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 문화는 신시대 문화로 변화 되어야 한다
한국사회문제연구소장/박사
조상진
민족의 전통문화는 존중되면서 전승되어야 마땅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변화되기도 한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문화(文化)라는 의미는 중국 문명에서 ‘문덕(文德)으로 교화(敎化)한다’ 등의 구절이 있지만 文化라는 직접 용어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서구 문명에서는 문화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고대 인류의 생활은 수렵과 채집을 위한 이동이 필수이었다. 그러던 중,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정착의 생활로 전환하면서 농업이 제1차 산업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즉 ‘농사를 짓다’ 라는 의미를 라틴어로 컬투라(Cultura)라고 했고 영어권에서 컬쳐(Culture)의 어원이 된 것이다.
또한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에서는, 서양 근대문물을 유입하면서 ‘컬쳐’를 ‘文化’로 한자 번역한 것이다. 중국이나 조선은 그 당시 서양 지식에 관한 한, 모두 일본 학계의 한자 번역 용어가 그대로 수입되었다. 그중 하나의 사례가 미국 프레지던트를 大統領으로 번역한 직명이다. 문화에서 文은 무늬(모습)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化는 변화한다는 뜻이 있어 결국 ‘무늬 또는 모습이 변화되어 자리를 잡는다.’라는 기본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앞세워 서구형 선진국에 진입하였다. 이에 따라 예술, 체육, 과학, 기술, 첨단산업 등에서 최고 수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통틀어 코리아 컬쳐 (K-Culture)로 표시하고 ‘한국 문화’가 되어 세계적 붐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의 전통문화가 코리아 컬쳐로 연결되는 것인가, 그 문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전근대의 조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있고, 조선의 문화는 이러한 케이-컬쳐의 생성에도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근래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는, 조선식 문화를 보고 싶어 하기보다 급속 성장한 한국 현지의 활기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대표적 관광지가 서울 광화문 광장이 된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식 문화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형물로 설치된 대표적 인물들에 대하여는 지나가면서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잘 보이지 않고, 조선의 인물들이 거대한 동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광화문 광장에 큰 형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순신은 갑옷과 투구로 긴 칼을 들고 위엄 있게 서 있다. 광화문뿐만 아니라 전국 요소요소에도 그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충남 아산시의 경우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적 캐릭터가 되어, 각종 표식과 시설 등으로 집중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1592~1598년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상기해본다. 임진년에 일본군 16만 명이 부산포로 침투하였고, 이들은 육지를 통하여 파죽지세로 한양성에 입성하고 이어서 명나라를 침범하기 위해 평양성으로 입성하였다. 이 당시 무능한 선조 왕은 명나라를 향해 피신하였다. 화가 난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우기도 한다. 일본군은 계속 중국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명군이 조선에 파병되었다. 명이 조선을 도와주기 위하여 파병했다고 주장했지만, 명나라의 방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명연합 결과로 일본군은 후퇴하면서 남해안 등 30여 개 지역에 왜성을 쌓고 4년간 주둔하며 명나라를 상대로 협상을 벌였다.
정유년 다시 14만 명의 일본군은 전라도 남원성과 전주성 등을 함락하였고 조선 의병들과 전투를 벌였다. 또한 한산도에서 이순신 해군과 교전하고 조선군이 승리한다. 그 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였으나 조선군이 패배한다. 다시 이순신이 나선 명량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한다. 그러한 교전들이 계속되던 도중에, 갑자기 일본 본국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일본 천하를 무사정권(幕府)으로 통일한 인물이었고, 내부의 반발 방지책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을 향한 침략을 명령한 자이다. 그의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이 제2의 권력자로 있었다.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을 반대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에야스 세력까지 조선 침략에 가담하였더라면, 조선과 중국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가설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국의 정치 판도가 바뀌는 긴박성에서, 본국으로 퇴각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이때 다른 지역 왜성의 일본군들은 속속 빠져나갔으나 전라도 순천왜성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들이, 노량 해안에서 이순신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한편, 명군 지휘관 진린은 노량의 퇴로를 열어 줄 것을 일본군에게 요청받는다. 진린이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이순신은 진린에게 찾아가 전투를 고집하였다. 일본군은 노량에서 마지막 퇴각을 위하여 이동하는 중에, 해로를 잘못 찾아 관음포로 들어간다. 이때 이순신은 관음포 입구를 차단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따라서 이 노량해전에서는 상당한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1) 더 이상 전투 의사가 없이 퇴각하려는 일본군 일부를 공격했다는 점. 2) 최고 지휘관이 갑판 위에서 갑옷을 벗고, 적의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점. 3) 총을 맞은 후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전하지 말라는 발언과 죽은 직후 시신이 불분명했다는 점. 4) 육지에서의 전적은 희미하고, 해전만을 강조한 점. 5) 무리한 전투로 인한 조명 연합군 장수들과 병사들의 희생이 가볍게 취급된 점 등에서 볼 때, 연전연승이라는 영웅담들은 과도한 미화가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 복판에 서 있는 영웅의 형상이 조선의 시각과 현대의 시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병법상의 평가분석 차이도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조선 전체를 구한 영웅처럼 시사되는 평가 역시도 조금 어색하다고 본다. 일본의 패배로 인한 퇴각도 아니며, 결국 1910년 한일합병으로 망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문화의 의미는 지금 현시대에서 유용한 전제가 되어야 한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구시대의 버전에 해당한다. 현대는 조선시대와 분명히 다르다. 민족주의가 아닌 국민주의 패러다임, 정치제도, 글로벌 다문화 환경 등을 보더라도 이제 전근대 조선의 문화는, 현대 한국의 새로운 문화로 변화되어야 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탄생이나 경제성장을 하게 된 배경으로서, 조선의 문화와는 그 국격과 정치체제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광화문의 상황뿐만 아니라, 전국 전역에 수없이 많은 전근대 유물 등이 각 자치단체에서 문화재나 사적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조장되고 있다. 역사는 기록이나 사진으로도 사료가 충분하다. 하지만 왕족 혈통주의나 사대부 가문이라는 족보 인식이 아직도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 불필요한 국가적 낭비는 물론 한국의 문화적 스케일은 계속 저급하게 지속될 뿐이다. 아전인수식 우민사관에 의한 ‘조선 신화’로서 국뽕에 취한 듯한 현상은 구시대 유산이며 시급히 사라져야 할 당면과제이다. 명실상부한 선진국 국민의 자질을 확보해야지만, 진정한 문화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조상진
2026.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