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장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잿물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죽은 죽음의 부패성과 그 죽음의 파괴적 효과를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정결에 힘쓸 것을 교훈하셨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광야를 향해 출발해야 한다.
그 전에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광야 40년 동안에 저들은 많은 죽음을 치러야 한다. 가데스 사건으로 말미암아 출애굽 1세대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80명에서 100명가량 죽어가야 했던 그 사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매일 매일 시체로 인한 부정을 면할 길이 없었다. 어느 가정이나 막론하고 가족의 시체를 접촉한 자나 만진 자는 부정하게 되어 진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주검을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자의 정결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본 장의 붉은 암송아지의 잿물로 정결하게 되는 법이다.
하나님은 잿물 제조법과 사용법의 규례를 제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정결하게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미리 예방하신 것이다.
1. 정결식을 위한 잿물 제조법 (19:1-10절)
죽은 사람의 시체로 인한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데 사용될 암송아지의 잿물을 만드는 법이 제정되었다. 부정을 위해 잿물 제조에 사용되었던 네 가지 제물, 곧 붉은 암송아지와 백향목, 우슬초, 홍색 실은 우리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영원히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예표한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상징적으로 이는 죄의 영향력을 완전히 극복하시고 절대 순결하시며 세속과 온전히 구별되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정결 제물로 쓰일 희생 제물을 붉은 암송아지를 택하셨는데 수송아지가 속죄를 위한 제물로 쓰여진 반면 암송아지는 정결례를 위한 피뿌림과 재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이 암송아지는 붉은 색으로 한정되었는데 이것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송아지는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맡겨졌는데 아론은 시체와 관련된 부정에서 절대 보호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송아지는 진 밖으로 끌어내어서 잡게 했는데 번제물이나 속죄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진의 북편 성막 뜰에서 잡았으나 이 암송아지는 태워서 재를 내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 진 밖에서 죽였다.
이는 상징적으로 장차 죄인으로 취급되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처형당하실 예수의 죽음을 예표한다. 희생 제물을 잡을 때는 제사장의 감독 아래 레위인이나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잡았지만 이 일은 백성의 대표자 중 정결한 자가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제사장은 죽은 암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회막을 향하여 일곱 번 뿌려 부정한 자의 죄 값에 대한 속죄 사역을 치러야 한다.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완전한 속죄를 상징하며 이는 구속사적으로 예수의 보혈이 지닌 속죄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일반 속죄제는 번제단 밑에 피를 모두 쏟았으나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곱 번 뿌리고 난 피는 희생 제물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불태워야 한다. 이와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불 가운데 던졌다.
백향목은 생명의 영원성과 고결한 가치를 나타내며, 우슬초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상징물이며, 홍색 실은 예수의 붉은 피를 상징한다.
이 후에 제사장이나 송아지를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하게 된다. 정결하게 된 사람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에 보관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부정을 입을 때에 정결하게 하기 위한 잿물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2. 암송아지의 잿물 사용법 (19:11-19절)
사람의 시체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접촉한 자나 물건은 산 사람에게 죄와 부패를 전염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날마다 죽어갈 때에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심령은 슬픔이나 원망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가족들이 죽어가는 비참하고 참담한 지경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할 정도로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런 어둠과 절망에 빠지지 못하도록 영적 백성으로 회복하는 정결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부모나 형제의 장례를 치른 자들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제사장에게 나아가 정결 예식을 치르고 나면 다시금 정결한 백성으로 되돌아 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이 사람은 일주일 기간 중에 두 번의 잿물로 정결 의식을 치러야 한다. 먼저 제 삼일에 첫 번째 정결 의식을 치르는데 이는 그가 속죄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 마치 구약의 율법을 예시해 주는 듯하다.
제7일에 두 번째 잿물 뿌림은 그 부정으로부터 온전한 정결과 속죄를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보혈의 능력으로 죄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은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의식은 회개와 구원을 상징하며 우리 신앙의 요체인 것이다.
제 삼 일에 잿물을 뿌리는 것은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상징하고 제 칠 일에 뿌리는 것은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완성을 예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누구든지 이 의식을 행하지 않고 진영에 들어가는 자는 거룩한 공동체를 부패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훼손시키는 일로 간주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모든 특권에서 제외되고 진 밖으로 추방되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장막에서 사람이 죽은 경우 시체를 직접 만지지 않아도 그 장막에 들어가거나 그 장막 안에 있는 자도 만진 자와 동일하게 부정하며 뚜껑을 닫지 않고 열어 놓은 그릇도 동일하게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 의식을 치러야 한다.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죽은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진 자도 역시 부정한데 제사장은 흐르는 물과 함께 재를 그릇에 담고 우슬초에 그 물을 찍어 모든 곳에 뿌리고 당사자에게도 뿌리되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에 뿌려야 한다.
무덤에 접촉한 자는 부정하다는 이 규정 때문에 유대인들은 무덤에 회칠을 하여 부정을 모면하려는 관행이 생겼다고 한다.
3. 정결 의식을 등한히 할 경우 (19:20-22절)
정결 의식을 행하지 않은 자의 치명적 결과와 그가 지닌 죄의 오염성 및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은 자의 정결례이다.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되었을 때 오직 암송아지의 잿물로 정결하게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영원한 율례였던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그는 회중 가운데서 끊어지고 하나님과 단절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