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의 글벗주호님의 글앞에 서서 (임창숙)
3월 첫주 첫월욜 오전10시, 첫 온라인 –로고스서원- 수업을 위해 모든 셋팅을 끝내고 stand –by 하고 있었다. 첫 수업준비를 위해 문자로 고지하신 컬리컬럼을 보고 수업을 위한 서적을 전 수료자이신 담임목사님께 빌려 목차와 서평들을 미리 숙지하였다. 노트북을 주일에 가져가서,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줌-을 설치하고 가상 연습으로 기술을 익혔다.
드디어, 사부님의 얼굴이 화면에 드러나면서 환영인사를 하심으로 이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학기동안 함께 “글”로 소통할 글벚님들과도 화면으로 인사도 했지만, 글쓰기 학교에 걸맞게 제출한 첫 글들을 통해 더 찐한 인사를 했다.
월요오전반의 반원님들이 각자의 글을 낭독할때마다, “이곳은 내가 있을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나를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이주호님의 글’을 듣고 그 생각이 굳어져 행동으로 옮겼다. 아는 분들만 아는 과거, 사부님께 자퇴 선언을 하고 몇일간의 자유함을 맛보다 선배이신 담임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재 입학을 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로 다시 시작한 글쓰기 학교 수업마다 발표된 주호님의 글을 대할때 마다, 나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희고 커다란 캠퍼스 위로 거침없이 고된 삶의 큰 붓으로 짙은 색깔들을 묻혀 그려내는 강렬하고 짙은 색채의 그림, 방파제위로 달려나오것 같이 출렁대던 짙은 회색의 파도들이 인상 깊었던 아일랜드의 Galway 연상케하는 ‘주호님의 글’은 그 파도가 되어 나의 무의식중의 기억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1학기 과정 중 필독 서적인 ‘상처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을 구입하고 아직 완독하진 못했지만, 내용대로 내가 이 치유 과정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의 과거와 ‘화해’를 했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는데, 글벗님의 ‘글’앞에 서서 바라보니 다시 한번쯤은 ‘로고스서원 글쓰기 학교’에서 ‘글’ 통해 ‘재확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심했다. 그동안 잠잠해져 보자기에 싸서 마음장롱 깊숙이 넣어놓은 ‘과거’들을 새삼 꺼내어 타인들앞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를! 하지만 로고스 서원 글벚님들과의 공유라 오래 고민않고 ‘말’이 아닌, 처음으로 ‘글’로 써보기로 했다.
나는, 1967년 6월20일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3녀1남의 둘째딸로. 위로는 10살위인 언니, 5살위인 3대 독자 오빠, 아래로는 2살 적은 여동생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두번째 처’로 아버지와 결혼해 우리들을 이 땅에 낳아두시고 내 나이 4살 때 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들은 다 그러했듯이, 나의 아버지도 짧은 가방끈으로, 유일하게 할수 있는 ‘운전기술’로 어린 남매들을 부양하려고 애쓰셨다. 물론 할머니의 성화로 ’처‘둘과 사별한 박복한 나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다. 큰 알사탕을 ’부실한 이‘로 쪼개어 큰 것은 오빠에게, 나머지는 우리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마저도 초등학교 입학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난기’가 도래했다. 가까운 친지도 없는 우리 남매들에게 흔히 읽고 들었던 ‘새엄마의 구박’이 시작되었다. 아침, 아버지가 일찍 일나가시면, 우리는 밥이 없어서가 아닌 밥을 주지 않는 구박으로 끼니를 거른체 학교에 가기가 일쑤였고, 점심 도시락은 사치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 수도가에 가서 수돗물로 허기를 채웠다. 나는 아마도 그때부터 ‘생존본능’이 발달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교후 집과 부엌을 깨끗하게 치우고, 빨래를 하고, 새엄마의 기분에 따라 아부하며 안방에 있는 ‘밥통’을 부엌으로 옮겨놓는 ‘이쁜짓’을 매일 했다. 