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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옛 그림을 보거나 글을 대하면 떠오르는 생각이다. 물질 공간 시간 속에 존재, 존재감의 발현이 곧 글이고 그림이다. 누군가가 읽어주거나 봐줄 것으로 인식하는 어느 예지력이라도 작용하는 걸까. 글의 기원이나 그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라 하면 무척 어려운 질문이겠다 싶다. 나보러 답을 하라하면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까. 라고 단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은 답할 재주가 없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기억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게 그들이 남긴 글이나 그림 소리 등등 여러 가지 형태가 또 문화의 시발이 되는 것이리라 믿어진다.
글도 표현을 의미하고 그림도 마찬가지다. 알기 쉽게 그림으로 그리다 그것이 글로 변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글이나 그림 모두 중요한 기록물이다. 그런데 글보다는 그림이 보다 더 확실한 역사적 증거물이다. 글은 해석에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림은 보면 한 눈에 느낌이 전달되고 실체를 바로 느끼게도 된다. 이는 물질 공간 시간이라는 변수의 모든 요인을 흡족히 채워주기 때문이다. 고구려에는 고분 벽화가 많다. 고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라고 하겠지만 그 결과는 실로 경이적인 것이다. 죽어서도 살던 대로 유희로 즐기고 실생활을 똑같이 하라는 의미로 그려 놓았다고 설명이 되지만 인간이 갖는 표현의 목적을 그야말로 제대로 실현한 산물이기 때문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이다. 고구려 사 연구에 있어서 고분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마치 현대의 매스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기록으로 나타내 주는 신문이라면, 벽화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텔레비전 영상과 같은 것이다. 한 외국 학자는 "벽화는 현대미술의 족보입니다. 벽화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합니다."라고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현재까지 대략 95기가 발견되었다. 집안지역에는 23기가 있는데, 모두루총, 환문총, 각저총(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회분(다섯무덤)4호묘, 오회분(다섯무덤)5호묘, 만보정1368호분, 장천1호분, 산연화총 등이 이곳에 있다. 또 최초의 수도였던 환인현 지역에는 미창구 장군묘 1기가 발견되었다. 북한에서는 평양지역에 동명왕릉, 진파리1호분, 내리1호분을 비롯해 24기가 있고, 천왕지신총, 요동성총 등 4기가 순천지역에, 쌍영총, 강서중묘, 강서대묘, 덕흥리 고분, 약수리 고분 등 21기가 남포지역에 있다. 또 팔청리고분을 비롯한 6기가 대동지역에 있고, 기타 온천지역에 2기, 평원지역에 1기, 평성지역에 1기 등 평양과 평안남도 지역에만 59기가 있다. 또 황해도에는 안악지역을 중심으로 안악3호분, 평정리1호분을 비롯한 12기가 있다.
이렇듯 고분벽화는 집안지역과 평양, 안악, 남포, 순천, 대동지역 등 고구려의 중심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및 고려에도 고분벽화가 있기는 하지만, 양과 질에서 고구려와 비할 바가 못 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혼이 담겨진 위대한 예술작품이며, 그들의 사상과 생활모습이 담겨진 고구려사의 귀중한 연구 자료이기도 하다. 그런데 벽화 중에는 묵서명이 있는 고분벽화가 있다. 묵서명이 있다는 것은 피장자가 어느 시대의 누구인지를 스스로 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알다시피 경주에는 신라의 무덤들이 많다. 무덤은 삼릉이나 대능원같이 남산만한 무덤부터 해서 이곳저곳에 왕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즐비하다. 그런데 실로 아쉬운 것은 그 많은 무덤들 중에 피장자가 알려진 것은 고작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원성왕릉 등 대 여섯 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기에 능을 비정하는데 많은 논란과 혼선이 끊이지를 않는다. 기록물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3~4백년 경을 말하는 역사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백제도 피장자가 밝혀진 무덤은 무녕왕릉이 고작이다. 광개토대왕의 비를 그런 점에서 값으로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 그는 한 시대의 정복자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뚜렷한 역사적 사실성으로도 여전히 우리민족의 위상을 드높여주며 꿋꿋이 서있는 것이다. 