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탄식처럼
가을이라고
당신이 말하는 순간
나는
마리노 마리니의 말을 타고
잠시 하늘에 있었다
투명한 셀로판지에 갇힌
마른 꽃다발의 香氣에 실려
가고 있었다
흐느낌의 시작처럼
가을이라고
당신이 말하는 순간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잠시 하늘에 있었다.
<별빛 등불 하나, 나남, 1987>
가을
김광림
□ *
아쉬운 花鬪짝을 내던지는 그 뭐랄까
알맹이는 죄다 거둬 들이고
빈 껍질만 내굴리는
十月에 남는 丹楓을
꽃에도 落日이 있다는
로댕의 말처럼
나의 落日은
丹楓에도 묻었을까
오뉴월에 이은
더운 가슴을
깔아 뭉갠
서늘했던 지난 여름
지금은 조용히 검불만 지핀다
十月은
마른내가 풍길 때
먼 길은
떠날 수 없는
그 뭐랄까
□ *
여울목 물구비도 잦아들었다
담 모퉁이를 돌아서 숨어 울던 새댁도 떠나갔다
바람을 벌판에 돌려보내라
꽃잎을 씨앗에 돌려보내라
뜻뜻한 아랫목은 나그네에게
질화로에 바알간 숯불을
까마귀엔 裸木 가지에
그리고 너는 나에게
빈 들은 서리맞은 허수아비에게 돌리고
充滿은 후미진 가슴마다 고이게 하라
나는 한자락 펄럭이는 바람이고 싶다.
<학의 추락, 한국시인협회, 1971>
가을
김상용
달이 지고
귀또리 울음에
내 靑春에 가을이 왔다.
<망향, 문장사, 1939>
가을
김용호
솔버섯 피는
절간 뒷산
낙엽만 밟아가도
눈물이 흐르는데
너 무덤 함께
벙어리된 내 사랑
산기슭 물레방아 되여
잊을 줄을 모른다
<饗宴, (동경), 1941>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는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가을 4
허영자
걸음마다
씽씽 신바람 일고
휘파람 소리, 그 휘파람 소리
가슴 울렁이던
천둥 번개의 사나이들
어디로 갔나
가을 빈 들판은
패망의 왕국
木발에 의지한
허수아비 하나
마지막 노병으로
지켜 서 있다.
<빈 들판을 걸어가면, 열음사, 1984>
가을 6
허영자
가을이면 저 멀리
떠나가리라
먼먼 어느 곳
낯선 땅에서
사랑을 생각하듯
별을 보리라
별을 우러르듯
사랑을 꿈꾸리라.
<빈 들판을 걸어가면, 열음사, 1984>
가을 感謝
정공채
우리들의 머리 위로
맑은 빛이 내려오는 이 시간
가을로 눈 뜬 이 시간
하늘과 바람과 땅 위의 온갖 것
참으로 神의 攝理는 偉大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땅 위에는
모두들 가을로 가고 있는 깊은 시간입니다.
바람따라 구름이 흐르거나 머흘거나
비바람 드센 물결이 일거나 잠잠하거나
神의 攝理가 내리시는 빛살 속의 이 시간은
바야흐로 이 시간 이 순간에 있습니다.
하나같이 하늘을 받들고 있습니다.
<사람소리, 1989>
가을 꽃
신효정
햇볕들이
나뭇잎마다 金빛으로
鮮明하게 흔들리며
世上 저 너머로
쏟아지는 꽃잎
잡히지 않는
향기와
색깔과
나비의 술래
푸른 장화를 신은
바람이 뛰어 간다
햇빛을 뒤집으며
무지개를 뿌리며
가장 찬란한 한때의 죽음을 시작한다.
<흰 종지부를 찾아서, 나남, 1987>
가을 달
김성춘
독창회 구경을 마치고 귀가하는 밤.
갑자기
가을 밤을 열창하는 달을 만난다.
오늘밤 나를 압도해 오는 것은
몇 소절의 노래가 아니라
근사한 그대의 사랑이 아니라
귀또리 울음처럼
귀또리 울음처럼
낮게 가을을 흔들어 주는
피아니시모의 저 달빛이다.
