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철학하기 - 마음속 호수와 익숙한 낯섦에 관해
2021101225 사회학과 조민수
낯선 철학하기. 철학은 잘 모르지만 ‘낯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낯섦은 항상 다가올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자뷔’는 항상 나를 놀라게 했다. 내 인생에서 데자뷔는 무언가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이 퍼즐을 맞춰서 규칙성도 없이 무작위로 다가왔다. 익숙한 일들이 충격적일 수 있다는 그 모순된 개념이 마음에 들었다. 익숙한 낯섦은 살아온 인생에서 수도 없이 겪어왔다. 데자뷔로 미루어봤을 때 익숙한 낯섦은 내 삶에 충격과 신비로움이었다.
익숙한 낯섦을 반복하여 느끼는 예시는 데자뷔였으나 일회성으로 느꼈던 낯섦은 많았다. 예로 다리가 다쳐서 목발을 짚으면서 걷고 있었던 적이 있다. 항상 보던 풍경인데 다른 사람보다 느리게 걸을 수 밖에 없을 때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나 간판 색상을 처음 보게 될 때가 있었다. 내가 다리를 다친 상황이 없었다면 이런 감정을 못 느꼈겠지. 내가 원래의 속도보다 느리게 걸을 상황이 없었다면 주변에서 익숙한 낯섦은 못 느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같았다면 익숙한 낯섦이 아니라 그저 익숙함에서 끝났을 텐데. 슬리퍼를 신었으면 익숙함에서 그쳤을 텐데. 평범한 나날들을 보낼 때에는 거의 익숙한 낯섦을 느끼지 못했다, 오른발에 깁스와 발목이라는 옵션과 ‘다친 상황‘과 ’속도‘라는 변수가 만들어 짐으로서 익숙한 낯섦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일련의 선택들과 과정을 통해 삶은 그 자체로 의미을 지니는 것이다. 또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첫걸음을 내딛거나 성장할 수 있음도 배웠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는 ‘마음의 호수‘라는 가상의 공간에 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담아두곤 했다. 생각날 때 마다 마음의 호수에 있는 울분을 풀어 헤치고 시간이 지나서 호수에 있는 시련들을 꺼내보면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최근에 호수에 던져놓은 ’군대‘를 꺼내어서 생각해 봤는데 군대에서도 익숙한 낯섦을 느낄 수 있어서 이를 주제로 글을 전개해볼까 한다.
1. 군대와 낯섦
살아오면서 익숙한 낯섦을 많이 느꼈던 곳은 사회가 아닌 군대였다.
군대는 입대하는 날부터 모든 게 낯설지만 익숙했다.
스무살, 처음 가본 충청남도였지만 친구와 함께 입대를 해서 그리 낯설다는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검정치마- love shine 노래 가사 中
내일이면 나를 버릴 사람들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내일이면 난 다시 바다 건너에
홀로 남을 그대는 괜찮나요
평소에 자주 듣던 노래를 입대하는 날에도 들었다. 평소였으면 멜로디만 흥얼거렸을 노래였지만 처음 와본 논산역과 곧 바로 입대한다는 상황이 겹쳐져서 가사가 하나하나 서글프게 들렸다. 그렇게 2021년 11월, 사회에서의 마지막 스무살을 보내는 법은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2. 반복의 익숙한 낯섦
군대에서 복무를 할 때 대부분의 날을 중간에 자다 깨서 불침번을 섰다. 불침번 근무를 하는 장소는 이등병 때부터 전역할 때까지 똑같았다. 흰 콘크리트 벽 가운데 중앙 복도에 서서 1시간 40분 가량을 정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을 만큼 지겨우면서 적응이 안 됐다. 항상 불침번 근무는 내게 공포로 다가왔다. 500일이 넘게 자다 깨서 군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새벽을 보내야 한다니... 흰 콘크리트 벽에 천장에는 밝은 전등을 두고 무표정으로 서 있는 내가 너무 낯설었다. 꼭 불침번을 설 때 마다 군인의 나를 침대에 두고 연기자의 가면으로 갈아 끼운 채 밝은 조명 아래의 무대를 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으로서의 나는 불침번을 서는 장소는 항상 반복되고 질릴 만큼 익숙한 장소지만 그곳에 서 있는 연극 자인 나는 나의 무대의 내가 반복될 때 마다 무섭고 낯설었다. 군대에 간 상황과 새벽의 시간이라는 변수가 더해서 내게 이런 익숙한 낯섦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3.가족사진과 익숙한 낯섦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요소에는 뭐가 있을까. 휴가를 나와 집에서 6살 쯤 여름에 집 근처 공원에서 가족끼리 찍은 사진을 군대에 가져갔다. 사진을 항상 복무하면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어느 날 4박 5일 간 훈련을 하러 진지로 나갔다. 제주도에서 한 평생을 살아왔기에 영하 20도 가량의 추위는 처음이었다. 밤에 라이터를 빛 삼아 가족사진을 꺼내 보는데 가족사진에 웃고 있는 부모님과 내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질리도록 가봤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인데. 저 공원이라는 장소가 과연 실존할까? 내가 최근에 실없는 농담에 웃은 것 말고 저렇게 행복하게 웃은 적이 있었나? ‘지금은 옷을 8.9겹 입어도 추운데 반소매만 입고 있었구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사진과는 정반대의 내 상황과 겹쳐 보이면서 사진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보였다.
4.마무리하며
익숙한 낯섦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뚜렷하고 명확하게 느낄 수도 있구나. 데자뷔처럼 일시적으로 끝나는 환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데자뷔는 작은 변화에 불과했지만 겨울의 가족사진은 큰 변화로 다가왔다. 내게서 내재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와 그때의 추운 겨울을 감정의 호수에 담아뒀다. 삶을 나아갈 수 있는 지표로서 내게서 일어나는 큰 변화는 어떤 형식으로 다가올까. 그때의 겨울 이후로 어떤 선택을 해야 익숙한 낯섦에 의한 뚜렷한 충격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또 어떠한 내재적 변화와 충격을 호수에 던질 수 있을까. 여러 질문을 메아리쳐 보며 글을 마친다.
첫댓글 처음 대하는 것들에서는 대개 낯설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들 말합니다. 개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낯선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면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답니다. 기후라든지, 장소라든지, 상황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이내 익숙해지고, 그것에 대한 경계를, 그리고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요소 가운데 하나가 변하면 다시 낯설음을 느끼게 됩니다.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상황이 펼쳐지면 "원래 이랬어?"라고 자신에게, 상대에게 되물어봅니다. 그런데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상대가 당혹스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항상 경계하고 사는 것은 아닐 뿐더러,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익숙함은 좋습니다. 하지만 익숙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를, 의미를,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때때로 낯설게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