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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머니의 죽음과‘웰다잉’에 대한 소고(小考)
한많은 삶에 황망한 죽음… “‘준비된’죽음을 맞고 싶다”
김수영│프리랜서·시인 kimsu01@hanafos.com│
박병혁│사진작가 k2p00@korea.com
한 달 하숙비 70만~100만원인 서울 근교의 사설 요양원. 말기 암에 걸린 한 할머니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서러운 죽음을 준비한다. 세상에 버림받은 분노, 삶과 밥에 대한 애착, 그리고 그리움…, 그러곤 제풀에 지쳐 선택한 죽음. 오래 살아 죄스럽고 자식 보고 싶어 미안했던, 한 많은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듯 황량했다. ‘웰다잉’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눈 감는 일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11월14일, 가평에 있는 한 요양원으로 향했다. 남편의 외할머니(93)를 뵈러 가는 길이었다. 요양원을 찾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작은 교회에 딸린 요양원은 목적지에서 반경 1km 주변에도 두 군데가 더 있었다. 잘못 알고 들어간 작은 교회도 요양원으로 내부수리 중이었다.
66m2(20평) 남짓한 교회 부속건물에는 1970년대 노동자들의 벌집방처럼 작은 쪽문이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이곳 가평 산골짜기는 원래 화전민이나 살던 곳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한 달 하숙비 70만~100만원을 내야 하는 요양원과 그보다 두 배 이상 월세를 내야 하는 요양병원이 속속 들어서는 중이다. 서울에서 가평까지 승용차로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 물리적으로는 멀지 않은 거리다.
우리가 가는 곳은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 산기슭에 위치한 사설 요양원. 문을 열자 사감인 듯한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신지체자로 이곳에 머물며 봉사활동을 하는 듯했다. 116m2(35평)쯤 되는 실내는 개미굴 같았다. 좁은 거실을 중심으로 방 세 칸, 화장실 하나, 목욕실이 빙 둘러 있었다. 할아버지 5명과 할머니 12명이 머물기에는 옹색한 공간. 일반 주택과 다른 점을 들라면 화장실의 남자용 소변기나, 좌변기가 앉은뱅이 변기로 앉아서도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점과 수도꼭지를 틀면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것 정도였다.
그들이 입은 유니폼만 본다면 ‘새싹반’ ‘개나리반’ 같은 유아원생을 연상케 했다. 할아버지는 연둣빛 티셔츠에 흰색 바지, 할머니는 노랑색 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석에 꼼짝 앉고 누워 있는 한 명을 빼고 훈련병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할아버지들은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김장을 도울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마침 할머니를 돌보고 있던 원장님은 쭈뼛거리는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배실로 쓰고 있는 큰 방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었다. 20여 개의 꽃 화분이 있었지만 똥오줌 냄새와 노인 특유의 냄새를 감추진 못했다. 욕창을 막기 위해 에어매트에 누워 있든, 베개를 벤 것처럼 목을 든 채 뻣뻣하게 누워 있든, 앞으로 꼬꾸라질 듯이 앉아 있든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시간이 정지한 화면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할머니 외손자가 왔어요, 외손자!”
할머니는 원장님 무릎을 벤 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할머니 오른쪽 목에는 작은 달걀만한 혹이 나 있었고, 평생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쪽을 쪘던 머리는 마구잡이로 쑹덩쑹덩 잘려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아파 죽겠어, 아파 죽겠어” “추워 죽겠어, 추워 죽겠어”만 쉬지 않고 되풀이했다. 두 손으로 원장님 무릎을 받친 모습은 마치 아이가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새색시가 신랑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아들 셋, 딸 다섯, 손자만 서른 명이 넘는 대가족을 일구었지만 병들고 아픈 때 무릎 하나 빌려주는 이가 없었다.
“할머니 외증손녀도 왔어, 둘이나. 외증손녀 예쁘네.”