쉿,
쉿, 쉿
가을 달이 피아니시모로 내게 들려 주는 것은.
안개처럼 흐르는 세상
가슴에 젖은 노래 하나쯤
슬픈 사랑 하나쯤
생각하며 살아라고, 살아가라고
오늘밤 피아니시모로
나를 압도해 오는 것은
근사한 그대의 사랑이 아니라
가을 밤을 혼신의 힘으로 열창하는
오! 황홀한 얼굴
가을
달.
<흐르는 섬, 문장사, 1982>
가을 비
허영자
가을 비
주문처럼 내리고
온 수풀은
몸서리를 친다
아아
凋落하는 나의 청춘이여
사랑이나
예술이나
또는 神이나
아직도 미간을 태우는
이런 이름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앉아
나는 운다.
<親展, 문원사, 1971>
가을 敍景
마종기
첩첩 깊은 산중 한구석에서 소리치고 찾아 헤맨다. 비맞고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온 계절을 헐어가는 짐승이 되어, 눈은 닳아서 찢어지고 발은 피멍이 되어. 해가 바뀌고 아직 다 늙기 전에 나는 참다가 이 가을에 모닥불을 붙인다. 바람이 분다. 불이 넓게 붙는다. 온 산에 외롭고 고달픈 모든 영혼이 불탄다. 산도 타고 나도 타고 천지를 깨끗이 한 뒤, 드디어 내 눈에 당신이 보이고 내가 연꽃의 밤낮을 뛰어 우리는 만나고 어루만지고 포기하고. 그러나 결국은 모두 타서 숯이 되어 우리가 손 잡고 있으면, 한 천년쯤 뒤에 그 숯을 태우는 젊은 애인들이 우리가 아직도 밝고 뜨겁게 타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리라.
<변경의 꽃, 지식산업사, 1976>
가을 서한 1
나태주
□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
□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가을 素描· 四題
양왕용
□ 하늘
구름 하나가
무표정인 채로
걸어가고 있다.
바지 저고리는
그들대로
손발은 손발대로
머리칼 하나도
함께 가고 있다.
□ 소풍
어머니와 같이 나온
아이가
물구나무서고 있다.
山들의
빨간 나무들도
돌아가는 木馬들도.
어머니는
빈혈의 증세처럼
손만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 강변
기차가 소리내는
강변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걸어가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가을과 바뀐
都會가 코골고 있다.
바람이 불어와도
더 큰 소리로
코골고 있다.
□ 果園
장대 끝에서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묻어나고 있다.
먼 여행길을 돌아온
과일들의 환한 얼굴이
그 고함 소리에
파묻히고 있다.
생나무 울타리의
잠자리도
그 소리에
파묻히고 있다.
<갈라지는 바다, 형설출판사, 1975>
가을 水彩畵
한기팔
가을 몇 잎의
은행잎을 그린다.
그릴수록
덧칠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조금씩은
엷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直線을 긋고
내가 마련한 一點을 향하여
포물선을 그린다
이내 밝아졌다
흐려지는
교정 뒷뜰의 空間
내가 그린 동그라미 속에
一點을 놓고 간
가을
몇 잎.
<서귀포, 심상사, 1978>
가을 숲
임강빈
가을 숲에
오솔길
곱게 물든 나뭇잎
모두가 서두는 채비
비어가는 숲 속
낭랑한 새 소리
어디로 가나
바람 없이도
쌓이는 낙옆
오솔길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당신의
뒷모습.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 창작과비평사, 1989>
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찢고 나오는
비둘기떼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 선반 위에 갈무리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가앙 푸르른
가을하늘 열린다.
<가슴엔듯 눈엔듯, 중앙문화사, 1966>
가을에
박성룡
바람은 이제
어디선가 이 쪽으로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 쪽에서 어디론가
불어가는 계절이 되었다.
바람이 불어가는 곳으로
낙엽들은 서운한 소식들을 싣고
흩어져 나리기도 하고 쓸려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분명
이것만은 믿는다.
머지않아 이땅에는 다시
포근한 함박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마을마다 집집마다의 굴뚝에서
평화스런 연기가 피어오를 것을.
