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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4
[설교묵상, 마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막 2:1-12; 눅 5:17-26)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러 모여든 사람들에게 '도'를, 즉 천국복음을 전하고 계셨다. 모여든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 먹을 것이나 병고침을 받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대중의 필요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천국복음을 먼저 가르치신다.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통상적으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는, 그 병자의 병을 먼저 고치신 후에 선별적으로 죄사함 또는 구원을 선포하신다. 그러나 내가 아는한, 이 중풍병자만큼은 그 고치심의 순서가 반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의 중풍병을 먼저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신다.
만약에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친구들이 병고침을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면,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포는 그들에게 일말의 실망을 안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그들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포에 실망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혹시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중풍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 또는 구원이 제일가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아니, 죄사함은 고사하고 그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베드로가 했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그 중풍병자는 자기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살아계신 주님이신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중풍병자는 아마도 친구들에게 유언과 같이 자기를 예수님께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던것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 믿음이 중풍병자에게만 있었을지라도, 그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셨다. 이는 중풍병자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도 예수님에 대해 동일한 믿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내어 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다주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병고침이 아니라, 마치 삭개오와 같이 그저 구주이신 예수님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뵙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 하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아닐까 싶다. 이로써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자기들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룬데다가 죄사함까지 받았으므로 비록 병고침을 받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으리라 생각된다.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당시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 조차도 죄사함의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신성모독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절대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다. 이는 오로지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야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라도 부정하거나 반인반신을 주장하는 것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가증한 미혹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생각이 악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비한 진리들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부 예수님 보시기에 악한 생각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랜 기간 역사적으로 신앙의 위인들에 의해 정립된 보편적 진리들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죄성에 이끌려 자기의 소견대로 성경을 악하게 해석하게 된다.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 불치병을 고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이다. 그러나 병고침보다 죄사함이 더 근원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의 병을 단 한순간에 고치셨으나, 죄사함을 위한 구속사역은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무한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육신을 입고 30여 년 동안에 걸쳐 이루신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죄사함과 병고침의 사역은 그 무게 자체가 비교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아마도 이를 먼저 알고서 예수님께 나아왔을 것이다.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언가 즉각적인 효력도 없는듯한 죄사함의 막중함을 알지 못한다. 도리어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표적들이 있어야 어느정도 감지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여든 자들의 믿음 없음과 무지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중풍병자와 친구들에게 선포하신 죄사함이 참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다.
중풍병자로서는 그저 참된 구주이신 예수님만 죽기 전에 한 번 뵙는 것이면 되었는데, 죄사함도 받고 생각지도 않았던 중풍병까지도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는 마치 솔로몬이 1천개의 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 부귀영화도 필요없고 단지 백성들을 다스릴 지혜만을 구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더불어 부귀영화를 비롯한 온갖 것을 부차적으로 더 주신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에 비교한다면 얼마나 낮은 수준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쩌면 우리는 그저 예수님으로부터 먹을 것이나 병고침을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과 별반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그 군중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병고침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썰물 빠지듯이 예수님을 떠났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동조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런 군중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병고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죄사함의 권세를 드러내신 것은, 마치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이 성경이라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문자로 기록된 것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눈에 보이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사함을 받은 중생한 신자가, 자기의 거룩한 삶의 열매를 통해 자기의 구원을 입증하고 드러내는 것과 같다.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다른 복음서에 보면 중풍병자는 병고침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감사와 영광돌림은 단지 병고침을 받은 것에 국한 되었을까? 병고침을 받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뵌 것과 죄사함을 받은 것을 자유롭게 감사할 수 있음을 더욱 기뻐하였던 것은 아닐까?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게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더욱 패역하게 되었을 것이다.
p.s.1.혹자는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내리기 위해 타인의 집 지붕을 뜯은 것에 딴지를 걸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그렇게 몰상식하고 경우 없지는 않다고 본다. 아마도 지붕을 뜯을 때 그들은 변상할 것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게다가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뜻하지 않은 큰 은혜를 입고 즐거워 했으므로, 더욱 흔쾌히 지붕 수리 변상을 넉넉히 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나의 추정일 뿐이다.
#20210204
#욥
비록 욥이 극심한 고난을 당한 후에 재물도 새로얻고 아내도 새로얻고(내생각) 자녀들도 새로얻고 수명도 새로 얻었지만, 그렇다고 처음 아내와 자녀들을 잃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것 같지는 않다. 새아내와 자녀들을 보면 더없이 행복하다가도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시험으로 잃은 가족들에 대한 회한과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보다 욥이 새롭게 누린 것들만 바라보고 있다.
