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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봄날은 오는가.
최 균 선
열여섯살 되던해 나는 마적달향중학교를 졸업하고 훈춘 2중에 입학하게 되였다. 산골에서 나서 산골에서 잔뼈를 굳힌 나로서는 현성이 그야말로 번화한 다른 세계가 아닐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재무과에 가서 돈을 물고 숙사를 찾아 나의 침대에 간단한 생활비 품과 옷가지서껀 넣은 허수룩한 가방을 던져버린후 내가 편입된 반을 찾아갔다. 현내 각곳에서 온 아이들은 의기양양해 있었지만 서로 서먹서먹해 서있었다. 원래 시골내 기라서 수집은 나는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한켠에 말없이 서서 아이들의 옷차림을 살 펴보기 시작했다. 촌학교들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보다는 다 시내티가 나는 옷 들을 입고있었다.
나도 새옷을 입고 멋을 낸다고 했지만 다른 애들에 비하면 관청에 잡혀온 촌닭의 꼴이였다. 나는 알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의기소침해졌다. 장기병자인 어머니가 일을 못하다보니 아버지 혼자서 밭일을 하는 우리 집은 촌에서도 가장 어렵 게 사는 집이였다. 개학첫날부터 나는 자존심이 별스럽게 비틀어졌다.
아버지가 곤백번 잘하라고 이런저런 당부를 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지경이였지만 내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슴속에는 허영심만 가득차서 고무풍선처럼 높이 날고있었다.
개학이 되여 한달후부터 나는 이런저런 구실을 대여 집에서 돈을 가져와서는 류행멋을 피우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좀더 머리가 명석한 놈이였다면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심리평형을 찾고 자기를 단속했을것이며 훌륭한 학생이 될수도 있었고 좋은 대학에도 갈수 있었을것이다. 하건만 나는 귀신에게 홀린듯 고급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기시작했으며 인터넷방에 드나들며 친구들에게 한턱 내기도 하면서 아주 의리가 있는 친구로 소문나있었다.
우리 짝패들은 쩍하면 학교에 나가지 않고 록상청에도 가고 당구실에서 시간을 소모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학습성적이 말이 아니였다. 고중2학년이 끝날때까지 나 의 이름은 58명중에서 거꾸로 일등이였다. 아버지가 성적표를 보자고 하면 이핑게 저핑게 대면서 용케 피해갔다. 방학에도 집에 가지 않고 PC방에 사정하다싶이 하여 심부름군으로 일하면서 어중이떠중이들과 몰려다녔다.
나는 때때로 아버지가 뼈빠지게 농사지어 쌀을 판 돈을 겨우겨우 부친다는것을 생각하며 량심을 붙안고 괴로워도 해보았지만 이제 돌아서려면 너무 멀리 왔다고 아 예 체념해버리고 알건달학생으로 나굴렀다. 집에서 후무려내온 돈으로는 친구들과 어 울려 멋을 내기에는 판부족이였다. 나는 뺑덕에미처럼 이애저애에게서 돈을 꾸기시작 했는데 웃돌 빼서 아랫돌 괴우는식으로 맞추어가다보니 3학년에 올라갈 무렵에는 내 힘으로는 도무지 물어낼수 없을만큼 많았다.
학교에 나가면 빚군들이 에워싸는 바람에 며칠이고 숙사에 돌아가지도 않고 거리 의 삽살개들의 집에서 얻어먹고 자고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나의 주머니가 텅텅 비 게되자 그렇게 의기충천하던 거리의 친구들도 차츰 백안시하기 시작했다. 먹어라 써라하는 가운데서 맺은 우정은 한가닥 실개천처럼 인차 물이 마르고 더러운 바닥이 드러났다. 드디어 친구들이 문전박대하다가 아예 무전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나는 그제야 허위적인 우정에 환멸감을 느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대학입시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나에게는 강건너 불이난 집을 보는듯 했다. 나는 졸업증만 가지면 아버지더러 빚을 내서 일본류학수속을 할 작정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우선 다른 애들에게서 꾼 돈을 물어주어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씻은듯이 싹쓸이해 온 집에서 더 우려낼 기름이 없는줄 알면서도 손을 내밀수 없었다.
며칠 밤을 궁리하다가 모험하는 길밖에 없다고 작심했다. 기회를 보아서 다른 반 애들의 침실에서 값진것을 후무려내는것이였다. 마침 기회가 왔다. 여느 때처럼 제일 마지막으로 침실을 나오다가 함께 잘 어울려 다니던 아래학년의 담배친구가 들어 있는 침실문이 빼끔히 열려져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아닌보살하고 그애 이름을 불렀다.
