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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란쌤 문화교육연구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웃음
+ 백지의 꿈
새봄의 개나리향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씀바귀 위에 내리는 이슬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처음 가 본 길처럼 설레는 마음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유리창에 부딪친 그날의 첫 햇빛 말고는
아무 것도 내 위에 쓰지 말라
어떤 화염에도 타지 않는 금결의 말 말고는
아물면 보석이 되는 상처 말고는
잊혀져도 맹서로 남는 사랑 말고는
날아가도 꽃이 되는 씨앗 말고는
(이기철·시인 )
+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들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의 여울은......
(도종환·시인)
+ 내가 가장 아프단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았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유안진·시인)
+ 나는 아직도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 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박재삼·시인)
+ 나는 순수한가
찬 새벽
고요한 묵상의 시간
나직이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박노해·시인-)
+ 세상의 중심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소요의 산 어디쯤에
뉘엿뉘엿 자리잡은 비탈진 나무들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
아니면 너무 멀리 에둘러 돌아 왔다
이빨 빠진 늙은 꽃들 웃는다
중심을 향하여 뿌리를 감추고
알록달록 나들이 왔다고
터진 발을 감춘다
(나호열·시인)
+ 무지렁이
무지렁이 . 무지렁이 . 무지렁이
어디에 쓸까 무엇에 쓸까
쓸만한 것 꺼내어 볼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무지렁이 . 무지렁이 . 무지렁이
없네 . 없네 . 없네 .
내 속에 있는 것 모두 쓴 물뿐 쓴 뿌리뿐
언제 다 비워 낼까 언제 다 뽑아 낼까
무지렁이 무지렁이 . 무지렁이
퍼내면 다시 고이고
뽑고 돌아서면 다시 돋아나는
내 안의 쓰디쓴 근원적인 독(毒)이여
(송해월·시인)
+ 수배전단을 보고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生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윤성택·시인 -)
+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장석남·시인 )
+ 나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김광규·시인)
+ 아무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신현림)
+ 모기장 동물원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
형광등 불빛 따라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
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
책을 덮고 생각중이다
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
모기장 안쪽에 있는가
바깥쪽에 있는가
(안도현·시인)
+ 녹슨 못을 보았다. 나는
길을 가다 문득
녹슨 못 하나 보았다
얼마나 거기 오래 있었을까
벌겋게 시간 속을 삭고 있다. 허리는 꺾인 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게다
손바닥에 올려본 못은 세월의 부스러기들
비늘처럼 털어 내며
허리는 이내 부러질 듯하다
순간 나도 온몸의 살들 떨어져나가고
녹슨 못처럼 뼈만 앙상히 남는다
언젠가 저 못처럼 뼈마저 삭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을
허우적거리며 오늘도 바삐
가고 있다
(송진환·시인)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마를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씩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시인)
먼 길
이재무
이 세상 가장 먼 길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몸 속 유숙했던 그 많은,
허황된 것들로
때로 황홀했고 때로 괴로웠다
어는 날 문득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날
길의 초입에 서서 나는 또,
태어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분홍빛 설레임과 푸른 두려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괜시리
주먹 폈다 쥐었다 하고 있을 것이다
+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세상은 가고 있다는 것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 목련이 지면서
진달래 피고
진달래 지면서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면서
잎이 푸르고
잎이 지면서
내가 지고 있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최영희·시인)
+ 어떤 기쁨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
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어디에서
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
울지 마라
(고은·시인 )
그건 사리가 아니다 -목욕탕에서
여름 한철 목욕탕은 한가하다
이렇게 조용한 절간이 어디 있나 하고
거울 앞에 앉아 독경을 하듯
벌거벗은 나를 읽는다
저 입이 먹어치운 양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무 실적이 없는 배꼽
그 밑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음모와 고환
비뚤비뚤 걸어온 두 다리
이렇게 나를 발끝까지 읽어가다가
젖은 수건으로 문지른다
사흘 전에도 이렇게 문질렀는데
또 때가 밀린다
먹고 때만 만드는 나의 육신에
목욕탕 유언을 심는다
'죽어서 사리가 한 사발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고
다 버려라
그건 사리가 아니라 때의 응고다'
(이생진·시인)
허공에 매달려보다
곶감 먹다가 허공을 생각한다
우리 일생의 한 자락도
이렇게 달콤한 육질로 남을 수 있을까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
기다려온 만큼 빛깔 이리 고운 것인가
맨몸으로 빈 가지에 낭창거리더니,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 벗어나
누군가의 손길에 이끌려
또다시 허공에 몸을 다는 시간
너를 위한 나의 기다림도
이와 같이 익어갈 수 없는 것일까
내가 너에게 건네는 말들도
이처럼 고운 빛깔일 수 없는 것일까
곶감 먹다가 허공을 바라본다
공중에 나를 매달아본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는 빈 손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진다
(김완하·시인)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국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타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잘 보고 들어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숲 그늘
작은 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일이니 그만 두라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시키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일본 시인이며 농촌운동가)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입니까?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입니까?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입니까?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입니까?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바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입니까?