거기에 또 확실한 모두루의 묘비명이 광개토대왕을 뒷받침을 해주고 있으니 역사적으로 그 같은 행운은 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시대를 또 소상히 느끼게 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바로 묵서명에 찍힌 연대가 408년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이 여전히 시대를 주름잡던 때를 그대로 보여주는 산 증거로서 벽화가 또 있다. 고분벽화는 자체가 회화작품이자 고고학적 유적이며 역사자료이자 종교 신앙의 흔적이며 사회상이기 때문 과거를 고스란히 현재로 읽을 수 있는 천 편의 글과도 같다. 그러기에 광개토대왕은 죽어서도 영원히 말하는 행운의 군자이며 역사를 넘나드는 우리들의 영원한 표상임에 틀림이 없다. 1976년 북한의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무덤 하나가 발굴되었다. 그 위치가 고구려 도읍지 평양과 가까운 곳이고, 거기에 그려진 고분벽화가 완전한 고구려 풍이기 때문에 그 고분은 고구려인의 무덤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게다가 고분 천정에 씌어져있는 글자(묵서명)에 따르면, 무덤의 주인공이 죽은 해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기록되어 있어 더욱 그렇다.무덤이 발견되자 한·중·일 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일본과 북한사학계는 광개토대왕이 북경 부근인 유주까지 진출했었다는 명백한 증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중국사학계는 중국에서 유주지사를 지낸 사람이 고구려로 귀화해 광개토대왕의 신하가 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고분에 무슨 내용이 있기에 모두들 그렇게 놀랐던 것일까? 그 묵서명을 소개한다.
(묵서명 번역문) 「□□군 신도현(信都縣)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遼東)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幽州)자사였다. 진은 77살에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408년) 신유월(12월) 을유일(25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에 이르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와 쌀은 다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 찾는 이가 끊이지 않기를」 무덤을 즐겨 찾아주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이채롭다. 무덤을 공개한다는 말이 아닌가.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구는 신도현에서 출생한 무덤의 주인공 진이 77세에 무신년에 죽었는데 무신년과 일치하는 영락 18년이라는 광개토대왕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이고, 진이 역임한 벼슬이 중국의 관직인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락’이라는 분명한 명문 때문에 유주자사 진이 광개토대왕의 신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중국사학계는 중국에서 그런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 고구려로 귀화한 것이라는 어불성설의 주장을 폈다. 분명 무덤 주인인 ‘진’은 부채를 들고 마치 도사처럼 평상에 앉아 있다. 그 앞에는 음식을 차릴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며 초상화의 서쪽 벽으로는 유주에 속한 13개 고을의 수령인 태수들이 자사를 향해 상하로 도열해 있다.
남벽에는 유주자사와 관리들의 회의 장면도 보인다. 동벽은 질서 정연한 행렬도이다. 이들 모두 유주자사의 공적인 관청 생활 장면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무덤의 주인공 진이 태어난 ‘신도현’을 검색해보면 산서성 남부 임분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중국사학계는 진이 중국출신이고 유주자사를 지낸 후 고구려로 망명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진의 고향인 산서성 남부까지 고구려 땅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13태수의 그림 옆에 ‘XX태수’라고 씌어져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태수는 군을 다스리는 직책이고, 그 군들이 모인 주(州)를 다스리는 관직이 자사이다. 우리 관직으로 설명하면 태수는 시장/군수를, 자사는 도지사와 같은 개념이다.
그 지명은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토(玄兎)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이고, 1명은 판독 불능...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들이 꽤 있는데, 요동과 요서 그리고 한사군으로 잘 알려진 낙랑군과 현토군의 태수들이다. 어찌 된 노릇인가. 태수들의 지명과 그가 죽은 때를 상기해보면 광개토대왕이 바로 북경 근처까지 갔다는 그때와 일치하지 않는가. 유주영역은 당시 후연의 영토였던 북경 인근이다.