계절은 이렇듯 어디선가 서서히
다가와서는 한동안씩 우리 곁에 있다가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런 계절처럼
허무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자라고 자라서는 또
단 맛 쓴 맛 맛보며 살다가
늙어서는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들이 간 자리에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반드시 남는 것이다.
아주는 잊을 수는 없는 것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꽃상여, 전예원, 1987>
가을에
박종해
내가
지상에 남아서
가을을 맞는다.
가녀린 코스모스의 하늘거림도
수숫대 위에 앉아 있는
고추잠자리의 파르르 떨림도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새털구름의 머흘거림도
모두 유정하다.
귀뚜라미 울음에
달이 기울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한지에 밴다.
후회와 자책으로 잠을 설치며
참회의 긴 편지를 써 놓고도
부칠 곳이 없구나.
당신이 보시지 못하는
이 지상의 가을
<이 강산 녹음 방초, 민음사, 1992>
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 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나르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傳說 속에 묻혀버리는
海底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 없이 밑으로만 떨어져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墜落과
그 速力으로
몇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恐怖의 記憶이 眞理라는
이 무서운 眞理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주십시오.
<여백을 위한 서정, 신구문화사, 1959>
가을엔
조태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돌아가게 하라.
곱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가을 바람 물들며 지나가듯
지상의 모든 것들 돌아가게 하라.
지난 여름엔 유난히도 슬펐어라
폭우와 태풍이 우리들에게 시련을 안겼어도
저 높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라.
누가 저처럼 영롱한 구슬을 뿌렸는가.
누가 마음들을 모조리 쏟아 펼쳤는가.
가을엔 헤어지지 말고 포옹하라.
열매들이 낙엽들이 나뭇가지를 떠남은
이별이 아니라 대지와의 만남이어라.
겨울과의 만남이어라
봄을 잉태하기 위한 만남이어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떠나게 하라.
단풍물 온몸에 들이며
목소리까지도 마음까지도 물들이며
떠나게 하라.
다시 돌아오게, 돌아와 만나는 기쁨을 위해
우리 모두 돌아가고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만나는 날까지
책장을 넘기거나,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띄우거나
아예 눈을 감고 침묵을 하라.
자연이여, 인간이여, 우리 모두여.
<산속에서 꽃속에서, 창작과비평사, 1991>
가을의 기도
김남조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당신 앞에 벌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느니
이제금 홀로인 그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보다 경건히
적요의 눈짓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 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라빛과 흰빛의 소담스런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저마다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정념의 기, 정양사, 1960>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가을의 향기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에 거울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해바라기, 자유문학사, 1957>
계절
박양균
동으로 트인 현관에서 하루를 향해 구두끈을 매노라면―
푸성귀 같은 아침이 구두 끝에 와 머문다.
잊어버린 시간을 생각해 본다, 가을……
<두고온 지표, 춘추사, 1952>
果木
박성룡
果木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事態처럼
나를 驚愕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薄質 붉은 黃土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恍惚한 빛깔과 무게의 恩寵을 지니게 되는
果木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事態처럼
나를 驚愕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詩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果木의 奇蹟 앞에 視力을 回復한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63>
菊花 앞에서
김종길
한 떨기 菊花꽃이여,
너 앞에 지금 나는 할 말이 없다.
불붙던 쌀비아는
어느새 잿더미로 식어 가고
플라타나스도 반 넘어 잎이 졌는데,
서릿발 싸늘한 이 아침을
홀로 늠름히 피어난 꽃이여,
너 앞에 지금 나는 목이 메인다.
한 떨기 菊花꽃이여,
너를 아끼고 노래한 陶潛과 杜甫,
秋史와 滄江과 그리고 아 우리의
芝薰―
그들의 超俗과 憂愁와 靈感과 氣槪,
그들이 사랑한 詩酒의 意味를 의젓이 默示하는 꽃이여.