#민수기 #Numbers 35:33-34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특별히 살인죄를 땅을 더럽히는 죄로 강조하시는 것 같다. 살인을 저지르면 피살자는 피를 흘리게 되고 그 피로 인해 땅이 더러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였을 때 아벨의 흘린 피가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마찬가지로 모든 피살자의 피가 부르짖는 억울한 호소를 들으시고 피의 호소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땅이 더러운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을 더럽게 하는 호소는 살인자를 죽여야만이 그치게 된다. 살인죄는 단지 십계명 중 단독적인 한 계명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계명과도 맞물려있다. 당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던 이방 족속들은 대부분 인신제사를 기본으로 당연하게 바쳤으므로 나중에 이를 본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1-4계명과 더불어 자기 자녀를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성경에는 자녀가 직접적으로 부모를 죽인 사례는 나오지 않지만 압살롬처럼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 한 패역한 자는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바치려 한 것이 진정이었듯이, 압살롬도 비록 다윗을 죽이지 못했더라도 5계명과 더불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또한 현대에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들 중에 특별히 더 패역부도한 자들은 스스럼없이 부모를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하몰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했다가 두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에게 살해되었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은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했다가 오라비 압살롬에게 살해되었다.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다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살해한다. 이외에도 불륜이나 치정 등의 사안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목사는 자기 교회 유부녀 교인과 불륜을 저지르는 중에 남편에게 발각되자 에어컨 실외기에 매달려있다가 떨어져 죽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에어 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 년 전에 내가 다니는 교회의 중고등부 담당 목사가 담당 부서 고3 학생과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어오다가 그 학생이 성인이 되어 2,3년 후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도적질과 강도질에 의한 살인은 너무나 평범해졌고, 거짓 증언에 의한 살인은 법정에서 주로 발생하며, 탐심으로 인한 살인은 부귀영화를 차지하기 위해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은 모든 계명과 직간접적으로 맞물려 있으므로, 어느 한 계명을 거치는 것은 결국 살인죄와도 연관이 되므로 결국에는 여호와의 땅,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피로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살인자를 죽여야만 피살자의 피의 호소를 그치게 하고 더러워진 땅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죄에는 동일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과 이는 비단 신앙뿐만 아니라 사회법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살인죄에 대해서는 사형으로 처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위 인권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피살자 또는 피해자들의 인권보다는 살인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쪽으로 법이 구성되어 도리어 역차별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로움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능가하지 못하듯이, 인권과 문명의 발달이 하나님의 공의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여전히 자기들이 가진 공권력으로 사법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버젓이 뻔뻔하게 저지르고 있는 불의한 사법부와 검찰과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들과 언론들과 목사들은 하나님의 소유인 대한민국이라는 영토를 억울한 피살자들의 피로 더럽히고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공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피로써 대가를 치르게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코로나라는 사상 초유의 엄중한 시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위 종교와 예배의 권리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대면예배와 집회 등의 모임을 함으로써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활동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인질로 삼아 해치는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런 교회들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세속 권세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살인죄를 동시에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범위를 더욱 확장하셔서 이웃을 마음에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라 하셨다. 그래서 이웃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자는 지옥불에 떨어지게 된다고 하셨다. 사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사랑이며 거짓 사랑이라 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국가 지도자를 비방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어떤 이단에 빠진 적그리스도 목사는 반정부 국가전복을 꾀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 교회는 억울하게 죽은 3백여 명의 피의 호소는 외면한 채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려는 악한 이전 정부를 감싸고 피살자들의 가족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을수도 없는 험악한 증오의 저주와 비방을 서슴지 않아왔다.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자기가 동생이나 지키는 자냐며 항변하는 가인을 심판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그 3백여 명의 피의 호소에 대해서는 한국 교회에 어떤 혹독한 심판을 내리실지 두려워 해야 함이 마땅하거늘, 한국 교회는 여전히 이에 대해서는 악령에 미혹된 사울 왕 마냥 선악 구분을 못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 벌어진 목사의 간음과 교인의 자살사건을 철저히 투명하게 드러내어 해결하지도, 통렬하게 회개하지도 않고, 이를 지적하고 드러내려는 성도들은 교회를 힘들게 하고 분열시키는 자라 비방하며, 교회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어떻게든 묻어두고 덮어두려 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외부적인 변화로 별 문제없어 보인다 하여도 교회의 주인이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러워진 교회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교회가 먼저 회개와 배상으로 더러움을 청소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철장을 휘둘러 정결하게 하실 것인데,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내외적으로 큰 환난일 수 밖에 없다.
