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봄 / 우남정 우중충한 참나무 숲이 순간, 일렁인다 검은 망토를 들추는 바람 보굿이 꿈틀거린다 짓무른 땅에서 누군가 주검을 밀고 깨어난다
까칠하던 나뭇가지가 반지레해졌다 화살나무 허리춤에 푸른 촉이 장전되었다 물오른 꽃봉오리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숨죽이고 있다
봄은 뱀파이어처럼 온다 저 산벚나무 피가 낭자하다
Let me in* 불면으로 누렇게 튼 산수유 입술에서 노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의 사랑은 늙지 않아요 꽃나무 아래 나의 목덜미가 창백하다 *뱀파이어 영화 제목
- 시집 『뱀파이어의 봄』 (천년의시작, 2022.11)
* 우남정 시인 충남 서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다시올文學』 신인상 수상,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김포문학상 대상 수상,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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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상투적인 봄의 문법을 뒤집는다. 작년에도 왔었을 상춘객들의 익숙한 탄성이 뒤엉킨 발걸음에 짓밟힌 봄은 가설무대에 불과했다. 위 시에서 화자는 가설무대에 불과했다. 위 시에서 화자는 가설무대의 익숙한 장막에 가려졌던 ‘뱀파이어’를, 즉 봄의 감춰졌던 민낯을 무대에 세운다. 뱀파이어의 이미지인 “검은 망토”와 “주검” 그리고 “피”는 이전의 대본에 없던 무대장치이자 소품이며 연출효과이다. 이로써 익숙했던 봄의 장면은 균열이 생기고, 검고 붉은 원색으로 채색된다. 누군가는 그 강렬한 이미지로 인해 “불면”의 밤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밤이 가장 긴 계절”(「햇살마루」)이라는 점을 알게 되리라.
“순간”의 일렁임이 낯선 무늬를 만들고 “바람”이 망토를 들추듯이, 그렇게 밤의 장막을 뚫고 ‘날 들여보내 줘.’(“Let me in”)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위 시의 클라이맥스가 열린다. 거친 껍질 안에서 농익은 “노란 탄성”이 마침내 터져 나오고, “산수유 입술” 아래에서 창백한 “목덜미”를 드러낸 화자인 ‘나’의 얼굴은 조금씩 상기되었을 것이다. 꽃나무에 습격을 당한 얼굴,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려 창백해진 얼굴은 서서히 입을 벌려 이곳이 모르는 문법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더는 겨울/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사라진 “나의 사랑은 늙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이로써 불씨처럼 살아나기 시작한다.
― 정재훈 (문학평론가) / 《아토포스》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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