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량을 구하러 온 요셉의 형들
창 42:1-8
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창 42:1-8 / [애굽으로 곡식 사러 온 형들] 이즈음에 야곱은 애굽 땅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식들에게 말하였다. `어쩌자고 이렇게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느냐? 2) 애굽에는 파는 곡식이 있다고 하더라. 그러니 애굽으로 내려가서 곡식을 좀 사오도록 하여라. 그래야 우리가 굶어 죽지 않을게 아니냐?' 3) 그래서 요셉의 열 형은 곡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4) 그러나 야곱은 요셉과 같은 배에서 나온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에게 혹시나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서였다. 5) 이렇게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무척 심하였기 때문이다. 6)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다] 애굽의 총리인 요셉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요셉의 형들도 곡식을 사려고 요셉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절하였다. 7) 요셉은 자기에게 절을 하는 형들을 알아보았다 `아, 형들이 곡식을 사러 여기까지 내려왔구나' 하고 속으로는 무척 반가웠으나 겉으로는 일부러 모른체하고 시침을 뚝 떼고는 형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예, 가나안에서 왔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져 이곳까지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하고 형들이 대답하였다. 8) 요셉은 자기 형들을 알아보았어도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창세기 42장은 온 근동지방에 기근이 휩쓸었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전역에도 기근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곡창지대였던 애굽으로 향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었습니다.
곡식을 사러가는 요셉의 형들(1-5) 가나안 땅의 기근은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항상 우물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 척박한 땅이었는데 긴 기근은 많은 사람들을 생사의 기로에 서게 하였습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도 기근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에 야곱이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1).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가족부양의 책임을 회피하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에게 소리쳤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죽지 않고 살리라’ 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주저했던 것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렸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야곱의 재촉을 받고 형제들은 준비를 갖추고 애굽을 향해 떠났습니다(3). 그러나 야곱은 그의 막내 아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우려해서 베냐민은 남겨두었습니다(4).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한 때문이었습니다.
요셉과의 첫 번째 만남(6-8)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타국에서 온 식량 구매자들이 총리 앞에서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요셉이 곡식 판매를 직접 관리했습니다. 이는 전 국민의 생존이 총리 요셉에게 달려 있었고 더욱이 애굽을 정탐하기 위해 침투하는 정탐꾼들을 막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온 요셉의 형들도 애굽의 총리 앞에 서야 했습니다. 그들은 땅에 엎드려 공손히 절하였습니다. 요셉은 단번에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동생이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어린 시절 꾼 꿈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37:6-9). 하나님께서는 한 번 계시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적용: 노력 없이 변명만 늘어놓는 것은 게으름일 뿐입니다. 고난을 불운 탓으로 돌리면 사람은 더욱 약해지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강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경쟁적인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대개 고난이라는 포장지로 싸여 있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이 점을 잘 이해합니다.