#민수기 #Numbers 36:1-13
시집 간 여자의 유산
1 요셉 자손의 종족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이 나아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지휘관들 앞에 말하여
2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 주에게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제비 뽑아 그 기업의 땅을 주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우리 주에게 명령하사 우리 형제 슬로브핫의 기업을 그의 딸들에게 주게 하셨은즉
3 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들의 남자들의 아내가 되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들이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가 제비 뽑은 기업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요
4 이스라엘 자손의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삭감되리이다
이전에 슬로브핫의 딸들은 자기들에게 남자 형제가 없음으로 인해서 아버지 슬로브핫이 받을 기업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여 모세에게 이 사연을 건의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받은 모세로부터 아버지의 기업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 때에는 아직 요단을 건너기까지 적지 않는 날들이 남아있었으므로 슬로브핫의 딸들은 수 년 후에 가나안에서 받을 기업을 믿음으로 미리 바라보고 그런 요청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전히 많은 날들이 남은데다가, 그 사안을 결정하고 처리하느라 여러가지 발생 가능한 상황까지 세세하게 따져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제 곧 있으면 수 일 내에 가나안 땅에 진입할 것이 눈에 보이자 슬로브핫이 속한 길르앗 종족의 수령들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기업을 받고 다른 지파 남자들과 결혼하게 되면 지파의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되었고 손실을 막고자 하여 모세와 지휘관들에게 해결책을 문의하였다. 길르앗 수령들이 이를 문의한 것은 슬로브핫의 딸들을 억제하려거나 자기들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령들은 슬로브핫의 딸들과는 그저 같은 지파 같은 종족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아무런 점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이 설령 다른 지파 남자들과 결혼해서 기업이 줄어든다 해도 개인적인 손해는 전혀 없다. 따라서 수령들의 우려한 바는 지파의 유익을 위한 공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찌보면 수령들의 의견은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는 그리 달갑지는 않은 것이었을지라도, 수령들은 개인의 소유와 자유라는 가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존속 가치를 우선하였음을 볼 수 있다.
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6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7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8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모두 자기 조상 지파의 종족되는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전하게 되어
9 그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
길르앗 수령들의 의견을 들은 모세는 이제 곧 있으면 모든 사역과 생명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어도 그에 대한 판단을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전가하지 않고 직접 여호와께 여쭈어 처리를 한다. 사역과 생명을 유지시키거나 멈추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께 달려있음을 암시한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로부터 받으신 길르앗 수령들의 의견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인정하시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내려주신다. 여호와께서 왜 처음부터 슬로브핫의 딸들의 경우처럼 아들이 없을 경우 기업 상속 규례나 이번처럼 지파의 기업을 유지하는 규례를 알려주시지 않고 그 때 그 때 백성들이 문의하거나 요청할때 알려주시는지 반문하거나 의문을 품는 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않으셨다가 그제서야 방안을 마련해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상황과 방안과 규례를 다 예정하셨어도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겨두심으로써 백성들이 이미 받은 율법들과 규례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지성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상황을 상정하고 해결해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슬로브핫의 딸들이 문의했을 때나 길르앗 수령들이 의견을 내러 왔을 때 여호와께서는 내심 흡족해 하시지 않으셨을까 싶다. 이처럼 슬로브핫의 딸들이나 길르앗 수령들이 율법과 규례를 기반으로 해서 발생 가능한 문제점들을 예상하고 도출해서 모세와 지휘관들에게 알리고 건의한 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베뢰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과연 그러한가 깊게 따져보고 묵상했듯이, 신자들도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공부하거나 경건서적을 읽을 때 그것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가 부단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비교대조 해보다가 걸리거나 의문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문의하여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또한 교회 내의 어떤 결정사항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과연 성경의 기준과 일반은총으로 허락하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에 합당한지 따져보고 문제가 예상된다면 적극적으로 건의하여야 한다.
