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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카오스모스적 유월개벽六月開闢이었다”
시인 김지하의 붉은악마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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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한달 내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어대며 사람들이
뛰쳐나와 야단법석하던 그 문화적 태풍을 도대체 무엇이라 이름지어
부를 것인가.
그냥 ‘월드컵’은 아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감히 ‘유월개벽’(六月開闢)이라 부르고자 한다.
개벽이 아니라면 그 사태를 지시할 수 있는 마땅한 말이 우리에게는
없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열광한 붉은 셔츠만도 700만명, 텔레비전을 싸고 돌며 흥분한 붉은 가슴까지 합친다면 3,000만명이 훨씬 넘는다.문제는 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한달이라는 긴 기간 내내 보여준 그
어마어마한 열광과 역동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폭력 사건이나 불미스러운 사고 없이 질서를 지켜 주었고 단 한 오리의 국수주의적 오만함이나 민족적 편견 따위의 노출 없이 돈독한 국제주의적 예절과
주최국으로서의 세계인다운 반듯함과 의젓함을 애써 지켰다는 그 기적적인 기록이다.
六月開闢은 꿈이 아닌 현실
이것이 과연 현실인지를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 요즈음의 나의 버릇이다.
그러나 유월개벽은 꿈이 아니라 엄연히 현실이다.그것이 꿈이 아닌
바로 현실이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심각성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비겁한 태도들이 지식인들 속에서 슬며시 나타났다는 점, 이 점이 아마도 유월개벽에서
유일한 사건이요, 사고일 것이다.
누군가 ‘나치즘의 예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이 독일에 패배했을 때 붉은악마들 속에서 터져나온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라는 국제적 우정의 연호(連呼)가 나치즘의 예감일까.
누군가 ‘파시즘의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역시 독일에 배패했을 때 한국 대표선수들에 대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라는 관용(寬容)의 연호가 붉은악마들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파시즘의 가능성일까.
얼마전 라디오는, 지난번 터키전에서 패배한 한국인들이 도리어 승리한 터키인들에게 보여준 그 깊은 우정에 감사하여 터키를 관광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앙카라발
터키 뉴스를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대(對) 터키전에서
‘대∼한민국’이 외쳐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는 이유만으로 ‘쇼비니즘’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조국을 지향하는 일체의 민족통일
대업(大業) 따위가 역시 갈 데 없는 쇼비니즘이겠다.
그래도 되는가.
지식인들 중에는 유월개벽이 그저 ‘일회적’(一回的) 사건에 그칠
것이라고 얕보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다.
직무유기다.
왜냐하면 설령 그것이 일회적이라 하더라도 지식인이란 그것을 역사의 ‘액센트’로 파악하여 그 근거와 사유와 맥락과 방향을 샅샅이
궁구(窮究)해야 마땅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런 명백한 부정적 태도만이 아니다. 긍정적인 쪽으로 분류되는 태도들 안에마저 문제는 있다.
문화, 그것도 시민문화, 민중문화의 개혁을 전업으로 하는 문화전문가들조차 유월개벽의 그 ‘민족적이면서 세계적인’ 독특한 메시지에는 한오리의 관심도 없이 그저 ‘광장문화의 회복’이니 ‘문화민주주의의 갈망’ 같은 문화정치적 구호로만 한꺼번에 정리해 버리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 역시 심각성의 회피다.
광장문화도 문화요, 문화민주주의도 문화다. 그것을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광장이나 민주주의라는 외면으로 세발짝 나갔으면 문화라는 내면으로 최소한 한발짝 정도는 들어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가 무엇인가.동양적 개념으로 문화는 우선 내면적 사태다. 그렇게 본 뒤에야 비로소 그 외면화를 논의할 수 있는 것이 동양의 문화
개념이다. ‘무늬가 안에 있다’(文在內也)거나 ‘무늬가 그 가운데
있다’(文在基中)는 역리(易理)가 그것을 뜻한다.유월개벽의 경우 무늬·문채(文彩),즉 문화는 바로 저 끝없이 되풀이된 연호와 박수(拍手)와 로고와 태극 상징 ‘안에’ ‘그 가운데’ 들어 있다.
이것을 끄집어내어 자각화하고 명제화(命題化)하는 이제부터의 노력마저 게을리 한다면 앞으로의 문화개혁은 쉽지 않을 것이다.
