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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84회>
씬 1 황궁 정전 뜰
활짝 열려진 사잇문으로 대소신료들이 들고 있다. 광치나 유천궁을 비
롯하여 박지윤, 장자1,2, 왕식렴, 박수문 형제, 복지겸, 이흔암, 배현
경, 환선길, 홍유, 김락, 아지태, 입전, 신방, 임춘길과 더불어 많은
신료들이 들고 있다. 그 한켠에서 유천궁을 보고 아지태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넨다.
아지태 아이고, 광치나 어른이 아니시옵니까?
유천궁 오랜만이구료, 내봉성령.
아지태 (가까이 다가가며) 매일처럼 조정에 출사를 하면서도 광치나
어른께 대소사를 의논할 시간이 없었사옵니다. 별일은 없으시
옵니까?
유천궁 나 같은 늙은이가 그저 구색 맞추려고 앉아 있는 것이지. 조
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리가 있겠소이까?
아지태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그래도, 이 나라 신료 중에 으뜸이시옵
니다.
유천궁 어서 가십시다.
그저 탐탁지 않게 이야기하고, 또 한편에서는 장자1,2가 환선길과 인
사를 나누고 있다.
장자1 아이고, 환장군, 아직 전선으로 안 가신 모양입니다.
환선길 예, 아직 폐하의 재가가 나지 않았소이다.
홍유 허허허, 뭐 금명간 어떤 영이 내리시지 않겠소이까?
김락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어깨가 근지럽소이다. 장수란 밖에
나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외다.
이흔암 왜 아니겠소이까?
그들 그렇게 들어간다. 왕식렴도 들어가며 사람들과 가벼운 묵례를 나
눈다. 그들 속에서 디졸브되면....
씬 2 조당(정전) 외경
군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있다. 금대와 장일이 거기에 있고....
씬 3 동 조당 안
문무백관들이 도열해 있다. 종간과 은부, 박유, 염상,최응 들도 보인
다. 궁예가 옥좌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관심법을 하고 있는
지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또 무섭게 번쩍 떴
다가 또 감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신료들이 초긴장하여, 움추리
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카메라 궁예에
게 다가가면서....
궁예 (눈을 번쩍 뜨며 실성한 듯 한참 웃는다)........
신료들 .........(의아하고 불안해서 본다)
궁예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경들은 들으오.
신료들 예...
궁예 내가 지금 가만히 관심법으로 보니까 오늘 경들의 마음은 참
으로 경건하고도 맑아 보이오. 좋은 날인 것 같소이다.
신료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나는 지난번에 야단법석의 법회를 주관했소이다. 참 좋고 뜻
이 깊은 것이었는데, 그만 마군이들이 와서 성스러운 법회를
망쳐놓았소이다. 그래서, 그날 다하지 못한 말을 오늘 확실하
게 주지시키려고 이 조회를 연 것이오. 이보게, 원봉성령.
최응 예, 폐하.
궁예 짐이 내린 조서가 있을 것이다.
최응 예, 폐하. 신이 가지고 있사옵니다.
궁예 옳거니, 그걸 가지고 나와 신료들에게 전해주어라.
최응 예, 폐하.
최응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나와 조심스럽게 궁예 앞에 서서 펼쳐 읽는
다.
최응 삼가 대 미륵부처이시고, 대 황제폐하이신 황상의 영을 받들
어 그 내용을 전해올리옵니다.
모두들 .......
최응 폐하께오서는 강력한 북방의 제국 건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명하셨사옵니다. 그 첫번째,
모두들 .......
최응 지금의 군사 체제를 개편하여 새로운 군단을 형성할 것이다.
새 군단은 마군과 보군, 수군, 공병 등을 비롯하여 가장 정예
적인 군대를 북쪽으로 배치할 것이니라.
그 말에 크게 놀라는 유천궁과 복지겸의 표정이 보인다.
유천궁 아니, 그것은 저.....
최응 (듣지 않고 계속) 물론, 백성들에 어려움을 짐은 아노라. 그
러나, 결코 힘이 들어 쉰다면 먼길을 갈 수 없느니라. 이 북
벌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장자와 호족, 백성들은 각각 세금
을 내는 의무와 군역 그리고 공역에 종사하는 의무를 지금의
배로 하여 져야 할 것이니라.
박지윤 폐하, 지금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당치 않사옵니다. 이미 백
성들의 살림은 피폐 할대로 피폐하여...
궁예 지금 짐이 내린 조서가 아직 끝나지 않았느니라. 원봉성은 뭘
하느냐? 계속 읽거라.
최응 예, 폐하. (계속) 군사 훈련과 모병, 그리고 그에 관한 재원
의 조달을 각 부서에서 차질 없이 나누어 해야 할 것이며, 특
히 사대(史臺: 외국어 통역 학습 관서)에서는 유능한 인재들
을 특별 관리하여 정예훈련을 시키고 적진에 보내 저들의 사
정을 낱낱이 그리고 쉼 없이 알아와야 할 것이다. 이른바 첩
보가 좋아야 이쪽의 손실이 적고 좋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것
이니라. 삼가 받들 것이니라.
신료들 예......
최응이 다시 궁예에게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 두루마리를 말아 물러난
다.
궁예 경들은 들으오.
신료들 예......
궁예 지금 백제와 신라의 전선에 나가있는 군대는 그대로 유지하면
서 저 중원을 도모할 새로운 군대를 만들자는 것이오. 여기에
는 질문도 필요 없고, 이의를 달지 않도록 했소이다. 그리고,
책임을 질 관리들도 짐이 벌써 정해놓았소이다. 이보시게, 내
봉성령.
아지태 예, 폐하.
궁예 경이 북벌의 군대를 모두 관리하고, 준비토록 하시오.
아지태 예, 폐하. 그토록 중요한 영을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궁예 그리고, 내원.