밥통을 쟁탈해야만 오빠, 동생에게 ‘저녁 밥’을 차려줄수 있어서였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학생이 되어 ‘입학식’에 얻어입은 교복을 입고 갔다. 운동장을 쩡쩡매웠던 신윤성 교장선생님의 ‘입학환영사’가 가슴에 박히던 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추운 3월의 입학식날, “지금, 여러분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머리를 하고 똑같은 학교의 학생이지만, 앞으로의 3년으로, 20년후의 자리가 만들어질것입니다. 그때엔 아마 같은 장소에 있지못하는 일도 있을겁니다.” 삶이 힘들고 고달팠던 14살의 어린소녀의 칡흑같이 어두웠던 마음속에서 ‘희망의 오기’를 발동시켰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새엄마의 본가가 있는 ‘신평’으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와 엄마는 시장에서 반찬가게를 열었다. 매일 방과후 집에 돌아오면 항상 나를 기다리는 일들, 잔파까기, 마늘까기로 일년내내 나의 손에서는 비누냄새가 아닌 마늘냄새가 베였고, 나의 손가락은 붕숭아물이 아닌 잔파의 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손질한 야채들을 머리에 이고 지고 시장에 배달하면, 새 엄마는 ‘정부미한되’와 ‘신김치’로 나의 수당을 챙겨주듯 교환했다. 그나마 나아진 삶이었다. 그것으로 오빠, 동생의 저녁을 지어줄수 있었기에. 저녁 늦은 새엄마의 귀가전까지는 ‘공부’를 할수 있었기에. 우리의 아버지는 시장가게에서 새 엄마와 식사를 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않았던 아니 못했던 아버지를 나중후에야 ‘경제권 상실’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을것이라 이해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집을 나왔다. 새엄마의 진학 반대로, 어려운 형편으로 근처의 ‘신발공장’에 나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시장에서 난생 처음, 울며 불며 아버지와 새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왔다. 결혼해서 어렵게 단칸방에서 살고 언니집으로 도망갔다. 언니 자신 또한 진학을 포기하고 ‘한일합섬’ 공장에서 주경야독을 한지라 나를 보고 엉엉 울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에 미성년자인 내가 할수 있었던 일은 별로 없었다. 입학허락된 실업야간고등학교의 ‘입학금’을 먼 친척의 소개로 ‘서울 큰부자집의 작은식모’로 2개월간 일해서 마련했다. 나는 그때 하루 연탄을 20개 정도 갈고,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보필하고 작은 집안일들을 했다. 드리마 ‘서울의 달’처럼 서울의 겨울은 어린 나에게 살이 애리도록 혹독했다.
주경야독을 하면서 지낸 고등학교 3년은 ’더 나아진 삶‘이었다. 집을 떠나, 새엄마의 구박과 구타를 떠난 자유로운 삶이었다.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의 간사’로, 가끔씩은 ‘신발공장’에서 일했지만, 머리 둘곳이 없어서 친구집을 전전긍긍하는 생활이 힘들어 숙식제공이 되는 남천동 부촌 남천비치아파트의 부부와 한자녀가 사는 가정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했다. 또 다른 어려움과 서러움과 구박들이 있었지만, 나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다. 그때 월급이 월5만원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내방과 밥과 샤워를 할수있어 감사했다. 가끔씩 주말에 주인 아주머니의 대학생 여동생이 눌러오면, 나는 과일과 차를 내어가면서, 아무걱정 없는 대학생의 청량한 웃음소리와 세련된 용모에 나는 부러워하며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 아주머니가 던진 한마디가 나의 귀에 꽂였다. “부럽지, 넌 생각도 못하는 대학생이!”
19살, 아직 갈바를 몰라 방황하던 내 마음에 또다른 ‘오기’를 발동시켰다.
졸업후. 나는 ’성심외국어전문대학‘의 영어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때 취득한 ”관광호텔종사자’자격증으로 5성급ㅇㅇㅇ호텔에 취업도 했다. 더더 나아진 삶이 시작되었다.
근무하는 업장의 지배인님께 부탁하여 방학때는 ‘저녁조’로 다른날들은 ‘오전조’로 일할수 있는 혜택을 얻어 ‘야간대학’을 다닐수 있었다. 그 보답으로 항상 오전 5시30분 출근시간전에 출근해 쓰레기통 청소, 물품들을 정리등 궃은 일들은 자진 도맡아했다. 제일 좋았던 혜택은 많은 외국인손님들로 인해 영어, 일어 실력도 나날이 늘어났다.