六月開闢의 명제화, 자각화가 과제
아예 없는 것도 창조라는 이름 아래 쥐어짜내야 할 문화사적 대전환점이 바로 지금이다. 더욱이 저 숱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리버럴들이
그처럼 깊이 심취해 있는 동북아 전통문화의 원형 계승과 그처럼 깊이 갈망해 마지않는 동북아 문화 전통의 창조적 해석에 단 한 발자국이라도 접근해야만 이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다운 세계적 지성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하물며 바로 그와 같은 내용들, 관점들이 젊은 군중의 끝없는 함성 속에 되풀이, 되풀이 마치 상식처럼 관통하고 있음에랴!
그것들을 자각화, 명제화 하는 곳에 지식인과 문화 전문가들의 사명이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북아의 모든 것이 다 선(善)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유월개벽에 대한 중국의 속내 깊은 시샘이 무엇과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유월개벽에 대한 일본의 겉치레뿐인 칭송이 어디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짐작해내야 할 것이다.
남은 때가 그리 많지 않다.
세계에서의 동북아,
동북아에서의 허브!
전 세계적 물류와 동서남북 문화 교류의 허브!
그것이 결판나는 때가 그리 멀지 않다.
그러매 유월개벽의 그 빛나는 나날에 나타난 붉은악마들의 새 문화,
새로운 문화적 코드에 관한 몇가지 생각을 여기에 펼쳐보이는 것 또한 시절에 대해 그리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민족철학인 역리(易理)에서 일종의 운수(運數)로 치는 하나, 셋, 다섯,
일곱 그리고 아홉의 순서대로 말해 나가겠다.
하나.
유월 개벽의 외면적 경과는 매스컴에 의해 정확히 보도되어 이미 드러났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음양’(陰陽)이다. 그렇다면 그 숨겨진
하나의 내면적 규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태극’(太極)일 것이다.
음(陰)과 양(陽)이 서로 물고 돌아가는 근본적인 하나의 차원 즉 ‘중도’(中道)가 바로 태극이다. 그것은 현대과학의 개념으로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요, 문명사의 용어로는 ‘역동적 균형’이며 문화적 패러다임으로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합성어인 ‘카오스모스’(Chaosmos)다.
셋이 다 한 뜻, 한 태극이다.
그 어마어마한 열광과 역동과 혼돈에 가까운 활력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게 안정된 질서와 균형과 예절을 잃지 않았고, 모두 다 붉은색 일색이요 일사분란한 그 통일성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혼란한 정도의 다양한 패션과 재치 넘치는 개성적 표현들로 인해 도리어 해체적이었다.
경기장이나 길거리 응원에 나선 붉은 악마들은 태극기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은 물론 현란한 태극기 패션을 선보여'하나의 무서운 철학책'인 태극기의 본래 의미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
양극단의 모순속 조화 창출
양극단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화를 이룸으로써 지나친 통일성 일변도의 중심중심주의나 지나친 다양성 일변도의 탈중심적 해체주의 양쪽의 위험을 군중 자신의 의지와 감성으로 이미 일찌감치 넘어섰다는 말이다. 많은 내외의 평자(評者)들이 한결같이 바로 이 점을
두고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애당초부터 우리가 지닌 독특한 민족성(民族性) 아닐까.
민족의 조상인 단군(檀君)이 북방 대륙계의 유목이동민인 환웅(桓雄)의 영성(靈性)과 남방 해양계의 농경 정착민인 웅녀(熊女)의 감성(感性) 사이의 사랑과 결혼에 의해 탄생한다는 신화 자체가 우리 민족성의 상징적 근거 아닐까.
민족성은 있다.
인간성,민족성이란 본디 없다는 속류 유물론이야말로 오류다. 착오를
범하기 십상인 무상(無常)한 감각체험에 근거를 둔 유물론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착오요, 오류인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총괄적 현실인식과 초의식, 무의식을 통합하는 인간의 우주적 무의식이란 이름의 본 성품(性)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고 민족 또한 그렇다.
이렇게 보는 것이 도리어 ‘아래로부터의 기제(機制)’와 ‘위로부터의 기제’를 하나로 융합한 가장 영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첨단적 인식론이자 믿음직한 존재론일 것이다.
이른바 태극이 이것 아닐까.
셋.
