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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나라 왕징(王徵)의 자는 양보(良甫), 호는 규심(葵心)이다.
벼슬은 첨사(僉事)에 이르렀다. 관서(關西) 사람으로 갑신(甲申)에 순절(殉節)하였다.
그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의 서문에
“내가 성(省) 안의 땅속에서 비석 하나를 파냈는데,
비의 이마에 ‘경교유행중국비송(景敎流行中國碑頌)’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는 바로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가 새긴 것으로
1천 년이 지났으면서도 어제 만든 것처럼 새로웠다.
이 비의 내용이 지금 전하는 천주(天主)를 공경하는 교와
하나하나 모두 같아서 부절(符節)을 맞춘 듯하다.
여기 실려 있는 것이 당 태종(唐太宗) 이후의 여섯 임금인데
서로 이어받아 높이고 공경한 것이 매우 독실하였으니,
지금 뿐이 아니라 옛날에도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하였다.
매문정(梅文鼎)의 자는 정구(定九)이고 선성(宣城) 사람으로
청(淸) 나라 강희(康熙 청 성조(淸成祖)의 연호) 연간의 공생(貢生)이다.
그가 지은 《역학의문보(曆學疑問補)》에 말하기를
“서양 사람도 처음에는 회회교(回回敎)처럼 불교를 섬겼다.
당(唐) 나라 때 파사국(波斯國)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대진사(大秦寺)를 세웠으므로
지금 전해오는 경교비(景敎碑)라는 것에 그 사람 스스로 ‘중[僧]’이라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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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학대는 중국언어문화콘텐츠학과 임영택 교수가 한국연구재단 2020년도 인문사회 분야 ‘명저번역(名著翻譯) 지원사업’에 선정돼 그간 수행해왔던 '大秦景敎流行中國碑--大秦景敎文獻釋義'(대진경교유행중국비—대진경교문헌석의)’(吳昶興-臺灣-2013년)의 한국어 번역서가 출간됐다고 5일 밝혔다.
서울신학대는 본 역서가 경교(景敎) 연구자, 기독교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학술적 목적 중 하나의 중요한 기초 자료로 제공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고 밝혔다. 역서에서는 원저자인 吳昶興교수조차도 경교 원전 문헌들에 대한 현대중국어 해독을 하지 못하였으나 임영택 교수가 각 경교문헌들에 대해 상세한 해석을 더했다.
임 교수는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 때에 이미 경교(景敎)라는 모습으로 전래돼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고 후에 원대(元代)까지 교세가 활발히 확장되었던 사실을 오늘날 새롭게 인지할 수 있으며 또한 중국 전래 초기 기독교의 면모를 여러 문헌과 사적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귀한 통로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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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실크로드 동방기독교 학술세미나가 10월 7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실크로드동방기독교연구소(소장:김규동 박사) 주최로 열렸다.
‘몽골제국 고대기독교 발전사’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연구소장 김규동 박사(광신대 초빙교수)를 비롯해 김영일 목사, 이경운 목사 등 한국인 강사와 쵸카, 두거리마아, 아마르사이칸 바자르 등 몽골인 강사 등이 여섯 차례 강의를 인도했다. 김규동 박사는 ‘당(唐)·원(元) 시대의 기독교 발전사(907∼1279)’를 강의했으며, 김영일 목사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나타난 메시아론에 관한 고찰’, 이경운 목사는 ‘아시아의 기독교 경교(동방기독교)’를 강의했다.
GMS 선교사이기도 한 김규동 박사는 “지금까지 동방교회를 연구하는 학자는 극히 드물었고, 미약했다. 더욱이 현재 우리 아시아의 토양은 서구화로 인해 자문화에 대한 인식과 사유체계가 무너졌기에 새로운 학문적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라며 “실크로드 동방기독교 학술세미나를 통한 학문적 접근은 후일 아시아의 뿌리 깊은 영역에 도달하여 복음의 토착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의의를 밝혔다. 김 박사는 이어 “한때 몽골제국 시기에 기독교가 이 몽골땅에서 얼마나 큰 선한 영향력을 펼쳤고, 또한 부작용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며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며 “이를 통해 초기 안디옥교회가 가졌던 순수 복음선교의 대열에 우리 역시도 재합류하여 아시아 기독교 문화의 기류를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초석을 이루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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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대학교와 하베스트대학교, 고대아시아기독교연구소 등이 협찬한 세미나는김영일 목사가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나타난 메시아론에 관한 관한 고찰”을 발표했다. 또한 이경운 목사가 “아시아의 기독교 경교(동방기독교)”룰 주제로 발표했다.