이것이 나입니까? 저것이 나입니까?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입니까?
둘 다입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를 잘하는 겁쟁이입니까?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디트리히 본회퍼·독일의 목사이며 신학자)
+ 작별
내 얼굴을 들이대며
무엇이 되고 싶어했다
지난 30년 동안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 거울이었다 항상
그 거울을 저쪽에 아주아주 던져버렸다
쨍그랑!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은·시인)
+ 나는 너무 무겁다
소금쟁이 한 마리가
물 위를 걸어다닌다
소금쟁이 두 마리가
물 위를 뛰어다닌다
소금쟁이 여러 마리가
물 위에서 춤을 춘다
나는 하나의 늪도
건너지 못했다
(양선희·시인 )
+ 다시 절벽으로
내가 시시해졌다
부동산, 재테크, 조루증 상담
이런 광고들에 눈이 쏠린다
아찔한 계룡산 능선이나
북한산 바위 절벽
거기 매달려 있는 소나무들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연을 믿다니
나는 분명히 타락했다
이렇게 쉽게 순결이 구겨지다니
절벽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공광규·시인)
+ 나의 존재
바람이 집이 없듯이
구름이 거처가 없듯이
나는 바람에 밀려가는
집 없는 구름이옵니다
나뭇가지에 간혹 의지한다 해도
바람이 불면 작별을 해야 할
덧없는 구름이올시다
(조병화·시인)
+ 나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
아직 나 자신인가?
아니, 고쳐 물어보자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
나 자신인가?
(황인숙·시인 )
+ 절필(絶筆)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이근배·시인)
+ 졸개
이제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일도 시들해졌고
누군가를 끝없이 욕하는 일도 신물이 난지 오래,
제발 혼자가 되어야 할 일이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 나무 아래 한 그루 나무로
외로워지고
하늘 아래 또 하나 하늘로 가득해지고
먼지 날리는 자갈길 위에 오로지 고달픈
노새가 되어 고달플 일이로다
부디 누군가의 졸개가 될 일이 아니고
자기의 졸개가 한번 되어볼 일이다
정이나 졸개가 되려면 바람의 졸개가 되고
똘만이가 되려면 구름의 똘만이가 되거라
나무 나무, 나무의 진짜 심복이나 되거라.
(나태주·시인)
+ 다시 나만 남았다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이생진·시인)
+ 나의 쳇바퀴·2
쳇바퀴가 돈다. 내가 돌리는
이 쳇바퀴는 잘도 돌아가지만
돌고 돌아도 제자리다. 이른 아침부터
돌리고, 자정 넘어서도 빌빌거리지만
헛바퀴다. 도대체 무얼 돌렸는지,
왜 돌리고 있는지. 여전히
안개 속, 어쩔 수 없는 미궁이다.
해가 지고, 달과 별들이 떴다가 조는 사이
동이 트고, 해가 떴다. 강물은 엎드려
아래로 가며 햇살을 등 뒤로 받았다.
그저께는 쳇바퀴를 빨리 돌리다가
안 돌리느니만 못했고, 오늘은
새벽까지 빌빌대다 그 바퀴에 쓰러진 채
벼랑에서 떨어졌다. 깊이 모를 허공에
매달리고, 먼지처럼 떠돌았다. 이제야
간신히 꿈을 깨어나도,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는지, 물구나무서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내가 쳇바퀴를 돌리는 게 아니라
쳇바퀴가 나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태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