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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3. 신약의 세 번째 인용: 야고보서 2장 23-24절!
(2) 왜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는가?
5)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된 독자적인 해석!
●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칭의는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다!
나) 현재의 칭의에 대한 몇 가지 추가적인 설명!
ㄷ) 현재의 칭의는 칭의를 계속해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저는 약 2년 전 야고보서 2장 21-25절의 의미를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해석을 통해 뒤집혔고, 다시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이 뒤집히면서 처음 해석이 기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해석을 토대로 야고보서 2장의 해석을 완성한 지 이틀 후였습니다.
우리 교회 인터넷 카페의 한 회원님이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이라는 신문기사를 제게 메일로 보내왔습니다. 그것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면까지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저와 견해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바울은 로마서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
그러면 그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하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 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 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인 80세라고 가정해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4:19-22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의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1-23) 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세기 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세기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 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세기 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나이 80세, 100세, 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를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은 더굳뉴스 2020년 4월 9일자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예장 합동 서울반석교회 황정길 원로 목사님의 견해를 기사화한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너무 신기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것은 저의 독자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과 '성령이 주시는 내적 증거'를 통해서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확증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제게 확증처럼 느껴졌습니다. 황정길 목사님의 견해는 큰 그림에서 저와 놀랄 정도로 일치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가지 점이 다릅니다.
A)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처음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
저는 이 설교의 초반에,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이 아니라 12장에서 첫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12장과 히브리서 11장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확증해드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그렇듯 황정길 목사님도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처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소한 것이긴 하나 이것은 저와 견해가 다릅니다.
B) 이미와 아직이 아니라 현재 칭의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황정길 목사님은 칭의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세 번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만 보고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와 다른 점이며,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a. 아브라함은 세 번 칭의를 받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처음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창세기 15장 6절에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바울이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 인용했습니다. 또, 로마서 4장 22절에 따르면 100세 때에 아브라함이 후손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었고(18절)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총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이지요!
그런데, 야고보서 2장 21절은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14절)이라는 문구가 보여주듯이, 믿음에 행함이 따라야 된다는 것과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라합의 생애 중 가장 행함이 두드러지는 사건을 예로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 이때로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때만 순종했을까요? 아니지요. 믿음이 약해지고 의심할 때도 있었지만, 항상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때도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습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사는 한, 어느 때나 그 표현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단락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루는 야고보서를 연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단락에 나오는 행함이 복수 아니야? 복수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시 '전부 행함들이 아니라 행함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22절에서 말한 대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됩니다. 참 믿음도 처음부처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것 같은 최고 수준의 순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들을 통해 점점 자라서 그 수준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행함이 복수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수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원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행함"의 헬라어 "에르곤"이 명사복수형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에 나오는 "행함"은 단수여야 하는데, 이것도 복수였습니다. 또, 라합의 순종을 설명할 때 사용한 "행함"도 단수여야 하는데 복수였습니다. 둘 다 하나의 순종을 예를 든 것인데 복수라니 희한하지요!
과연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저는 이것이 야고보가 두 가지를 예로 들기는 했지만, 단지 그때의 행함이 아니라 믿고 난 후 지속적으로 나타나야할 행함들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예로 들었음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의 의도는 그때 아브라함이나 라합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과 그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은 그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사는 모든 순간에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세 번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b. 우리가 칭의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단락이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현재의 칭의를 다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다시 칭의를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칭의는 '일반적으로' 단회적인 것이며 반복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나 21절과 25절에 분명히 그때 칭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분명히 성경에는 이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때 다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히브리서를 사용해서 여러분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만약 뒤로 물러가면 어떻게 될까요? 39절에 보면 뒤로 물러가면 멸망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취소되고 칭의의 상태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칭의를 받았다고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유지돼야 칭의가 유지됩니다. 즉,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칭의가 없어지고, 믿음으로 살아야만 칭의가 계속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때 칭의를 다시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결과가 의롭다 함입니다.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매 순간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그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분들은 "그렇다면 표현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때 의롭다 함을 다시 받은 것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점이 모이면 선입니다. 점만 하나 있을 때는 점이지만 점이 계속 모이면 선이 되고, 선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지속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가 말한 현재의 칭의를 칭의를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유지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가 뒤로 물러가면 칭의가 없어집니다. 