UBTS 신학교 김규동 박사는 “唐‧元代之間의 기독교 발전사(907-1279)”에 대해 발표했다.
이밖에도 쵸카 박사가 “몽골제국과 케레이드 부족”에 대해 발표했다.
“몽골제국과 케레이드 부족”에 대해 발표한 Chuluunbat 쵸카 박사는 “몽골 땅에 흩어진 투르크(돌궐_의 기념비석에 대한 연구와 동방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했다.
그는 “투르크 기념비석은 10~13세기. 적어도 몽골제국 성립 이전 8~10세기에 특히 헤레이드, 나이만, 웅구드 부족 등의 지역에 정착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고 했다.
이어 “위에 언급한 부족들의 영토 위치, 투르크 기념비석의 디자인 묘사 등을 보면 당시 기독교의 기초인 세례, 성만찬의 흔적을 볼 수 있다.”며 “그 당시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대개 종족 우두머리인 제사장이 성찬식 때 오른 손에 잔을 들고 있으며, 그 뒤로 4개의 돌로 된 벽들은 물세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러한 장소나 소위 투르크기념비석은 10~13세기 몽골제국 전역에 발전해 온 네스토리안 동방 기독교 교회 중의 주요 의식인 물세례와 성만찬을 묘사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 제사행위가 이루어졌던 현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唐‧元代之間의 기독교 발전사(907-1279)”에 대해 발표한 김규동 박사는 “당말기, 경교가 순식간에 중원에서 소멸된 듯 했으나 뜻밖에 북부 닝샤(寧夏)에서 기사회생하여 원대(1279~1368)까지 절정에 맞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궁금했던 부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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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경교유행중국비(경교비) 건립은
AD 781년 덕종 때인 건중(建中) 2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AD 635년 태종 정관 9년에
알로펜 주교 일행 21명이 당나라에 입국하여 150여년 만에 한 시대를 정리했다.
그때 당나라 크리스토교는 “황금기”였다. 절정의 시대를 직감했을까?
만월처럼, 그래서 그때도 민간에 회자되었을 말,
달도 차면 기운다까지 그들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나라 크리스토교가 마치 스스로에게 내린 훈장처럼 ‘경교비’를 만들었다.
높이가 279cm, 폭 99cm, 두께는 30cm인 걸죽한 품새였다.
여기 32행간에 각 행마다 62자의 한자 1,984자로 적어 넣은 문장과
고대 수리아의 문장도 40여 개나 함께 쓰여 있다.
비석문에는 당시 대덕(大德)으로 호칭했던 당나라 경교의 주교가 70명,
일반 성직자인 승려들 이름도 나온다.
화려 찬란한 7, 8세기를 승세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 시대를 가늠해 보았을 것이다.
로마 크리스토교 중심에서 밀려났으나
오히려 먼 앞날에는 세계 종교사의 중심이 될 아시아에서 예수의 복음을 꽃피우기 위하여
제자들을 에뎃사(현 터키 산우르파)에 집결하게 하여 아시아로 진군시켜 점차 유라시아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네스토리우스의 크리스토교 운동이 아시아의 중심부인 당나라 심장부에 터를 잡았다.
다위드 총주교는 장안을 떠났다. 그는 3년 전부터 교단의 지휘를 사실상 놓고 있었다.
수리아 출신 아시후 주교에게 행정수반의 자리를 넘겼다.
그는 북경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최종 결심을 말했다.
“그래, 그럴 거야. 내 아들 다위드는 교단 상층부에서 결재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아깝지.
우리 사마르칸트로 함께 갔으면 하는데, 생각 좀 깊이 해봅시다.”
실비아가 요수아를 바라보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래, 나는 지금 떠나도 될 만큼 준비가 되었어요. 나이가 많다고 누가 걱정할지는 몰라도 나 지금도 계속해서 다섯 시간 성경강의를 할 수 있어요.”
다위드가 어머니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장안으로 돌아가서 요한과도 상의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실비아가 다위드에게 말했다.
다위드는 부모를 모시고 장안을 행해 길을 떠났다. 그는 교단이 급속하게 팽창 하면서 지도자 노릇이 싫어졌다. 급속한 팽창 기간이 10여년 내외가 되지 않을까. 당나라 주민들의 호응도 좋아졌으나 페르시아나 시리아 출신 주교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다위드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공부하고 싶었다.
성경을 더 깊이 알고 제자 한 사람을 길러도 시간을 두고 가르칠 환경을 그리워했다.