혼돈과 질서, 역동과 균형, 카오스와 코스모스, 통일과 해체 그리고
아래로부터와 우리부터 사이의 분열 대립의 이중성, 즉 음양(陰陽) 및
‘아니다·그렇다’의 양가적(兩價的) 생명교차라는 현재 차원과 동시에 그 음양을 뒤에서, 밑에서, 숨어서 추동(推動)하고 견제하고 비판 쇄신하다 때가 되면 마침내는 태극 스스로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 개벽(開闢)하는 이 ‘셋’의 이치가 바로 유월개벽에서 우리가 뚜렷이 본 것이고, 앞으로 민족통일의 대사변에서 우리가 다시금 보게
될 진정한 대개벽의 예감이요, 그 내용이다.
한민족 國運 상승의 기회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까마귀,‘삼족오’(三足烏)로 상징하였으며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천부경’(天符經)으로 논리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셋’의 이치는 우선 ‘천(天)·지(地)·인(人)’의 3대 원리다.
한민족이 바야흐로 국운상승(國運上昇)의 때를 맞았다는 것은 부질없는 헛소리가 아니다. 천시(天時)란 반드시 있는 것이어서 모처럼 ‘월드컵’의 주최국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시간의 신비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세계사의 여러 대립 국면들의 교차와 교류
일치의 지점으로 부상하면서 그 창조적 합일의 비전의 출처로 기대되는 동북아 그중에서도 또한 물류(物流)와 문류(文流)의 허브라는 한반도의 지리학적 요건 자체가 지리(地利)인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북 민족의 유례 없는 상호 접근 상황 아래서 대한민국 전 인구의 70%라는 10대, 20대, 30대 신인간(新人間) 세대의 민족문화 역량으로서의 놀라운 성장 자체가 인화(人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지·인’의 ‘셋’의 이치는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人中天地一)는 주체적 융합점으로 나타나 오늘의 유월개벽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주체로 기대되는 청소년과 젊은 여성층의
빛나는 주도력에 의해 폭발한 것이다.
앞으로 ‘셋과 하나의 이치’(三一神誥와 人中天地一의 이치)는 계속해서 우리 사상과 문화의 모터가 되어줄 것이며, 이 ‘셋’의 차원 변화와 ‘아니다·그렇다’의 생명논리는 동서양을 넘어선 생명·생태·생성 과학의 기본 이론으로 크게 확산될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깊은 생명학의 이치가 한국의 절대다수 청소년과 여성들에 의해 하나의
축구 응원의 외침으로까지 현실화, 구호화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자각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문화화하고 그 문화화에 의해 민족통일이라는 새로운 창조적 통일원리의 차원으로 상승하면서 개벽할 것이 틀림없다.
다섯.
유월개벽에서 나타난 붉은악마 세대의 새 문화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젊은 새세대만의 독특한 문화요, 민족 전체의 고유한 문화이며, 전세계 인류의 새로운 문화의 새 알맹이와 새 틀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글의 핵심인 ‘3박(拍) 플러스 2박(拍)’이 그것이다. 3박자가 새로운 알맹이고 2박자가 새로운 틀이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보다 깊고 그 파급 범위는 보다 크고 넓다.
유월개벽의 특징 중 특징은 응원단과 선수들의 혼연일체의 호흡(呼吸)에 있다.‘호’(呼)와 ‘흡’(吸)의 멋진 플러스 말이다. 만약 응원단의 열광을 3박자라고 한다면 선수들의 균형을 2박자라 할 수 있고,
만약 응원단의 질서를 2박자라 한다면 선수들의 에너지를 3박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분류해서 ‘응원단의 3박 플러스 선수들의 2박’이라고 우선 가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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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자존심'을 그린 붉은 악마의 카드섹션은 인류 개벽의 동행자로 한국을 자리매김하는 위대한 포용력의 표현이었다. |
‘엇박’은 민족문화의 핵심 원리
‘3박 플러스 2박’은 민족음악의 기본 박자요, 민족문학의 기본 음보(音步)이며, 민족문화의 핵심 원리다. 그것은 민족 역사를 본다면
북방계 환웅족과 남방계 웅녀족의 플러스이며 유목이동문명과 농경정착문명의 모순과 일치의 플러스이면서 백두대간 동쪽과 서쪽의 3수분화(三數分化)와 2수분화(二數分化)의 세계관, 가치관 및 문명과
정치의 역동적 통합인 것이다. 그리고 철학으로 본다면 음과 양이요,
하늘과 땅, 신(神)과 인간, 영성과 감성 및 이성주체와 타자, 남성과 여성, 왕권과 부족공동체적 화백의 정치철학인 통일과 자유의 결합, 경제 원리인 우주생태적 인간주의와 사회경제적 호혜(互惠)주의의 결합인 신시(神市)의 경제 철학 등이다.
