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0
12월25일[주님 성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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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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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95acNtrpL4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96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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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기 예수님께서는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삶 속에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의 성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자신의 한평생 화두로 삼았던 예로니모(AD 340-420) 성인이십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히브리어나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행중의 고행이었던 성경 번역 작업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임했는데, 그 작업은 바로 아기 예수님 탄생지로 추정되는 예수 탄생 성당 옆에 있는 동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주 서울 갈 일 있어 고속 터미널 근처를 지나갔었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번쩍번쩍, 시끌시끌, 와글와글, 캐럴송이 크게 울려 퍼지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다 헛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상술에 우리까지 덩달아 놀아나는 것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이 예수님의 성탄 전야,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일입니다.
잠깐만 우리 마음 안을 한번 같이 들여다보실까요?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위한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우리들 내면이 너무 많은 것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분 마음을 살펴보면 자신에게 심한 상처를 안겨준 그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떤 분 마음속에는 오로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비롯한 다양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위해 조금 비집고 들어오시려고 해도 워낙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요란한 광란의 성탄 파티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휘황찬란한 도시 한 가운데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각자의 상처받은 인생 안에 탄생하고자 우리 옆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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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Wxv_CRmX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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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가 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되새기는 날>
사람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환경에 따라 형성됩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녀는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환경은 정글과 같게 됩니다. 정글에 살면서 착해질 수는 없습니다. 피해받지 않으려고 움츠러듭니다. 일단 모든 사람을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으로 봅니다. 누군가 그의 환경을 바꿔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착해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MBN 특종세상 290회에 ‘서울 도심 폐가에 홀로 사는 수십억대 부자’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내용이 있습니다. 70대 초반의 한 어르신이 서울 금싸라기 땅 한 복판에 시가 70~80억 되는 땅에 세워진 폐가에서 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분의 일상은 새벽에 나와 지하철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무료 급식과 약간의 돈을 받아 밤에 폐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사는 데는 자신의 땅이 자기 것이 아니라 누나들 것으로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누나들이 자신들의 명의로 다 찢어놓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누나들도 재산 때문이었는지 동생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나서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나들은 다 이민을 가서 법적으로 그 땅을 동생에게 넘겨준 상태입니다.
이 상처가 사람과 담을 쌓게 했고 충분히 많은 땅을 보유하고도 자신이 땅을 팔면 누나들이 빼앗아 갈까봐 쥐가 들끓는 전기와 물도 안 들어오는 이 집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 그럴까요? 이분에겐 어머니가 전부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갑니다. 사람이 환경입니다. 이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입니다.
방송에서는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누님과 같은 분이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과자를 주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어르신은 고마움을 느끼고 할머니가 사 오신 과자 중 하나를 도로 주며 100세까지 사시라는 말까지 전합니다.
이렇게 조금씩 신뢰가 쌓이면 어떨까요? 그동안 자기 피만 빨아먹으려고 덤볐다고 믿는 사람들 틈에서 조금은 편안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사람이 나의 환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따라 내가 형성됩니다. 누가 독사가 들끓는 정글에서 평안을 유지하고 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원죄로 살기에 다 모기로 태어납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해도 세상이 그렇지 못하니까 자기 환경을 에덴동산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한 가지 방법, 에덴동산에서 오신 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도 함께 계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드님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며 우리 환경을 에덴동산으로 바꿔주시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정글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에덴동산에 살고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정글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쁜 사람, 곧 나뿐인 사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 자체, 그것으로 내가 에덴동산에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선악과를 바치는 것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으로 조금씩 바뀝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 사랑을 바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인간부터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인간을 통해 오는 사랑의 맛을 받아들이면 이제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변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웃에게 해야 합니다.
