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행복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1) 남에게 기대하지 않기.
2) 나에게 기대하지 않기.
3) 작은 보폭으로 노력하기.
남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힘든 일의 7~80%는 남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게 그러면 안 되지. 부모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것 아냐?’ 등등 남에게 기대하는 척도에서 부족함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아예 기대하지 않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게도 해당합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도 결국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 실패를 반복하는 것,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모두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나’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커다란 성공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커다란 노력이 곧 커다란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요. 그리고 큰 성공이 반드시 큰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도 않습니다. 자그마한 노력으로 이룬 자그마한 성취들이 모여서 행복을 만들어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특히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에 맞게 생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장 큰 행복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요? 혹시 남에게 계속 기대하고, 나에게 기대하고, 무엇보다 커다란 성공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속량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1,28). 그래서 세속적인 만족을 가져오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대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주님 앞에 바로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4.36 참조)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중요한데,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엉뚱한 행복만을 찾으면서, 잘못된 기도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대림 제1주일로, 교회력으로는 새해에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올 한해, 주님과 함께 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은 당신이 꿈꾸는 삶을 사는 것이다(오프라 윈프리).
우리의 속량이 가까웠습니다.
노년에도 하느님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습니다(창세 21,5 참조). 솔직히 가능할까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사벳도 노년에 세례자 요한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예순에 낳았다고 성경은 전해줍니다.
생물학적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이 많은 이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구원 역사에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다’라는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노년에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년에 어떤 사명이 주어짐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떤가요? 노년에 어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꺼릴 때가 많습니다. 주위 사람의 시선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저 나이에 뭘 하려는 거야?’라면서 그냥 편안히 쉴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죽기 전까지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온 몸을 사용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