ㅡ철주야. 안에 있니?
대답이 없었다. 하건만 혹시 빈침실에 슬쩍 후무릴 값진것이 없나해서 대범하게 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 눈빗질하다가 아래층침대의 베게밑에서 핸 드폰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꿈쩍 놀라서 식은 땀을 뺐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번개같 은 생각이 손을 뻗치게 했다. 삼성패 한국핸드폰이였다. 나는 담방이라도 덜미를 잡힐 것같아 후들거리는 다리로 침실문을 나섰다. 층계를 내리려고 발을 내디디려는데 복도 귀퉁에 있는 위생실에서 한 아이가 나오더니 휘파람을 불며 침실로 들어가는것 이 곁눈에도 보였다. 그 침실이였다.
나는 층계를 세계단씩 뛰여내려 숙사를 빠져나온후 교실로 향하지 않고 교문밖에 서 택시를 불러탔다. 시내의 핸드폰중고품매대에가서 별로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2천원에 팔았다. 한국핸드폰이 금방 사용되기 시작한 때이고 워낙 새것이여서 생각밖에 그만큼이래도 받을수 있었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이젠 빚을 다 물고도 친구들과 한상 퍼지게 차려먹을수 있게된것이다.
그러나 좋은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교보위과선생님이 나를 불러 조용한 칸에 데리고 들어가더니 다짜고짜 주먹닥질해댔다. 도적이 제발 저리다고 지은 죄가 있는 나인지라 찍소리 못하고 다듬이질 당했고 낱낱이 이실직고했다. 하지만 돈은 이미 빚으로 거진 나갔고 식당놀이도 하다보니 주머니속엔 잔돈밖에 안남았다. 숙사의 특대절도안건은 이렇게 인차 들통이 났고 처벌이 곧 내려졌다.
학적제명에 핸드폰값 3천백원을 배상하고 벌금 5백원까지 내야 했다. 눈앞이 캄캄한데 부모가 직접와서 도장을 찍고 결산해야 한다는것이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 아지는데도 아버지가 달려왔다. 나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고난 아버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질렸다. 그 큰 주먹을 들어서 한주먹에 내골을 박살내려고 입술을 앙당그 려물던 아버지는 한동안 노려보기만 하다가 맥없이 주먹을 내리웠다. 얼굴에 얼기설 기 얽힌 밭고랑같은 주름살에 눈물이 덧거니 맺거니하였다. 땅꺼지게 내쉬는 한숨은 예리한 비수마냥 내가슴에 박혔다.
아버지는 너무 억이막혀 말문이 닫겼는지 아무 말도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라초를 말았다. 그러는 아버지의 모습을 곁눈질 하면서도 나는 앞으로의 머나먼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고 천문수자같은 빚을 아버지가 어떻게 갚고 어머니 병치료는 어떻게 해야 하며 온집이 어떻게 살아 갈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담배연기에 사래들면서도 연거퍼 두대나 태우고난 아버지는 내 팔을 세괃게 잡아쥐고 교장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을 보자 다짜고짜 무릎을 털썩 꾸는것이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보기 부끄럽습니다. 다 제가 아비구실을 잘 하지 못하고 교육을 잘 하지 못한 탓입니다. 학교에서의 처리는 다 지당합니다. 구류소에 집어넣지 않은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
난데없이 뛰여든 사람이 잡담제하고 무릎부터 꿇고 눈물범벅이 되여 사정하는것 을 어정쩡해서 바라보던 교장선생은 그제야 갈피를 잡았는지 아버지를 부추겨세우며 핀잔조로 말했다.
