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에서 땀이 났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온몸의 촉각이 곤두섰다. 디지털시계가 정확히 오후 2시로 바뀌는 순간, 버튼을 클릭했지만 대기자 수는 이미 3,654명. 염불 외듯 '제발, 제발'을 속으로 반복하며 숫자가 줄어드는 모니터 화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탄식. 오늘도 회전문을 열고 입장하는데 실패했다.
이미 본 뮤지컬을 보고 또 보는 것을 '회전문 돈다'라고 표현한다. 관람을 막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바로 예매를 알아보는 모습은 마치 회전문 출구를 찾지 못해 공연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형국이다. 실제로 공연장 입구는 보통 회전문이니 영 동떨어진 표현도 아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어떤면에서는 틀렸다. 고장이 수시로 나서 웬만해선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2021년에 뮤지컬 <드라큘라>를 보고 한 배우에게 '입덕'했다. 그전까지는 유명 아이돌 그룹의 멤버 정도로만 알았다. 주변에 그의 골수팬이 몇몇 있었지만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골수팬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마. 너 아니어도 이미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니까." 뮤지컬 속 그의 노래와 연기는 '그동안 왜 나를 몰라봤느냐'고 꾸짖는 듯 강렬했다. 여운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마흔이 되도록 이 재미를 모르고 살았다니, 지난 세월의 헛헛함이 느껴지며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손 쓸 틈도 없이 그에게 빠진 뒤 그가 캐스팅된 모든 뮤지컬을 챙겨보는 중이다. 올 초에는 <드라큘라> 10주년 공연이 열렸다. 정말 어렵게 구한 표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손끝, 발끝, 모세혈관에 흐르는 피까지 모두 심장으로 달려가 펌프질을 해댔다. 마지막 넘버는 유튜브에서 수도 없이 들었지만 역시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행여 울음소리가 나면 민폐일까 봐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한 손으로는 안경 밑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관극을 마치고 나오는데 마치 드라큘라에게 '신선한 피'를 수혈받은 듯 몸에서 활력이 샘솟았다. 건조한 피부에는 생기가 흐르는 듯했고, 라식 수술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채도가 높아졌다. 이것이 바로 도파민의 힘인가!
● 마음에 생긴 내성
요즘 도파민 중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졌다. 자극적이고 짧은 영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현상에 주로 쓰인다. 마치 도파민이 악당처럼 치부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뇌에서 생성되는 이 신경전달물질은 보상과 동기부여, 쾌락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파민이 줄어들기라도 한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일로는 크게 감흥이 일지 않는다. 매사에 심드렁하다.
혼자 첫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8년 전 겨울,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막막함도 잠시, 비를 맞아 반짝반짝 빛나는 람블라 거리를 걸으면서 눈 앞에 펼쳐진 모든 순간에 감동했다. 가우디의 건축물을 마주할 때면 입이 떡 벌어졌고, 온화한 바람이 부는 해안가에서는 신선한 해산물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나는 자주 웃었다.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그곳을 떠나기 아쉬워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두 달 더 연장했고, 진지하게 이민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몇 년 후 다시 찾아간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하다는 진리를 배웠기 때문이리라. 약을 오래 반복적으로 복용하면 더 센 약이 필요해지듯, 인간의 경험에도 내성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뮤지컬이 내게는 내성을 물리치는 특효약이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에 완전히 이입해 현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감각, 달고 쓴 감정의 휘몰아침은 스마트폰 속 '숏폼'과 비교 불가였다.
공연 관람 후 수시로 예매를 시도했지만 매진이라는 두 글자가 굳게 닫힌 드라큘라의 성문처럼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공연을 보고 나면 충만함에 푹 젖는 한편, 다음 티켓을 구하지 못해 금세 침울해졌다. 뮤지컬 덕후의 마음은 '지킬 앤 하이드'처럼 수시로 바뀌었다. 뮤지컬을 보고 밥까지 먹으면 20만 원 가까운 비용이 든다. 결코 저렴한 취미생활이 아니다. 그런데도 표 구하기가 어렵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지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면 내 통장은 '텅장'이 되었을 게 뻔하니까. 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샤롯데시어터나 블루스퀘어 같은 뮤지컬 전문 공연장 앞에서 좀비처럼 서성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 뮤지컬이 선물해 준 포용심
<드라큘라>를 시작으로 뮤지컬 관람이라는 새로운 취미생활이 생겼다. 표를 구하려고 더 열심히 일하고 유튜브에서 뮤지컬 음악을 검색해 종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으며 기분을 낸다. 일상에 활기를 되찾아 주는 것 외에 '덕질'의 장점은 더 있다. 인류애가 솟아난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30대에 아이돌에 빠진 친구나 임영웅에 열광하는 중년을 보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척만 했다. 그런데 내가 덕후가 되고 나니 그들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누가 티켓팅에 성공했다고 하면 내 일처럼 기쁘다. 모든 사람의 덕질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할까.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고 나와 취향이 다르다는 점을 십분 공감한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소 이해가지 않고 조금 이상하게 보여도 누군가는 진심일테니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이제 연필 수집이나 휘황찬란한 애니메이션 코스프레는 물론, 거리의 요란한 포교 활동마저 어느 정도 너그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사랑에 빠진 마음에서만큼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게 됐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행위인 '덕질'이 세계 평화에도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지 않을까?
나의 건강한 도파민, 뮤지컬이라는 묘약이 내성 없이 오래 유지됐으면 좋겠다. 버는 족족 다 쓰고 티켓팅에 마음 졸이더라도 이 중독만큼은 끊고 싶지 않다.
김선영 13년 간 방송작가로 지냈고 지금은 글쓰기 코치 겸 에세이스트로 삽니다. 프리랜서가 되면서 시 낭송, 필사, 식후 스쿼트, 맨발 걷기 등 다양한 습관으로 일상을 가꾸는 '루틴 부자'입니다. 《오늘부터 나를 고쳐 쓰기로 했다》 《어른의 문장력》 《어른의 문해력》 등을 썼습니다.
솔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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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고운 발걸음주셔서
감사합니다 ~
호국보훈의 달 6월이에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행복 가득한
6월 보내세요!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오늘도 좋은 글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행복한 불 금 멋지게 보내세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소중한 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행복한 6월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