다. “목사님끼리 행복한 게 저한테는 힐링이 됩니다.” 부모인 엄마, 아빠가 굉장히 행복하면 자녀도 행복하다. 나중에 가정을 꾸리게 되면 행복한 가정을 보고 자랐기에 그렇게 잘 산다. 그런데 부모가 싸우고 있으면 아이들이 불행하고, 나중에 그런 싸우는 가정으로 마치 대물림하듯이 된다. 영적으로도 그렇다. 리더들끼리 품어 주고, 칭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멤버들도 리더들을 칭찬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고 긴장을 하면 몸이 경직된다. 이처럼 공동체 안에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며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동체성은 고사하고, 생지옥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진짜 사랑을 받아 본 사람, 진짜 헌신을 받아 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받은 만큼 내리사랑을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영적인 멘토 혹, 리더에게만 이런 사랑의 관계적 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정과 사회에서도 필요하다.
우리가 다 리더지만 다 같은 영성의 리더는 아니다. 관계적 생명이 있는 영성을 가진 리더는 공동체에 밝은 꽃을 피운다. 생명이 없는 곳에는 절대 생명이 일어나지 않는 원칙이 적용된다. 무정란과 유정란은 크기가 같다. 색깔도 똑같다. 무게도 똑같다. 그러나 가격이 다르다. 왜 그럴까? 유정란은 생명을 꽃 피우고 무정란은 먹는 식용으로만 쓰이기 때문이다.
7. ‘인재 관리력’을 갖춰라.
우리는 모두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고, 적을 수 있다. 많거나 적거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 적은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리더는 그 사람들을 인재로 만드는 자이다.
그런 사람이 리더이고, 인재를 관리하고, 키우는 멘토이다. 어떤 사람은 인재가 많음에도 그 사람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많은 도구가 있지만, 그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인재가 있다면 그 인재를 잘 관리하고 영향력 있게 날개를 펼치게 하는 것이 리더십이다.
인재가 떠날 때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떠날 사람이라도 키우고 파송해야 한다. 벤쿠버에서 유학할 때 같이 예배하는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주 짧게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2개월, 3개월, 6개월 있다가 돌아갔다. 청년들에게 실컷 밥 먹이고 케어하지만 어김없이 돌아갔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집에 데리고 와서 아내와 함께 밥도 먹고 게잡이도 갔었다. 그리고 교육과 훈련도 시켰는데... 떠났다.
이민 교회를 다닐 때 왕복 100km를 주행했다. 오가는 길에 청년들 라이드도 해 주었다. 일주일에 4번씩을 다니면서 섬겼다. 그러나 다들 몇 개월 있으면 돌아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민 교회를 섬기면서 회의가 들었다. 언젠가 한 해는 몇 명 정도 왔다가 돌아갔는지 헤아려 보았다. 한 200여 명이 왔다가 다 한국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부흥은 하고 있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청년이 공동체를 떠나게 되다 보니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민 목회는 어렵다고 그러더니 진짜 어렵네...’신기한 것은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묻기 시작했다. 3개월 뒤에, 6개월 뒤에 새로운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어, 친구가 벤쿠버에 있었는데 벤쿠버에 가면 무조건 이 교회 가라고 했어요.” 자신들이 머물다 돌아가면 다른 멤버들에게 교회 공동체를 추천해 주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떠나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 부메랑이구나. 보냈다고 해서 다시 안 오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구나.’
인재양성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당장 써먹기 위해서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다. 써먹을 필요가 없는 사람도 인재로 만들어 파송하면 나중에 다른 사람을 보낸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재로 만들고 다시 역 파송을 해 주는 것이다.
교회 안에 결혼해서 나가는 지체들이 있다. 그런 지체들을 보면 대부분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섬기는 교회가 연약하니 신랑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러나 신부 측이면 신랑 측 교회로 가서 섬기라고 한다. 그곳에 인재가 필요해서 주님이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며 그곳으로 파송하게 하시는 것이니 가라고 한다.
교회는 인재를 만들어 내고, 파송하는 곳이다. 그런데 인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사람으로 말미암은 재앙인 인재(人災)가 일어난다.