종간 예, 폐하.
궁예 이 대 역사에 참가하는 많은 조정의 부처들을 감독하는 감독
관으로써 내원을 명하오.
종간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또한, 군사 훈련과 그에 관한 직접적 일은 병부령 지휘하에
환선길 장군과 이흔암, 홍유, 배현경, 김락 장군들이 맡게 될
것이오.
그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더불어 짐이 매일처럼 이 일에 진행 사실을 점검할 것이오.
다시 말하거니와 질문이나 이의는 없소이다. 그럴 틈이 없어
요. 그리고, 또한 말해두리다. 각자가 맡은 일들을 이행하지
못할 때는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죽음, 죽음 말
이오. 지금은 바로 그럴 때이오. 죽느냐, 사느냐, (주변을 돌
아보며) 죽느냐, 사느냐.....?
모두들 ........
궁예 (일어서며) 오늘 조회는 이것으로 끝이올시다. 우리는 북으로
간다. 우리는 북으로 간다. 이것을 전해드렸소이다. 모두들
아시겠소이까?
신료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들을 보는 궁예의 표정에서.....
씬4 황후전 복도
진내관들과 제조상궁들이 서있다. 그 위로 백씨 소리가 들려온다.
백씨 (E) 자주 들리지 못하여, 참으로 송구합니다, 마마.
씬5 동 황후전
연화가 백씨와 마주해 있다.
백씨 오늘은 그래도 모처럼 조회가 열려, 나으리를 따라 궁에 들어
왔사옵니다.
연화 잘 오셨습니다, 어머님. 하지만, 이 궁에 오셔도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요즘은 그저 안이나 밖이나 모두가 찬바람입니다.
백씨 그렇기는...한 것 같사옵니다. 아휴, 지난 번 그 법회 때문에
어디를 가나 그냥 쉬쉬하면서....
연화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백씨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연화 말씀하세요, 어머님.
백씨 아무래도 폐하께오서 지난번에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신 이후
많이 달라지신 것 같다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연화 (놀라며) 그렇습니까?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씨 글세요, 뭐. 생각하기에 따라서...그럴 수도 있다고 보옵니다
만은....
연화 그렇습니다, 어머님. 폐하께서는 지금 많이 아프십니다.병이
십니다.
백씨 예?
연화 송악에서 이곳으로 오시면서 폐하는 변하셨습니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시던 폐하셨습니다. 헌데, 어머니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아무나 거리낌없이 피를 보십니다. 피 말
입니다, 어머님.
백씨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떨었는지....
연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버님은 이미 경고를 받고 계십니다. 조
심해라, 아니면 죽을 것이다, 지난번에 그런 주의를 받으셨어
요.
백씨 왜 모르겠습니까? 잘 압니다, 황후마마. 그 생각만 하면, 너
무 떨려서....
연화 한치 앞이 안보입니다. 언제 어디로 불똥이 튈지 아무도 모릅
니다. 조심하라고 이르시어요. 폐하께서는 본래 잔정이 없으
십니다. 가리는 게 없으십니다. 처가 집이고, 뭐고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
머님.
백씨 (겁을 먹고 끄떡이며) 예, 마마. 씬6 철원 저자 거리
평복을 입은 왕건의 군사 하나가 달려와 지나쳐 간다.
씬7 왕건의 집 마당
소리 (E) 계시오! 충주에서 왔소이다. 계시오.
누군가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다. 저만치 집안을 경계하던 장수
장이 고개짓을 하자, 하인들이 달려가 대문을 연다. 그러자,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장수장 어디서 온 뉘시오?
사내 조령 전선에서 왕건 총사께서 보내서 왔소이다.
장수장 (반가워) 오, 그렇소이까? 안으로 드시구료. 자, 어서.
그들 그렇게 들어가면.
씬8 동 집 사랑
서찰을 읽고 있는 유씨, 그리고 그 옆에서 함께 보고 있는 오씨의 입
은 앙 다물어 지고 있는 반면, 유씨는 그에 눈물을 떨구고 있다.
왕건 (E) 부인 보시구료. 그리고, 이 염치없는 사람의 어쩔 수 없
는 처지를 이해하여 주시구료. 본래 신하는 나라의 명을 받
고, 그 생사를 운영하는 사람이외다. 이 사람이 전선에 나와
여러가지로 나라땅을 되찾는데 있어서 지금 혼인을 명 받은
장자 유긍달의 집에서 말로 다하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소이
다.
두여인 .........
왕건 (E) 이제 저들이 한 집안 되기를 원하고, 또한 폐하께오서 큰
장인어른 되시는 부인의 아버님, 광치나 어른과 더불어 이 혼
인을 명령하시니 참으로 물리치기 어렵게 되었구료. 이 사람
의 딱한 사정을 십분 이해하시고, 작은 부인과 더불어 다음
날을 기약해주시구료. 만나서 자세한 사정을 전하리다.
유씨가 눈물을 흘리며, 서찰을 접는다. 감정을 숨기려던 오씨가 다시
그것을 들어보다가, 탁자 위에 놓는다. 그리고, 또 참고 있다.
유씨 서방님께서..... 혼례를..... 그에 올리신단 말씀이신가?
사내 그러하옵니다, 마님. 먼지 이러한 사실을 두 마님께 올리시어
답을 받으시고, 사정을 전해 올리라 하셨사옵니다.
오씨 나라님이 명하셨고, 서방님께서 그에 응하셨네. 우리의 답을
받고 아니 받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유씨 (눈물을 훔치며) 그 말은 맞네. 우리가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좋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 일을 어찌하겠
는가, 아우님?
오씨 (한숨) 이 서찰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라님의 영은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말이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기는 하지
만, 밖으로 나가서는 한 나라의 신하라 하셨습니다. 형님, 이
해하십시다.
유씨 이해라고 하였는가, 아우님?