내 또한 詩와 술을 사랑하고
不義와 庸劣을 미워하건만,
내게는 돌아갈 田園도 流謫과 漂泊과 絶叫의 땅도 없어
다만 저 재로 사위어 가는 쌀비아 꽃밭과
잎지는 플라타나스의 빈 校庭을
온 아침 넋없이 바라보며,
이 서릿발 속에서도 홀로 오히려 오만한,
한 떨기 끼끗한 菊花꽃 앞에,
잠시 말을 잃고 목이 메일 뿐.
<하회에서, 민음사, 1977>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그 女子
윤동주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그대 내 마음의 窓가에 서서
박화목
그대 내 마음의 窓가에 서서
黃昏의 그늘같은 고요한
微笑를 머금고 날 바라 보고 있네.
어서 들어오라는 情熱의 손짓에도
나의 애타는 안타까운 表示에도
그대는 창가에 서서 微笑할 뿐이네.
이제 九月의 밤 하늘에 흰 달이 돋아오고
유달리 반짝이며 선회하는 人工衛星과 함께
기러기들이 날아올 테지만,
그대는 흘러간 歲月과 같은 것.
자꾸만 식어가는 싸늘한 그대의 입김을
내 마지막 사랑을 노래하여 덥힐 수 있으랴.
아, 그러나 지금은 가을이 오고, 黃昏이 내리고
孤獨한 내 마음의 窓가에 그대는 서서
고요한 微笑를 머금고 날 바라볼 뿐이네.
<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 보문출판사, 1960>
나무
김현승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 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나무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새벽꽃 향기, 문학사상사, 1989>
나직한 노래부터
김남조
모든 가을에
앞질러 그리움이 오곤 했었지
병이 깊어지듯
가을도
무겁고 힘드는 수레
열 손톱
하나씩 멍들이듯
아픈 계절
차례로 섬겨
오늘 이상한 비파 소리를 듣네
수심 깊이 두레박을 내린
빛의 동아줄 그 섬세한
흐느낌의 음악을
겹겹의 문
마저 다 지내면
들어가는 房
비파 소리는 거기서 울리는 겐지
무궁한 감정
종내 다 쓰고 나면
또 있는 마음
비파 소리는 거기서 울리는 겐지
모든 가을에 서둘러
그리움이 오곤 하더니
이 가을엔 나직한 나직한
노래부터 오네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 1983>
落葉
박화목
落葉이 나를 따라온다.
내가 落葉을 따라 걸어간다.
머언 산 봉우리에 흰 구름
골짝에는 丹楓이 빨갛게 타는데
휘파람을 불어봐야 더욱 외로워
落葉을 조심히 밟고 간다.
落葉에는 냄새가 있다.
무언지 찌릇하니 마음을 울린다.
落葉을 한웅큼 집어서 주머니 속에 넣고
그리운 追憶 속에 날이 저문다.
落葉에는 또 옛 이야기가 있다.
내가 落葉을 밟고 살아간다.
<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 보문출판사, 1960>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내가 오는 가을산 눈부심을
홍윤숙
지난 여름, 내가
떠도는 한 점 구름으로
지새던 만리 이역의 들에
사막의 고독한 혼처럼 피어
발이 시린 나그네의 길을 막던
라벤다의 들에도 지금 가을이겠지
코끝에 스며 오는 마른 약쑥 냄새
기억의 벌판에
한 덩어리 영혼처럼 무리져 오는
보라빛 들국화 점점이 피는
내 나라 산야에도 지금은 가을
흐느끼며 가슴 떨며
여윈 볼 쓸쓸히
성긴 깃발 앞세우고
바람 앞세우고
추억의 수레 끌며
종일을 먼 길에
네가 오누나
산머루 검게 익어 떨어지고
가랑잎 비에 젖어 썩는 숲길에
우리들의 여름날 묻으며 묻으며
익숙한 몸짓
언제나 말보다 더 확실히 말하는
분명한 걸음으로 네가 오누나
그저 그런 거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삶에도 사랑에도 가을이 오고
과일밭에 빛나는 과일도
잠시 충만하다
이윽고 북풍에 떨어져 가는
이별과 침묵의 완성이라고
빗발로 가르치고
바람으로 일러 주며 네가 오누나
그럼에도 어찌할까, 나를
물 같은 추억에도 가시처럼
아픈 살을
이 나이에도 철없이 신열 올라
그리운 배고픔에 살이 내리는
가을산 눈부심을 어찌할까
<사는 법, 열화당, 1983>
너의 목소리는 木管樂器
김경린
하늘
높이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는
너의 목소리는 木管樂器
전쟁처럼
황혼에 매어 달린
나의 가슴에
쏟아지는 가을의 이빨이 차거워
家系譜도 없이
좁은 언덕을 넘어 서면
거기
고요히 인습에 젖은 어머니의 얼굴들
모래알 같은
별이 부서진다는
길 바다 위에
아직도
불안의 그림자는 부풀어
비늘 돋친
방파제를 향하여
질주하는 파도소리와 함께
쏟아져 오는 가을의 음향
오
오
하늘
높이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는
너의 목소리는 木管樂器
<현대의 온도, 도시문화사, 1957>
네 대의 피아노와... 1
김용범
원제 : 네 대의 피아노와 한 명의 무용수를 위한 시 1
깊은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피아노가 있었네
그건 조율이 잘된 바람 소리였다네.