공동체의 힘겨움은 막상 재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건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을 인재로 키워내지 못하면 그로 인해 결국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공동체는 기둥과 같은 인재가 없을 때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인재 양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다. 게다가 지치기도 한다. 이유는 무엇보다 인재를 키우는 것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유학 가기 전 서울에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었다. 섬길 때는 잘 몰랐다.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말이다. 유학 중 잠시 들어왔을 때 섬겼던 지체들을 만났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나니 어떤 아이는 어엿한 사모가 되어 있었다. 신학교 학생도 있고, 선교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청년도 있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사역의 열매는 5년, 10년이 지난 뒤에 나타나는구나...’열매는 당장 보이는 게 아니듯 인재를 키우는 것도 당장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사람을 기능적으로만 이용하고 써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작은 교회도 큰 교회도 요즘엔 일꾼이 없다. 이러다 보니 초신자나 다른 교회에서 온 기신자에게도 바로 무언가를 섬기도록 한다. 케어해서 돌보고, 양육하기보다 써먹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를 키워야 한다.
멀리 내다보고 5년, 10년을 정성껏 길러내야 한다.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 리더는 멤버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 하라고 그냥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여주고, 같이 해 보아야 한다. 리더로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해보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나는 계속 책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책을 15권 정도 썼다. 이제는 책을 혼자 쓸 수 있다. 이미 탈고한 것이 있어서 출판사에 넘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있다. 그런데 혼자 쓰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갓 등단하는 사람, 이끌어 주고 싶은 사람과 같이 공저로 출간하기도 한다. 한 번도 책을 안 낸 사람, 또 책을 내고 싶은 사람과 같이 하면서 서로 돕고,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공저로 출간하면 인세도 별로 받지 못한다. 이것이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함께할 때 덜 힘든 부분도 있고 서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나 혼자 다 큰 다음에 누군가를 키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클 때 같이 키우는 게 인재를 키우는 것이다.
존 맥스웰은 리더십에 대해 5가지 모델이 있다고 한다. 제일 차원이 낮은 단계의 리더십은 권위로 누르는 리더십이다. “내가 누구인데, 당신이 내 말을 들어야지” 하는 것은 가장 저능한 최하위의 리더십이다. 권위로 누르는 것은 좋은 리더십은 아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리더십은 그나마 조금 괜찮은 것이 관계를 통한 리더십이다. 같은 공동체에 있지 않은데 도움을 달라고 하면 도움을 주고받는 리더십이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하는 데 도움을 받고, 일이 되도록 만드는 리더이다.
세 번째 단계는 실력이 있는 리더십이다. 어떤 사람이 딱 거기에 들어가면 해낸다. 뭔가 이루며 발전을 한다. 뭔가 온전해진다. 그렇다면 세 번째 단계인 능력을 갖춘 리더십이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단계는 리더가 없는데 공동체가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공동체는 리더가 있고 앞에서 진두지휘해야 한다. 그런데 네 번째 단계의 리더십은 리더가 그 자리에 없어도 공동체가 유기체적으로 잘 돌아가게 하는 리더십이다. 그만큼 공동체가 건강한 것이다.
다섯 번째 리더십은 공동체가 리더를 통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리더를 통해서 멤버가 어떤 축복을 누린다. 또한 이 다섯 번째 리더십은 반대로 공동체 사람들을 통해 리더가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가 리더를 통해 성숙 돼야 하는데 거꾸로 리더가 그 공동체를 통해 복을 받게 되는 단계이다. 공동체가 리더를 칭찬해주고 세워주고 기도해주는 것이다.
리더가 공동체에 축복을 주는 단계가 아니라 공동체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리더가 리더십을 인정받고 축복을 받는 단계인 것이다.
벤쿠버에 있을 때 교회를 떠나기로 작정을 했었다. 왜냐면 공동체가 너무 건강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면서 교회를 100km 왕복하며 섬기자, 쉼을 가지라고 여행을 보내주는 지체들이었다. 배를 타고,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는 섬에 가서 머무를 수 있도록 호텔을 잡아 주었다. 호텔의 마사지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정상까지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약해 주었다.
아주 비쌀 것 같았다. 리조트에 가서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정말 비쌌다. 한국 돈으로 하면 약 100만 원 정도였다. 그런데 대학교 다니는 청년들, 갓 직장에 다니는 청년들이 자기네들끼리 돈을 모아서 쉬라고 여행을 보내준 것이다. 그때 ‘아, 내가 이 공동체를 떠날 때가 되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내가 더 여기에 있으면 축복만 받을 것 같았다.