유명한 뉴스 캐스터였던 데이비드 브린클리는 “신은 가끔 우리 앞에 빵 대신에 벽돌을 던져놓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원망해서 그 벽돌을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한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고난이라는 벽돌은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행복의 기초가 될 수도 있고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설 교 >
20년 후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열었던 때가 딱 20년 전이군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그 동안에 무슨 일들이 있었습니까? 새로 오신 다현이 엄마와 얘기를 하다가 조금 있으면 서머타임이 시작될 거라고 했더니, 자기가 어렸을 때는 우리나라에도 서머타임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88년 올림픽 때 다른 나라들과 시차 맞춘다고 일시적으로 시행했었습니다. 그게 20년 전입니다. 저는 20년 전에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 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20년의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들도 있지만, 세월 속에 묻혀버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아무리 묻어버리고 싶어도 묻히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잊어버리고 묻혀버린 것 같았는데, 비만 조금 와도, 바람만 불어도 그 묻힌 것이 드러나서 우리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는 다시 가나안의 야곱의 집안으로 돌아갑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사나운 들짐승에게 물려 죽은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그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야곱의 집에서 요셉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는지 모릅니다. 요셉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야곱이 깊은 슬픔에 잠겼을 테니까요. 그렇게 20년이 흘렀으니 요셉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고, 요셉의 죽음에 얽힌 비밀도 영원히 묻히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결코 요셉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사랑하는 아들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겠지만, 형들은 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셉에 얽힌 비밀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요셉은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더욱 요셉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자기들이 행한 그 악한 일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비밀이 밝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저지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사람은 진실을 묻어버리고 자기가 행한 악한 일을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만약 흉년이 들지 않았더라면, 야곱이 양식을 사기 위해 그 아들들을 애굽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격자가 없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증인이 없다고 해서 무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들로 데리고 나가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완전범죄였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도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이 아벨 죽이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땅이 알고 하늘이 아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죄를 짓고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누가 봐도 죄를 지은 것이 뻔한데,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뻔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속이고 죄를 감췄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 1970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로레인 마가렛 제이콥이라는 젊은 여자가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에서는 살해범을 잡지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거의 40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2008년 2월 초에 하비 리차드슨이라는 은퇴한 사서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품 가운데 38년 전 자신이 로레인을 살해했다는 고백을 담은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은 그 끔찍한 살인자에 대해서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평생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악한 일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2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대로 죗값을 치러야 하고, 죽었다면 죽은 대로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라가 내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고 번영을 구가해야 할 터인데, 연이어 3년 동안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까지도 심각한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권 초기에 그런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정권 탓을 하게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일 때문에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했더니, 여호와께서 대답하시기를,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한 재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권력을 잡은 후 기브온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러 들어왔을 때, 기브온 사람들은 멸망당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 속임수를 써서 여호수아와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섞여 살게 된 것인데, 사울이 인종청소를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사울이 행한 악을 속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의 자손 7명을 내어 주면,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범한 죄의 대가를 그의 자손들이 치른 후에야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습니다(삼하 21장).
요즘도 가끔 뉴스에 친일파 자손 재산 환수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의 친일파들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 죗값을 그 후손들이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친일파 후손이라는 이름 자체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저주입니까?
2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하루인들 편하게 살았겠습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들은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받았을까요? 아니, 어쩌면 세월이 흐르면서 양심도 무뎌갔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20년 동안 그들은 아버지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상심과 분노가 크다 할지라도, 20년 동안 용서를 구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에 사람을 보내거나 또는 자기들이 직접 내려가서 요셉을 찾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찾기가 어렵다 해도 20년 동안 찾았다면 못 찾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2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슴 속에 그 비밀을 깊이 감추고 아무 일도 없는 척했을 뿐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도 나쁘지만, 그 악을 회개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쁩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하비 리차드슨처럼 죽기 직전에야 자기들이 행한 악을 고백하려고 했을까요? 그래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고백하려면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지요. 요셉을 찾아와서 자기들의 죄를 속죄해야지요. 하비 리차드슨이 죽은 다음에야 진실을 밝힌 것은 대단히 무책임하고 비겁한 짓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년 동안 속으로만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롭게 사는 것은 속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속죄에는 대가 혹은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20년 동안 누구에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또 무슨 대가를 치렀습니까? 괴롭게 산다는 것 자체가 대가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대가로서 충분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그것이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진실을 감추는 또 하나의 악을 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20년을 보낸 후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드러내기로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20년 동안이나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벧후 3:9). 그러나 하나님의 기다리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기 전에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서, 만일 가슴에 묻어두고 잊혀지기를 원했던 일이 있다면, 비록 대가를 치러야 할지라도 깨끗하게 해결해서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회개하지 못한 악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합시다.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원망들을 일이 아직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면, 화해하고 용서해서 그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립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더 크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세월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이 결코 치유할 수 없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속죄에 근거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 뒤틀어진 문제들은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꼭 바로잡고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행동과 결정이 세월이 지난 후에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0년이 지나도록 그들이 그렇게 괴롭게 살게 될 것을 알았더라면,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다른 사람들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원망 듣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