만약 응원단의 3박이 이와 같은 ‘문·사·철’(文史哲)의 문화원리,
즉 문학문화예술적 표현원리와 민족 역사의 현재적 원형과 민족적이고 동양적이면서 전 인류·우주적인 오래고 새로운 철학법칙의 3자
결합을 함축한다면 선수들, 태극전사들의 2박을 개인 개인의 육체와
정신의 통일, 기(氣) 중심의 수련과 신인간적 삶의 수양 즉‘싸움의
예절’ 그리고 단체, 사회, 세계적으로는 모든 대립항의 모순과 일치를 조화시켜 탁월한 유격전쟁과도 같은 놀이와 싸움의 ‘기우뚱한 균형’의 결합을 목표하고 결국 호모 크레아티부스와 호모 루덴스의 결합, 일과 놀이를 균정하는 데에 그 중심이 놓여 있다.
3박이 역동·변화·혼란·혼돈·움직임, 즉 양이요, 붉은 빛이요, 남성이며 하늘이고 불이라면 2박은 안정·균형·평형·평화·고요와
질서, 즉 음이요 푸른 빛이며 여성이요 땅이고 물이다.
그러므로 ‘3박 플러스 2박’이란 다름아닌 ‘엇박’으로 길었다 짧았다, 빨랐다 느렸다,이리치다 저리치다, 어울렸다 흩어졌다, 대립했다 통일됐다, 움직이다 고요했다 하는 ‘혼란스러운 균형’으로서 민족문화의 핵심이자 민족 음악의 기본이다.
이 ‘엇박’이 곧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요, ‘역동적 균형’이요,‘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합성어인 ‘카오스모스’이고 이것이
곧 혼돈과 복잡성, 모호성과 해체, 탈중심 일변도로 기울어지는 서구문명 속의 21세기 인류에게 그 나름의 혼돈의 질서, 그 나름의 역동하는 균형, 그 나름의 카오스모스의 새 차원, 새 나침반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무엇으로 그것이 나타났는가.
본디 2박 또는 4박인 ‘대한민국’을 ‘민국’의 2박은 그대로 두되
‘대’를 ‘한’까지 길게 끌어 ‘대∼한’의 3박을 만들고 거기에
급하게 ‘민국’의 2박을 붙여 버렸다.
‘짝짝짝 짝짝’의 ‘3박 플러스 2박’의 박수 또한 마찬가지다. 바로 이와 같은 ‘3박 플러스 2박’의 ‘엇박’ ‘혼돈박’에 기초하여
민요풍으로 복잡화시킨 것이 곧 ‘아리랑’이고, 록으로 복잡화한 것이 ‘오 필승 코레아’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양인들은 바로 이 모순된 통일 형식때문에 마음과 몸이 못따라왔고, 발박자가 안맞아 혼란에 빠진 것 같다는 평론이 나왔을 정도다.
이런 문화, 즉 혼돈과 질서, 역동과 균형,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동시에 함께 붙어 있는 문화는 전 세계에 한국민족밖엔 없다. 혼돈이면 혼돈이고 질서면 질서인 것이다. 사실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문화 패러다임인 ‘카오스모스’ 또는 ‘카오스 모시스’ 역시 일리야 프리고진 류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인 것이 평형상태의 물에
일정한 높은 열을 가했을 때 비로소 새롭게 일어나는 대류, 즉 ‘기화(氣化)현상’이지 그 자체로서 애당초부터 혼돈이면서 질서인 ‘태극현상’은 아닌 것이다.
이 문화가 우리 민족의 독특하고도 보편적이며 신화적이면서 역사적이고 영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다섯’의 원리이다. 이 ‘다섯’이라는 ‘엇박’의 문화가 바로 역리(易理)의 기본으로, 태극과 음양 나아가 오행(五行)인데 마치 서양식 모슨어법 옥시모론(Oxymoron)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얼핏 보아 변증법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엇박이나 역리와 달리 모순어법은 형이상학적, 정태적, 연금술적이며 변증법은 모순성, 투쟁성, 대립성, 정복성만 중심으로 다루어 공생과 상생 또는 조화 일치와 함께 드러난 현 차원과 숨은 새 차원 사이의 ‘아니다·그렇다’의 교차적 생명논리를 전혀 결핍하고
있다.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면서 동시에 통일되고 조화되는 것, 드러난 차원과 숨겨진 차원 사이의 끝없는 차원 변화라는 음양 태극적 생성인
이 ‘엇박’과 ‘역리’는 모순어법의 한계와 변증법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한다.