오씨 어찌 하겠습니까? 지난 번 형님의 아버님께서도 말씀하셨고,
그리고 저희 아버님도 마침 이곳에 오셨다가 이 소식을 들으
셨습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
하셨습니다.
유씨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안 믿겨 지네.
오씨 어쨌든 각오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서방님께
서는 우리들의 의견을 구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형
님?
유씨 모르겠네. 난 하나도 모르겠네. 그저, 답답하기만 하네 그려.
남자들 사는 세상은 왜 모두들 이렇단 말인가 말이네.
씬9 철원 황궁 외경
씬10 동 어느 전각 안
유천궁과 병부령 복지겸이 함께 해 있다. 계속 한숨을 쉬는 유천궁.
유천궁 캄캄하오이다. 갈수록 캄캄해.
복지겸 어찌 아니 그렇겠사옵니까? 부당한 명령을 내리시는 데다가,
미처 반론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으시옵니다.
유천궁 내가 이 나라의 광치나로써 오래 전부터 실속은 없고 그저 이
름뿐이었소이다 만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번 일은 폐
하께서 너무 하시는 것 같소이다.
복지겸 (생각하다가) 아지태가 그야말로 이 정권의 중심으로 떠올랐
사옵니다. 지난날에는 그래도 주변에서 맴돌았는데, 이제는
아주 중심으로 나타났사옵니다.
유천궁 맞는 말이오. 이제는 내원의 그 위치까지도 흔들리는 것 같소
이다.
복지겸 소생도 그렇게 보옵니다, 광치나 어른.
유천궁 어쩌다가 이 나라 조정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소이다. 누
구 하나 숨소리조차 크게 못 내고 있소이다.
복지겸 오늘 폐하께서 하신 말씀들은 하나 같이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이루기 어려운 일들이옵니다. 분명, 생각하시는 것과 실제적
인 상황은 서로가 맞지 않을 것인데..... 불안하기만 하옵니
다. 과연, 어찌 될 것인지....?
유천궁 그러게 말이외다. 특히나, 병부령은 우리보다 더할 것 같소이
다.
복지겸 그럴 것 같사옵니다, 허허허, 이것 참.... 옛날이 그립습니
다. 그냥 이럴 때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한데....
씬11 동 황궁 내원
종간이 기록들을 계속 검토하다가, 탁자를 치며 긴 한숨을 쉰다. 어려
운 것이다. 모든 것이 어려운 것이다. 박유, 은부가 보고 있다.
박유 지금 신료들이 삼삼오오 조정 곳곳에 모여서 폐하께서 내리신
조칙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하옵니다.
종간 왜 아니 그렇겠소이까?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르라는 명들을
받았소이다.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라는 명을 받았소이다.(사
이) 즉,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마지막 선택을 하라는 영을
받은 것이올시다.
은부 소장이 듣기로도 이번 폐하의 영은 너무도 기가 막히옵니다.
이거야 말로, 아지태의 또 한번 농간이 아니겠사옵니까?
종간 아닐세. 오래전부터 폐하께서 꿈꾸시던 것들을 아지태가 부추
기는 것일세. 그 불씨에 불을 붙여 놓은 것이야. 법회도 그렇
고, 이번 조회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래.
박유 이렇게는 절대로 오래 갈 수 없사옵니다. 순종만이 미덕은 아
니옵니다. 벗어날 방도를 강구해보시오소서, 내원어른.
종간 (도리질하며) 아니오. 병이 깊어지신 폐하께 무슨 방도를 드
릴 수가 있다는 말이오? 병...병이 깊어 지셨소이다. 내 생각
으로는 빨리 박학사가 좀 나섰으면 좋겠는데....
은부 금강산 도인을.... 말씀하시옵니까?
종간 기댈 곳이 없지 않은가? 의원의 손을 빌려서 될 일이 아니
고.... 병은 깊어지시고..... 아지태는 그것을 이용하고 있
고...... 곳곳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어찌해야 할
지....... 참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은부 그리고, 내원어른.... (눈치 보다가) 부장 염상을 병부로 보
냈사옵니다.
종간 알고 있네. 보이지 않길래 궁금해하였네 그려. 잘 했어. 처음
에는 우리 쪽에서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 지금은 실망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주변에 사람들이 떠난 다는 것은 불행한 일인
데..... 폐하께서 그걸 모르시네.
두사람 ........
종간 어쨌든, 박학사.
박유 예, 내원어른.
종간 그 도인을 찾아 봐주시구료.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직접 금
강산에 좀 다녀와주시구료.
박유 알겠사옵니다, 내원어른.
종간 병이시오. 법회도 그렇고, 이번 조회도 그렇고, 이 모두가 병
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이시오. 아,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언제까지..... 나는 박학사만 믿소이다. 한번 더 힘을 써봐주
시구료.
박유 (어쩔 수 없다는 듯) 예, 가기는 가보겠사옵니다만은....
그런 그들의 면면에서...
씬 12 철원 저자거리
박유가 가고 있다. 그 위로 박유의 소리가 들려온다.
박유 (E) 세상사 참으로 뜻대로 아니되는 구나. 이 박유가 산 속에
숨어 살다가 좋은 세상 한번 만들려고, 나왔더니 끝내 이루
지 못하고 다시 가는 구나... 내가 올 때는 아지태의 만행을
한 번 꺾어 보려고 나왔건만, 그를 이루지 못하고 다시 가는
구나. 폐하를 살려 달라는 내원의 말을 들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허나, 이제 더는 어찌 할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멀어지는 박유의 모습위로. 해설이 깔린다.