우리는 늘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숙한 공동체, 성숙한 리더십은 먼저 내어준다. 앞에 있는 리더에게도 주어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기를 잠시 멈추고, 멘토에게, 교역자에게 문자라도 한 번 보내면 좋겠다. 평신도 리더인 부장, 교사, 리더, 섬김이에게 문자로 축복을 해 주라! 그러면 공동체는 한층 건강해진다.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가 가슴을 뛰게 만든다. 사람을 기도하게 만들고, 헌신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게 회복된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의 특징이다.
인재를 격려해야 한다. 앞에 리더도 격려하고, 공동체 멤버도 위로하고, 세워 주어야 한다.
8. ‘공감 능력’을 갖춰라.
사실 탁월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멤버들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리더로 섬기면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 공감이다.
특히, 큰 공동체일수록 공감 능력은 떨어지게 된다. 공동체 속 리더는 멤버들의 소리를 다 듣고, 반응하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공감 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 무엇보다 리더가 부지런히 양 떼를 살펴야 하지만 이를 보완할 장치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세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모세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겨야 했다. 그러나 모세도 인간인지라 나날이 지쳐갔다. 일일이 모든 사람을 다 재판하고, 케어 할 수 없었다. 이때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통해 사람들을 세웠고,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을 통해 백성을 돌보고 섬기도록 했다.
이렇듯 공동체가 커지면 모든 멤버를 다 만나 공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공감해 줄 리더들을 세워야 한다.
점점 커지는 공동체라면 조직의 개편과 공감하기 위한 창구를 개설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체된 공동체도 공감을 통해 멤버를 케어하고,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공감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리더 중에 멤버들과 소통을 꺼리는 사람이 있다. 공동체 멤버에게 상처를 받아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공감이 주는 위로와 회복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감해 주는 것은 리더로서 아주 중요한 리더십의 요소이다. 수직적인 관계로 공동체에 머무는 리더는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명령 식으로 지시하고 일이 되지 않으면 꾸짖는다. 일만 중요시 하고, 그 팔로워의 삶과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경우 멤버는 결국 지친다.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일반 사회에서 이익 창출이 목적인 집단에서는 그렇겠거니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지속해서 아픔이 된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같은 교역자끼리도 힘들다. 같은 공동체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어렵다.
그렇다면 소통이 안 되고, 힘겨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리더가 자기 생각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생각을 나누지만, 구체적으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와 카톡으로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말로 소통할 때보다 카톡으로 소통할 때는 오해의 소지가 있고 상당히 대화가 불투명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7시에 밖에 나가서 먹어요.” 이 말은 7시에 심방이 있어서 못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아내는 7시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전화를 했다. 왜 안 오느냐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야기했잖아요. 오늘 7시에 밖에 나가서 식사한다고!” 아내가 다시 이야기했다. “집에 와서 같이 나가자는 것 아니었어요?”
깜짝 놀랐다. 15년 이상을 같이 살았는데...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아내가 한마디 해 주었다. “당신은 말할 때 주어가 없잖아요!” 내가 나가는 것인지 우리가 같이 나가서 먹는 것인지 명시를 해 주어야 하는데...그렇지 못했었다.
리더로 살면서 생각 속에 갇혀 있을 때가 많다. 분명히 소통했다고 생각했는데...그렇지 못했다.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소통할 때 이런 소통 능력의 부족함이 매우 많다. 소통을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과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광고주들이 광고를 하나 내기 위해서 상당한 광고비를 지출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10초, 15초 광고는 억 단위의 비용이 든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광고를 하는 것일까? 그만큼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광고한 만큼 구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 공동체에서 공감하고 같이 가려면 몇 번을 공지해야 할까? 사람은 18번을 공지해야 인식하고 인지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공동체에서 올해 전도하자고 한다면 18번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해야 한다.
공감하도록 홈페이지에 게시해야 한다. 카톡으로 보내야 한다. 페이스북으로 올려놓아야 한다.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 전화로 ‘전도를 합시다!’ 권면해야 한다. 그리고 광고 시간에도 구두 광고로 “여러분들 아시죠? 전도합시다! 이번 새 생명 축제는 11월 11일입니다. 그때 태신자를 초청해 주세요!” 전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루트로 18번을 들어야 구성원들이 전도 해야겠구나... 공감한다.