호텔옆 주택가의 냉기 충만한 다락방을 월세로 빌려 생활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호텔안에서 해결할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수업후 12시가 가까워 집에 오면 옷만 갈아입고 호텔로 갔다. 때 맞춰 나오는 ‘야식’을 저녁으로 먹고 따뜻한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직원휴식실에서 따듯한 잠을 잤다. 새벽5시 출근시간까지. 호텔의 많은 상사들, 동료들이 ‘주경야독’하는 나를 후히 후대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 자리에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는지, 새삼 감사하다. 누구보다도 나의 하나님아버지께!
나는 이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 나의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셨다.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전부터. 한번도 들어보지못한 감당하기 어려운 고백, 그것도 신에게로부터의 고백이었다. 나는 이 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2년의 대학과정을 보내고, 나는 꿈에도 그리던 해운대의 ㅇㅇㅇㅇ호텔에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 마지막 관문인 ‘면접’날이었다. 총지배인 아이리쉬인 Mr,Kerry와 미국인 부총지배인 Mr.Robert씨가 면접관이었다. 그동안 갈고 닦았던 영어실력을 보여줄수 있고 좋은 포지션을 잡을수 있는 큰기회 였다. 평소 전 근무지에서 외국인들은 매일 접해온 나는 담담했던 것 같다. 그들의 질문과 요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소개부터 특기,성격 등등 즐거운 면접시간 이었다. 이제껏, 이땅에 태어나 아무도 나에게 물어주지 않았던 생소한 질문들에 당황했지만, 아마 나는 미소를 지으며 크게 ‘나를’ 표현했으리라. 면접의 결과는 합격과 동시에 칭찬일색이었다. 나의 당당함을 칭찬했고 나의 의견에 감사해 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았다. 그 누구도 “부모님은 무엇하시느냐” “몇남, 몇녀인가, 부모님 생존해 계시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살아온 나날 동안 귀가 아프게 들었던, “기가세서 팔자가 사납다” “기집애가 고집이 세서 남편 고생시킨다” “여자는 두레박인생인데, 어느 남자가 널 감당하겠느냐”라는 항상 들어왔던 말들로 스스로 닫아놓았던 편견의 새장이 열려 가두어놓았던 내 영혼이 그날 자유로이 날개짓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알았다. 나는 외국인과 결혼해야 하는 운명이라는것을! 아니, 외국인과 결혼하리라 결심했다.
6개월간의 실습기간후, 나는 후론트의 VIP 담당으로 배정되었다. 나에게 꼭 맞는 직책이라 재미나게 일했다. 그런 와중, 독일 선박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 준비하는 과정의 남편을 만나 결혼해 33년간 이땅에서 살고 있다. 나에게 ‘국제결혼’은 신의 한수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 조실하고 변변치 않은 학벌의 배경을 가진 나에게 ‘결혼’이란 엄두도 못낼 일이었고,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앞이 뻔히 보이는 그 시련들 안으로 들어가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시련을 격었기에! 나는 또 다른 삶의 시련이 아닌 더 나은 삶으로의 날개짓을 하고 싶었다.
남편으로 인해 나의 어린 시절의 상처는 아물어져 갔고, 믿음으로 인해 나의 고난들은 이해되어져 갔다. 로고스 서원과의 시작된 인연으로 나는 ‘글’로써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훈련의 과정속에 있는 것 같다. ‘글’의 치유능력을 한번 믿어보고 경험하기로 하고 써내려간 이 ‘글’을 통해 나의 짙고 어두웠던 과거의 시간들을 바라보니 많은 감정의 선들이 또렷히 보여져 잘 정리할수 있었다. 찌거기들은 자연히 버려지고, 서러움은 서러운대로, 아팠던 것은 아픔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를 좀더 평안히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되었다. 누에고치가 제속에서 비단을 뽑아내듯이, ‘글쓰기’도 내속의 또 다른 나를 ‘글’로 뽑아내어 ‘구원의 비단길’를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내일은 부활절이다. 상처입은 치유자이신 주님이 자신의 옷자락에 지금까지의 나의 눈물, 한숨, 서러움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싸고 계시니, 이 상처들로 나를, 타인을 치유하는 아름답고 선한 일들로 부활시킬실 것이다.
오늘도 나는 월요일 로고스 서원의 만남을 기다리며 글을 쓴다.
첫댓글 자서전을 쓰셔야 할 것 같아요. 창숙님의 삶 앞에서 저의 삶이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