해설 박유! 기록으로 보면, 그는 은자(隱者)라 하여 숨어 있는 의
인이나 성인처럼 표현되고 있다. 아마도, 상당히 존경받았던
학자였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세상에 나와 궁예를 돕다가 이
때쯤 다시 종적을 감추니, 기록은 그가 궁예의 폭정을 보다
못해, 몸을 숨겼다고 그 사유를 적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얼
마 후 왕건의 세상이 왔을 때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어쨌
든, 박유는 종간의 부탁을 받아 금강산 도인을 찾아 나선 길
로 그 모습을 감추고 만다. 종간에게 있어서는 또 하나의 치
명적인 아픔을 맛보게 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씬13 동 황궁 대전
궁예가 책을 보고 있다. 그 한쪽에서 최응이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명필이다.
궁예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내가 지시한 중원의 역대에 황제들에 관해 기록하는 것이냐?
최응 그러하옵니다.
궁예 아지태 학사는 늘 진시황을 그렇게 칭찬하였었지.
최응 그러하옵니다. 비록 말년에 가서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후
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사옵니다만은, 또 한편으로 보
면 그만한 용기와 소신으로 자신의 뜻을 펼친 황제도 없었사
옵니다.
궁예 옳거니, 아지태도 내게 그것을 계속 상기시켜 주었지. 결국,
군주의 결심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 말이야.
최응 그러하옵니다, 폐하. 하온데...... (눈치를 본다) 폐하,
궁예 왜 그러느냐?
최응 정말 그 관심법으로 사람을 꽤 뚫어 볼 수 있사옵니까?
궁예 허허허, 궁금하느냐?
최응 예, 폐하.
궁예 하하하, 하하하, 암, 볼 수 있고 말고. 사람이 극도로 수양이
깊어지면, 다 볼 수 있느니라. 볼 수 있고 말고.....
최응 부처님은 사만, 팔만 리의 먼 세계까지도 보신다 하였사옵니
다. 폐하께서도 그러하시옵니까?
궁예 암, 그렇고 말고. 나는 미륵이 아니냐? 다 볼 수 있느니라.
최응 (미소) 지금 왕건 장군이 어찌하고 계시옵니까?
궁예 음? 허허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고?
최응 많은 사람들이 왕건 장군을 폐하 다음으로 존경하는 것 같사
옵니다. 이번 상주의 조령과 죽령일대도 모두 평정하고, 또
세번째 부인까지 얻는다는 기록을 보았사옵니다, 폐하.
궁예 하하하, 그랬지. 짐이 허락해 주었느니라. 아마도, 지금쯤 충
주에서도 그 일로 바쁠 게다.
최응 폐하께서 아우님을 삼으셨다 들었사옵니다.
궁예 그랬다. 왕장군은 나의 아우이지. 이 시대에 나와 더불어 그
만한 인물이 또한 없느니라. 가까운 시일에 최응이 너도 보게
될 것이야. 혼례가 끝나면, 내가 올라오라고 하였거든. 하하
하....
최응 그렇사옵니까, 폐하?
씬14 충주 길
산 사잇길로 왕건과 세 가신, 태평들이 오고 있다. 윤신달과 전이갑,
의갑 형제도 따라 오고 있다. 박술희는 보이지 않는다.
유금필 주군, 유장자께서 특별히 그 분의 별원이 있는 온천 쪽으로
주군을 뫼시라 하셨사옵니다. 이 참에 한 며칠 푹 쉬시오소
서.
능산 그 문제를 여기 태평 군사가 지난번에 아뢰었습니다. 하지만,
주군께서 대답을 아니 주셔서....
태평 하하하, 아마도 쉬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유장자께서 모든 것
을 다 준비해 놓은 것으로 소인을 알고 있사옵니다.
왕건 헌데, 술희 아우는 왜 아니 보이는가?
능산 예, 갑자기 사정이 있어, 좀 늦을 것 같사옵니다. 전선을 한
번 돌아보고 오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왕건 허허, 그런가? 그래도, 쉴 때는 같이 좀 쉬어야지. 자, 어서
들 가세.
씬15 유긍달의 집 별원(온천)
그 집 마당에는 장정들과 하녀들이 부산하게 오고 간다. 음식을 만들
고, 옮기고, 하는 모습들이 매우 바쁘다. 그 한쪽에서 금식과 유긍달
이 보고 있다.
금식 나으리, 왕건 장군이 그 부장들을 대동하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하옵니다. 아마도 다 온 것 같사옵니다.
유긍달 오, 그런가? 주안상은 다 보았는가?
수인 예, 아버님.
유긍달 (만족한 듯) 요즘 같아서는 참으로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닌
가? 이 유긍달의 사위로 왕건 장군이 오고 있네 그려.
금식 혼례날이 잡힌 것이옵니까?
유긍달 자고 나면 적과 마주하는 전쟁터일세. 혼례를 뭐 특별하게 올
릴 게 뭐 있겠는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요 이틀 후면
길일 중에 길일이라고 들었네. 그래서, 좋은 사람도 초청을
해 놓았고.
금식 물론, 많은 지역 호족들이 다 참석을 해야겠습지요. 당연한
일일 것이옵니다, 하하하. 헌데, 집사장은 어딜 갔사옵니까?
오늘 따라 아니 보이옵니다.
유긍달 내 심부름을 좀 보냈네. 귀인 한 분을 모셔오라고 말일세.
하인 하나가 와서 고개를 숙이며 아뢴다.
하인 나으리, 왕건 장군께서 오셨사옵니다. 문 밖에 막 당도하셨사
옵니다.
유긍달 뫼시어라. 어서, 뫼시어라.
그렇게 대답하며, 이들이 내려서는데, 문안으로 왕건과 그 일행들이
들어선다. 수인이 예를 올리고,
유긍달 허허허, 어서 오시오, 왕장군.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왕건 청해 주시어, 감사하옵니다. 많은 군무를 처리하느라, 다소
시간이 걸렸사옵니다.
유긍달 알고 있소이다. 왜 모르겠소이까? 자, 이쪽으로....
수인 어서 오시오소서, 장군.