《이게 무슨 행동입니까? 어느때라고…참, 할말이 있으면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 해도 되는데 이렇게 사람을 난처하게 굴다니요? 》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벌금은 얼마라도 내겠습니다. 배상도 하구요. 다만 저 애에게 고중졸업증만은 내주시여 살길을 틔워주십시오. 예? 제가 이렇게 무릎꿇고 빌겠습니다. 》
사십이 갓 넘은 젊은 교장앞에서 50대 중반인 아버지가 무릎을 꿇은채 일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이 아픈지 쓰린지도 몰랐다. 후에 안일이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기르던 암소와 송아지까지 다팔아서 빚을 갚고 졸업증만 가지면 다른 현의 어느 고중에 전학시켜 대학시험을 치게 하려고 작심했던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죽이고싶도록 미웠겠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학교에서 쫓겨나게 할수 없었던것이 다. 나는 시골중학교때까지는 아버지의 자랑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보다 퍽 아래인 교장선생에게 말끝마다 님자를 개여올리면서 손이야발이야 빌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굶어죽어도 자기가 못한 대학공부를 아들에게 시킨다고 뼈무르던 아버지의 마음이지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구제불능의 탕아로 된 나는 배움의 성당 에 들어설 마음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아버지가 고중졸업증을 가지기나 했는지 어쨌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먼저 학교를 나와 무작정 연길행뻐스에 넋을 잃은 몸을 실었다. 고향마을에 돌아갈 용기가 없었던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내 척추가 끊어날것이고 불효막대한 놈이라고 욕하며 튕길 침방울이 나를 익사시킬것만 같았던것이다. 단돈 몇원밖에 없는 나는 연길에서 안도까지 가는 표를 끊어가지고 심양행렬차에 가만히 올랐다. 어릴때부터 나를 무척 귀여워해주시던 이모에게 가서 잠시 숨어있을 작정이였다. 그러나 나는 어떤 수를 쓰든 렬차원들의 눈을 피해 끝까지 가야할 내 신세가 한심했다…
운수좋게 심양역을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어데로 가서 이모의 집을 찾아야 할지 막연했다. 밤새도록 찾고 이튿날 점심때까지 찾아서 겨우 초인종을 누르니 낯 선 녀인이 나와서 얼마전에 새아빠트로 이사갔다고 했다. 그야말로 인생고가 시작될 판이였다. 련사흘 공지란 공지를 다 찾아다니며 일거리를 얻으려 했으나 어데서 굴러온 놈이냐고 욕만 먹고말았다. 하얀 얼굴에 갱핏한 내 체구가 그들의 마음에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을수도 있었고 원체 조직적으로 도급맡은 일을 나같이 중뿔나게 찾아든 놈을 받아들일수 없다는것을 나는 후에야 알았다.
아무값도 가지 않은 내 눈물이 그제야 지난 3년간의 악몽을 씻어주었다. 나는 주린배를 안고 대합실구석에 쭈크리고 앉아 뼈저리게 느꼈다. 응당 지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나이에 사악의 잡초만 키웠을뿐만아니라 옹근 봄을 잃어버린것이다. 몸에 지녔던 돈이 거덜이 나고 진짜 알거지가 된 나는 후들거거리는 다리를 끌며 지향없이 걷고 걸었다.
심양시 제일중이라고 요란한 간판을 건 으리으리한 교문앞을 지나며 보느라니 대 도시아이들답게 청신하게 차려입은 남녀애들이 웃고떠들며 들락날락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복속에서 복을 모르고 허송한 나의 봄날을 생각하였다. 한번 가버린 봄이 이제 다시 못올줄 알면서도 가슴을 어루쓸는 나자신이 세상에 바보같이 여겨졌고 인 간쓰레기같았다.
나는 자존심을 살아서 어느 식당에 들어가 남이 먹다 남은 음식찌끼라도 얻어먹 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빈속으로 돌아다니가 해질녘 역으로 나가는 길도 잃고 해서 채소도매시장안으로 들어갔다. 장사군들이 다 가고 날이 어두우면 생고구마쪼각 이라도 얻을수 있을가 해서였다.
날은 차차 어두워졌다. 여기저기 어둠을 헤치며 다니던 나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 고 쓰러졌다. 배고픔과 비바람에 열이 올랐던모양이다. 내 젊은 목숨이 이렇게 낯선 거리바닥에서 허무하게 끝나는가싶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점점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튿날 내가 깨여났을때는 어둑시그레한 곳에 누워있는것을 발견했다. 나는 놀라운 눈길로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구석쪽에 남새가 무져있는것을 보아 남새창고 같았다. 그제야 보니 침대란 두개 긴 걸상우에 널판지 몇잎을 편것이였고 거적을 두벌 깔고있었다. 침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람통으로 만든 난로가 있었고 난로우에 놓인 자그마한 납가마에선 무엇인가 끓고있었다.
내가 깨여난것을 보자 나보다 두어살 이상이 돼보이는 청년이 벌씬 웃어보였다.