어떤 교회를 갔는데 태신자 신청 명단을 교회 내 게시판에 적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메시지를 전하러 가서 게시판을 지나가는데 전도할 대상의 이름들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름을 적을 게시판이 어디에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담당 교역자는 사람들이 명단을 얼마나 기록했는지도 몰랐다.
SNS로, 영상광고를 통해서, 주보를 통해서 알려야 한다. 만났을 때 말로 나누어야 한다. 공동체의 목표, 철학, 가치, 방향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하지만 단지 공동체 일만 나누고, 공감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교감이 있어야 한다. 어떤 교역자가 떠날 때 눈물이 날까? 어떤 공동체 멤버가 헤어질 때 가슴이 아플까? 공감해주고, 자신의 기도 제목과 상처를 아는 사람이 떠날 때이다.
영적인 교통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게 된다. 영적으로 케어를 해 준 사람을 리더로 여긴다. 행정적인 일만 하면 안 된다. 한 사람 한 사람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다수로 만나서는 절대 한 영혼 속에 있는 기도의 제목을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삶의 간증을 듣기 어렵다. 10명이 있는 데서 “자, 오늘 진실한 기도 제목을 이야기해 주세요!” 부탁해도 아무도 제대로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상처와 어려움을 나눌 수 있도록 일대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영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공감 능력은 사실 땀을 흘리며 노력해야 한다. 같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하나가 된다. 피를 흘릴 정도로 한 영혼을 위해, 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서로 공감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9. ‘지력’을 갖춰라.
자신의 분야에 specialist,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고는 안 될 정도로 그 분야의 전문적인 탁월성이 있어야 한다.
몇 년 전 CCM 가수를 초청해 20분 공연을 하였다. 그때 1,000만 원을 지급했다. 1분당 50만 원씩 지급한 것이다. 그 CCM 가수에게 그렇게 큰 비용을 지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가수는 한 곡을 연습할 때 만 번을 부른다. 가사를 보면서 노래하지 않는다.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부른다. 각 곡의 느낌과 의도를 파악하고 가슴 깊이 부른다.
외국에서 산 적도 없는데 영어로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한다. 외국에 10년, 20년 산 사람보다 더 잘한다. 중국어도 잘한다.
어느 날 간증을 들었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중국어로 두 시간 Q.T.를 하고, 5~7시까지 영어로 Q.T.를 한단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영어와 중국어로도 간증하고 노래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그렇게 준비가 되자 미국 NBA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연구하는 사람이든 예술을 하는 사람이든 각자 자기 분야에 specialist,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21세기 리더는 generalist로 어느 정도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21세기를 통합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분야와 다른 분야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독서를 할 때 옛날에는 I-reading을 하였다. I-reading은 자기 분야와 전공 분야만 관심을 두고 읽었다. 현대는 H-reading으로 바뀌었다. 음악을 하는데 자신의 분야와 다른 미술 분야 책을 읽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분야 ‘I’와 다른 분야 ‘I’를 연결하여 ‘H’형 리딩을 통해 더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
현대에 미술만 잘해서는 안 되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 해석해내고 프레젠테이션을 잘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얼마나 잘 설명하고 전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림은 잘 그렸는데 “모릅니다, 그냥 느낌으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림은 잘 그렸는지 몰라도 소통의 부재로 그 가치를 전혀 풀어내지 못하는 화가로 인식되었다.
21세기는 X-reading을 해야 한다. X-reading은 무작위로 읽는 것이다. 자신의 분야와 상관없는 분야도 읽는 것이다. 건축하는데 음악에 대한 글을 읽고, 천문학을 전공하는데 지질학에 관한 글도 읽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creative 하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지력을 갖추고 전문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은 뒤에는 기록해야 한다. 1년에 책을 10권 정도 낼 수 있었는데 그런 이유는 자료를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설교와 강의 할 때마다 녹음한다. 스스로 어느 곳에 가서 메시지를 나눌 때도 녹음을 한다. 여러 번 강의한 것을 다시 듣고, 나중에 보완한다.
이 리더십 강의도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대전에 육군, 해군, 공군이 연합되어 있는 계룡부대에서 군 장교들과 교회 교사들에게 나누었다. Next 세대 Ministry 세미나 때 서울, 대전, 부산, 광주에서도 강의했다. 평신도 리더들 모임에 초청을 받아 여러 곳에 가서 나누었다.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도 나누었다. 장소와 대상에 따라 강의가 조금씩 달랐다. 이런 강의들을 취합해서 다시 업그레이드한다.