때문에 그때 칭의를 다시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면 칭의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의롭다 함을 받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그러므로 칭의를 다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만약 칭의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다시 칭의를 받아야 한다면 칭의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칭의를 뭐하려고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칭의를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칭의가 유지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 저는 앞에서 칭의는 "일반적으로" 단회적인 것이며 반복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칭의를 단회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반적으로"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배교하거나 타락하여(바울이 말한 대로, 양심을 버리므로 믿음이 파선해서) 버림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히브리서 6장에 나와 있듯이, 다시 회개할 수 없는 타락과 회개할 수 있는 타락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한 네 가지를 경험하지 않고 배교하거나 타락한 경우 회개가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 다시 회개하고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반적으로"라는 단어를 첨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배교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신자들은 다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의롭다 함이 유지될 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배교하거나 타락한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21절과 25절의 "의롭다 하심"은 다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의롭다 함이 취소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또, 14절이 잘 보여주듯이 이 단락의 주제는 다시 받는 칭의가 아닙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 계속 믿음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것과 신자들 중 하나님이 누구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여기고 의롭다 하시는가가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처음 믿을 때 의롭다 함을 받고, 이때 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는 칭의를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유지된다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구절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1-22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한복음 15:4-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또, 사도행전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또,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구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골로새서 1:22-23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골로새서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리고 요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일서 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이 모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가 될까요? "뒤로 물러가지 말라!"가 됩니다. 때문에 저는 이 구절들이 우리가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 때 다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의롭다 함이 유지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유지되는 것이지 다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롤랜드 벅 목사님이 받은 계시를 통해 확인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대속에 관한 말씀은 놀랍도록 감동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를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풀어놓고자 하는 말씀 중에 하나로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전파되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대속'이 지닌 사전적인 의미는 '덮다'입니다(히브리어로는 'kaphar'로 '덮다, 취소하다'의 뜻이고, 헬라어로는 'katallage'로 '교환하다, 화해하다'의 의미를 지님). 가브리엘 천사는 저에게 이 '대속'의 중요성과 역할을 설명해주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제가 그릴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아래의 그림이 보여주는 '대속'의 진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 그리고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모두를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저를 만나러 올 때마다 이 메시지에 대해 반드시 언급을 했는데, 이 점에서 이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를 완성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오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심장부에는 바로 이 '대속'의 원리가 있으며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토대 역시 이 '대속'의 원리가 있으며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토대 역시 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감동을 강하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전함으로써 이 말씀이 듣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지기를 원하시며 또 그들이 나가서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이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림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아치가 있습니다. 이 아치는 우리 위에 덮여 있는데 '대속', '덮으심', '그리스도의 보혈'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아치 위에는 하나님과 그분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관점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아치 아래에는 인간과 인간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적혀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죄인이고 흠이 많으며 무가치한 존재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이와 다릅니다. 그분은 인간을 바라볼 때 반드시 '대속'을 통해서만 바라보시기 때문에 인간을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책망할 것이 없는 존재로 여기십니다(골 1:22). ...
'대속'에 관한 이 환상을 보는 동안 가브리엘 천사는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통해서 완전한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돌보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면 결코 마음의 눌림을 겪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예수님과 그의 희생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예수님과 동일하게 보신다고 말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것과 다른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에 관한 진리이며,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롬 11:22)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진리뿐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진리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둘을 통해 균형을 잘 잡고 성경을 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수의 설교자들과 달리, 감사하게도 롤랜드 벅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자뿐 아니라 엄위에 대한 진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의 하나님이기만 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죄에 대해 분조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 죄에서 돌아서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 않고 단지 그 죄만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속의 은혜 속에서 안전함을 누림과 동시에 그 죄악들을 스스로 버리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마련된 '대속'이라는 안전한 장소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보호하심이 미칠 수 없는 영역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신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죄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수와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 '(막 7:20-21)
실수가 계속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가 되고 그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덮여지지 않습니다. 실수가 사라질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그래야 예수님의 보혈이 효력이 있습니다.
' ...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저는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토록 보호하셨는데 왜 그들은 계속해서 벌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설명하셨습니다. '나를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나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게 하는 두 가지 죄악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호하심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그 보호하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본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벌주고 멸하셨던 때는 언제나 그들이 나에게 불순종함으로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했을 때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 아닌 다른 것에 그들의 믿음을 두게 될 때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는 순간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결점 그리고 실패함을 보게 되십니다.
우리의 죄악은 모두 어린양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우리를 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면서 죄가 아닌 거룩을, 결점이 아닌 흠이 없음을, 실패가 아닌 완전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함으로 그분의 보호하심 아래로 들아가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간절히 바람으로 우리 심령의 생각과 의지까지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보호 아래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분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거역하는 죄와 우상숭배입니다."
이 간증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면서 예수님 안에 거하면 절대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믿을 때 받은 칭의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의롭다 하심"은 그때 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의롭다 함이 계속 유지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확실히 아시겠지요!
끝으로, 제가 야고보서 2장 21-25절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은 약 2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린 것은 2020년 4월 9일자 기사입니다. 그러므로 그 원로 목사님이 아브라함을 여러 번 의롭다고 하신 성경의 표현을 저보다 먼저 캐치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록 제 견해와 두 가지 차이가 있지만 저는 그것이 놀랐습니다. 또, 길어서 다 소개하지 않았지만 칭의와 성화가 불가분리라는 것과 예수님을 구주로만이 아니라 임금으로 영접하는 참 믿음을 요한복음 1장 12-13절로 설명한 것은 저와 완전히 똑같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이 분이 내 책을 읽어보신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흔치 않은 것인데 로마서 6장 6-7절에 대한 해석도 큰 틀에서는 저와 같습니다. 그래서 놀라웠고 진실로 감사했습니다.
주님, 진리를 정확하게 깨닫고 이해하는 분들이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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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랜드 벅 목사님이 천사로부터
계시받은 '대속'의 원리를
그림으로 나타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