원장님이 거듭 눈을 꼭 감고 있는 할머니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충남 대천, 독산동, 의정부 같은 도시의 변두리 지명에 이어 충남 보령 오서산 아래 성골이라고 고향 마을 이름을 대자 표정이 없던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는 말없이 앉아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는 이번에는 “밥 좀 먹어, 밥 좀 먹어”라고 읊조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
방에는 할머니 외에도 8명의 할머니가 더 있었다. 한 분을 빼고는 모두 치매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몇 분은 의식조차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위중해 보였다. 20년 전에 풍을 맞아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할머니는 이 방에서 도우미 역할을 자처했다.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할머니들의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가까이 누워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지 않게 조금씩 밀어서 떼어놓기도 한다. 할머니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거나 조처를 취해야 할 점이 있으면 요양원에 건의도 하는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정릉에서 살다 3년 전에 요양원에 왔다는 할머니는 방에 있는 다른 할머니들을 일일이 소개해줬다. 97세, 93세, 91세, 88세, 83세, 85세, 그리고 의식이 없어서 나이를 모르는 할머니들…. 두 다리를 가슴에 모은 채 앉아 있던 털모자 쓴 할머니가 이 방의 큰언니로 97세였다. 일어서 걷지는 못했지만 엉덩이로 밀어서 움직일 수 있었고, 본인의 이름, 자식, 며느리, 손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들 말은 못해도 눈치는 빤해. 다 알아.”
모두 침묵하고 있었지만,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은 채 눈도 못 뜨는 할머니도 싫다는 의사표시는 한다고 했다. 말을 못하면 눈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온몸으로 전해지는 어떤 기운으로.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 한 감정은 전달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곧 풀렸다. 8년 전에 요양원에 왔다는, 중증 치매에 걸린 할머니 한 분의 시선이 내게 고정됐다. 사람의 눈이라기보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눈빛에 더 가까운 천진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거 같아서 웃으면서 큰소리로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 어디에 사는지, 이곳에는 왜 왔는지 설명했다. 나의 설명을 듣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아들었다면 어디까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느낌 또한 들지 않았다.
흔히들 오감 외에 육감이 있다고 한다. 오감이 마비되어가는 할머니들은 육감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치매로 지능을 잃어버렸지만, 분명한 건 아직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안락사도 존엄사도 논의할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완강한 고립에 담긴 곡절
아이들이 노래를 시작하자 방금 나와 대화를 나눈 바로 그 할머니가 가장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봐여. 할머니들 모르는 거 같은데 다 알잖아여. 애들이 오면 좋은 거라. 누워 있지만 다 알아여.”
할머니들은 아이를, 사람을 좋아했다. 조금이라도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 얼굴 밑으로 얼굴을 갖다 넣기도 하고 일부러, 아이들 곁에 바싹 다가오고 싶어했다. 우리가 할머니들의 냄새를 느끼는 만큼 할머니들도 우리들의 냄새, 요양원 바깥의 냄새를 느낄 것이다.
97세 할머니는 아이들이 벗어놓은 오리털 파카를 가지런히 펴놓고 마치 인형놀이를 하는 것처럼 팔을 접었다 폈다 하며 몇 시간이고 만지작거리며 쓰다듬었다. 손자의 나이와 이름을 기억하는 할머니는 손자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할머니는 파카를 뺏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할아버지 방은 할머니 방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다섯 명의 할아버지는 나이가 일흔 남짓했다. 이곳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90세인 것을 감안하면,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의 아들뻘이다. 차이는 그것말고도 또 있었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낯선 방문객이지만 아이들의 몸을 어루만지고, 내 손을 잡고 반가움을 나타냈다.
반면, 할아버지들은 누구 한 사람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인사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남편은 일부러 할아버지 방에 가서 앉아 있어봤지만,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할아버지들은 시선을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방에 있는 동료끼리도 대화하지 않았다. 아이들조차 할아버지 방의 침묵을 깨지 못했다. “안녕하세요”라고 배꼽인사를 해도 누구 한 사람 웃으면서 받아주지 않았다.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이렇듯 완강히 고립을 고집할 때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터였다.
암은 오히려 축복
할머니 목에 난 혹의 정체는 암세포였다. 작은 달걀만한 그 혹 아래로 단단한 조직이 만져졌다. 단단한 그 조직은 말랑말랑한 정상적인 조직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듯했다.
“목을 누가 쥐어뜯는 것 같다고 말했어요. 아프신가 봐요. 아직은 고통을 많이 느끼는 것 같지는 않지만 밤에 잠을 잘 좀 주무시라고 약을 드리고 있어요.”