그럴 때마다 녹음하고, 기록을 하므로 이 내용을 책으로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매일 아침 묵상한 말씀을 기록하고, SNS에 나눈다. 1년이면 365개 묵상 노트, 3년이면 1,000개의 묵상 노트를 갖게 된다. 설교와 강의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기록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역하면서 기록을 하고, 자료를 모았다. A4사 이즈로 180페이지 정도의 청년 사역 매뉴얼이 작성되었다. A4 사이즈로 167페이지 정도로 매뉴얼을 정리하여 필요하다고 하는 분들 3,500여 명에게 나누었다. 영어예배 자료도 3,500여 명에게 나누었고, 양육시리즈 내용은 6,500여 명에게 나누었다. 기록하고, 자료를 정리하였기 때문에 나눌 수 있었다. 올해는 기도양육교재를 나눌 것이다. 사실, 작년에 나누려고 하였는데... 늦어지고 있다. 올해는 꼭 나눌 것이다.
설교할 때, 혹 짧은 강의를 나눌 때도 기록하고 나누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모아서 순금이 묵상 시리즈로 나누고 있다. 사역적 내용은 Next 세대 Ministry 페이스북에서 나누고 있다.
유학 시절에 했던 설교를 본 적이 있다. ‘아, 내가 이렇게 설교했나?’ 깜짝 놀랄 때도 있고, ‘아, 이렇게밖에 설교 못 했나?’ 실망할 때도 있다. 이렇게 감사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 것은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그 내용을 나누려면 머릿속에만 가지고 있지 말고, 기록하고 더 나누고, 업그레이드도 해야 한다.
자신의 분야에 전문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더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이다.
최근에 나온 ‘블랭크’라는 기업이 있다. 블랭크라는 기업은 몰라도 ‘악어발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악어발팩, 마약 베개 이런 것을 만드는 회사가 블랭크이다. 30대 초반의 사장이 만든 회사로 1년 매출액이 1,500억 이상이다.
이 기업은 물건만 열심히 만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더 잘 업그레이드 시켜 만들고, 1분짜리 영상광고를 통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 구매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각질 제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악어발팩’ 제품을 9,800원에 내놓았다. 그런데 놀랍게 141만 개를 팔았다. 엄청난 금액을 벌었다. 마약 베개도 마찬가지로 대박을 터트렸다.
지금은 직원이 100명이 넘는다. 30대 초반의 사장은 더 많은 전문가를 모집하고 있고, 그 전문가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매달 200만 원씩 적금을 2년 동안 넣어 준다. 2년 후 만기가 되면 4,800만 원의 통장을 쥐여 준다. 전세금과 집 자금을 1억, 2억을 대출해 준다. 그래서 회사 근처로 올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상당한 성과급을 준다. 1년에 매출이 올라가면 매출이 올라가는 대로 보너스를 더 준다.
젊은 사장님의 꿈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유치원을 만들어서 직장에 오는 사람들이 아기를 안전하게 맡기고 하루 종일 편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 여행할 수 있는 여행 티켓을 주면서 쉬게 하는 것이다. 전문가를 정말 귀하게 보는 사람이다.
그 사장도 대단하지만, 전문가를 아주 귀하게 여기다 보니 회사는 더 성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이런 노력을 해야 한다. 정말 한 분야에 전문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자신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전문가가 되었더라도 협력하지 못하고, 다른 전문가와 함께하지 못하면 멀리 가지 못한다. 더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10. ‘심력’을 갖춰라.
앞에서 섬기면서 제일 어려운 게 무엇인가? 바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 ‘자격지심’이다.
리더라면 누구나 본인이 정말 잘하는지 고민한다. 그런 가운데 누가 이런 말을 하면 상심하게 된다. “야, 넌 리더 같지도 않은데 리더니?” 이런 말을 들으면 아주 완벽히 잘하는 리더도 속으로 이렇게 반응하게 된다. “그래! 나 그만둔다. 오늘부로 내려놓지 뭐! 내가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해?”
