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자기 비참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게 아니라면 신앙생활은 짐스러운 거다. 동아리나 친목 단체에는 사정에 따라 안 나가도 괜찮은데 신앙은 완전한 신뢰와 종속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당이 아니더라도 봉사하고 사회 정의와 평화, 약자 보호, 환경 보호 등 좋은 일을 하는 단체나 기구들도 많아서 여기저기서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정말이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면, 예수님처럼,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성당에 나올 필요 없다.
영원한 생명이 아주 오래 사는 게 아닌 거라는 거쯤은 다 안다. 죽은 다음에 다시 사는 거, 영화에서 그리는 그런 삶도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고 그분과 아주 친해져서 그분처럼 되는 거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고백하셨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이번 주간 영성체 후 기도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기도 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거다. 하늘나라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일곱 마귀가 지배하던 삶을 청산했고(마르 16,9; 루카 8,2), 성모님 다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처음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성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그런 일들을 겪은 성인에게 죽음은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을 거다. 성인의 지독한 예수님 사랑은 세속에서 뮤지컬이나 영화의 소재가 되는데, 성인이 예수님께 완전히 빠졌기 때문일 거다.
극(極)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성인의 삶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그 후로 나뉜다. 두 극단은 일곱 마귀의 지배를 받은 삶과 하느님에게 빠진 삶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성인의 삶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을 거고, 그 후에는 죽음의 독침도 그를 쓰러트릴 수 없게 됐다.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 비참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거 같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한 다음 깨닫고(루카 15,17), 닭 울음소리에 울었던 베드로 사도가 깨달은 그것과(마태 26,75) 같은 것이겠다. 하느님이 아니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몰라야 가르칠 수 있고, 힘을 빼야 익힐 수 있고, 죽어야 살 수 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예수님, 막달레나 성인은 아마도 성모님 다음으로 제일 주님을 사랑했을 거 같습니다. 성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꼭 붙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뵙고 놀라고 의심도 했던 거와 많이 다릅니다. 제 비참함을 깨닫고 성인처럼 주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픈 아들을 간호하는 엄마처럼 제 영혼을 돌보아 주셔서 제가 주님을 더 가깝게 만나게 해 주소서. 아멘.
[구속주회 한국지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