사람들은 고요한 저녁 이후 쓸쓸히
머리를 빗고, 빗발 사이에서
문득 흰 새치를 발견한다네.
그저 덧없는 가을의 낙엽 한 장을
만난다네.
<평화 만들기, 문학아카데미, 1989>
능금
김춘수
□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祝祭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餘韻을 새긴다.
□ 2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時時刻刻의 그의 充實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愛撫의
눈짓을 보낸다.
□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微笑를 따라가면은
歲月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感情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꽃의 素描, 백자사, 1959>
丹楓
이호우
져서 더욱 피는
생명의 길 앞에서
차라리 아낌없이
저렇게도 잎 잎들은
스스로 몸들을 조아
남은 피를 뿜고 있다.
<휴화산, 중앙출판사, 1968>
대숲 아래서
나태주
□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道 峯
박두진
山새도 날러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가을 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 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들국화
김광섭
돌연히 나를 기다려
들가에 홀로 나섬인가
너를 반겨 외로움
너와 함께 핀다
너를 가꾸어 보낸 손길
가을 하늘이 차서
분향하여 향기런가
네 모습 꽃 위에 선다
<해바라기, 자유문학사, 1957>
또 가을이다
이승훈
피는
불이 되고
불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풀풀 날린다
시간이
딸국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사물들, 고려원, 1983>
晩秋
김종문
나무가지
끝에
枯葉들이
붙어있다
바람소리를 내며
가지들은
하늘의 주름살, 찌푸리며 다가온다
지구는 태양의 形骸가 되려는가
샘은 끝내 말라버리는가.
소년의 妄想에서 시작된
生涯들이
墓碑 뒤에 누워 기다리는
영원.
달은
영원한 달은
回想의 샨데리아
그 아래서
애인들끼리 포응하지 않으려는가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사랑의
감동도 표현도 없는가
그저
행복 속에 숨어 있는 절망을 폭로하는 자세,
행복을 체념하지 못한 기도문.
독수리떼가 날라드는가
경련을 일으키는 肉身,
앙상한 눈구멍에
구제의 銀화살은 띠지 않고
검은 날개들이 일어 오는
회오리바람에
枯葉들이 떨어지려는가
枯葉들이.
인간과 함께
寸刻이나마
시간을
시간을
고엽(枯葉)들이 떨어지려는가.
봄의
여름의
가을의
풍속과 함께
인간이 출연한 지구라는
圓形舞臺에
검은 幕이 내려 닫기 전에
안녕!
안녕!
인간이 즐겨 쓰는 말로.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63>
毘盧峯 2
정지용
담장이
물들고,
다람쥐 꼬리
숱이 짙다.
산맥 위의
가을 길―
이마 바르히
해도 향그로워
지팽이
자진 마짐
흰 들이
우놋다.
白樺 홀홀
허울 벗고,
꽃 옆에 자고
이는 구름,
바람에
아시우다.
