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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 18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 요 21: 22 내가 올 때까지
요 21: 18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아멘 아멘 레고)는 요한만이 사용한 것으로 요한은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과 임무나 명령을 할 때 아멘 아멘을 사용했다. 요한은 또한 '아멘'이라는 단어를 항상 말씀의 첫 부분에 두 번을 반복적으로 기록함으로 말씀의 중요성을 증가시켰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행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띠 띠고"는 유대인의 옷은 띠를 제대로 메어야만 제대로 갖추어 입은 옷이다.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은 베드로에 대한 예언이 틀림없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敎)가 예고 되고 있다.
2]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본 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이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3]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본 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 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① '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다.
② '띠를 띠우다'(*, 존뉘나이)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본 절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 시킨다.
① 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 65: 2의 '내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 사 65: 2 -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사 65: 2는 바나바 서신 12: 4, 저스틴( ., I 35), 이레니우스( ,79) 그리고 키푸리안( ,II, 20)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② '존뉘나이'( ,'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두 번째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20: 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절)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요 21: 19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언하며 양을 돌보다 순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doxavsei(독사신)을 돌리는 것이었다.
1]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언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립바 I세(Herod Agrippa I, 37-44)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행 12: 1-19)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 15: 1-11).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생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 1서)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고 전한다(HE, III, i. 2).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어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 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 분는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2]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본문은 13: 36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결국 그 말씀은(13: 36)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베드로가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다.
순교에까지 이르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것 그것이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이다.
* 요 12: 25-26 –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 막 8: 34-35 –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께서는 이런 암시의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암시였다.
고난을 각오하며 사는 것은 전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마 16: 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였다. (빌 1: 29).
요 21: 20 제자가 따르는 것을 -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
사랑하시는 제자(요한)는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
이미 여기서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가 예수를 따르고 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1]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소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계속해서 베드로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7절; 20: 2-8).
이 제자가 예수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13: 23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본문의 의미에 대하여 혹자는 베드로에게 방금 내려진 명령을 요한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이 암시된 것이라고 한다(Barrett).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가 아직 따르기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이 먼저 따랐다는 것을 전제한 듯하나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베도로가 먼저 따르고 있고 그 뒤를 요한이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개역 성경에는 '따르는 것을 보니'로 되어 있어 상황에 대한 불명확한 이해를 유발(誘發)시키는 데 공동 번역에는 "뒤따라 오고 있었다"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기 전에 베드로가 이미 행동을 나타낸 것을 암시한다.
RSV의 번역을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는 "Peter turned and saw following them"으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them)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them은 예수와 베드로라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본 절은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을 암시한다기 보다는 다만 요한도 베드로에 못지 않게 예수를 따르는 일에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2]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본 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뒤를 이어 그 뒤를 따르는 자가 예수님이 베푸신 만찬석에서 주님의 품에 누워서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까? 라고 묻던 자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요 21: 21 이 사람은 어떻게 -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
베드로는 자신의 마지막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갑자기 다른 제자의 마지막에 대해서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기를, 많은 학자들은 요한에 대한 질투에서 찾는다(Olshusen, Lucke, Meyer, Baumlein).
즉 베드로는 자신의 순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도 당연히 순교를 당함이 마땅하다는 식의 바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2]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제자들의 순교가 모두 베드로와 같을 수는 없다.
베드로의 십자가 참수가 예수의 가장 사랑을 받는 요한에게도 똑같은 십자가형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다(Godet). 왜냐하면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어머니의 여생을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 요 19; 25-27 –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21: 22 내가 올 때까지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해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요한의 운명과 베드로의 운명 모두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으로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요한도 자신과 같은 순교의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예수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따를 때 다른 이와 비교하거나 다른 이의 일에 관여치 말고 주님만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종들은, 비록 교회의 성결을 위해 바른 말을 하고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는 일들이 있으나, 다른 사역자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참견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면 된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도 다 그런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충성하면 된다. 우리는 남의 일을 상관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하고 하나님의 명령만 준행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다만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강조적 명령문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너'(*, 쉬)가 강조적인 위치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쉬 모이 아콜로이데이).
본 절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1) 하나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들 모두의 운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
(2)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국(終局)에 의해 그들의 비중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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