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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토론방 스크랩 박정희와 문세광 중 누가 육영수를 죽였을까?
민족끼리 추천 1 조회 87 11.11.13 10:5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육영수, 문세광과 박정희중 누가 암살했을까?


1974년 12월20일 서울구치소, 문세광이라는 한 젊은 청년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죄목은 육영수 암살범 이었다. 문세광은 1974년 8월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8.15 광복 기념식에서 육영수를 암살하였다. 당시의 수사발표-재판은 모두 이렇게 문세광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또한 국민 대다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건은 숱한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사건발생 16년이 지난 1989년 8월,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수사관의 양심선언으로 촉발 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이건우"씨 였고 사건당시의 직책은 서울시경찰국 감식계장(경감) 이었다. 이건우씨는 1983년 6월30일 61세로 정년퇴직을 했다. 이건우씨의 주장은 그야말로 폭탄선언 이었다.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죽은것이 아니다, 육영수의 암살범은 따로 있다"
당시 이건우씨의 양심선언은 대단한 파장을 몰고 왔는데, 그렇다면 그 진실을 추적해 보자.


먼저 이건우씨가 내세운 첫번째 근거는 문세광의 총기소지였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대한 행사에 최고의 보안이 요구되는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당연히 출입구에는 금속탐지기가 작동되고 있고, 행사장엔 관할 경찰은 물론 청와대 경호실-중앙정보부 등 관계기관의 요원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문세광은 행사장에 무려 23분이나 늦게 입장했다. 행사장 입장이 당시 오전 9시50분에 완료됐는데 문세광은 그보다 무려 23분이나 늦은 10시13분에 입장한 것이다. 더구나 특별한 검문도 없었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문세광은 초청받은 인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초대받지 않은 일본대사관 직원이 한국의 광복 기념식에 그것도 23분이나 늦게 총기를 소지하고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고 입장한 것이다.


두번째로 총알의 발사탄수이다.

당시 재판의 판결문을 보면, 제1탄은 범인 대퇴부, 제2탄은 연단좌측, 제3탄은 불발, 제4탄은 육영수, 제5탄은 연단 뒷쪽의 국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장검증을 했던 이건우씨는 제5탄은 문세광의 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건우씨가 확인한 바로는 "제1탄은 오발, 제2탄은 연단, 제3탄은 태극기, 제4탄은 천장, 그리고 마지막 제5탄은 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우씨의 주장대로라면, 그날 문세광은 육영수를 저격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검사 김일두씨도 문세광이 사용한 총은 미제 스미신 5연발로, 범행때 4발만 쏘고 나머지 한발은 장전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발표하였었다. 그런데 사건직후 당시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씨는 제1탄은 불발, 제2탄은 연단, 제3탄은 육영수 저격이라고 발표했었다. 이렇게 본다면 청와대-검찰-경찰-법원의 발표가 모두 다르다는 얘기가 된다.


세번째로 이건우씨의 증언은 결정적이다

그날 문세광이 소지한 권총이 미제 스미신 5연발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날 문세광은 모두 4발을 쏘았는데, 네발의 탄흔은 확인되었으나 나머지 한발은 총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문세광은 육영수를 저격할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다시말해서 "육영수가 맞은 실탄은 문세광의 권총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현장보존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건 직후 구성된 이건우씨를 포함한 수사팀은 다음날 바로 현장 확인차 국립극장에 갔다. 그러나 탄흔은 찾았지만 탄두를 찾는데는 실패했다. 탄흔이 있는데, 어째서 탄두가 없는 것일까? 다음은 당시 국립극장 소도구 주임의 증언이다.

"어젯밤(8월15일)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이 자정 가까운 시간에 불쑥 나타나서 극장안을 샅샅이 쓸어갔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 청와대 경호실은 수사본부의 현장검증이 실시되기도 전에 현장보존의 원칙을 깨뜨렸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사건을 맡았던 수사본부는 탄두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다. 육영수를 관통한 탄두를 확인한다면 범인소재는 명확하게 드러날텐데, 청와대 경호실은 왜 탄두를 제거해 갔을까? 아마도 이는 영원한 의문점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섯번째는 당시 문세광이 투숙한 호텔과 그가 이용한 승용차이다.

사건 당시 문세광은 조선호텔에 묵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이용한 차량은 [서울2바 1091]으로 검은색 포드 20M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포드사의 승용차라면 상당히 고급한 차이다. 그런데 특별한 귀빈도 아닌 문세광은 어떻게 이런차를 몰수 있었을까?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차는 차적조회에서 등록되지 않은 위장번호로 확인 되었다는 것이다.


여섯번째로 "비표"이다

원래 비표란 초청을 받은 하객이 식장에 들어갈때 패용하는 일종의 통행증이다. 당시 기념식장의 하객들에게는 비표로 화장(花章)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문세광은 이 화장이 없었다.


일곱번째로 육영수가 입은 총상의 위치이다

이는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한데, 사건재연의 내용을 보면, 육영수는 문세광이 달려나가면서 발사한 총에 맞게되는데, 그렇다면 총상의 위치는 정면 혹은 오른쪽의 어느 부위가 되어야 이치에 맞다. 그러나 이건우씨가 육영수의 치료를 맡았던 서울대 의대부속병원에서 확인한 바로는 "총탄이 왼쪽 뇌정맥을 관통"했다는 것이었다.


여덟번째로 현장검증이다

어찌된 일인지 문세광은 현장검증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당국은 대역을 시켰다)


어쨋든 문세광은 이러한 의혹에는 상관없이 1974년 12월20일 오전 7시30분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전격 처형 되었다. 이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건우씨의 양심선언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검사 김일두씨는 문세광이 진범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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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11.13 10:56

    첫댓글 저는 SBS그것이 알고 있다에서 다루었던 문세광-육영수 살해 사건을 보고 육영수 살해는 박정희의 짓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게됬습니다.

  • 11.11.13 21:13

    그럼, 박정희가 엽색행각을 들키니까, 아주 치밀하게 .....18 년이나 해먹은 박정희에 치부는 많을겁니다.특히 기집질은 밝혀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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