고구려가 이곳에 진을 파견한 것은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후연의 주인공 고운이 왕으로 추대된 시점이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때 새로운 북연왕조가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이듬해 5월이 되어서였다고 자치통감은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 무렵 고구려는 혼란기를 이용해 전격적으로 진을 유주지사로 임명하고 특수임무를 부여했던 것은 아닐까. 한족 출신을 자사를 임명하여 그 지역을 통치한 것이란 학자들의 견해다. 408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의 정의를 나누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문구상에 부는 7세에 미쳐’라는 문구로 보아 유주자사 진의 무덤은 사후 약 200년 후 원래 묻혔던 어딘가에서 평남 덕흥리로 이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진이 죽은 후 바로 이 무덤을 만들었다면, 묵서명에 ‘부는 7세에 미쳐’라는 문구를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무덤은 북경 근처였는데 훗날 어쩔 수없이 집안 전체가 평남 덕흥리로 이주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한 후손의 직위가 후왕(侯王)에 이르렀다는 문구로 보아 고구려에서 득세한 상황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당시 고구려는 왕(제후)을 거느린 황제 국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는 자체연호를 쓴 황제 국임이 확실하고, 그 이후에도 줄곧 황제 국이라는 말인 것이다.황제도 아닌 일개 대신의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술·고기·쌀은 먹지 못할 정도라는 문구로 미루어 보아 당시 고구려의 국력과 풍요로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울러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 벽화는 정치적인 해석만으로 자기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니다. 피장자가 누구인지 밝혀진다는 것은 바로 어느 시대를 정확히 말해주는 이정표이고 안내장이기 때문이다. 피장자가 밝혀진 또 하나의 고분 안악 3호분과 더불어 그들은 그 시대상을 밝히는 데 정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몇 천 장의 사서 기록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그 시대를 말한다. 이는 고구려의 찬란한 영광을 후세들도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선조들의 애틋한 서정도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치고 무용총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용총은 바로 이곳 통구에서 나온 벽화이다. 이 벽화 색채는 황색과 갈색 등 따뜻한 느낌의 색으로 되어 있다. 널방의 서북벽에는 화면 오른쪽 2/3 지점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경계로 하여 그 왼편에 수렵도를 그렸다. 도안화된 산악과 나무들 사이로 새 깃털로 장식된 관과 검은 두건을 쓴 기마 인물들이 사슴과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수렵도는, 기교가 없고 소박한 기법에도 불구하고 시원스런 공간 배치와 생동감 있는 필치로 인하여 고구려 고분 벽화 초기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그중 주목할 것이 수렵도다. 최초 발견 당시 사진에는 무사들을 도와서 호랑이를 쫓는 사냥개 한 마리가 보이는데 최근에는 지워졌다고 한다.
무용총의 〈수렵도〉는 활달하고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무용총의 널방 서쪽에 그려진 것으로, 큰 나무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소가 끄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고, 왼쪽에는 사냥 장면이 전개된다. 사냥 장면은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다섯 명의 말 탄 인물이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사슴과 호랑이를 쫓고 있는 모습이다. 산과 산 사이를 쫓고 쫓기는 말 탄 인물과 동물들은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거친 자연 속에서 뻗어나가는 고구려인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사냥 장면의 발달된 표현력에 비하면 산이나 나무는 도안화되어 배경 역할만을 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산은 단순히 굵고 가는 선으로 상징적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산은 흰색, 그 다음 산들은 빨간 색, 가장 멀리 있는 산들은 노란 색을 쓰고 있어서 고대인들의 채색법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무는 가지와 잎이 마치 고사리처럼 어색하게 표현되어 나무다운 맛이 없다.이는 당시 회화에서 산수화에는 무관심했던 사실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배경의 단순화가 오히려 사냥 장면의 운동감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다. 그림에 나오는 세 명의 무사는 모두 동쪽으로 달리고 있다. 말의 거친 숨소리와 발굽소리가 끝이 없이 이어질 듯한 느낌이 바로 든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상단의 사슴 두 마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고 눈도 겁을 먹었다. 상세히 보면 점점 속도를 줄이려는 건지 네 발의 각도가 적다. 이를 예감하는 백마는 입을 닫고 있다. 사슴은 꼬리가 작고요. 달릴 때 흥분해서 꼬리를 올리는데 이것까지 묘사해놓았다. 동쪽으로 내지르고 있는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아직도 발을 쫘악 펼치고 있으니 흑마는 좀 더 고생을 해야겠다. 그래서인지 입을 벌리고 헉헉대고 있다. 호랑이가 적게 그려진 것은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결국 잡을 거라는 굳은 결의의 표시가 아닐까.