다위드는 장안에 와서 아들 요한과 단 둘이 깊이 있는 대화를 했다.
“아버지, 그동안 너무 혹사 당하셨어요. 저는 아버지가 종신직이신 총 주교직에서 벗어나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만 교단의 분위기가 알로펜 시대로부터 이어오던 전통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합니다.”
“너의 눈에 그런 모습이 보이다니 내 아들이 많이 컷구나.”
“아버지, 앞으로는 저에게 아버지께서 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를 다 가르쳐 주세요.
저는 요즘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고통하고 있어요.”
“그러냐? 그런 갈증은 평생이면 더 좋다. 사실 너도 생각해 봐라.
이곳 당나라에 공자, 노자, 맹자, 장자 그리고 수많은 선생들이 있는데 그들은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들 스승들인 선지자나 사도들은 가르치기보다는 자기 배움에 세월을 다 보내지….”
“그건 왜 그럴까요?”
“이 나라는 사람에게 배우고 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배우니까 다르지 않겠느냐.”
“그런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으니까 우리 기독교 또한 하나님께 직접 배우는 교육법을 따라야 하겠군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하나님에게 직접 배운다는 자세를 가지면 그들은 다 성공할 수 있지.”
“하나님께 직접 배운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그래 그 말도 맞다. 불가능에 가깝지. 우리들의 과거나 현재 지도자들이 불가능한 것을 너무 쉽게 아는 체하니까 실패하는 거야 생각해 보거라. 전에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느니라. 구약 예언자들은 대부분 평생 걸렸어. 난 말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주목해서 살펴보는 데 그분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예언을 했어.
그리고 그 예언의 후속 예언, 곧 답변이라고 할까 아니면 해석이라고 하는 말씀을 이사야서(53장)에 해놓았는데 이사야서 (예수의 탄생 예언) 7장과 (예수의 탄생) 53장의 시공간의 거리는 몇 년쯤일까?
1백 년이 넘을 거야. 나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
요한은 답을 못했다.
“그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식 전달은 쉽지 않거늘 하나님의 가슴 속 진리를 쉽게 터득하겠느냐?”
“그렇군요. 아버지. 이제 더 정확하게 알았어요. 아버지가 70여 명의 주교단을 거느리는 최고 지도자 자리를 3년이나 계속해서 그만 두겠다고 사양하시고, 이제는 왜 초야에 묻히겠다 하시는지를 알겠습니다.”
“그렇다. 진리! 내 몸 내 뼈 속에 아로새겨지는 수준의 자세로 몸을 낮추고 배워야 만날 수 있는 진리는 하나님이시다. 아 참, 아들아 너 대속죄(代贖罪) 교리에 대한 자신이 있느냐?”
“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할머니께 다시 학습했어요.”
“그래, 그럼 어디 말해 보거라.”
“주 예수 십자가 죽으실 때 그의 피가 나의 모든 죄, 원죄까지도 깨끗케 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가르침입니다.”
“틀렸다. 너는 너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교리책을 낭독했어. 그건 너의 믿음이 아니라 공중에 떠다니는 임자 없는 지식일 뿐이야.”
“…….”
요한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좀 심하게 말했느냐?”
“…….”
그래도 요한은 말이 없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다위드(총주교)가 일어섰다. 아들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아버지여, 요한을 도와주소서.
대속죄의 은혜가 쉽게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사오나
이는 주께서 주신 은혜가 분명하오니 대속의 은혜가 쉽게 내 경험으로 감지되지 않았다
해서 그것이 나의 불신앙이 아님 또한 가르쳐 주소서.
그러나 주여 대속죄 은혜는 충분히 준비된 자,
이미 자기 목숨을 주 예수께 내어 맡긴 자, 속된 욕망에서 해방을 받은 자가 아니면 감당하기가 어려운 경지임을 알게 하소서.
마치 주 하나님 가슴 속으로 내가 뛰어드는 경험과 같은 것이고
그래서 자칫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드는 순간의 경험도 할 수 있는 신비의 지경 임을 알게 하소서. 주여 요한이 온전히 담대함으로 주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소서 아멘.”
다위드는 요한을 남겨두고 부친 요수아에게로 갔다.
“부자 간에 대화를 많이 했는가?”
요수아의 말이다.
“대속죄 이야기를 했는데 요한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갔습니다.”
“그렇겠지. 대속죄 교리는 너무 어려워요. 그 내용이 어려운 게 아니라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어느 정도의 분위기에서 꺼내느냐가 말이지 어렵더라….”