10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11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들의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니라
12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
13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례니라
어쩌면 슬로브핫의 딸들로서는 자기들에 대한 길르앗 수령들의 문제제기나 여호와께서 내리신 결정이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자유가 제한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자 형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나안 정복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나 대가 없이 같은 지파의 남자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거저 기업을 받는 혜택을 가지게 된데다가, 지파 간의 활발한 교류와 이동이 있지 않는 이상 다른 지파의 남자들을 만나 결혼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여호와의 결정에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이고 순종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녀들은 단지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모두가 숙부의 아들들과 결혼함으로써 규례대로 이행하지 않을만한 어떠한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비단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에도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남자 형제가 없어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게 된 모든 여인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거저 받게 될 기업들의 가치에 비하면 그에 따른 일신의 제약은 너무나도 하찮고 가벼운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누군가가 자기는 기업을 포기하고 연애와 결혼의 자유를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아마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여자라고 비웃음을 당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지라고 하시는데 이는 세속의 멍에에 비해서도 쉽고 가벼운 것일 뿐더러, 주님의 멍에를 지는 불편함과 손해에 비해서 그런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원한 상급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아무리 좀고 협착한 주님의 복음의 길을 가다가 여러 환난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늘의 상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권면한다. 신자들이 지는 예수님의 멍에와 복음의 좁고 협착한 길은 단지 슬로브핫의 딸들이 받은 타 지파와의 혼인금지 같은 있으나마나 한 제약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원무궁한 기업을 상속받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이나 부귀영화나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마치 거저 받을 기업을 포기하고 연애와 결혼의 자유라는 하찮은 것을 선택한 어리석은 여자처럼, 이 땅에서 잠시 누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하찮은 것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완전히 버려버리는 어리석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적지 않다. 저들은 그저 한 시대 한 지역에 세워진 눈에 보이는 교회를 차지하기 위해서 온갖 불의한 권모술수를 쓰곤 한다. 어떤 자들은 강대국의 정치와 경제이념에 주님과 복음을 팔아버리기도 한다. 주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진리임에도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은 복음을 교묘히 왜곡해서 특정 정치경제체제만이 복음적이라는 이단 사상을 전파한다. 이렇게 이념에 사로잡힌 자들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3백여 명이나 되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어도 전혀 일말의 안타까움도 내비치지 않고 도리어 마귀적인 주적으로 몰아세운다. 그렇게 주님과 복음을 저버린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미혹에 팔아넘겨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영원한 멸망을 기업으로 받게 될 뿐이다.
#20220204
#요한계시록 #Revelation 1:11-14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敎會에 보내라 하시기로
which said: "Write on a scroll what you see and send it to the seven churches: to Ephesus, Smyrna, Pergamum, Thyatira, Sardis, Philadelphia and Laodicea."
dicentis : Quod vides, scribe in libro : et mitte septem ecclesiis, quæ sunt in Asia, Epheso, et Smyrnæ, et Pergamo, et Thyatiræ, et Sardis, et Philadelphiæ, et Laodiciæ.
λεγούσης Ὃ βλέπεις γράψον εἰς βιβλίον καὶ πέμψον ταῖς ἑπτὰ ἐκκλησίαις, εἰς Ἔφεσον καὶ εἰς Σμύρναν καὶ εἰς Πέργαμον καὶ εἰς Θυάτειρα καὶ εἰς Σάρδεις καὶ εἰς Φιλαδελφίαν καὶ εἰς Λαοδικίαν.
주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주신 명령은 요한 사도가 보는 모든 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그것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보내라 하는 것이었다. 요한 사도가 섬으로 유배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기 때문인데도 요한 사도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기록하고 일곱 교회에 보내어 주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배 된 섬에는 두루마리나 펜이나 잉크 같은 기록매체를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나 요한 사도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그것들을 마련해야 했다. 또한 요한 사도는 육지에서 동떨어진 외딴 섬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두루마리에 전부 기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기록매체와 전달 방식을 마련하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을 핑계로 주님의 명령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요한 사도는 기록매체와 전달 방식을 모두 주님께로부터 제공받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은 그가 기록한 주님의 마지막 계시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音聲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金 촛臺를 보았는데
I turned around to see the voice that was speaking to me. And when I turned I saw seven golden lampstands,
Et conversus sum ut viderem vocem, quæ loquebatur mecum : et conversus vidi septem candelabra aurea :
Καὶ ἐπέστρεψα βλέπειν τὴν φωνὴν ἥτις ἐλάλει μετ’ ἐμοῦ· καὶ ἐπιστρέψας εἶδον ἑπτὰ λυχνίας χρυσᾶς,
모세는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성소 제작 규례에서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순금 등잔대를 만들 것을 지시한다. 구약의 스가랴서 4장에는 기름 그릇과 그 위의 일곱 관과 일곱 등잔으로 구성된 순금 등잔대를 가리켜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 순금 등잔대 좌우편에서 등잔대에 감람유를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는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라 칭한다. 요한 사도가 목격한 일곱 금 촛대는 아마도 온 세상을 샅샅이 감찰하시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능력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여 아시는 성령 하나님 외에는 없으므로 이는 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13 촛臺 사이에 人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金띠를 띠고
and among the lampstands was someone like a son of man, dressed in a robe reaching down to his feet and with a golden sash around his chest.
