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왜 모범적 시민이 살인마가 될 수 있는가?
히틀러 치하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600만 명에 이른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학살 대상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사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학살(虐殺)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인물이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 1906~1962)이다. 그는 독일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이다.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독일을 떠나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15년간 숨어 지내다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조직에 체포되어 9일 후 이스라엘로 압송됐다. 1961년 4월 11일부터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그해 12월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1906~1975)는 <뉴요커>란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 과정을 취재한 후,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이란 책에서 ‘악(惡)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 주장했다. 즉 악의 화신으로 여겨진 인물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다.
아이히만은 학살을 저지를 당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는 평소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 과정에서 어떠한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저지른 악독한 범죄라고 하는 사실에서 연유되는 곤혹스러움은 ‘인간의 사유(thinking)란 무엇’이고, 그것이 지능과는 어떻게 다르며, 나아가 ‘사유(思惟)가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가?’란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과 관련,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1900~1980)은 ‘관료주의적 인간’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아이히만은 관료의 극단적인 본보기였다. 아이히만은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죽였던 것이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유대인들을 죽일 때 그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들을 독일로부터 단지 신속히 이주시키는 책임을 맡았을 때도 똑같이 충실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에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는 단지 두 가지 경우에만, 즉 어릴 때 게으름 피웠던 것과 공습 때 대피하라는 명령을 어겼던 것에 대해서만 죄의식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즉 기술적인 일만 성실히 수행했다.
모범적 시민이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 있는 ‘악(惡)의 평범성’의 근거가 된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후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 1933~1984),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 1933~) 등에 의해서도 입증됐다. 이들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기 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모든 건 상황에 따른 것일 뿐, 악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가? 그렇진 않다. 한나 아렌트도 일부 가해자들의 가학 성향을 언급하면서 드물게나마 괴물들이 존재한다는데 동의했다. 도덕성이 결여된 사이코패스의 악행을 상황 탓만으로 돌릴 순 없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권위에 대한 복종 의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사람에 따라선 그게 지나친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환기시킨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