할머니는 전문병원에 가서 암을 진단받은 게 아니었다. 요양원에 와서 노인들의 건강상태를 정기적으로 살피는 은퇴한 의사가 보고는 암이라고 피력한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여윌 것이며 3개월 정도 생존할 것이라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설암, 후두암, 식도암 등 입 주변에 걸리는 암들은 진행도 빠르고 고통도 상대적으로 크다고 알려져 있다. 할머니는 그중에서 하필이면 후두암, 후두의 앞쪽에 자리 잡은 경부후두암이었다. 요양원에 온 지 일주일 만에 혹의 크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침을 삼키는 데 불편함이 있는지 침을 조금씩 흘렸다.
할머니의 몸은 30㎏도 안 됐다. 153~154㎝ 키에 28~29㎏, 미라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허벅지는 지름 8㎝ 통나무 같았다. 정상적인 세포보다 수백, 수천 배 더 왕성한 대사를 하는 암세포는 인체의 다른 기관에서 자신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살과 근육의 양이 조금 더 많다면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될 것이다. 할머니의 몸무게는 앞으로 버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줬다. 한편으로 할머니의 몸무게는 그간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도 증언해 줬다.
할머니는 90세 되던 해에 화장실에 갔다 오다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부서졌다. 부서진 뼈를 고정하기 위해 나사를 몇 개씩 박는 대수술을 했지만 뼈는 놀랍게도 두 달 만에 붙었다. 문제는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에 일어났다.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그 때문에 며느리는 밥과 물의 양을 줄여버렸다. 좋아하던 커피도 소변 양을 늘린다는 이유에서 끊어버렸다. 딸들은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학대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침묵했다. 요양원이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다.
밥과 삶에 대한 욕심
할머니들의 식사시간. 작은 소반이 나란히 놓이고, 한 상에 세 사람씩 앉게 국과 밥을 갖다놓았다. 상이 다 차려지자 수건이 하나씩 주어졌고, 할머니들은 그것을 무릎 위에 얌전하게 펴놓았다. 저녁 반찬은 미역국에 상추겉절이, 검은콩조림, 버섯볶음이었다. 요양원 3년차인 정릉 할머니는 갑갑하다는 이유로 밖에서 어슬렁거렸다. 요양원에서도 ‘짬밥’이 있었다. 8시쯤 기상해서 기저귀를 간 뒤 9시쯤 아침을 먹고, 오후 1시쯤 점심, 6시쯤 저녁을 먹었다. 수시로 귤 같은 간식이 주어졌고, 도우미가 있는 날은 필요에 따라 목욕을 했다. 적당히 눈치를 보아가며 씻겨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산보를 하더라도 밥 때나 간식 때가 되면 와서 대기하는 식이었다. 정릉 할머니는 식사기도가 끝날 때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뻣뻣하게 누워 있던 할머니들이 일어나 앉아서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할머니 말아요?” “국에 마는 것 싫어?” “말아버렸는데 어떡하지?” “싫어? 그럼 바꿔서 맨밥 드릴게!” 산송장처럼 보여도 할머니들의 취향은 까다로웠다. “콩이 딱딱해요?” “김치 매워요?” “국이 뜨거워요?” 말을 못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말을 시켜주는 것을 좋아했다.
눈뜰 기력도 없어 보이던 할머니도 젓가락으로 콩을 집었다. 할머니들은 버섯이 입맛에 맞는지 숟가락이 부닥칠 정도로 바쁘게 버섯볶음을 자신의 밥그릇으로 퍼갔다. 숟가락질을 못하는 할머니들에게는 떠먹여주었다. 숟가락이 얼굴 주위로 가면 입을 크게 벌렸다.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수 있든 없든 할머니들의 식성은 왕성했다. 웬만한 성인 남자의 양을 먹었다. 변을 잘 보게 하기 위해 미역이나 채소 같은 반찬을 빠뜨리지 않았고, 모두 바로 조리한 반찬들이었다. 우리 할머니의 식사 양은 다른 할머니 양의 반의 반밖에 안됐지만, 아침식사 후에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할머니는 많은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식사 풍경은 할아버지 방도 다르지 않았다. 거동을 못하는 분을 위해서 사감이 밥을 슥슥 비볐다. 할아버지는 자동으로 턱뼈가 벌어질 수 있는 최대치로 입을 딱 벌렸다. 고봉으로 퍼서 몇 숟가락 떠 넣어주자 후딱 한 그릇이 비워졌다. 할아버지들의 식사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금세 상이 치워지자 빗자루를 들고 사감이 방을 쓸었다. 그때쯤 할머니 방에서도 식사가 끝났다. 빗자루에 쓸려나가지 않은 밥알이 뒹구는 바닥에 할머니들은 다시 쓰러질 듯이 누웠다.