21세기 리더들은 과거보다 많은 교육을 받았다. 신체적인 조건도 훨씬 좋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심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는 화살을 부여잡고 자기 가슴에 딱 꽂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상처의 화살에 꽂힌 거야! 너는 쏜 것이고!” 쓴 말, 상처 나는 말이 지나갈 때 맞지도 않은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고 하면서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날과 그 시간을 잊지 못한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
리더일수록, 특히 탑 리더일수록 한 명이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에 민감하다. 특히 설교자는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설교를 잘한다고 해도 수백 명 혹 수천 명 중 한 사람이라도 설교가 별로라고 하면 힘들어한다. 설교자는 100명 중 99명이 “목사님 설교는 너무 좋아요.”라고 해도 딱 한 사람이 부정적으로 한 말이 가슴에 남는다.
어느 날 설교를 한 후 A4로 4페이지짜리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내 설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아 놓았다. 이런저런 부분에 부족한 면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황당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편지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친구가 SNS 계정을 만들어 접근해 왔다. 자신의 편지를 받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공개적으로 SNS상에서 대화도 했다. 그러던 중에 그 지체가 묻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런 질문이었다. “목사님은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한 사실을 믿으십니까?” 너무나 황당하였다. 태신자 초청 집회를 1년에 6번 이상을 하면서 수없이 복음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담당 교역자에게 하는 질문이 정말 내가 예수님의 대속 사실을 믿고는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지체의 편지 속의 수많은 의혹은 설교자인 나 자신을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쓴 약이 되기는 했지만 잠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란 사람은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지체가 설교자가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있는지 의심하며 들었다고 생각하니 설교 중에도 가슴이 답답했다.
속으로‘에이, 그만둬야겠다. 설교고 뭐고. 마음에 안 든다는 데...뭘 더 해?’이런 말을 내뱉었다. 설교하기 전에 수많은 젊은이가 설교를 기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사람이 말한 내용이 머리와 가슴에 남게 되었다. 설교 준비하기가 싫었다. 예전에는 주일이 끝나면 설교를 준비했는데 ‘준비해봤자 뭐 설교 안 좋다고 그러는데 뭐해.’ 이런 생각이 드니 기쁜 마음도 없고,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모든 리더는 강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리더는 한 사람의 생각, 말, 행동으로 쓰러질 수 있다. 강한 척하지만, 막상 심력이 강한 리더는 많지 않다. 지력이 있고, 영력은 있어도 이렇게 심력이 약한 리더는 한자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대부분 교회에서 몇 년간은 섬겼다. 한 교회에서 10년을 섬기기도 했다. 그러나 버티어 내야 할 상황에서 자리를 지켜 내기가 쉽지 않은 때도 있었다.
한 교회에서는 재정을 횡령한다고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 일이 없어 문제는 없었다. 이렇듯 리더로 섬긴다는 것이 늘 존경을 받고, 다 이해해 주는 자리는 아니다.
벌꿀오소리처럼 강해야 한다. 벌꿀오소리는 세계 기네스북에 가장 겁 없는 동물 중 1위로 등재되어 있다. 벌꿀오소리는 사자한테 길을 비켜 주지 않는다. 치타랑 싸우려고 한다. 덩치 큰 코끼리도 키가 큰 기린도 겁내지 않는다. 고슴도치가 와도 피하지 않는다. 싸우다가 가시가 박혀도 저벅저벅 갈 길을 걸어간다. 코브라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코브라에 물려 독이 몸에 퍼져 쓰러진다. 그러나 6시간 뒤에 다시 일어나서 코브라와 또 싸운다. 그 코브라를 물어뜯어 먹어 치운다.
벌꿀오소리라는 별명대로 벌집을 좋아한다. 벌집 한가운데에 손을 집어넣고 꿀을 먹는다. 혀로 핥아먹는다. 혀에다가 침을 쏘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입안에 벌이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꿀을 먹기 위해서는 감내하고, 애벌레까지 먹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무엇 때문일까? 벌꿀오소리는 독을 해독할 수 있다. 그래서 견뎌내는 것이다.
리더라면 자체 독을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상처 났다고 길을 멈추고, 겁에 질려 포기하면 안 된다.
11. '체력'을 갖춰라.