et in medio septem candelabrorum aureorum, similem Filio hominis vestitum podere, et præcinctum ad mamillas zona aurea :
καὶ ἐν μέσῳ τῶν λυχνιῶν ὅμοιον υἱὸν ἀνθρώπου, ἐνδεδυμένον ποδήρη καὶ περιεζωσμένον πρὸς τοῖς μαστοῖς ζώνην χρυσᾶν·
성령을 상징하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도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령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다니엘은 바사 왕 고레스 3년 첫째 달 24일에 힛데겔 강가에서 세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우바스 정금 띠를 두른 한 사람을 목격하는데 이는 요한 사도가 목격한 인자의 모습과 동일하므로 다니엘이 목격한 사람은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가 있다. 첫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가슴에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보석으로 장식된 흉패를 찼는데 이는 요한 사도가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슴에 두르신 금띠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므로 열두 지파만을 상징하는 열두 보석의 흉패보다 더 순전하고 완전한 황금 띠를 두르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품으시는 것이다.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羊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The hair on his head was white like wool, as white as snow, and his eyes were like blazing fire.
caput autem ejus, et capilli erant candidi tamquam lana alba, et tamquam nix, et oculi ejus tamquam flamma ignis :
ἡ δὲ κεφαλὴ αὐτοῦ καὶ αἱ τρίχες λευκαὶ ὡς ἔριον λευκόν ὡς χιών, καὶ οἱ ὀφθαλμοὶ αὐτοῦ ὡς φλὸξ πυρός,
선지자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목격한 인자의 모습에서 그분의 눈이 횃불 같다고 하였고, 그보다 수년 전에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네 마리 짐승의 환상 중에서 목격한 왕좌에 앉으신 옛적부터 계신 이의 머리털이 깨끗한 양의 털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요한 사도가 목격한 주님의 모습과 동일하다. 이 땅에 계셨을 때의 예수님의 모습은 그 머리색은 사람들과 같았을 것이고 그 눈은 고된 사역에 피곤에 지쳐 계셨을 것이지만 모든 지상 사역을 완수하시고 이전처럼 다시 하늘에 오르신 후에는 순백의 머리털과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셨다. 백발은 공경받는 노인의 인품과 연륜을 상징하므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순수한 백발이시라는 것은 사람으로서도 그분의 연한은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처럼 사람들이 친근하게 그분의 눈을 보면서 상대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과 주님의 눈은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으시며 우리조차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00204 #창세기 #Genesis 30장.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드디어 라헬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라헬은 외모만큼은 자기 고모 리브가를 닮았으나 성품은 리브가의 발치에도 따라가지 못했다. 리브가는 20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을 때 남편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였으나 라헬은 남편 야곱에게 그 책임과 원망을 돌리며 죽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아마도 라헬은 이전부터 자기가 언니 레아보다 외모가 출중한 것을 가지고 알게 모르게 레아를 무시해 왔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보다 못난 언니가 자기 남편을 먼저 가로채고 자식도 네 명이나 낳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결국 라헬은 야곱의 전폭적인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자기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는 악수를 두게 된다. 만약에 라헬의 남편이 야곱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면 아무리 라헬이 탁월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자식도 낳지 못하고 남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여인을 아내로서 마냥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헬이 여종 빌하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를 얻게 되면서 하나님을 언급한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감사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육적인 소원이 왜곡된 형식으러 이루어진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라헬처럼 신앙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추구하고 포장하는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쓰임받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실상 속마음은 이를 통해서 돈을 더 잘 벌고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며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살핀다는 미명하에 투명하지 못한 불의를 저지르고 은폐하며 묵인한다. 담임목사는 교회에서 발생한 사고처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부교역자들에게 떠넘기며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린다. 교회 재정이 불의하게 늘어나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건축을 위한 법적 절차가 무시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포장한다. 