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 이정록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
무릎 수술한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
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
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
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
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겄네.
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
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
눈감아드릴 테니께
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아유.
성장판 수술했다맨서유.
등 뒤에 바짝
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
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
오빠 수딱 달려.
인생 뭐 있슈?
다 짝 찾는 일이쥬.
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
그짝이 지나치게 연상 아녀?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
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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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시인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범대 한문교육과 및 고려대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및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그럴 때가 있다』 등
청소년시집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저 많이 컸죠』 『지구의 맛』
동화책 『십 원짜리 똥탑』 『미술왕』 『대단한 단추들』 『아들과 아버지』
그림책 『똥방패』 『달팽이 학교』 『황소바람』 『나무 고아원』 『아니야!』 『어서 오세요 만리장성입니다』
2002년 김달진문학상, 2013년 윤동주문학대상, 2017년 박재삼문학상, 2021년 한성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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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를 쓰는데, 이정록 시인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정록 시인의 좋은 시 참 많지만, 특히 ‘충청도 사투리’로 쓴 시가 좋습니다.
제가 충청도 산골짝, 보은 태생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시인의 시 속에 ‘삶의 해학’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해학(諧謔)은 한국 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학을 다른 말로 바꿔 쓰면, ‘유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유머라는 단어 하나로만 해학을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해학을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한(恨)의 유머’라고요.
왜냐하면, 한국인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이 한(恨)이며, 한(恨)의 삶을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해학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어 해학(諧謔)을 살펴보면, 해(諧)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해는 ‘화할, 어울릴’ 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울리느냐, 그 방법이 ‘말’입니다.
‘말’ 언(言)이 ‘다, 모두’ 개(皆)에 붙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를 합하면, ‘말로서 모두 어우러지다’라는 속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말로써 우리 모두가 어우러질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웃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웃음 지을 일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눈물을 흘릴 일이 많겠습니까.
인생을 다 살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 둘 다 많았습니다.
다만, 울 일도 웃음으로 바꾸려고 노력할 수 있었을 텐데요, 저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팔순의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하고 버스를 타려고 합니다.
무릎이 아프니 버스 계단을 오르 내리는 일이 쉽지 않죠.
만만했던 버스 계단도 높디높게만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죠. 버스가 많이 컸다고요.
버스를 탄 할머니 얼굴에 거뭇거뭇한 저승꽃이 피었는데, 버스 기사는 이것을 보고 여드름이라고 얘기하고,
여드름이 잘 익은 걸 보니, 서른은 넘었다고 농을 건넵니다.
이런 농이 재미있었는지 할머니는 점집 차려야 하겠다며 말을 잇습니다….
버스 기사와 할머니의 대화, 해학을 빼고 읽으면, 서글픕니다. ‘해악’이 됩니다.
하지만 서글픔을 빼고 해학을 섞어 말하니, 좀 낫지 않습니까.
해학을 섞는다고 팔순의 할머니가 서른의 젊은이로 바뀌는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만큼은 서글프지 않겠죠.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 힘든 삶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든 삶 가운데에 작은 오아시스를 만들기 위해서요.
지금 내 삶은 구조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 삶의 현장을 ‘어떻게 꾸며 가느냐’는 나의 의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하루하루 노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기도 합니다.
저 먼 미래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오늘 노력한다고 해서, 내일이 바뀔지 바뀌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실존을 꾸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저 먼 미래가 더 나아질 수도 있는 것일 테고요.
더군다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미래는 확실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