한창 젊을 때, 체력이 영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풀타임으로 섬길 때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젊은이들에게 새벽을 깨우라고 수없이 외쳤다. 지금 새벽을 깨우지 못하면 평생 새벽을 깨울 수 없다고 외치고 외쳤다. 적지 않게 반응을 하기도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나중에 젊은이 중 상당수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상당수는 노인대학에 다니는 사람처럼 체력이 약하다. 눈동자에는 힘이 없고, 원기 왕성한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젊은이들도 체력을 키워야 한다.
교역자 중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새벽예배를 못 나오는 경우가 상당수다. 새벽에 나와도 졸다가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몽사몽간에, 환상 중에 있다가 집에 들어가 다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다.
리더로 서려면 일찍 일어나기도 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체력이 있어서 낮에도 해야 할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체력이 국력이라고 하는데, 체력이 있어야 어떤 일이든 주저하지 않게 된다. 해야 할 일이 당장 눈앞에 보여도 건강이 좋지 않으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무브먼트 운동을 일으키려면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특히, 비전을 이루는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길게 보고 달려야 할 마라톤과 같다.
주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챙기고,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근력이 달리고, 몸에 근육이 없다. 그래서 쉬고 싶어 한다. 근육은 운동을 해야 단단해진다. 가만히 놔두면 점점 빠진다. 나중에는 서 있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될 수 있다.
팽이는 언제 서 있을 수 있는가? 빙글빙글 돌 때 팽이는 서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영적으로 서 있으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진짜 일할 때는 20대, 30대가 아니다. 40대, 50대에 일을 많이 한다. 60대, 70대에는 더 중요한 자리에서 섬기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을까? 20대와 30대에 몸을 잘 만들어야 40대와 50대 잘 섬길 수 있다. 40대와 50대 건강을 챙기며 운동해야 60대와 70대 진짜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있다.
요즘 젊은이 중 몸이 안 좋아 병원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아프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도 못한다. 결혼 전에 어디 아프다고 하면 괜히 허약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드러내놓고 기도 제목을 말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건강을 챙기고, 새벽에 기도도 하고, 책도 읽고, 하루를 열어야 한다. 아침부터 피곤해하고, 밤에도 체력이 저조해 이런저런 해야 할 것도 뒤로 미룬 채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은 영향력 있는 리더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젊은이 사역을 하면서 건강을 잃기 시작하게 되었다. 청년 사역을 갓 시작했을 때 검진을 받았었다. 그때는 건강이 좋았다. 그러나 청년 사역을 한 2년 뒤에 다시 건강 검진을 받을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콜레스테롤, 지방간, 신장, 혈압 등 다 좋지 않게 나왔다. 위장은 하루에 여러 잔 마시는 커피로 안 좋아졌다. 그 뒤로 하루에 1~2잔으로 커피를 줄이고, 조금 더 운동하고, 걸으려고 아등바등하기 시작하였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알지만 잘 안 된다. 그러나 건강은 꼭 챙겨야 한다. 리더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력도 잘 관리하지 못하는 자가 공동체를 잘 관리하고 성실히 섬기기란 여간 쉽지 않다.
공동체의 근심과 걱정거리가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공동체 지체를 챙겨야 한다. 근심과 걱정으로 시름시름 아파하고 쓰러져 있는 지체를 일으켜야 한다.
감기만 걸려도 자신을 위해 밥 먹는 것조차 귀찮고, 하고 싶지 않다. 이렇듯 리더가 건강해야 가슴 뛰게 하는 비전을 생각만 하고 포기하거나 자꾸 뒤로 미루지 않는다.
편하게 차만 타고 다니기보다 불편하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걷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하게 올라다니기보다 힘들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걸어 올라다녀야 한다. 많이 먹기보다 조금씩 절제하여 살을 빼고, 날렵하게 주어진 일을 섬겨야 한다.
12. ‘실력과 겸손’을 갖춰라.
리더가 실력만 갖춘다고 리더십을 탁월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단한 능력만큼 겸손함이 없으면 오히려 팔로워의 마음에 큰 짐을 지워주는 것과 같다.
존 맥스웰은 5가지 리더십을 말할 때 실력 있는 리더십을 세 번째 단계의 리더십으로 본다. 첫째는 직위를 통해 일하는 리더십, 둘째는 관계를 통해 일하는 리더십, 세 번째가 바로 실력을 통해 일을 성취하는 리더십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리더십을 가진 자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겸손하게 일하는가이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만 믿고, 함께 하는 사람들 앞에 겸손하지 못하면 멀리 가지 못한다. 그래서 실력과 함께 겸손이 필요하다.