왕건 오랜만에 뵙습니다, 낭자.
금식 하하하, 장군, 이제 곧 마님이 되실 분이 아니시옵니까? 감축
드리옵니다, 장군.
왕건 허허, 이런...
수인 (부끄러운 듯)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유금필 (부산한 주변을 보며) 집안이 온통 부산한 것 같습니다.
금식 그럴 수 밖에요. 아, 충주 일대를 쥐고 계시는 유장자의 따님
께서 혼례를 올리시는 일이올시다. 소 잡고, 돼지 잡고, 떡
메치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올시다. 세상이 시끄럽게, 뻑
적지근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이까?
왕건 허허, 이런 참....
유긍달 자, 어서 안으로 다들 드십시다.
그들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왕건과 수인의 시선이 교차된다. 수인이
더욱 눈을 내려 깔며, 왕건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
고, 한참을 더 수인은 부끄러운 듯 그쪽을 보고 있다. 디졸브 되면.
씬16 동 집 안 사랑
왕건과 유긍달, 그리고 금식과 왕건의 여러 부장들이 함께 모여 있다.
유긍달 지난 번 왕장군께서 그 수하 장졸들의 문제를 걱정하신다 하
기에, 여기 태평 군사와 더불어 군사들이 쉴 온천장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왕건 고맙습니다, 장자 어른.
태평 그 일은 이미 소인이 총사께 보고를 올렸사옵니다.
유긍달 허허, 그러셨소이까? 이제는 왕총사와 그 주변 장군들께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때라고 보여지기에, 그 또한 마련해
놓았습니다.
왕건 그토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금식 사실은 장자 어른께서는 오래전부터 왕총사를 이 댁으로 뫼시
어, 한식구가 되고 싶어 하셨사옵니다. 소장이 알기로는 이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사옵니다만은....
유긍달 그렇소이다. 이 사람이 떼를 써서 이미 황제폐하와 광치나 유
장자 어른의 허락을 받았소이다.
모두들 감축드리옵니다, 허허허.
유긍달 이제 이곳에서 혼례 준비를 서두르고 있으니, 한 이틀 푹 온
천을 즐기시다가 의례를 집전 하려고 합니다. 자, 여기(서류
를 꺼내 보인다) 이 서찰들은 폐하와 왕장군의 두 분 장인께
서 보내신 서찰이외다. 모두들 이번 일을 축하하고, 또 동의
한다고 하셨소이다.
왕건 알고 있습니다, 장자 어른.
유긍달 백년을 약속하는 의식이올시다. 아무튼, 기쁘고 또 기쁘오이
다.
유금필 주군을 뫼시는 사람들로써 저희들 또한 기쁘옵니다.
윤신달 저희들도 그렇사옵니다.
유긍달 고맙소이다. 모두 고맙소이다. 한 이틀 푹들 쉬시구료. 그리
고, 혼례 날에는 많은 귀인들이 오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참으로 깜짝 놀랄 귀인은 청했소이다.
능산 그분이 누구시옵니까?
유긍달 그것은 그날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태평 ........ (웃기만 한다)
유긍달 자, 드십시다. 모두 한잔씩 하십시다. 하하하.....
씬17 사불성 외경
아자개 (E) 아니, 술희 장군이 왠 일인가? 어쩐 일로 왔어?
씬18 동 성 안
아자개와 계모, 대주, 용개, 보개가 보고 있다. 그리고, 박술희가 유
긍달의 집사장과 함께 인사를 올리고 있다.
아자개 어쩐 일이야?
박술희 상부어른을 저희 주군의 혼례식에 뫼시고자, 청하러 왔사옵니
다.
아자개 엥? 나를 어디다 청해?
계모 혼례식이라니..? 도대체, 누가 혼례를 올린단 말이오, 박장
군?
박술희 저희 주군이신 왕건 총사께서 충주 장자 유긍달의 따님과 올
리는 혼례이시옵니다.
아자개 유긍달의 딸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음, 그렇지.
이번 전쟁을 함께 치루었으니까 그럴 만도 할 게야. 그런데,
그래도 그렇지 마누라가 둘이나 되면서, 또 가? 또 간단 말
이지?
박술희 예, 상부어른.
아자개 또 간다? (삐꼼이 대주를 본다) 누구는 한번도 못 가고 있는
데, 세번씩이나 가?
박술희 예, 상부어른. 영웅호걸이 어찌 열 여인을 마다하겠사옵니까?
아자개 뭐라고? (하다가, 웃는다) 그 참 마음에 드는 소리다. 그래,
그래, 본래 영웅호걸은 주색을 마다 않는 법이야. 헌데 말이
야. 왕총사는 세번씩이나 장가를 가는데, 왜 우리 박술희 장
군은 못 가고 있는가?
모두들 .........
박술희 그저 안타까울 뿐이옵니다. 이 딱한 현실을 어찌 하겠사옵니
까? 상부어르신께오서 살펴 헤아려 주시오소서.
대주 .......
아자개 들었느냐. 대주야?
계모 아, 우리 대주가 귀가 없습니까, 눈이 없습니까? 왜 모르겠습
니까? 에이 쯧쯧쯧....
대주 박장군,
박술희 예, 낭자.
대주 아버님을 혼례에 청한다 하셨습니까?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생각입니까?
박술희 헤헤헤, 실은..... 소장의 생각이올습니다. 성스러운 주군의
혼례이옵니다. 이럴 때에 상부 어른을 잘 뫼시고, 소장의 먼
훗날도 생각할 겸 해서 유긍달장자님과 은밀히 의논하고 급히
왔사옵니다.
대주 닥치시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가지고 노실 셈이오?
박술희 오....오해올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소장은 다
만 오로지 낭자만을 생각하고 자나깨나 이렇게....