《아, 마침내 깨여났구나. 》
말을 마치자 가마안에서 죽같은것을 사발에 퍼담아들고 침대가로 다가오더니 친절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며칠 굶은것같군. 먼저 이 죽으로 위를 다스리라구.》
학교에 있을때 같으면 더러워서 구역질했을 나였지만 여윈개 언똥을 가리랴! 사흘이나 굶은 놈에게 체면이 있을리 없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도 생략해버리고 입천장이 데는줄도 모르고 련거퍼 세사발이나 마셔버렸다. 그러는 내 꼴이 기막혔 던지 청년이 껄껄 웃었다. 더운죽이 들어간 위에서 사지에 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쎄쎄닌!)하고 뒤늦은 인사치례를 했다. 말이 끝나자 이 며칠 죽도록 고생한 일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황소울음이 터졌다.
청년이 담배를 권하며 한식경이나 안위해서야 나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청년은 내가 순서없이 엮어대는 말을 말없이 듣고나서 깊은 한숨을 토하더니 차지도 덥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ㅡ그렇구만, 허 이거 나와같은 룸펜이 이 심양거리에 또 한명 나타났군그래. 그런 데 장차 어떻게 할 작정인가?
내가 그저 머리만 절레절레 흔들자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ㅡ너 조선족이지? 내 이름은 왕명이구, 산동 량산박부근에서 왔어. 이제 직접 체험하고 보니 절실하게 느껴지겠지? 기실 우리는 잘못 판단했기에 버리지 말아야 할 길을 다 가지 못하고 그 한걸음이 천고의 한이 될 길을 걸은거라구 그 길은 가면 갈수록 비탈지고 험난해지면서 낭떠러지로 뻗어간 길이야, 안그래?
나는 그의 《우리》란 말에 신경이 살려졌다.
ㅡ이자 우리라구 했지? 그럼 형님도 나와같은 경력을 겪었단 말이요?
ㅡ그래 맞다구, 나도…내가 저지른 착오는 더구나 황당하고 대가가 침중했어, 내가 한쪽다리를 절게 된것은 무리싸움에서 칼에 찍힌후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고 신경이 좀 잘못된 탓이라네. 게다가 나에게 맞은 애의 집에서 무리지어와서 우리 집을 박산냈어. 어머니는 분김에 강에 뛰여들어 죽고말았어, 내가 어머니를 죽인거지, 아버지는 낫을 들고 나를 찍어죽인다고 길길이 뛰였어, 나는 별로 살고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본능적인 공포심에서 집을 뛰쳐나왔지, 그리구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어. 아버지가 농사지어서 고중까지 보내주었는데 보답은커녕 이렇게 속만 태워주니 내사 불효막심한 개놈이지.
난 밤마다 혼자 생각하면 정말 한심하네. 도무지 자신을 용서할수 없는 죄인이 된 오늘 내가 계속 살아야 하는가를 의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네.
그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두손으로 더부룩한 머리칼을 마구 잡아뜯으며 오열을 토하였다. 나는 다리꺽어진 노루가 한굴에 모인다더니 세상에 이런 공교로운 만남도 다 있냐싶으면서 그를 와락 그러안고 함께 꺼이꺼이 울었다.
그날부터 나는 왕명을 형님이라 부르면서 그와 함께 남새장사를 시작했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삼륜차를 몰고 먼곳의 시교에 가서 직접 밭에서 남새를 사다 가는 아침 시장에서 팔았다. 우리는 힘은 넘치고있으니까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뛰였 으며 남보다 눅게 팔았다. 그러다보지 너른마당쓸기를 하면서 많은 단골까지 만들어 놓았다. 비록 일은 고되였지만 하루 순리윤이 몇십원씩 되였다. 게다가 잘곳이 있고 먹을것이 있어서 힘드는줄 몰랐다.
월말이 되여 결산해보니 돈이 적지 않았다. 집세 물세를 다 떼고도 두어달 지나서 한사람앞에 천원이 차례졌다. 나는 똑같이 가질수 없다며 견결히 사양했다. 그러나 그 의 고집은 나보다 더 검질겼다.
ㅡ더 말 말게!동생, 과거는 과거로 굳어져있게 내버려두자구. 응? 우리가 비록 오 다가다 만난 친구이긴 해도 의기상투하지 않았어? 이렇게 제힘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잘수 있으니 우리도 구제불능아들은 아닌것같아, 하하하…
말을 마친 그는 백원짜리 한장만 꺼내여 안주머니에 넣더니 어디로 나갈 차비를 했다.
ㅡ 형, 어데로 가려구?