이 사실적인 벽화에서 고구려 시대에 이미 호랑이 잡는 사냥개가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 땅에서 호랑이를 소탕할 때 풍산개가 맹위를 떨쳤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풍산개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렇듯 수렵도 감상을 하자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서는 보는 관점이 다르다. 화살촉을 보면 이상하다. 뾰족하지 않고 뭉뚝한 것이 정작 사냥을 하자는 것인지 의심이 간다. 왜 그럴까. 추정하건대 엄연히 이 무용총 수렵도는 군사훈련을 겸한 고구려의 [월동준비] 풍속도이다. 집단 사냥에서 무사들이 화살촉 끝에 달라붙은 뭉뚝한 뭉치, 이는 사냥감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이를 명적이라고 한다. 명적은 [우는 화살] [소리나는 화살]이란 뜻으로 화살 앞부분에 '동물의 뼈로 구멍을 내서 만든 작은 통'을 달아서 화살이 날아갈 때 '삐이익'하고 고음의 피리 소리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나게 하는 화살인데, 전쟁 시에는 적의 진영으로 날려보내 공포심을 유발시켜 혼비백산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런 화살이 한꺼번에 수백 발 수천 발이 동시에 '삐익' '삐익' 괴음을 내면서 머리 위로 날아와 꽂히면 얼마나 무서울까? 이재운의 [칭기즈칸]을 읽어보면 명적의 위력이 잘 나와 있다. 그런 용도의 명적이 무용총 수렵도에 나와 있다는 것은 저 집단사냥이 군사훈련을 병행한 겨울철 [월동준비] 풍속이라는 것이다. 저 수렵도에서 무사들이 화살 앞에 명적만 달고 화살촉을 안 달았다는 것은 저 무사들이 호랑이나 사슴이나 표범을 한 방에 죽이지 않고 지금 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삐익 소리를 내면서 화살이 날아와 엉덩이나 가슴에 맞으면 호랑이나 사슴이 어떻게 되겠는가? 혼비백산 죽어라하고 도망갈 것이다. 만약에 저 무사들이 호랑이나 사슴을 한 방에 쏘아서 죽이려고 했다면 저 화살의 앞부분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달려 있어야 한다.
기마민족들은 초한지나 삼국지에 나오는 것처럼 몇 십만 명 대 몇 십만 명으로 전쟁을 하지 않았다. 인구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다. 속성상 초원지애에 흩어져 사는 게 또 다른 이유가 되겠다. 수나라 양제만 해도 고구려 침공 시 130만 명을 동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박살이 나서 결국 나라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다. 왜 그럴까. 수 양제가 130만 명을 동원할 때 그들은 대부분이 농민들이었거나 보병들이었다. 그런데 농사짓는 사람들이 저 수렵도에 나오는 무사들하고 상대가 될 수 있을까. 기마민족들의 전투 전술의 기본은 몰이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활로 도망가는 맹수들을 맞추어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람을 맞춘다면 얼마나 쉽겠는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활하고 화살 준다고 해서 50미터 앞에 있는 사람 맞추라고 하면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아마도 저 수렵도에 나와 있는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경우 100미터 앞에 있어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움직이는 물체, 즉 도망가는 노루나 사슴을 쏘아서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말은 기마민족들은 농경민들과 전투 시 거리를 두고 전투를 벌려야 유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활 잘 쏘는데 일부러 쫓아가서 백병전 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농경민 부대가 쪽수 믿고 쫓아오면 일부러 도망가다가 뒤돌아 포위하여 농경민들을 몰살시켜버리는 그런 묘수, 이것은 정우성 주연의 무사라는 영화에서도 바로 나온다. 고려인들이 도망가다가 덤비려고 하자, 원나라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포위해버리자, 고려인들이 공포심에 질려서 뭉치면 살 줄 알고 서로를 믿고 가운데로 몰려서 싸울 준비를 하는데, 몽골 기마병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말 위에서 바로 활을 쏘아 전멸을 시켜버리는 그 장면.