민족문화의 바로 이런 특징은 앞으로 다가오는 신세대 신인류문화의
특징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생명 생성의 에콜로지와 영성 교호의 사이버네틱스의 교호작용과 결합으로 보이는 차세대 문명의 핵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엇박’ 다음으로 놀라운 것은 붉은악마들의 그 시뻘건 ‘로고’다.
이 ‘로고’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일까.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배달국(培達國)과 고조선의 역사에 뿌리를 둔 현재적 역사 원형이
바로 이 ‘로고’다. 그것은 배달국의 제 14대 천황 ‘자오지’(慈烏支),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살았다는 신화 속의 천황, 싸움과 전쟁의 신(神)인 치우(蚩尤)천황의 얼굴 모습이다.
문명통합 상징 치우천황 로고
당시 중국 화하족(華夏族)의 리더인 황제(黃帝)와 한민족인 배달국 동이(東夷)의 리더인 치우는 47회나 전쟁을 치렀으며, 저 유명한 탁록전쟁에서 황제와 피비린내 나는 결정적 전투를 치른다. 그후 치우는 중국 민족에게 두고두고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지금과 같이 두 뿔이 돋친 붉은악마의 모습으로 전해 내려왔다.
동이족의 치우와 화하족의 황제는 무엇 때문에 47회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였을까? 바로 여기에 중국과 한민족 사이의 문명관과
가치관, 세계관의 대립 그리고 또 다음 일치점이 있고, 그러기에 그
역사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사의 미래에 하나의 현재적 원형이
되는 것이다.
4,500년전 동북아에는 지구 기온의 대대적 상승과 함께 남쪽으로부터 북상한 남방계 농경정착문명이 전파되었다. 중국의 황제는 바로
이 농경문명 일변도로 중국을 쇄신하며 이전의 북방계 유목이동문명을 청산하고 그 모든 연관 부분을 숙청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이후
중화문명의 농업적 전통, 봉건제, 가부장제와 장자세습제, 정태적 우주관과 중국 중심주의, 제후국과 왕권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 동이족의 치우는 북방계 유목이동문명과 남방계 농경정착문명을 병행, 조화 또는 공존, 통합하려고 했고 유목적 영성의 가치관·세계관과 농경적 생명의 감성-이성적 가치관·세계관을 혼융하려고 했다.
환웅과 웅녀의 결혼의 신화 안에 그리고 천제단(天祭壇)과 고인돌 안에 바로 이와 같은 유목과 농경, 대륙과 해양의 결합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 필사적인 문명전쟁에서의 치우의 승리는 인류사적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 세계는 환경과 지구생태계의 오염, 파괴로 신음하고 있다. 여기에서 부자 나라 중심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반대하여 많은 환경운동가와 생태주의자들, 제 3세계 및 반(反)세계화주의자들은 일단 생명론 차원의 새로운 유기농업으로 세계와 민족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기농업과 생태학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유럽과 아메리카 중심의 지배적인 세계문명은 핸드폰과
노트북, 사이버와 디지털 그리고 도시와 비행기, 공항, 주유소, 승용차, 호텔, 모텔, 항만을 일상화시켰다. 즉 유목문명의 부활이다.
유럽의 선진적 철학자들인 자크 아탈리와 질 들뢰즈까지도 미래에 도래할 세계문명은 유일하게 유목사회라고 일방적으로 못박아 버린다.
들뢰즈의 경우 역사 생성의 이중성, 양면성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주장해온 자기 철학에 모순되는 태도, 유목사회 일면성 강조라는 파탄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만큼 유목화의 요구 또한 큰 것이다.