“그렇죠. 우리 기독교가 대속죄에 대한 가르침을 너무 성급하게 하다가 싸우고 등을 돌리고, 죽이고 무서운 저주를 퍼붓고 있죠. 이는 그들이 대속죄 신앙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그들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속죄’란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 또는 하나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신의 경지로 올라가는 듯한 영적 상승을 하는 것이죠.”
“그렇지, 그게 적절한 표현이죠.
사실은 지금 우리 네스토리우스 교단도 내적 청결이 필요한 때야.
사람들이 너무 붕 떴어요.
마치 우리가 당나라 주인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니 걱정이예요.”
“저희가 기도해야죠. 장안에는 요한을 남기고
저는 코초에서 제자들을 기르겠으니 부모님은 사마르칸트에서 제자들을 기르시죠.”
다위드의 말이 끝나자 요한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말했다.
“저는 코초로 가서 다위드 주교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응, 그러냐. 우리 부부도 다위드 총 주교님의 애제자가 되어 다시 공부하련다.”
요수아가 큰소리로 말하자 실비아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저도요. 내가 다 늙었지만 다위드를 보고 있으면
사마르칸트의 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다니까….”
다위드는 웃으면서 모친 실비아를 부축하며 자리에 앉게 했다.
“요한이 오늘 아버지께 복음의 진수를 배웠다며?”
요수아가 요한을 자기 가까이로 불렀다.
“네, 저는 오늘 뿐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배울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주님이 도와 주실거야.”
실비아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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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敎景)의 중국 전래의 근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중국 당나라 덕종 2년(서기 781년)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경교(경교(敎景)의 중국 전래의 근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중국 당나라 덕종 2년(서기 781년)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문(大秦景敎 流行中國碑文)》
경교(敎)는 1400여 년 전인 서기 635년 당(唐)나라 태종 때 중국의 장안(長安, 서안西安)에 전래된 동부 시리아 지역의 기독교를 지칭한다. 동부 시리아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네스트리우스의 신학을 수용했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교회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교회는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 페르시아교회, 동부시리아교회, 앗시리아교회 등으로도 불렸다.
한편, 아라본 일행의 중국 내도 이전인 5세기 중반부터 이미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정욱, '예루살렘에서 장안까지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경교 문헌과 유물에 나타난 중국 종교의 영향에 관한 연구』 (한신대학교출판부, 2005)52-56.: 서원모, "당대의 경교와 동아시아 문화" 15.)
서기 635년에 아라본(阿羅本)을 단장으로
시리아교회 선교단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에 이르렀다.
아라본 일행이 중국에 처음으로 내도(來到)한 해는
당 태종이 이(異)종교에 대해 포용정책을 펴고 있던 시기여서
아라본 일행을 크게 환영하였고,
그들이 중국에 온 지 3년이 되던 해인 638년에는
황제가 직접 조서를 내려 그들의 포교활동을 허용하였다.
이어서 장안의 의녕방에 토지를 내주고 대진사(大秦寺. 로마 교회)를 세워,
21명의 경교 사제(司祭)를 등적시켜 상주토록 하였다.
따라서 경교 사제들은 당 태종의 어진을 대진사 교당 내에 걸고 활발 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당 태종의 모친은 열심 있는 경교도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중국에 전래된 경교는 650년에서 841년까지
당나라의 12명의 황제 치세를 거치면서 중국 전역의 10도와 385주에
경교의 교당을 세우는 놀라운 중흥을 이루었다.
한편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는 고구려가 멸망하여 통일신라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삼국의 대당(對唐) 교류가 활발했던 때였다.
이처럼 당나라 황실의 도움을 받으며 활발하게 부흥하던 경교는 당 고종의 사후(死後),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박해(713년)를 시작으로,
도교 신봉 자인 무종(武)의 박해(845년), 황소(巢)의 난(879년) 등을 거치면서
극심한 탄압으로 경교 사제 6·7백 명이 환속되고, 교도 3만 여명이 학살되었다.
그 박해로 잔존 교도들은 중국 북방의 몽고(蒙古) 초원과 만주 등의
변경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 결과 몽고의 주변지역인 알타이 산맥 부근의 돌궐족, 헤프탈족, 위구르,
타타르, 케레이트족 등에는 칭 기스칸이 출현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경교가 전파되어 있었다.