할머니들은 식사시간 외에도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정릉 할머니가 할머니 옆으로 다가와 운동복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사탕을 꺼내자 주무시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솔개가 병아리 채가듯 입에 넣었다. 치매로 말도 못한 채 꼼짝없이 누워 있는 할머니가 순식간에 할머니의 양말을 벗겨가서 두겹을 신고 있었다. 정릉할머니가 장난처럼 모자를 벗기려 하자 97세 할머니는 안 뺏기려고 모자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할머니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의사는 석 달은 살 거라고 했지만, 할머니의 육신은 눈에 보일 정도로 상해가고 있었다. 타박상을 입었을 때 드는 푸릇푸릇한 멍과는 다른 멍이 팔에 들어 있었다. 욕창은 없었지만 피부 곳곳에는 작은 염증들이 있었다. 혈관이 드러나는 팔뚝은 곳곳이 푸르뎅뎅하고 불그레했다. 팔을 보고 있으면 영양제를 꽂을 혈관을 찾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보였다. 살점이라고는 없는 다리에는 각질이 비늘처럼 일어나 있었다. 아기에게 하는 마사지는 사실 할머니들의 건조한 피부에 더 필요했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쓰다듬어주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아파, 아파 죽겠어” “추워, 추워 죽겠어” 하는 혼잣말도 하지 않았다. 뼈만 남아 울퉁불퉁한 등을 쓸어줄 때도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손길을 받았다.
할머니에게는 몇 가지 버릇이 있었다. 하나는 방바닥을 손으로 삭삭 훑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말라붙은 밥풀과 고운 먼지가 묻어나왔다. 평생 정갈하게 살아온 버릇은 요양원에서도 버리지 못했다. 또 다른 버릇은 가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할머니 손을 왜 쳐다보세요.”
“그냥.”
할머니가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육신의 한 부분은 손이었다. 할머니의 왼쪽 새끼손톱에는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요양원의 할머니들 모두 왼쪽 손톱과 엄지발톱에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요양원에서는 목욕을 한 할머니들의 손톱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곤 했다. 정릉 할머니는 열 손가락에 다 발라달라고 해서 열 손가락 모두 발랐다.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가리키며 “예쁘다”고 하면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도 좋아하는 듯했다.
올해로 만 83세인 정릉 할머니는 매니큐어뿐 아니라 6개월 전부터 파마를 하고 싶어했다.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왼쪽으로만 잤고, 그 바람에 왼쪽 머리는 눌린 채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아들이 파마를 하라고 돈을 주고 갔어. 파마할 데가 있어야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왜 파마를 하고 싶으세요?”“젊어 보이잖아.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는 게 좋지. 귀신 같은 게 좋나?”
“그럼 원장님께 부탁하면 되잖아요.”
“그렇지. 안 들어줄 분은 아니야. 그런데 너무 바빠.”
거동이 자유로운 할머니들은 행색이 달랐다. 요실금 때문에 기저귀는 찼지만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었다. 로션도 바르고, 머리도 곱게 빗고, 유니폼 위에 카디건을 걸쳐 멋도 부렸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 방에 있는 83세의 정릉 할머니도 그들처럼 곱게 보이고 싶어했다. 할머니들에게 고운 것은 늙지 않았다는 것, 건강하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오래 산 죄, 자식 그리운 죄
사흘 뒤인 월요일에 다시 갔을 때 할머니는 목욕을 마친 뒤였다. “또 왔어?” “밥은 먹었어?” 이제는 제법 대화가 됐다. “누가 가장 보고 싶으세요?” “다 보고 싶지 뭐.” 할머니는 노여움을 푸신 모양이었다. 첫날 할머니는 아들은 보고 싶지 않지만 손자와 손녀는 보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어법은 독특한 반어법이다. 손자와 손녀를 보려면 아들이 와야 한다. 사실은 이곳에다 자신을 버린 자식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방 도우미 총각을 볼 때마다 손자 이름을 부르며 고추를 만지려고 했다.
그날 할머니는 기분이 좋았는지 말도 몇 마디 하고 박수도 쳤다.
“왜 박수를 치세요?”
“그냥 이러고 싶어서.”
속으로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박수를 치자 치매를 앓는 할머니도 따라서 쳤다.