문제는 농업 일변도나 유목 일변도의 외짝문명으로는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배달동이족의 치우가 세우려고 했던 ‘유목-농경적(Nomadic-Agral)이중적
통합 문명’의 창조를 의미 깊게 검토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 시원에 있는 이같은 이중적 문명 통합을 위한 투쟁의 원형을 자기들의 축구열의 ‘로고’로까지 밀어붙인 붉은악마들은 참으로 인간과 민족과 세계 인류와 지구 생명계의 축복을 한아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엇박’과 ‘치우’에서 놀라는 사람들은 그 현란한 태극기와 태극
무늬, 태극 상징들의 물결 앞에서는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기야말로 이 모든 현상의 원리를 안고 있는 하나의 무서운 철학책이다. 그것은 민족과 인류가 미래에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새롭고도 오래 된 철학을 간단히 제기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태극패션 물결은 철학적 문제 제기
태극기로 모자 해 쓰고 태극기로 망토 해 두르고 태극기로 바지나 스커트를 해 입고 태극기로 스티커까지 만들어 붙이는 젊은 세대는 한마디로 ‘철학자들의 신세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태극기 자체가 심오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우선 국기(國旗)에 대한 강제적 존중이 아닌
자발적 사랑이 나타난 것에 박수하자! 다음에 그 철학적 깊이를 알고
나면 아마도 신세대 스스로 자연스럽게 태극기를 존중할 것이다.
세계의 모든 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태극기의 그 역리(易理)적 음양법(陰陽法)이겠는데, 그것은 동이족의 문화적 산물인 복희역(伏羲易), 중국문화의 산물인 주역(周易), 그리고 한민족의 신령한
문화적 산물인 정역(正易)을 다 관통하는 원리다.
우선 태극기의 흰색 바탕의 의미를 보자!
그것은 단일민족을 뜻하고 순박순결한 인간성과 민족성 그리고 세계만방의 항구적 평화를 상징한다. 복판의 태극은 이미 누누이 설명한
바와 같은 천지음양(天地陰陽)의 대립과 통일이니 동양과 민족철학의
핵심이요, 새 시대의 세계철학의 기초 윈리로 될 것이다.
음양은 빛과 그늘,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역동과 안정, 변화와 질서,
카오스와 코스모스인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세가지다. 먼저 두가지
중 하나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통일하는 것이다.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그것이다.이 두가지를 다 포함하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태극의 세 차원과 음양의 기존 차원 사이의 ‘아니다·그렇다’의 교차적 생명논리가 바로 세번째 원리로서 ‘중도’(中道)다.
다음에는 네 귀퉁이에 있는 네개의 괘(卦)의 상징이다. 먼저 건(乾· )과 곤(坤· )이 뜻하는 바는 현실적으로는 천지비(天地否· ) 즉 혼돈,
분열, 쇠퇴이고, 바람직한 것은 거꾸로 지천태(地天泰· ) 즉 질서, 통일, 발전이다.
다음 리(離· )와 감(坎· )이 뜻하는 바는 현실적으로는 화수미제(火水未濟· ) 즉 미해결, 혼돈, 무한, 개방이요 바람직한 것은 수화기제(水火旣濟· ) 즉 해결, 질서, 완성, 통일이다.
오직 현실적인 민족상황만 표현하거나 아니면 바람직한 민족 미래만
상징하는 세계 국기들의 하나같은 일면성을 이미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우주 생명·생성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웅변적으로 드러내어 모든
인간과 우리 민족과 세계 인류와 심지어 지구·우주 생명의 참된 삶의 이중적 실상과 그 희망의 차원까지 보여주고 밝혀주는 상징인데,
개별적으로 본다면 ‘건’은 천도(天道)로서 정의(正義)를, ‘곤’은
지도(地道)로서 공동의 물질적 이익(共利)을 뜻하여 자유롭고 정의로우면서도 풍요롭고 평등한 복지세계를 상징한다. ‘리’는 불이요 빛으로서 광명과 정열을, ‘감’은 물이요 그늘로서 지혜와 활력을 의미한다.
분열과 통일, 정의와 공리, 정열과 지혜, 즉 현실과 바람이 음양의 태극처럼 통전, 공존한다면 어떤 철학 원리가 될 것인가. 대답은 이미
주어졌다. ‘엇’이요 ‘태극’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북한의 사회주의와 남한의 자유자본주의, 북방 대륙세력과 미국·일본 등의 남방 해양세력, 동양과 서양 사이의 상관성을 표현하며, 그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기회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극과 극
사이의 창조적인 새 차원에로의 평화, 통일, 화해, 일치와 그 차원의
창조적 생산력을 의미한다.
태극기는 인간, 민족 그리고 현대적 상황 속의 인류와 지구 우주 뭇
생명의 미래의 출구로서 신생 철학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신세대,
신인류의 철학적 깃발이 아닐 수 없다.