대주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오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고 땅과 바다
가 하나가 되어도 내가 박장군에게 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하는 낭군의 상이 아니기 때문이오. 아시
겠소이까? 다시 한번 그런 소리를 한다면 (칼을 빼어 땅에 꽂
는다) 이 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박술희 낭자, 왜 이러시옵니까? 낭자.......
아자개 그 무슨 짓이냐? 아 손님에게 무슨 짓이야? 글세 저렇다니까,
저 애가 성질이 저래요.
대주가 칼을 다시 칼집에 꽂고 나가버린다. 계모가 한숨을 짓는다.
계모 쟤가 아주 어떻게 보면, 저 완산주에 있는 견훤이하고 성질머
리가 비슷한 데가 있어요. 에이그...언제까지 속을 썩힐려고
저러나, 에이그..
아자개 이보게, 박장군.
박술희 예, 상부어른.
아자개 너무 상심말아. 여자들이란 말이야 때로는 좋아한다는 표현을
저렇게 거꾸로 하기도 하는 법이야.
박술희 알고 있사옵니다, 상부어른.
아자개 가지. 내 가고 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술과 선물을 보내
주었는가? 그리고, 나를 상부로 대해주고 말이야. 가지, 가고
말고. 어떻게 하든 대주도 앞세우고, 여기 모두 데리고 왕건
장군의 혼례식에 가지. 아, 어렵게 청한 일인데, 가보는 게
도리 아니겠어?
박술희 감사하옵니다,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상부어른.
아자개 재미있을 게야. 음, 정말 재미있을 게야. 그 혼례를 보면, 우
리 대주도 많이 달라질 게야. 아니 그런가, 박장군?
박술희 감사하옵니다. 역시 소장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은 상부어른
뿐이시옵니다.
계모 왜 이러는가? 나는 또 얼마나 그대 생각을 하는 줄 아시는가?
박술희 감사하옵니다,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아자개 감사할 것 없어. 가지, 기꺼이 간다고. 암.... 가고 말고.
씬19 전주 황궁 외경
씬20 동 황궁 안
견훤이 뒷짐을 지고 맴돌다가, 화가 나는 듯 바라본다.
견훤 뭐라고? 왕건이가 장가를 간다? 이번 전쟁을 도와준 그 충주
에 유긍달의 딸하고?
최승우 그렇다 하옵니다.
능환 왕건은 부인이 둘이나 있사옵니다. 또, 부인을 얻는 것을 보
면, 다분히 정략적인 것 같사옵니다.
추허조 이 전란 속에서 정략 결혼은 당연한 것이옵니다. 두번이든 세
번이든 왜 못가겠습니까? 그렇게 서로가 피로써 뭉쳐 가지고,
세력을 더 단단히 하자 이런 것이 아니옵니까?
견훤 맞아, 맞아. 모처럼 추장군이 옳은 말 한 번 했어. 사실 왕건
이가 우리로써는 밉기는 하지만, 얼마나 영리한 장수인가? 충
주 지역의 대 호족과 결혼을 함으로써 수천 군사가 해야 할
일을 간단하게 해치우고 있는 게야.
애술 그것은 금성에서도 그리 했사옵니다.
견훤 그랬지. 그랬어.
박영규 그야말로 교묘한 전략이 아니옵니까? 결혼도 하면서 땅도 지
키고, 군사도 얻고 또 군수물자까지도 얻사옵니다.
능애 남의 칭찬만을 할 일만이 아니옵니다. 우리가 왜 이것을 보고
만 있었는가 하는 것이옵니다. 우리는 조령과 죽령 전선에서
졌사옵니다.
공직 ..........?
능애 그리고도 지금 남의 칭찬을 할 때이옵니까?
견훤 맞는 말이야.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먹은 것이 다 올라와.
신덕 폐하, 속담에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이야기가 있사옵니
다. 지난날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오소서. 새로운 출구를 찾
아 폐하의 위엄을 보이시오소서.
능환 그렇사옵니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으시고, 새로운 방안을 강
구하셔야 하옵니다.
애술 폐하, 지금 조령과 죽령은 워낙 방비가 단단하여 뚫기가 어렵
사옵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신 그대로 금성을 빨리 도모하
시오소서.
견훤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 이보게, 파진찬.
최승우 예, 폐하.
견훤 금성을 다시 도모할 준비를 하게. 서두르게. 서둘러!
최승우 예, 폐하. 군부에서도 준비중이옵니다. 그리고, 무진주에 나
가있는 수달장군도 절치부심하며 그쪽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그리 멀지 않았사옵니다, 폐하.
견훤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씬21 무진주 성 외경
씬22 동 성 안
지형도를 보며 수달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리고, 또 고개를 끄떡
인다. 곰치(부장1)이 그 옆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부장2,3도
함께 해 있다.
수달 되었어.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될 것이야. 금성을
빼앗는 문제는 수륙양면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작전이 필요해.
곰치 그렇사옵니다, 장군.
수달 허지만, 말이야. 우리는 적에 비해서 기동력이 떨어져. 얼마
나 빨리 일어나서 움직이는가 하는 기동력 말이야.
곰치 실은 그것 때문에 지난 금성 전투에서 희생이 컸사옵니다. 주
변의 호족들이 모두 목포의 장자 오다련에게 붙는 바람에 그
리 되었사옵니다.
수달 그랬어. 그때는 너무 우리가 인심을 읽지 못했어. 허지만, 말
이야. 이번에는 달라. 우선 많은 배들을 지금 모으고 있어.
그것으로 수군을 만들고, 오늘의 폐하를 있게 하신, 대 철기
군을 앞세우면 금성은 다시 도모할 수가 있어. 안 될 리가 없
지, 암, 안 될 리가 없어.
곰치 그렇사옵니다. 조령, 죽령도 다 빼앗겼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럴 때에 장군께서 다시 금성을 도모하시면 그야말로 잃어버
렸던 옛 위엄을 모두 찾으실 수가 있사옵니다.