그러다 교회가 조금만 힘들어져도 남편을 원망하는 라헬처럼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온갖 불평과 원망을 하며 심지어는 교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헬이 남편 야곱의 사랑에 만족해야 했던 것처럼 교회와 신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들에 탐욕을 부리며 불평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변함 없으신 사랑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빌하의 두 아들 단과 납달리는 그 후손들이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그리 탁월한 역할도 영향도 없었다. 특히나 단 지파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모든 지파들 중에서 가장 늦었으며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우상숭배와 약탈을 일삼았다. 그나마 단 지파에서는 삼손이 사사로 20년 동안 다스리기는 했으나 삼손은 모든 사사들 중에서 날 때부터 나실인일 정도로 성령의 은사를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모든 사사들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다. 더욱이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하늘 성전의 열 두 지파에서 단 지파만을 언급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성경 해석가들은 공통적으로 단 지파가 가룟 유다처럼 유일하게 배교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단과 그 후손들이 성경에서 부끄러움의 대명사가 된 이유 중에는 아마도 부당한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것과 어미 빌하의 근친상간이라는 추잡한 음란함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불법적으로 얻은 것의 비참한 결과에 대한 예시가 종종 나오는데, 롯의 두 딸이 아버지 롯과 간음하여 낳은 모압과 암몬 족속이 그렇고 사라가 자기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낳게 한 이스마엘이 그렇고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들이 그렇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것은 결국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라헬은 자기가 낳지도 않고 여종 빌하를 통해서 두 명의 아들만을 얻었으면서도 자기 몸으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언니 레아와 경쟁하여 크게 이겼다며 극강의 허세를 부린다. 이는 그만큼 라헬의 자존감이 얼마나 알량하고 하찮은 것에 불과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혼 전까지는 라헬이 자기 미모로 언니 레아를 업신여겨 왔더라도 이제는 그런 언니에게 자식 경쟁에서 밀려 허세나 부리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제 라헬에게는 나이가 들면 시들뿐인 미모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리고 단과 납달리에 대한 근거없는 자부심마저도 레아의 반격에 뭉개지게 된다.
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레아는 라헬의 언니였어도 그동안 라헬과 비교되는 열등감과 남편 야곱의 무심함이 쌓여서 그런지 언니로서의 성품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기가 낳은 아들들에 만족하지 못하여 동생 라헬이 하는 짓거리를 그대로 똑같이 하여 맞불을 놓아 라헬을 짓밟아 버린다. 그런 진흙탕 개싸움으로 동생은 이겨먹었을지 몰라도 언니라는 연장자로서의 품격은 진흙탕에 버려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연장자에게는 연소자들보다 더 나은 선한 성품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연소자가 도발하고 조롱하여도 그와 동일하게 대응하면 결국 자기 이름만 더럽히게 된다. 소위 '나잇값'을 하는 것도 연장자의 의무와 책임이다.
타인보다도 못한 첨예한 자매 갈등은 계속 이어진다.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어느 날 들에서 산삼처럼 귀한 합환채라는 약용식물을 구해다가 어미 레아에게 드리자 라헬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서는 염치도 없이 그 합환채를 달라고 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니 레아가 자기에게 빚진 것이 있다는 의미로 빚쟁이 마냥 합환채로 갚으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레아는 벌컥 화를 내며 동생 라헬에게 자기 남편을 빼앗은 주제에 자기 아들이 구해준 합환채까지 뺏으려 하냐며 독기서린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레아가 야곱을 자기 남편이라고 한 답변이 잘못된 이유는 물론 자기가 야곱의 법적 아내가 맞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라반의 속임수로 가로챈 것이고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여전히 야곱은 자기보다 동생 라헬을 진정한 아내라고 여기고 모든 사랑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레아는 여전히 야곱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라헬은 마치 언니에게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합환채의 댓가로 언니에게 남편 야곱과 동침하도록 허락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레아는 너무도 비참하게도 라헬의 그 터무니 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자기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게다가 그녀들은 정작 남편 야곱의 의사는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거래함으로써 마땅히 존중하고 순종해야 할 남편을 마치 창기처럼 취급한 죄를 저질렀다.
이로 말미암아 야곱은 하루종일 힘겹게 양떼를 돌보고 집에 돌아가 사랑하는 라헬과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기대가 무참히 좌절되고 아무런 애정도 없는 레아와 동침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야곱이 이 상황을 불평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형 에서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아내들에게 이리자리 시달리는 고달픈 생활 또한 야곱이 받아야 할 죄의 댓가 중 하나이다.
레아가 낳은 딸 디나는 후에 세겜 족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