文史哲 3자 결합의 문화
바로 이같은 붉은악마, 즉 응원단의 3박 또는 ‘문·사·철’의 3자
결합의 문화가 선수단 즉 태극전사들의 균형잡힌 예절과 역동적 투지의 통합, 즉 ‘기우뚱한 균형’ 그리고 공격과 수비, 좌익과 우익,전진과 후퇴, 집중과 분산이 자유자재한 완벽한 ‘유격’적인 ‘싸움의
예절’을 성취한 팀워크와 결합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유월개벽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태극이자 토박이 우리 말의 ‘엇’이다.
유월개벽의 또 하나의 이름은 ‘엇’이니 바로 동학(東學)의 ‘궁궁’(弓弓)이다. 그러므로 유월개벽의 깃발은 동학의 후천개벽의 계시
상징인 ‘태극이면서 궁궁’(其形太極 又形弓弓)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엇’이나 치우의 역사적 원형이나 태극처럼 인간과 세계와 우주 전체에로 차원을 바꾸어가며 거듭 거듭 확산하는 새 문화, 새로운 태극문화의 물결이니 그 주체는 일곱이다.
첫째는 청년과 소년, 즉 청소년이다. 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고 세계의 신인류다. 유월개벽은 바로 이 주인공들 때문에라도 불멸의 세계적 문화개벽이 될 것이다.
둘째는 청소년 못지않은 젊은 여성, 젊은 주부들이다. 유월개벽은 전
세계의 영성적 생명문화에 개벽적 페미니즘을 결합시켰다. 여성들의
음양태극, 여성들의 이중통합적 문명, 여성들의 ‘카오스모스’가 민족은 물론 세계와 지구를 구할 것이다.
셋째는 인터넷과 언론과 방송이다. 즉 사이버와 디지털 미디어가 유월개벽의 큰 공로자다. 다만 인터넷과 미디어는 이제부터 유월개벽의
자각화, 명제화, 논리화, 문화화에 앞장서야 한다.
넷째는 정부와 기업이다. 아마도 이 부분의 협조와 협력은 유월개벽에서 매우 중요한 방조자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부정적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 역할이 심각히 검토되어야 하되 결코 폄하되거나 적대시되거나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다섯째는 북한이다.
이탈리아전 때에 붉은악마의 카드섹션이 ‘1966, AGAIN’으로 형상화되었을 때 우리 민족의 심장은 눈물로 가득찼다. 북한 민족의 승리를 남한 민족이 이어간 것이니 여기에 거스르는 서해교전(西海交戰)은 참으로 큰 오류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 민족과의 유월개벽의 문화적 공유, 공동의 철학 탐색은 끊임없이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여섯째는 아시아다.
붉은악마는 카드섹션으로 ‘아시아의 자존심’을 그렸다. 중국의 속내 깊은 시샘과 일본의 겉치레뿐인 칭송은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야
한다. 유월개벽은 터키를 들어올리는 아시아적 함성으로서 중국과 일본의 오류와 위선까지 다 용서하고 포용하여 인류개벽의 동행자로 자리매김해 주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포용력이었다.
일곱째.
우리가 버거운 상대로 생각했던 포르투갈을 이겨 어부지리로 16강에
진출한 미국의 언론은 그때 ‘생큐 코리아’의 제목을 뽑았다. 놀라운 신사도(紳士道)다.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에 대해서도 ‘싸우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우호적’이었다. 그럼으로써 세계
인류가 모두 주최자요 주체이게 되었으니 무엇보다 앞선 공로요 성과다.
이제부터의 일이 중요
유월개벽은 문자 그대로 ‘월드컵’이었고, 그 주최국인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 부채 탕감의 세계사적 기회였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아홉’은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그것은 이제부터의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아홉은 모든 것의 관건(關鍵)으로서 우주의
‘아홉 궁궐’(九宮)이요 세계의 ‘아홉 범주’(九疇)다.
유월개벽에서의 멋진 태극전사의 선수들과 붉은악마 응원단을 주인공으로 하는, 민주적이면서도 전 인류적, 전 세계적인 아시아 문예부흥, 세계 문화혁명이 확산적으로 거듭거듭 발화되어 참으로 유월개벽을 전 지구적 후천개벽으로까지 완성할 날을 기다린다.
민족 전통을 지키면서도 오늘의 세계 인류와 신세대에 알맞게 창조적으로 변형시킨 유월개벽의 문화적 주인공들에게 다함없는 사랑과 모심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