수달 왜 아니겠는가? 그까짓 위엄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자존심이란 말이야. 이 수달이의 자존심. (긴 한숨) 그걸 되
찾아야 해. 이 수달이의 자존심이 곧 대 백제국의 자존심이
아닌가 말이야? 그걸 찾아야 한다 이말이야.
씬23 나주(금성) 관아 외경
씬24 동 관아 안
오다련과 장군 김언이 마주해 있다.
오다련 장군, 요즘 들어서 우리와 마주해 있는 저 백제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하여이다.
김언 계속하여 수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적장 수달
이가 쉼 없이 배를 끌어 모으고, 어부들을 모아 수군을 만들
고, 또 백제 본국에서도 군사들을 이쪽으로 배치한다고 들었
습니다.
오다련 전쟁이 계속되는 이런 시국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언제 어떻
게 변할지 모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이 나주를 얻을 수 있
었던 것은 견훤왕의 통치가 강압적이고 억지가 많았기 때문입
니다. 장군께서도 그 점을 유의하십시요. 즉, 인심을 잃어서
는 아니된다는 그말입니다.
김언 이를 말이겠습니까? 십분 유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철
원의 황도는 그 인심이 매우 사납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는 북벌을 서두르시느라 백성들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있습니
다.
오다련 그렇습니다. 나도 그 법회를 다녀왔습니다만은 아주 힘이 듭
니다. 백성들도 그렇고 신료들도 그렇고 정말 모두 고통스러
워하고 있어요.
김언 이럴 때는 그저 우리처럼 이렇게 밖에 나와있는 것이 다행이
지요. 조정에 있으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나저나, 왕장군
께서 또 혼례를 올린다고 들었습니다만은....
오다련 그렇습니다. 나 혼자 만의 사위로 하기에는 너무도 큰 사람이
에요. 그 때문에 광치나로 계시는 정주의 유장자 어른과도 합
의를 했습니다. 이 혼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말이지
요.
씬25 유긍달의 별원(온천장) 외경
씬26 동 온천장 문 밖
수인이 시녀와 함께 왕건의 욕의를 정갈하게 받쳐들고 있다.
왕건 (E) 이곳에 물은 참으로 좋구먼 그래.
씬27 동 온천장 안
왕건과 태평, 유금필, 능산이 함께 해 있다. 이들은 온천욕 중이다.
흰 김이 실내를 가득히 메우고 있다.
왕건 물이 참으로 좋아.
유금필 이 정도의 온천장을 별채로 쓰고 있는 걸 보면, 유장자의 재
력을 알만할 것 같사옵니다.
태평 소문난 대부호올습니다. 주군께서는 그러고 보면, 참 복도 많
으시옵니다. 처갓집이 하나 같이 그 지역의 갑부들이니 말이
옵니다.
왕건 허허, 듣고 보니 그렇네 그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
갓집 재물이지 나의 것이겠는가?
그들 ......... (웃는다)
능산 하온데, 주군, 들으셨사옵니까?
왕건 뭘 말인가?
능산 철원에서 있었던 법회 말이옵니다. 그곳에서 온 사람들의 이
야기를 들었는데, 법회 도중 엄청난 참사가 있었다 하옵니
다.
왕건 참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능산 석총 스님이 법회 자리에서 바른 말을 하시다가 타살되셨다
하옵니다.
왕건 (깜짝 놀라며) 타살이라니?
능산 철퇴로 맞아 얼굴이 일그러져 숨을 거두었다 하옵니다.
왕건 뭐라? 석총 스님이....... 스님이....... 돌아가셔?
능산 뿐만 아니라 스님을 따르는 수십명의 승려들이 생매장되었다
하옵니다.
왕건 뭐라? 오, 어떻게 그런 일이....
왕건은 한동안 말을 못한다. 한동안 눈치를 보던 유금필이 다시 묻는
다.
유금필 주군, 그 석총 스님께서 이곳을 다녀가셨다 들었사옵니다만
은....왕건 (한숨처럼) 맞네. 그리 하셨네.
유금필 왜, 여기까지 와서 주군을 뵙고 가셨사옵니까? 실은 많이 궁
금했었사옵니다. 그냥 오신 것 같지는 않사온데....
왕건 물론, 그렇다네. 그냥 오신 것은 아니었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을 아시고 오신 것 같네 그려.
유금필 무슨 말씀이 있으셨사옵니까?
왕건 그렇다네. 내게 미륵의 상징인 간자를 맡겨 두고 가셨네.
유금필 간자라고 하셨사옵니까?
태평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미륵은 황제 폐하가 아니라 바
로 우리들의 주군이라는 사실을 그분이 인정하고 가셨습니다.
간자라는 것은 바로 진표 율사께서 내리신 부처님의 상징입니
다.
유금필,능산 (동시에) 오!........ 그런 엄청난 일이....
태평 두 분께서는 물론 아셔야 할 일이나 사안이 너무 중대하고 큰
지라 쉽게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왕건 .........
태평 이 일은 극비올습니다. 만에 하나 폐하께서 아시는 날에는 그
야말로 대역죄로 참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에요.
모두 지금부터 입 조심을 해야 합니다.
능산 주군, 석총스님이 간자를 전해 오셨다면, 이는 주군께 내려진
예언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옵니까? 삼한의 주인이 되
신다는 그 예언이.......
왕건 그만 하게! 불경스럽네. 나는 아직도 충직한 폐하의 신하일
세.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 할 것이야.
유금필 하오나, 주군. 폐하는 이미 예전의 미륵이 아니시옵니다. 수
많은 사람이 죄도 없이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백성들은 끊임
없는 전쟁과 공역으로 시달리고 있고, 조정은 폐하 한사람의
독단과 우상화로 치닫고 있사옵니다. 관심법이라니요? 도대
체, 어떻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왕건 그만 하게.