실력은 어떻게 극대화되는가? 주어진 달란트를 극대화할 때 일어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은 잘 보지만 정작 자신의 달란트와 재능은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하는 것을 자신도 해 보려고 노력한다. 정작 자신의 특기는 살릴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특기를 알고, 잘 살려야 한다. 자신이 못하는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거기에만 온 신경을 쏟아서는 안 된다. 정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오히려 잘하는 부분을 더 가다듬고 더 영향력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섬기며 경험을 쌓고, 전문적으로 쓰임 받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식을 잘하는 사람은 음식에 대해 배우고, 만들어 보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의 평가도 듣고 더 잘 만들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요리사가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 시간, 재정, 열정을 쏟느라 요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목회자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 목회가 주가 아니라 다른 것이 주가 되는 것이다. 목회자 이중직에 찬성이다. 바울도 텐트 메이커로 텐트를 만들어 팔고, 재정적 기반을 통해 섬겼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텐트를 만들었던 이유는 복음과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텐트를 통한 이윤 자체가 아니었고, 텐트를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중직을 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비즈니스 선교를 할 때도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선교를 위해 비즈니스를 하는 것인지 비즈니스를 위해 선교지에 있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터키에 단기선교를 하러 갔다. 거기 선교사님 중 한 분을 만나려고 했지만, 여행사를 운영하느라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단기팀이 갔지만 너무나 분주해 시간을 내주지 못하셨다. 그 당시 충격이었다. 선교를 위해 여행사를 하는 것인지... 여행사를 운영하기 위해 선교지에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여행사를 하는데, 아무리 실력이 좋고, 이윤을 많이 남겨서 좋을 수 있지만 무엇을 위한 이중직인지 정직하게 고민해야 한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탁구는 부수가 있다. 6부에서 1부까지 실력에 따라 부수가 주어진다. 시합에 나가서 이겨야 부수를 얻게 된다. 5부에서 4부로 올라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보통 2~3년은 꾸준히 레슨을 받아야 부수를 올릴 수 있다. 실력을 갖추는 것은 땀을 흘리고, 때론 눈물도 흘려야 한다.
리더십의 급수를 올리는 것도 그렇다. 땀을 흘리고, 다른 사람이 모르게 눈물 흘리는 시간이 있다. 때론 공동체를 위해서 피도 흘려야 한다. 그럴 때 성숙해져 가고, 리더십이 생긴다.
리더십이 더욱 성숙해질 때 그런 리더를 따르는 성숙한 리더들이 따라서 오게 된다. 탁구 관장이 되려면 3부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3부 정도 되는 관장이 탁구장을 오픈하면 3부, 2부, 1부가 오지 않는다. 4부, 5부, 6부 이런 사람들이 와서 배운다. 관장의 실력에 따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수준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탁구 관장님이 1부 혹 선수 출신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2부, 3부, 4부가 와서 한 번이라도 관장님과 치고 싶어 한다. 관장님이 치는 탁구를 보기만 해도 감탄하면서 즐거워한다. 리더는 단지 겸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실력도 키우고, 다른 사람을 제대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어야 한다.
리더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서 팔로워의 수준이 달라진다. 셀 그룹 멤버 중 셀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셀 리더는 그 사람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있고, 공동체에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것을 얘기할 때가 있다. 셀 리더가 리딩을 잘하지 못해서...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자꾸 예전 사귀던 사람 이야기를 너무 자주 해서... 등 여러 이야기를 한다.
리더가 팔로워의 수준도 안 되면 팔로워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계속 나올 것인지 아니면 셀 모임은 그만 나오고 예배만 드릴 것인지 생각한다.
텐트에 4개의 기둥보다 가운데 기둥은 더 높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텐트에 들어가게 되면 왠지 답답하다. 불편하다. 리더십도 그렇다. 리더의 수준이 높고, 성숙한 만큼 팔로워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하다.
진정한 리더가 되기 원하면 자신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한 수, 한 단계, 한 등급 올리기가 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십은 절대 나올 수 없다. 리더십이 주어지더라도 교만하면 안 된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실력 있는 지도자일수록 겸손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기 위해서 겸손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편 147:6)
김영한 목사(품는 교회 담임, Next 세대 Ministr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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