ㅡ나 벌써 3년동안 집에 안갔다구. 집에서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있 지, 늦게라도 효성을 조금 할가구 우정국에 갔다오겠네.
그렇게 말하는 왕명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고있었다. 얼굴은 더없이 비통한 모습이여서 보기조차 민망했다. 나도 온밤 잠들수 없었다. 정말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사는지, 어머닌 병이 더 위중해졌을것이다.
나는 악몽같던 지난날을 돌이키며 눈물을 삼켰다. 그러면서 묘망하고 또 도피할수 도 없는 나의 인생행로를 생각하며 몰래 울었다. 그래 한번 실족했다해서 이제 금방 시작된 인생행로의 끝까지 유감과 참회를 가지고 가야한단 말인가? 내 청춘을 그냥 이렇게 남새시장과 시교를 전전하면서 썩여야 한단말인가? 나는 고통속에서 자기를 반성했고 후회속에서 자신을 해부하였다. 자기 청춘과 래일을 가지고 장난질한 나를 아마 현대머저리라고 해야하리라
담방이라도 차표를 사가지고 고향으로 달려가고싶었지만 참았다. 이미 늦어진 길을 다그쳤대야 지금 곧 남들을 따라잡을수도 없는바하고 조금이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왕형과 나는 제각기 3륜차를 몰고 가서 남새를 실어다 시장에서 팔았을뿐만아니라 낮결이면 페품수구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공동체》는 의좋게 꾸려졌으며 우정은 생사지교로 날로 더 극진하게 되였다. 나는 서점에 가서 고중교과서들을 한벌 사다놓고 저녁이면 왕형에게 물어가며 공부했다. 왕형은 워낙 머리도 좋은데다가 그 싸움만 아니였더면 제남대학에라도 갈수 있는 우수생이였다는것이 과목마다에서 알렸다.
왕형은 부지런도 했거니와 장사리속도 나보다 몇배 나았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가지려는 티도 없이 제친동생처럼 생각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강개하게 나오는 왕명 을 보며 량산박호한들중 누구의 후예가 아닌가고 생각했고 우스개삼아 캐여묻기도 하였다. 왕명은 그저 웃어넘겼지만 산동사람들의 전통인 무술 몇가지는 좀 익힌게 있다면서 쯤이나면 가르쳐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무술을 채배우지 못하고 이듬해 그와 갈라지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늦기전에 학업에 달라붙어야 할것같았다. 내 생각을 말하 자 왕명은 친동생과 갈라지는듯 애석해서 눈물까지 지으면서도 극구 잡아두지는 않았 다. 내가 그만한 돈이면 연변에 나가서 어느 사립학교같은데 들어가 일년 다니고 대 학시험을 칠수 있지 않는가고 권유했지만 그는 상한 다리를 쳐들어보이며 허구프게 웃었다.
ㅡ아무튼 나는 포기했어, 너나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라구, 약속하는거야. 응? 내가 종종 편지할테니까 이 량산박형을 잊지말라구, 우리 중국말에 집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타향에 나오면 친구에게 의거한다는 말이 있지, 내가 이제 남새점이나 꾸리고 돈벌되면 동생의 학비도 보태줄지도 모른다구, 하하하…
말만 들어도 고마웠다. 우리는 플래트홈에서 계집애들처럼 서로 부등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렬차가 떠날때까지 손을 저어주는 왕명의 사나이다운 모습을 나는 가슴에 깊이 깊이 새겨넣었다.
차창가에 머리를 구겨박고 석별의 정과 쓰라린 후회를 씹노라니 어느새 차창에 어스름이 깃드는듯싶더니 칠백리료동벌이 완전히 어둠속에 잠겼다. 기차는 숨가쁘게 씩씩거리며 밤을 누벼나갔다. 아니 새벽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생각하고싶었다.
내 인생의 려정에 다시 해가 솟을 래일! 막연한 느낌속에도 젊은 패기는 뜨거운 피속에서 고패치였다…잃어버린 봄은 과연 오는가?!!
2006 년 6 월 20 일
첫댓글 감동되는 글 잘 읽어보았어요. 잃어버린 봄 꼭 다시 찾아 오리라고 믿어요 .
참 뼈저리게 느낀 만큼 크게 성공하여 부모님앞에 효도하세요!!
사람은 아픔속에서 성장해요 꼭 성공하세요 ..그러고 부모님게 효도하고 그 의리 있는 형한테도 ..
훈춘2중근처에 사는데.. 그 후일 굼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