칭기즈칸 당시 몽골 전체 인구는 100만 명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몽골 군대가 썼던 전술이 바로 유인 작전 후 포위하여 몰아서 몰살을 시켜버리는 작전이었다. 농경민 부대도 기마부대가 있었지만 기마 수렵 민족에 비해 말 타는 솜씨나 활 쏘는 솜씨가 월등히 떨어졌다. 어떻게 말 타고 활 쏘아 짐승들을 잡아먹고 사는 사람들 부대하고 농사짓다가 군대가서 말 타고 활 쏘는 것 배운 사람들 부대하고 그 실력차이가 같을 수 있겠는가. 이른 바 테크놀로지다. 그런데 또 궁금한 것이 있다. 무사들의 발을 한 번 보시라. 그림을 기초하여 보면 무용총에 나오는 수렵도 같은 사냥장면은 스키타이와 이란의 동물미술에 기원을 두고 발달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한나라의 화상석(畵像石)이나 고분벽화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즉 바람의 나라 스키타이가 말을 타고 동으로 달려가 초원지로 흩어져 돌궐 거란 말갈 동이 등으로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바로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등에 이르러 그들의 실력을 뽐낸 것이다.
몽고 역사 연대기를 보면 금나라 요나라 거란 돌궐족 등등의 출현이 바로 몽고의 역사다. 인간의 풍속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장신구, 장례, 생활 습관 등등 늘 하던대로 유지하려는 속성이 짙다. 그것이 곧 전통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에게 정착을 권유해도 다시 옛날로 돌아서 초원지대로 나서는 것을 보면 그 속성을 알 수 있다. 중동의 배두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돌궐족이 바로 터어키 조상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이 우리보고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돌궐이 흩어져 서쪽으로 달려가 부족으로 살다 어느 날 뭉쳐서 나라단위로 커져 정복을 나선 게 바로 오스만 투르크다. 거란족이 한 때 고려를 밀고 내려왔는데 어디로 사려졋는지 종적조차 알길이 없는 것이 바로 유목민의 특성이다.
아무튼 서역과 초원지대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먹고 살기위해서 활을 쏘는 것이다. 송나라 때 편찬된 〈선화화보 宣和畵譜〉에는 번족(番族)이라는 화문(畵門)을 따로 두어 서역인의 활달하고 힘찬 기질과 사냥을 주로 표현한 그림들을 따로 구분했다. 그림의 제목으로 미루어 말 타고 활 쏘거나 사냥하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의 동물문견갑이나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에도 사냥과 관계되는 단편적인 표현이 존재하고 진정한 의미의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된다. 덕흥리(德興里)·약수리(樂水里)·감신총(龕神塚)·장천1호분(長天一號墳) 에도 나오고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뛰어난 필치와 생생한 묘사력으로 북방기마민족의 기상을 잘 표현한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인 것이다.