당시 초원에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케레이트의 군주 토오릴과 테무진(칭기스칸)의 부친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여서, 그로 인해 칭기스칸의 가문은 경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내몽고의 오르도스 지역에는 20세기 중엽까지 경교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Walter Heissig. 『몽골의 종교』(Die Religionen der Mongolei), 이평래역 22.8 Mostaert, A, Ordosica, Peking (reprint from Bulletin, No.9 (1934) of the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1934 )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고려 말기 7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공 시기에
한반도 지역에도 경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특히 고려 말 충렬왕 26년(1300년) 10월에는 원나라의 경교도로 알려진
할리길사(闊里吉思)가 고려의 정동행성(征東行省) 평장정사(政事)로 부임 하였다.
당시 평장정사는 고려 후기 원나라가 설치하였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1품, 정원은 2인이다. 원의 행성 관제에 의하면 장관인 승상의 바로 아래 관직이며,
특히 1320년(충숙왕 7)부터는 모든 행성의 승상이 혁파됨으로써 각 행성의 최고관직으로 되었다.
그는 대대로 내려온 고려의 노비제도를 혁파하려 시도하였으나,
고려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간 일이 있다.
오늘날 연구자들 중에는 이 사건을 경교의 고려 말기 전래설의 중요한 단초로 보기도 한다.
고려 고종이 붕어하자. 1260년 3월,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세조)는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의 세자 왕전, (元宗, 재위 1259-1274년)을
고려의 왕으로 일방적으로 임명하여 귀국시켰다.
그 후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과 고려 태자 '심'을 결혼시키고,
원종에게는 충경왕(忠敬王)이라 시호(諡號)했다.
이후 계속해서 쿠빌라이의 후손들을 고려의 왕들에게 시집보내어
고려의 왕을 사위로 삼고, '충'(忠)자 시호를 내렸다.
충렬왕(忠烈王, 1274년), 충선왕(王) 충숙왕(忠肅),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 1349-1351년)과 공민왕은
징기스칸의 가문의 여인들을 왕비로 맞았다.
이들 고려의 왕들은 모두가 몽고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몽고에 가서 몽고식 교육을 받고 자라며 몽고식으로 머리도 깎았다.
무려 1세기에 걸친 원나라 황실과 이와 같이 밀접한 관계로 미루어
고려말의 경교 전래설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조선왕조 말기인 고종 21년(1884년),
감리교회가 한국에 전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창간된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제145호(광무1년, 1897년 12월 8일)에는
중국의 당나라 때 정교가 중국 에 전래된 일에 대하여 서술한 기사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세교회가 동양에 들어옴.... 아시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년도를 궁구하여 보건데,
당나라 정관(貞觀) 연호를 쓸 때에 예수 씨의 제자 니타리유(네스토리우스)라 하는 사람이 퍼시아(페르시아)국으로부터 구세 교회를 받들어 당나라에 들어와 장안(長安)에 우거할 새, 그때에 임금과 신하들이 존중히 대접하여 땅을 주어 집을 짓게 하고
그 교회 이름하되 경교(景敎)라 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실상은 그리스도의 교회라 지금 경교비문을 볼진대
확거(확거)가 분명하거늘..
(여기서 이 경교비문은 1625년에 한 사원 안에 있던 비석으로 그 비문을 통하여 이 비문은 638년에 세워졌고. 635년 중국의 당나라 때 경교가 중국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한국 개신교 전래 초기의 선교사들도 이미 경교에 대한 사적을 알고 있었다.(대한 크리스도인 회보,광무 원년(1897년 12월 8일)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은 경교를 '구세교회'라 이름했다
<오세종,경교비문역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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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역사 자료
한국기독교회사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제4장 한국의 protestant church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제6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제9장 한국 교회 재건과 분열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 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크리스토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크리스토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쫏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크리스토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크리스토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권..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년 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1)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중에 가장 큰 죄이다.그리고 효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때 조상제사는 정치적의식이요
크리스토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 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 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
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 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 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 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
1. 신유 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
*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제천 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만 삼천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 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 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 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 왕으로 하 여금 서교를 받아 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 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실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 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 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 했 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
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한다.
(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 브리기에는 부임 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하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나라에 잠입해 옴. 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
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 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
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 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곤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
6개월후 김대곤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곤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 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근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할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 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명성황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 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소식은 오지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 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하였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 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 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 로 라는 사람이 청 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때 도와주고 헤어질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없이 통상 하려고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 why? 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cf.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하고 믿지 못할정 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
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 조로 변모 되었다.
(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 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되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 로 되있다.)
(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
(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 인은 전혀잠잠.(박해에 그동안 질림)
제4장 한국의 protestant church
1. 시대적 상황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
(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 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 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 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되고 살아가던 도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 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 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가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 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네들란드)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중국옻, 음식 잘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 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 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1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 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 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 는데
(서양 문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