“할머니는 이곳이 더 좋대. 전에는 혼자 있었는데 여기는 동무들이 있으니까.”
정릉 할머니는 아마도 “할머니 여기가 더 좋지.” “전에는 동무도 없는데 여긴 있잖아.” 이런 식으로 물었을 것이고, 할머니는 “그래”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원래 처음 오면 안 좋아. 내가 왜 이런 데까지 왔나 싶고. 버림받은 거 같아서 괴롭고.”
정릉 할머니의 “왜 이런 데까지 왔나 싶고”라는 말 속에는 일찍 죽지 않은 한탄이 깔려 있었다. 요양원에 오면 처음에는 누구나 ‘너무 오래 산 죄’에 대해 괴로워하고, 그 다음은 외로움에 조금씩 지쳐간다.
지난해 11월5일, 며느리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데려다주면서 “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느냐”며 도리어 할머니를 힐난했다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가고 난 뒤 할머니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주일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열여덟에 결혼해서 자식을 여덟이나 둔 할머니는 첩에게 할아버지를 뺏긴 채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세상의 풍파를 다 겪었다. 남편이 첩을 얻어 집을 나간 뒤에도 한 번도 두 사람에 대해 원망의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온 처음 며칠은 밥도 먹기 싫다며 숟가락을 내던졌다.
또 다른 징역살이
“할머니 성질이 대단해요. 할머니 욕도 잘하세요.”
할머니는 첫날 나직하고 분명하게 “씨발년”이라고 내뱉었다. “밤 좀 먹어” “추워 죽겠어”라고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뉘앙스였다.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가 억눌러져 있었다.
자식에게 버려진 데 대한 분노와 수치심은 요양원에 처음 온 할머니라면 누구나 가진다. 요양원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 이런 들끓는 감정을 표면적으로는 일부 내려놓게 된다.
할머니보다 이틀인가 사흘 뒤에 요양원에 입소한 젊은 할머니도 이 분노의 단계를 겪고 있었다. 새로 온 할머니는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고 허리와 등도 꼿꼿했다. 좋은 혼처가 나면 재혼을 해도 될 정도로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나이를 물어보자 거듭 “나이 많아 부끄럽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여든 살이었다.
일반인이 보기에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은 공기 좋고 쉬기 편한 곳이다. 그러나 거동이 다소 불편한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주택가가 훨씬 행동하기 편하다. 볼거리도 많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고, 파마를 하든 쇼핑을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외롭지 않다. 거동을 하는 할머니들의 가족은 1년에 한두 번은 찾아왔다.
그러나 거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방에 있는 할머니 중에는 몇 년째 가족이 찾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 거동이 가능한 노인의 처지에서는 요양원 생활은 ‘징역살이’나 다를 바 없다. 요양원에 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정릉 할머니는 갑갑함을 참을 길 없어 요양원 주변을 하루에 몇 바퀴씩 돈다. 야산에 둘러싸인 요양원에서 산책거리는 불과 200m에 불과하다. 이런 ‘징역살이’는 할머니들이 다른 요양원으로 옮겨가거나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가는 날 끝이 난다. 어느 요양원이든 보호자가 데리고 나가지 않는 한 외출은 허락되지 않는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에게 사고가 날 경우 그 책임은 요양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포자기해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 한 아들을 생각하고 기다리게 된다.
서러운 저승길도 친구는 있다
세 번째 할머니를 찾아간 날, 할머니는 전날부터 곡기를 완전히 끊어버린 상태였다. 할머니의 입은 봉함엽서 모양 붙어 있었다. 끈끈한 침이 풀처럼 되직해져 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모님이 휴지에 물을 적셔가며 입술을 한참 동안 떼어냈다.
“물 좀 줘.”
아침과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물을 먹었지만 굶은 할머니는 물조차 마시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잔의 물을 두 모금씩 나눠 먹느라 여섯 번을 누웠다 일어났다. 덮고 있는 이불에는 온통 똥이 말라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5시부터 저녁 7시 사이 물 두 잔, 베지밀 하나를 먹었다. 도합 500㎖ 정도의 물을 한꺼번에 마신 셈이다. 그동안 갈증을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곡기를 끊는다는 건 나뭇잎이 떨켜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할머니의 몸에산 이미 냄새가 진동했다. 속의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는지, 이미 입 밖으로 분비물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에 있던 종양은 이제 젖무덤 중간까지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다. 노인들에게 찾아오는 암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본인에게든 가족에게든 질긴 목숨을 끊게 해줄 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할머니는 너무 쇠약하다 보니 통증도 거의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프다는 소리도 첫날보다 훨씬 덜했다.
