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읽었던 동물우화 ‘서울쥐 시골쥐’는 무척 재미있었다. 시골쥐에 나를 감정 이입해서 읽다 보면 쏙 빠져들어갔다. 쥐뿐 아니라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환경의 차이는 삶의 차이를 낳게 된다. 조원상(61) 씨 부부는 청춘을 바쳐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치열하게 살았기에 돈도 조금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돈을 사기꾼의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설상가상 부인의 건강도 좋지 못했다. 삶의 가치에 대해 회의하던 조씨는 남과 경쟁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벌면서 살기로 했다. 남아있는 삶은 시간과 물질에 더는 쫓기지 않기로 했다. 세종시 고복저수지에 자리 잡은 <구름나그네>는 6년 전, 조씨 부부가 내려와 차린 식당이다.
꾸준히 장 담그며 고아낸 능이백숙, 향기 으뜸
식당의 주 메뉴는 호숫가에 위치한 식당답게 능이백숙이다. 토종닭능이백숙과 오리능이백숙, 두 가지다.(각각 6만원) 그런데 부부가 처음부터 백숙을 팔려고 했던 건 아니다. 조씨 형님이 재배하는 재래종 콩을 활용한 된장, 간장, 청국장 등을 담가, 이 장류들로 조리한 건강식품을 파는 토속음식점을 꿈꿨다. 그러나 장이 익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해마다 담근 장들이 익기를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 능이백숙은 장의 숙성기 동안 내놓은 메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근 도시에서 찾아온다. 이젠 자연스럽게 시그니처 메뉴가 됐다. 앞으로 장 음식들이 본격적으로 나온다 해도 아마 능이백숙을 메뉴판에서 지우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엔 이 집 능이백숙도 이런저런 재료들을 보기 좋게 잔뜩 올렸다. 그런데 능이의 향과 맛을 감퇴시키는 것 같아, 주인장이 한약재와 식재료들을 한약 다리듯 진액으로 낸다. 최근엔 부추마저 빼고 대파만 썰어 넣는다. 대신 능이버섯은 넉넉히 넣어 수북하다. 상품 능이를 넣고 고아낸 짙은 갈색 국물은 능이 향이 가득하다.
‘일능이 이표고 삼송이’라 하여 능이를 최고의 버섯으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물론, 능이 향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없진 않지만. 국물에 닭기름이 없어 담백한데 첫 맛은 쌉싸름하고 뒷맛은 달콤하다. 토종닭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육질이 질길 줄 알았는데 중탕을 해서 그런지 육질이 연한 편이다.
반찬은 소박하다. 얼갈이 열무김치, 백김치, 마늘종장아찌, 깍두기에 고추와 마늘을 직접 담근 된장에 찍어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렇지만 도시 식당들 찬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조미료 대신 양파 발효액으로 맛을 냈기 때문이다. 백숙을 모두 먹고 나면, 함께 내온 찰밥을 남은 국물에 넣고 더 끓여 닭죽으로 먹기도 한다. 닭죽 맛과 김치 맛의 궁합이 기가 막히다.
재래종 콩으로 장 담그고 두부 만들어 끓인 청국장전골
조씨는 이곳에 내려오자마자 장 담그는 법부터 배웠다. 작년에는 관련기관으로부터 자격증을 받기도 했다. 예전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는 조씨의 부친이 재래종 콩 농사를 지었다. 그걸 형님이 이어오다가 작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지금은 위탁으로 재배하고 있다. 조씨에 따르면 재래종 콩은 소출은 적지만 음식 맛이 좋다고 한다. 특히 이 콩으로 담근 장맛은 어떤 콩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구름나그네> 앞마당과 뒤꼍에는 부부가 5년 전부터 담가온 장독들이 나이별로 도열해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번갈아 메주와 청국장을 말려주고, 장독에 스며 장맛으로 변한다. 드디어 올해부터 5년 묵은 장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장으로 조리한 첫 메뉴가 청국장전골이다.
호박, 당근, 두부, 새송이, 느타리, 표고, 팽이버섯과 차돌박이 등을 냄비에 담고 마지막으로 맨 위에 청국장을 얹었다. 육수는 별도로 낸 것을 붓고 끓인다. 불을 붙여 전골이 익기 시작하면 먼저 몸에 좋은 청국장을 낫토처럼 떠먹을 수 있도록 했다. 가급적 청국장에 살아있는 바실러스 균이 열에 사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섭취하도록 고려한 조치다. 청국장이 짜지 않고 냄새도 거의 없다. 여분의 청국장은 육수와 결합해 구수하고 은은한 감칠맛을 낸다.
각종 버섯들을 건져먹는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두부 맛이 기가 막히게 좋다. 주인장에게 물어봤더니 재래종 콩으로 어젯밤에 내린 수제두부였다. 본가에서 명절 때나 겨우 얻어먹는 바로 그 손두부 맛을 의외의 계절에 의외의 장소에서 만났다.
청국장과 손두부, 따지고 보면 같은 재료다. 그러나 서로 지나온 삶이 다르듯 맛이 다르다. 그 다른 맛들이 결국 전골 자배기 안에서 바글바글 끓어가면서 하나가 된다. 자극적이지도 거스르지도 않는 맛이 창 밖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다.
파전 등 사이드 메뉴 탁월, 식사 후 호숫가 산책할 만
단체손님 가운데 개별메뉴를 원하는 손님을 위해 능이백숙을 단품화 한 능이계탕(1만5000원)과 산채비빔밥(1만원)을 준비했다. 산채는 이곳에서 채취한 것이 아니라 치악산에 사는 주인장 친구가 보내주는 것들이다.
이 집에는 의외의 인기 메뉴가 있었다. 한 번 먹어본 손님은 다음에 와서 다시 찾는다고 한다. 바로 파전(2만원)이다. 오징어와 양파, 당근, 단호박 등 각종 채소를 넣고 부쳤다. 부쳤다기보다 튀겼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일단 크기가 엄청나다. ‘자이언트 튀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몇 사람이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고소한 맛은 웬만한 고급 일식집 튀김보다 낫다. 이걸 많이 팔수록 식당 입장에서는 손해다. 조리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도 손님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주인장은 신이 난단다.
식사 끝나고 여유가 되면 둘레 7~8km인 호숫가를 산책해도 좋다. 벚꽃이 만개하면 호수 주변이 벚꽃 길로 변한다. 가끔 식재료가 떨어졌거나 먼저 받은 예약 때문에 먼 길을 헛걸음하는 손님들이 있다. 특히 여름철에 많다. 미리 전화로 예약하는 편이 안전하다.
이 집 주인장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거다. 그러려면 다른 것들을 내려놔야 한다는 걸 안다. 6년 전까지의 서울생활과 결별하고 이곳 호숫가에 내려온 것도 행복을 찾아서였다. 우선 본인들이 행복해야 손님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월든 호숫가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궁구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탐구하는 자세는 그 못지않다.
늦은 오후의 볕이 내리쬐는 호숫가 둘레에 봄까치풀꽃이 여기저기 보랏빛 고개를 내밀었다. 얼마 안 있으면 집 주변을 뒤덮을 진달래꽃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부부의 얼굴에도 봄볕이 내렸다.
첫댓글 남자들 술 안주로 딱이겠네요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