영화 ‘아일라’는 6.25 전쟁 때 한 터키 병사가 부모를 잃은 아이를 아일라(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버지처럼 잘 대해주며 지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지만, 60년 만에 다시 재회하는 실화를 다루었습니다. 아일라는 전쟁통에도 이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산타클로스가 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일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성 니콜라우스 주교의 별칭입니다. 성 니콜라스 주교님도 아이들에게 주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 계심을 느끼기 위해 몰래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환경을 변화시켜주는 일이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행복임을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산타클로스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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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10월 부르클린 한인성당 교우들과 미네와스카 주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퀴즈를 내고 맞히면 상품을 주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고 재미있는 문제였습니다. “허수아비의 아들 이름은? 허수, 계절에 관계없이 사시사철 피는 꽃은? 웃음꽃, 아이 추워의 반대말은? 어른 더워, 사람이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갈 때는? 철들 때, 라면은 라면인데 가장 달콤한 라면은? 그대와 함께라면” 돌아오는 길이 자칫 지루했을 텐데 웃으면서 오니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조재형’이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삼행시도 있었습니다. ‘조재형 신부님은 재미있는 강론으로 형광등처럼 밝게 한다.’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가득한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성탄 선물로, 새해를 시작하는 선물로 제가 아는 시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해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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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8: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1-3)
이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시려 하심이다. 즉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그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적으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게 된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봉헌 예절을 통해 이러한 결심을 함께 봉헌하도록 하며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자.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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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서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거룩하게 선포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는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장 56절에서 중단된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인구 조사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려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7절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사용된 ‘첫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동정 사실을 입증하면서(1,34 참조), 태어난 아들이 천사의 예고를 완성하였다는 사실(1,31 참조)을 보증합니다. 더불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율법의 규정에 따라 하느님의 것으로, 첫째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과 지위를 가짐을 의미합니다.(탈출 13,2; 민수 3,12-13; 18,15-16; 신명 21,15-17 참조)
예수님의 탄생 장소는 화려한 궁전도 부자의 저택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첫아들’이 태어난 곳은 마굿간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비천하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비천한 신분을 대표하는 목동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되었습니다. 하느님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도 가난하고 겸손한 이가 되어 스스로 낮출 때, 구유에 누워 계시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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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빛 안에 모두가 충만한 기쁨이 넘치는 성탄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이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모든 백성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현재를 사는 우리도 특별히 대림 시기를 지내며 차별, 대립과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오실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큰 사건입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 미사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서 2,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이렇게 성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 영혼과 결합 되십니다.”
이처럼 성탄의 의미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도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공동번역성서』 1요한 4,9)”(458항)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코로나19 감염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야기된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만 잘하면, 우리나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세계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서로 도와야 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의 연대와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돌봄의 중요함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전 인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은 공동의 집을 살아가는 우리가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교황님의 말씀처럼 형제애만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코로나19와, 언제 다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사회 지표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어렵게 합니다. 개인주의라는 편안함과, 나누지 않기에 유지되는 풍요로움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키워갑니다.
또한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자신만의 이익,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형제애가 아닌 무관심이 더욱 점철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안위나 소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문화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양극화 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소통 부재로 인한 불만과 화만 가슴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점차 우리는 이웃이 외치는 고통의 소리에 귀를 닫으려 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슬퍼하지도 못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빛은 소수의 몇몇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는 우리에게 열린 마음으로 모두와 함께 이 기쁨을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그 빛이 주는 희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탄을 통해 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깊이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이 성탄에 우리 모두 구세주의 사랑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형제애를 나누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제적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베푸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이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이들에게는 만나고 대화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빛의 자녀다운 행동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안의 한 형제로서 함께 기쁜 성탄을 보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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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권력자의 호적조사령으로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전쟁이 터지고 징집이 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돕니다.
우크라이나, 미얀마 등이 그렇고 여기저기 폭압자의 어둡고 음습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무기 공급이나 승전 소식이 희망이 아닙니다. 한 아기의 탄생, 그렇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아기의 탄생 역시 위대하고 근본적인 희망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숨통을 열고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릴 모든 작은 생명에게 축복이 있길 빕니다.
1.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방법
인간이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먼저 하느님이 인간을 믿었습니다. 갓난아기가 되어 인간의 손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경천동지의 사건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목마른 신체조건을 가지고 시공간에 제약받는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겸손되이 일상을 익히시고, 세상에 나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급기야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마지막엔 빵이 되어 먹히는 존재가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발로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얼마 전, 아이에게 성탄카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탄에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는 매년 성탄이 되면 아기 예수님이 한 명씩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년 성탄을 맞이하지만, 오늘 태어나신 그분, 정작 내 삶 속에 그분의 자리가 없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사랑의 응답이 아닐 것입니다.