아이들은 그날 따라 앞에 나가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는 그날 저녁도 완강히 거부했다. 할머니는 저녁으로 베지밀 하나와 과자를 먹었다.
“내일도 식사를 안 하시면 가족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요양원에는 강제급식을 할 수도 없고 의학적 처치를 할 수 있는 장치도 없었다. 임종을 맞게 되면 다른 노인들이 쇼크를 받기 때문에 사설 요양원에서는 때가 되면 보호자에게 연락을 했다.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할머니는 곡기를 끊음으로써 그 죽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맞으려 하고 있었다. 100년 전 옛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식들 얼굴 한번 보고 찬 물 한 모금 들이켜고 죽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죽음으로 생각했다. 옛날 사람인 할머니 역시 그 죽음의 방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요양원을 떠나기 전 사지가 굳은 할머니 옆에 할머니를 뉘고 똥 묻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낮에는 서로 닿기만 해도 꼬집던 두 사람은 밤이 되면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희한하게 둘이 꼭 끌어안고 자.”
저승길 길동무는 생전의 동무와는 또 다른 모양이다. 그곳에서 삶의 종착역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사람은 할머니였고, 이변이 없는 한 사지가 굳은 할머니가 두 번째일 듯싶었다. 그 할머니는 무릎을 펼 수도 팔을 펼 수도 없었다. 억지로 펴게 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몸에 닿으면 팔을 들어 내리쳤다. 몸에 닿는 것 자체가 아픔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옆의 사람을 치는 것이다.
다음날인 토요일, 할머니는 아침을 거른 채 점심 때 작은 고구마 한 개와 커피를 먹었다. 뜨거운 커피를 식히지도 않은 채 “이런 건 빨리 먹어야 해”하면서 바로 마셨다. 그러고는 이불을 덮어쓰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날 막내사위에 의해 전문요양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날인 11월25일 월요일 오후,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졌다. 의식을 잃지 않은 할머니를 동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화요일 새벽, 할머니의 육신은 마지막까지 수선스러운 긴 여정을 마치고 종착역에 닿았다.
준비된 죽음을 맞을 권리
할머니가 몇 시에, 어떻게 운명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5시30분경 기저귀를 갈기 위해 간병인이 이불을 들쳤을 때 이미 운명해 있었다. 그날 새벽, 칠순이 지난 큰딸을 비롯한 딸 셋과 사위 셋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상경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산 사람의 편의대로 찾아오지 않았다.
큰아들은 할머니가 30년 넘게 곱게 보관한 상자를 들고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왔다. 상자에는 수의 일습이 들어 있었다. 직접 천을 끊어 물을 들여서 손바느질한 분홍 저고리 연두 치마를 비롯해, 시집올 때 해온 단속곳에다 삼베 천을 대어 만든 속바지와 속저고리 속치마, 두루마기, 이불.
할머니는 환갑 이후부터 수의를 마련하는 등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할머니도 마지막 순간에는 스스로 준비할 수 없었다. 커피 한 잔과 물 한 잔, 기저귀를 치워주는 손길은 가족들이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양원에 머무는 2주일 남짓 동안 아들 셋과 보고 싶어한 손자 손녀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요양원의 서비스에도 한계가 있었다. 요양원에서는 할머니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방치상태에 가깝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젤 무서운 것이 자식이다.”
정릉 할머니가 몇 번씩 혼잣말처럼 뇌일 때 할머니는 눈을 꼭 감고 못 들은 척했다. 할머니는 자식에게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았다.