태평 아무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이제 곧 혼례를 올리시고 나면
철원으로 가시게 되어 있사옵니다. 매사를 잘 살피시고, 주의
를 기울이시오소서. 잘못하시다가는 수렁에 빠질 수도 있사옵
니다.
왕건 (끄떡이며 한숨)........ 폐하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셨는
데.... 어쩌다가 그리 되셨을꼬? 안타까우이...
씬 28 철원 황궁 대전
궁예가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 저만큼에서 최응도 뭔가를 적
고 있다. 궁예는 계속 책장을 넘긴다.
궁예 (한참 보다가)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지금 나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를 보고 있노라. 여기에 보면,
한비자라는 사람이 나오는 구나.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한
비자가 지은 책을 보고 나서,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
어도 여한이 없겠다 라고 말을 했다는 구나.
최응 그렇사옵니다. 그런 사람이 있사옵니다. 진시황은 그 한비자
를 만나기 위해서 한비자가 있는 한나라를 공격했사옵니다.
궁예 (책을 보며) 그랬구나, 그랬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났어.
그런데, 주변의 모함에 빠져서 그 한비자를 등용하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애석한지고.....
최응 그렇사옵니다. 사람 하나 얻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말해주는
대목이옵니다. 진시황제가 그 사람을 얻으려고 한나라까지 공
격을 했사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을 얻고서 쓰지도 못하고
죽게 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 것인가를 말
해주는 것이옵니다.
궁예 옳거니, 그런 것이야. 사람이 초지일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
운 일이지. 처음에 작정하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밀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궁예는 그렇게 끄떡이며 계속 책을 본다. 그때, 밖에서 대전내관이 알
린다.
내관 (E) 폐하, 내봉성령 입시옵니다.
궁예 음? 아학사가? 들라하라.
대답소리와 함께 잠시 후 아지태가 들어와, 예를 올리고 앉는다.
아지태 책을 보고 계시나 보옵니다?
궁예 그렇소이다. 사기에 있는 한비자 편을 보고 있소이다.
아지태 오, 그렇사옵니까? 그 사람은 모두 쉬흔 다섯편의 사상을 나
누어 설명했사옵니다. 거기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군신간
의 예의와 경계에 대하여 적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렇소이다. 참, 읽을수록 볼만하구료. 그래, 어쩐 일로 오시
었소?
아지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북벌 준비에 대하여 몇 가지 아뢸 일이
있어 왔사옵니다.
궁예 말해보오.
아지태 폐하께오서 아시는 것처럼 북으로 가는 일은 그야말로 어마어
마한 재력과 사람이 동시에 필요하옵니다.
궁예 물론이지.
아지태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같지 못하여 많은 곳에서 걸림이 있사
옵니다. 생각한 만큼 재원이 조달되지도 않거니와, 군대 또한
예상대로 아니되고 있사옵니다.
궁예 (굳어지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내가 분명히 말을
하지 않았는가? 길은 두 가지 뿐이라고. 내 영이 서지 않는다
면, 죽음뿐이라고 말이야.
아지태 물론 그리 말씀하셨사옵니다. 하오나, 현실이.....
궁예 뭐가 현실이야?
아지태 폐하, 폐하께서는 이 아지태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해 주셨사
옵니다. 그러나, 신료들이 아직도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
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신이 내놓는 요구조건을 외면하고
있사옵니다.
궁예 그래? 어떻게 하면 되겠소이까?
아지태 신은 곧 폐하의 분신이며, 신이 하는 말은 곧 폐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옵니다.
궁예 그럴 수 있지.
아지태 폐하, 신에게 강력한 폐하의 의지를 집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소서.
궁예 어떻게 하면 되는가 묻고 있지 않소이까? 무얼 원하오?
아지태 폐하께서 어검을 한 자루 내려주시오소서.
궁예 어검?
아지태 그렇사옵니다. 본래 한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면, 총사령은 작
전을 지휘하는 군사에게 군령을 상징하는 검을 맡겨 두는 것
이 상례이옵니다. 그것은 계급의 높고 낮음을 떠나, 작전을
수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옵니다.
궁예 알겠소이다. (미소지으며) 힘과 권위가 딸려서 일을 못하면
아니되지. 최응아.
최응 예, 폐하.
궁예 거기 검을 가져오너라.
최응이 대답하며 일어나, 벽 한쪽에 있던 어검을 가져다준다. 궁예가
그것을 아지태 앞에 놓는다.
아지태 신의 청을 그대로 들어주시니,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폐하.
궁예 무슨 소리.... 하지만, 말이오, 아학사.
아지태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이 어검을 주기 전에 할 말이 좀 있소이다.
아지태 예, 폐하. 말씀하시오소서.
궁예 이 칼이라는 것이 말이야, 참으로 쓰기 나름이거든. 어린아이
가 잘 못 가지고 놀면, 제 몸이 다쳐.
아지태 ...........?
궁예 그리고, 목수가 잘 쓰면, 기가 막힌 연장이 되는데.... 도둑
놈이 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을 상하게 해. 그렇지 않은가?
아지태 폐하..... ?
궁예 지금 아학사는 이 보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강한 권력
이 필요한 게야. 그렇지 않소이까?
아지태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궁예 이미 전권을 주었어. 그런데, 또 더 달라고 한단 말이야. 내
눈이 하나라고 세상도 하나로 보이는 것이 아니야. 무슨 말인
지 아오?
아지태 예, 폐하.
궁예 권력이란 적당히 나누어 갖는 것이 좋아. 그래서, 나는 아직
도 개인적으로 사형이기도 한 내원을 끝내 옆에 두고 있는 것
이야. 자, 아직도 보검이 필요하오?
아지태 폐하....
궁예 아직도 보검이 필요한가 물었소이다!
< 84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