<백록담, 문장사, 1941>
四季
김동현
□ 1. 가을
새가
허공을 끊으며
날아간다
끊어져 흩어지던
허공이
다시
몰려들어 이가 물린다
새는
포물선을 그으며
허공을
끊는다
새는 허공을 끊고 끊고
또
끊는다
아무리 끊어도
다시
이가 물리는
허공
□ 2. 겨울
바람이
허공을 채찍치며
지나간다
허공에 무늬지는
피 배인
채찍자욱
다시
바람은
씽
씽
허공을
채찍치며
지나간다
허공의
하얀 살결 위에
수없이
감기는
채찍자욱
<새, 청하, 1984>
석류
이형기
이 가을
석류가 익는다
익어서 반쯤 벌어져 있다
실은 지난봄
어느 시인의 대뇌 좌우반구
그 뇌막에 퍼지기 시작한 작은 물집들
물집 모양의 종양들이 하나 가득 알알이 익어서
석류처럼 절로 벌어진 이 가을
사람들아
와서 그 속을 들여다보아라
정원의 석류나무 그늘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흔들흔들 바람을 타고 가는 시인의
반쯤 열린 의식의 病巢
아니 그 꿈의 밀실을
가을이 없는 킴벌리 광신의
깊이 감추어진 가을의 속살
눈부신 노다지가 거기 있다
그리고 또 늙은 창녀의
한평생이 담긴 보석상자가……
밤이면 밤마다
머리를 쥐어뜯곤 하던
지난 봄부터의 가려움의 발작이
이제는 갈 데까지 가서 도리어
석류처럼 알이 찬 이 結晶
그러기에 시인은
봄이 아니라 가을에 미친다
맑은 정신으로
<보물섬의 지도, 서문당, 1985>
深秋
신석초
손 대면 꽃물 들 듯한 나뭇잎들.
연 사과 같은 태양의
눈부시게 쏟아지는 금가루
千山에 가을은 짙어 가고.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씨앗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 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빈 들판을 걸어가면, 열음사, 1984>
秋果三題
신석정
□ 1.밤
명랑한 이 가을 고요한 석양에
저 밤나무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숲속엔 낙엽의 구으는 餘韻이 맑고
투욱 툭 여문 밤알이 무심히 떨어지노니
언덕에 밤알이 고이 져 안기우듯이
저 숲에 우리의 조그만 이야기도 간직하고
때가 먼 항해를 하여오는 날 속삭이기 위한
아름다운 과거를 남기지 않으려니?
□ 2.감
하―얀 감꽃 뀌미뀌미 뀌이던 것은
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거니
물밀듯 다가오는 따뜻한 이 가을에
붉은 감빛 유달리 짙어만지네
오늘은 저 감을 또옥 똑 따며 푸른 하늘 밑에서 살고 싶어라
감은 푸른 하늘 밑에서 사는 붉은 열매이어니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푸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기항지, 정음사, 1947>
푸른 하늘
박이도
너의 모습은
한 십리밖
꿀벌의 使役처럼
윙 윙 퍼져 오는 音樂
風琴의 바람주머니엔
아직 告白하지 못한
내 사랑의 말
가을 비 흩뿌린 날
너의 모습은
짙은 秋色을 보듯
비로소 鮮明히 들어온다
푸르고 맑은 하늘
가을이 오는 여울에
나는 한 마리 매처럼
一切의 失意에서 蘇生한다
<불꽃놀이, 문학과지성사, 1983>
回歸
홍윤숙
가을잎 한 잎
빛나는 가지 끝에 머무는 햇살은
여름을 걸어온
해의 발자욱입니다
소슬한 바람에 오스스 나부끼는
잎들의 잔잔한 아우성은
때를 알리는 時間의 손짓입니다
이제 저 많은 黃金의 작은 잎새들이
수만의 작은 새 새끼들처럼
노을 속에 부산히
먼 길을 차리고 떠나려 합니다
바람 속에
불빛으로 익어 온
回想의 날개를 달고
즐거웠던 이웃도 없이
그 전날의 그들의 본향
흙의 무덤으로 돌아간다 하오니
거두어 주소서
당신……
자비로운 大地의 어머니
그도 우리도 모두가 끝내는
曠野의 한 티끌 같은 목숨들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