할머니의 죽음은 모두가 기다린 죽음이었다. 호상(好喪)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본인과 외손자 하나밖에 없었다. 외손자가 상조에 들어 있었던 덕분에 장례 절차는 쉽게 진행이 되었다. 상조는 가족들이 어떤 수고도 하지 않게끔 편안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할머니는 그 순간 차디찬 냉동고에 누워 있었다. 흰 천에 싸인 할머니 시신은 작은 나뭇단 같았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편안했다고 한다. 눈도 꼭 감고 입도 다물고 있었다고 했다. 정신이 온전히 있던 마지막 날, 할머니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마지막 이틀 동안 할머니는 자식에 대한 원망 한 마디 남기지 않은 채 침묵했다. 물 한 모금 달라는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생은 남들이 보기에 박복하고 보잘것없는 생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알려지지 않았을 뿐, 생전에 많은 일을 했다. 그중에 하나가 뒷간에 버려진 한 목숨을 살린 것이다. 아이가 많은 아랫집에서 또 딸을 낳았고, 산모는 아이를 뒷간의 재속에다 파묻어놓았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딸에게서 들은 할머니는 울음소리를 찾아가 뒷간의 재 속에서 아기를 찾아내어 집으로 안고 왔다. 할머니 덕분에 목숨을 건진 그 아기는 할머니의 팔순 때도, 장례식에도 왔다. 할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생전에 할머니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 조금쯤은 덜 서럽고 외로웠을 것이다.
웰다잉을 위하여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든 첫 번째 감정은 후회였다. 월요일 마지막으로 빨대를 끼워서 마시는 커피를 한 잔 사갔으면, 젊은 애들이 맛있다고 하는 스타벅스 커피를 사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동안 그 사소한 아쉬움에서조차 놓여나지 못했다.
행복한 죽음은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모두 행복하게 만든다. 웰다잉이라고 말하는 이 ‘행복한 죽음, 혹은 행복한 죽어감’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요양원이나 상조가 가족들의 준비를 대신할 순 없다. 준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심리 상태에 있고, 육신은 어느 정도 고통을 느끼는지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죽음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천국에 가려고 해도 죽어야 하고, 고통스러운 질병에서 해방되려고 해도 죽어야 하며, 움직일 수 없는 몸에서 해방되려고 해도 죽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관문 앞에 서면 어떤 인간이나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닿아 있다. 그것은 ‘죽음학’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하는 웰다잉의 문제는 한 미국인의 죽음과 그 과정을 통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 슈워츠 박사. 모리 박사의 죽음은 미국 ABC방송의 나이트라인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중계되다시피 했다. 모리는 자신의 죽어감에 대해 방송과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을 통해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한 인간이 죽음 직전에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는 사후에 공개하라고 했다. 그를 편안한 죽음으로 이끈 심리치료가인 폴라 다시는 약속대로 그 내용을 ‘이별수업’이란 책을 통해 사후에 공개했다. 모리는 말한다.
“자네는 딸아이가 떠난 뒤 작별을 고했지. 난 내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 스스로에게 작별을 고해야 한다네.”모리에게는 죽음을 잘 맞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지막 생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반드시 대답할 것을 요구하며 모리는 자신의 치료가에게 “죽음의 마지막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양팔을 활짝 벌린 품을 상상할 것 같은데요. 준비가 됐을 때 그리로 뛰어드는 거죠.”
“사람이 자기가 떠날 때를 정할 수 있다고 믿나?” “그 품은 누구의 품일까”라는 물음에 대해 모리는 마지막 순간에 나름대로 답을 구했다. 임종을 예감하고 자신의 심리상담가를 부른 모리는 다시 한번 그 품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그 팔을 벌리고 있는 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리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의식을 잃어버린다. 마지막 순간 모리에게 필요한 것은 ‘품’에 대한 확신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심리치료사란 존재였다. 결국은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이었다.
‘죽음’과 ‘죽어감’의 5가지 단계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서는 ‘죽음과 죽어감’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겪는 다섯 가지 단계를 말한다. 부정과 고립,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이 단계는 행복한 죽음과는 별개의 것이다. 암을 1기 2기 3기 4기 말기로 구분하는 것처럼 일종의 구분이다. 행복한 죽음은 이 단계를 다 격지 않아도 되고, 이 단계를 다 겪더라도 행복한 죽음에 다다를 수도 없다. 행복한 죽음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죽어가는 사람이든 지켜보든 사람이든 저마다 해야 할 몫이 있다. 이 단계를 이해하면, 이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라는 게 로서의 당부다.
죽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죽음을 맞는 사람의 문제다. 그러나 로서는 위로나 터치 같은 ‘전해지는 사랑’이야말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보다 좋은 죽음을 선물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폴라 다시 또한 죽음의 시간을 편안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시간이 화해와 용서, 감사로 가득 차야 인생 전체를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이 좋아야 전부가 좋다’는 성경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한 사람의 평생은 길어졌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은 짧아졌다.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죽음을 지켜보는 시간,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이 웰다잉을 만든다. 웰다잉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예의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