2. 구유 안에 담겨있는 신비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마구간’의 가축들이 자신들의 거처를 내어 주었나 봅니다. ‘구유’ 안에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세주 탄생을 알아보는 표시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이도 예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워 있는 아기’가 아니라 ‘눕혀있는 아기’입니다. 운신할 수 없는 아기, 벌써 두 팔 벌려 백성을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조만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아기를 중심으로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의 송아지 가족, 요셉 마리아 그리고 목동들을 상상해 봅니다. 아기는 구유(먹이통)에 눕혀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빵이 되시고 가축들의 먹이로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미일까요? 구유 안에 모든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항)
이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계십니다. 목동들이 밀고 들어간 문은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대표이면서 인류의 대표입니다. 그들이 엎드려 경배드린 것은 가난한 이를 하늘로 들어 올린 행위였습니다.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지이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눕혀진 채 온몸으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4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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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주영 시몬 주교님]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3)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야 예언서 9,5)라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은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성령의 은총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환희의 선물입니까? 해마다 맞는 성탄절은 우리가 내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모든 시련과 고통에 맞설 힘을 예수님 안에서 찾게 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멀리서 온 이방인을 위한 빈자리 하나가 없어 당신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는 지금 꿈을 잃어버린 이들, 가난하고 고립된 삶에 숨이 막히는 이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시어 모든 것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때문에 베들레헴의 구유를 잊고, 수많은 허영의 구유에 우리 자신을 내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가난해 보였지만 사랑으로 충만했던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 구유는 생명의 양식인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그분의 참된 힘과 진정한 자유는 약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을 당신의 가난과 겸손으로 선포하고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여기는 모든 상황에서도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환대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시며 이들을 절대적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느님의 신비, 세상에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하고 따뜻한 관계를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성탄은 불확실함과 두려움의 감정을 새로운 사랑의 힘으로 바꿀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사랑의 힘은 긴장과 갈등 속에서도 스스로 환대의 땅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도 변화합시다. 주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무관심을 떨치고, 동참하고 연대하는 신앙인들로 거듭납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두 팔을 뻗어 아기 예수님을 들어 높이듯이, 병들고 헐벗고 목마르며 갇힌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품에 안읍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작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태한 무관심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귀를 열어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든 이들 안에서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야 예언서 9,1) 하느님 백성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언제나 사랑과 기쁨이, 특별히 우리 안에 오신 큰 빛이 함께하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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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기 밥님 오시네>
루카 2.1-14 (예수님의 탄생,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아기 밥님 오시네>
하늘에서 땅으로
밥그릇에 담기시려
아기 밥님 오시네
아기 밥님이시니
오로지 밥그릇에만
모실 수 있네
밥그릇에
오롯이 담기시니
아기 밥님이시네
주린 이들
든든히 배불리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추운 이들
따뜻하게 데우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흩어진 이들
오순도순 모으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서로 밥이 되라고
기꺼이 먹히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아기 밥님께서
밥그릇에 담기신
영광과 평화의 오늘밤
아기 밥님
모실 수 있도록
깨끗한 빈 밥그릇이 되네
아기 밥님 닮은
맛깔난 밥이 되어
벗들에게 기꺼이 내어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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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을 정성껏 준비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시길 빕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양식을 충만히 채웠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낳아드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성탄의 삶이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환히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 3,16) 성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한번 불러볼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부르십시오. 예수님을 부르는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 박대하였을까요?
결국, 우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차려져도 매일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철없이 구는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구유에 뉘여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어느 성당에서 성탄 축제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다솜이라는 학생은 선천적으로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솜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어떤 역할을 줄까 고민을 했습니다. 마침내 액션도 대사도 아주 적은 배역을 찾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관 주인의 역할이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일행이 여관 문을 두드리면 “방이 없어요!” 하고 한마디 말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솜이도 또박또박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연극의 내용상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 주인과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애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라고 하면 “방이 없어요!” 라고 같은 말을 3번 반복하기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를 부축하며 요셉은 다급히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나왔습니다. 다솜이는 연습한 대로 또박또박 말을 했습니다. “방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 않고 여관 주인에게 매달렸습니다. “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을 줄 수 없나요?" “방이 없어요!”
다솜이는 또박또박 맡은 배역을 잘 해나갔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면 대 성공입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사정합니다.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방을 좀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다솜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요, 제 방으로 오세요!”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대사는 아니었지만, 다솜이의 그 순수한 마음은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원의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구세주이심을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집을 내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를 문전박대했습니다. 세상에 방은 많았지만, 그분이 태어나실 방은 없었습니다. 그 방은 오늘도 여전히 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마구간을 선택하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안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분으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오늘도 방을 내어드리지 못한 어두움, 우리의 이 어둠을 벗겨 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의 어둠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추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볼 수 있는 눈,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곧 그분이 태어나실 안락한 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필리 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누군가의 밥이 되어줍시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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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쁜 오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에이미 커디 교수는 여러 실험을 통해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첫인상을 통해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인상을 좌우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따뜻함과 유능함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따뜻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듯함으로 먼저 신뢰를 얻어야 유능함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첫인상이 좋다, 나쁘다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를 결정합니다. ‘따뜻함’이란 무엇일까요? 배려하고, 인정하고, 지지해주는, 바로 사랑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이 첫인상이 영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을 첫인상이 결정하는 것을 볼 때 ‘따뜻함’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삶은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따뜻함’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 중요한 ‘따뜻함’을 간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를 낮추지 못하고 높이려고만 할 때, 남을 이해하기보다 나만 이해받으려 할 때, 남과 나누기보다 나의 것을 더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내 안에서 ‘따뜻함’이 과연 보일까요?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난방이 제대로 되어 있는 화려한 궁전이 아닌, 가장 초라한 마굿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너무나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탄생에서 ‘따뜻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우리를 지배하러 온 힘 있는 군주가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신 사랑 그 자체이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당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따뜻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 모범을 따라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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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교환에 참여>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이 성탄절에 교회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에 교회는 창조와 구원을 왜 같이 노래합니까?