고대의 전장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병이 처음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활을 사용하는 경기병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활을 든 기병대가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일찍이 앗시리아 제국에서도 주요병과로 취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기병대에 착안하여 등장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오랑캐 옷을 갖춘 기마무사)들 역시 활을 쏘는 경기병이었다. 경기병은 서로는 우크라이나의 스텝 지대로부터 동으로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주력 병종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목축과 수렵이 생계수단이었기에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병이 육성되었고, 광활한 초원은 활을 필요가 아닌 필수품으로 만들었기에 양 다리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양손을 이용해 활을 쏘았다.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를 '활의 백성'이라 자처했으며 중국의 문헌에도 이들을 '장성 이북 궁술의 나라'라고 일컫는 표현들이 보인다. 빠른 기동력을 갖춘 경기병들이 다수 모이면 칼이나 창 등의 냉병기를 든 보병은 그저 과녁일 뿐이고 중기병조차도 대응이 힘들었다. 똑같이 원거리 무기를 갖추지 않았으면 이들의 화살공격에 맞설 수 없었고, 무장이 가벼워 빠른 탓에 말을 타고도 이들을 추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병을 많이 보유한 유목민족들은 정주민들에겐 악몽 같은 존재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때에 조나라 이목이 흉노군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펼쳐 흉노군 10만 명을 몰살시킨 적이 있었고, 한나라의 흉노 원정시에는 곽거병이나 이감이 기병대로 돌격하여 백병전으로 이들을 제압한 이력이 있었다. 삼국시대 때는 원소군의 국의가 활을 쏘며 전진해오는 공손찬의 백마의 종 기병부대를 방진과 쇠뇌를 이용하여 격퇴한 바 있고, 위나라의 전예가 조창과 함께 수송용 수레를 원형으로 빙 둘러 장애물을 삼아 원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쇠뇌를 쏘면서 오환의 기병대를 격퇴한 바 있다. 그런데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쏜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테크놀로지다.
무용총 수렵도를 보라. 분명 무사 발 아래 뭔가를 차고 있다. 바로 등자다. 그러니까 몸을 뒤로 비틀어 사슴을 겨냥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얼마전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다니엘 R. 헤드릭이 쓴 '테크놀로지: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에서 테크놀로지라는 색다른 코드로 인류의 문명사를 조망한 책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꽤 실감이 났다. 대목 중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먼 옛날에도 유용한 기술과 도구는 신속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17세기의 과학혁명, 18세기의 산업혁명, 20세기의 컴퓨터 혁명와 정보혁명 등은 모두 새로운 기술과 도구에서 비롯되었다. 종이, 화약, 나침반은 14~19세기에 일어난 중대한 사건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발명품으로 꼽힌다. 이 발명품들은 중국에서 발명되어 중동으로 전파되었다가, 결과적으로 유럽에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유럽은 이 기술들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서 세계 곳곳에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의 역사에서 작은 발명품은 때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다.
고대시대에 있어서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등자를 들 수 있다. 이 단순한 발명품은 동양과 서양 양측에 전쟁의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등자가 발명되기 전까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보병이었다. 기병은 말 위에 앉아서 불안하게 한 손으로 말을 몰아야 했고, 전쟁터에서 자주 낙마하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등자가 발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말안장에 앉아 발을 등자에 고정한 기병은 곧 보병을 압도하게 되었다. 유럽에는 8세기에 등자가 전파되면서 무거운 창으로 무장한 기병이 등장했다. 병사들은 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둘렀고, 말은 이 모든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더 튼튼한 종으로 개량되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다." 라고 말했다. 해마다 겪게 되는 나일 강의 범람 때문에 태양력과 기하학, 건축술, 천문학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영국 역사가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원리'로서 설명하였다. 즉 다시 말해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바로, 인간 사회의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한 것이다.
로마도 마찬가지다. 지형적으로 요새적인 조건이 없었던 로마는 북쪽의 에투아니아와 남쪽의 카르타고와 동쪽의 그리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응전과 투쟁 속에서 로마는 전무후무한 패권국이 되었고 거대한 세계국가를 만들어 내었듯 비옥한 옥토는커녕 동토의 땅으로서 대륙의 힘과 맞대고 있는 고구려도 살기위해서 어쩔 수없이 강해질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 무용총은 왜 고구려 군사가 강했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무사는 그야말로 당대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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