그것은 창조 때의 신성을 상실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 상실한 우리의 신성을 되찾아 주러 오신 것이 주님의 성탄이고, 이 성탄의 신비에 우리가 참여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 미사 예물 기도도 비슷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오늘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결합되었으니 이 축제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소서.”
이것으로 교회 전례는 성탄 축제가 교환의 신비를 기리는 축제,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교환됨을 기리는 축제임을 거듭 얘기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제가 포도주와 물을 섞을 때 하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
그러므로 이 성탄 축일에 교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성탄 축일에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탄 축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축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환입니까? 그것은 위치 교환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위치에 오시고 우리는 주님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시고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시소와 같이 주님이 내려오시자 우리는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늘로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요, 수렁으로 들어오시어 수렁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교환은 또한 신분 상승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여입니다. 신성에 대한 갈망도 없고, 신성에 참여할 의지가 없으면 그 교환은 물 건너갑니다.
여전히 땅에서 살고만 싶고, 여전히 인간적으로 살고 싶어 하면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구출하지도 못하시고 우리를 인성에서 신성으로 끌어올리지도 못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 교환의 신비에 참여함은 마치 구출하러 온 소방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듯이
불구덩이 속에 있고 수렁에 빠진 우리가 구원자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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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태어나셨다!>
-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
오늘 밤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태어나셨습니다. 화답송 시편이 그대로 우리 기쁜 마음을 대변합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뛰고,
숲속의 나무들로 모두 환호하여라.”
온 우주만물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마침내 오매불망 고대하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마침내 독서기도 성경독서 이사야서 11,1-10절 까지의 유토피아 이상향이 평화의 메시아 예수님 탄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 역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마침내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어둠속에 빛으로, 절망속에 희망으로, 죽음속에 생명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구유 안에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심으로 이제 살맛나는 광야 인생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구원자 계시지 않으면 이 춥고 어두운, 험하고 거친 광야 세상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무심코 입당송을 읽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꼭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여자라 섭섭해하지 마세요. 바꿔 읽어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딸.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러니 주님 성탄은 그대로 우리 하나하나의 탄일이기도 합니다. 구원자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탄생한 우리들입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탄생 축일입니다.
우리 구원자 어디서 탄생하셨습니까? 하늘 높은 곳에서 탄생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중궁궐 고대광실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곳,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탄생하셨습니까?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다윗 고을 여관도 아닌 마구간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실감나는 묘사를 소개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굿간 구유하니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가 연상됩니다. 참으로 지금처럼 강추위 속에 궁색하기 이를데 없는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 탄생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으면 외롭고 쓸쓸한 곳, 춥고 어두운 소외된 이들의 삶터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낮고 응달진 구석진 곳에서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태어나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자 탄생을 체험했습니까?
밤새 침묵과 고독중에 깨어 양 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이 구원자 탄생을 체험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주님의 천사들의 주님 탄생을 알린 이들은 고위 성직자들도, 고매한 신학자들도, 고승들같은 수도자도 아니었습니다.
어둡고 추운 밤, 내내 깨어 양떼를 지키며 주님을 기다리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들이 가난한 목자들에게 또 목자들과 깨어 성탄 밤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목자들은 참으로 놀랐고 이어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탄생을 체험한 목자들이야말로 내적으로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참행복을 그대로 체험한 목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탄생하신 구원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주님의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찬미할 때의 환호가 그 비밀을 알려 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바로 하늘의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평생 소원이자 꿈이 마침내 구원자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원대한 꿈을 들어보세요.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바로 이 모두를 한 몸에 안고 오늘 우리 구원자로 탄생하신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 평화의 꿈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오늘 밤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려온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성탄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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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하느님께서 인간(육)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나셨습니다."(티토 2,11)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러니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의 성탄을 기뻐하고 축하합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 가장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가장 누추한 곳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탄생의 기쁜 소식이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첫 번째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주 깊은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 탄생의 큰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이들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둠과 암흑 속에 있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런 우리들을 부활시키시기 위해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모두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주님의 죽음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역설)이며, 나도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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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19E7-3YOq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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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기다림 뒤에
성탄이 옵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하느님
성탄의 참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너무나 크면
성탄으로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디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우리 삶의 자리에
구원자가
태어나셨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우리가
큰 빛을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는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믿지 않는다면
성장과 부활도
없습니다.
성탄은
하느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시간이
이 땅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살아볼만한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발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부정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소식을 먼저
전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가장 좋은
성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습니다.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이 마음을
내어드립니다.
사람의 본성 안으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심으로
모든 마음은
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성탄이
춥고 아픈
이웃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성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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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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