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교수의 전쟁과 미술]
사상 최대 전투…5개월 새 200만 명 사상
소련군 육탄방어…獨 전차군단 넘어 2차대전 ‘승기’
현대 전쟁 본질 부서진 철근·추상적 인물로 표현
|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투는 무엇일까?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와 견줄 만한 사례는 없다. 1942년 8월 시작돼 1943년 2월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5개월10일간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는 거의 20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돼 도시는 앙상한 철골과 콘크리트 잔해로 황폐화됐다. 소련군은 부서진 건물을 방호벽 삼아 진격하는 독일군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러시아 남부 볼가 강을 끼고 있어 지금은 볼고그라드(Volgograd)라 불리는 이 도시는 당시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세워졌다. 산업화를 독려했던 스탈린은 이 도시를 사회주의 경제발전의 상징적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스탈린그라드는 최신 트랙터 공장과 곡물저장시설이 있었고, 볼가 강을 중심으로 한 자원수송의 거점이었으며 크고 작은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 찬 산업도시였다.
● 산업거점도시 스탈린그라드
그런 만큼 히틀러에게도 스탈린그라드는 중요한 도시였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면 소련의 자원수송망을 차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자존심과 소련군의 사기를 꺾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독일군의 전력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당시 그들에게 스탈린그라드는 지도상의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스탈린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전략적 중요성도 작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름이 걸린 일이었다. 스탈린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도시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입체파 화가로 시작해 현대문명 속 대중의 삶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프랑스 화가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1881~1955)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의 본질이 차가운 도시와 기계에 있다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현대문명의 또 다른 본질을 보여준다. 독일 공군의 도심지 폭격은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 찬 도시를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폭격으로 부서지고 휘어진 철근 구조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에서 현대 도시의 숨겨진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하단의 전투에 임하는 군인들의 모습도 독특하다. 지금까지 보아온 많은 전투 그림과 달리 그들에게서는 전사의 결연함이나 투혼을 발견하기 어렵다. 단순화되고 희화된 전투 장면에서 전장의 치열함은 증발해버린 것 같다.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와 철근구조물에 의탁해 총을 겨누고 있지만 싸워야 할 적은 보이지 않고, 그들의 모습은 장난감 인형처럼 도식화돼 있다.
레제가 병사들에게 영웅적 개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현대문명에서 대중이 차지하는 지위와 연관돼 있다. 그가 보기에 현대사회의 중심은 다수의 대중이며, 나폴레옹 같은 고전적 영웅이 아니다. 그가 서민들의 레저나 근로자들의 작업, 서커스나 퍼레이드와 같은 대중적 소재를 중시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추상화된 모습을 갖고 있지만 굵은 선과 볼륨, 그리고 강력한 색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 소련군 하루도 못 살아
이러한 개인의 모습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본질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전장에 투입된 소련군들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선에 투입되자마자 독일군 총탄의 제물이 됐다. 전장의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죽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체가 나뒹구는 참호 속에서 무시무시한 포격을 견디며 군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정신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은 명령에 의해 돌진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잘 묘사됐듯이, 후퇴하는 병사는 무조건 사살됐다. 어떤 후퇴도 용납되지 않았다. 전쟁의 고통을 느끼는 것조차 그들에게 사치였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지만 결국 그들에 의해 스탈린그라드는 사수됐다.
독일군의 공격은 현대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탱크의 화력과 속도는 한순간에 적의 전선을 유린하고 군사거점을 장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적의 전력은 가공할 폭격에 무력화됐다.
탱크와 비행기, 야포와 보병이 적절히 결합해 전격적으로 돌진하는 독일군의 전력은 가히 무적이었다. 이에 비해 소련군은 인민들의 육탄공격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절멸할지언정 후퇴는 없었다. 소련군은 도시문명의 아이콘인 콘크리트 건물과 철근구조물에 의지해, 탱크와 비행기로 대표되는 독일의 기계문명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치열했던 ‘붉은 10월 공장’ 전투의 한 장면을 다루고 있다. 전장에 선 병사들은 추상화되고 형식화됐지만 선명한 주제의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부서진 철근구조물을 방호벽 삼아 한 무리의 무채색 군인들이 하나의 전사집단을 이루며 붉은빛 전선을 막아내고 있다.
● 추상적 인물 속에 강렬한 주제의식
비행기 폭격으로 폐허로 변한 도시와 철근 구조물, 핏빛 대지, 인간적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전장 분위기. 이 모두가 ‘인간의 전쟁’에서 ‘기계의 전쟁’으로 변해버린 제2차 세계대전의 본질을 보여준다.
독일은 전격전을 통해 소련 깊숙이 진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북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남부 코카서스에 이르는 광대한 전역을 감당해야 했다. 수천㎞로 펼쳐진 전선을 커버할 병력과 전력이 부족했다.
이에 비해 소련군은 애국심에 불타는 군인들로 보충됐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되면서 탱크와 야포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비행기 기름이 공급되면서 전력 면에서 독일군을 압도할 수 있게 됐다.
1942년 11월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남북 외곽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헝가리와 루마니아군은 힘없이 붕괴되고 단 나흘 만에 26만5000여 명의 독일군과 동맹군 병력이 완전히 포위되고 만다. 전장을 포기하지 말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독일군은 돌파작전마저 감행해보지 못한 채 1943년 2월 2일 사실상 궤멸 상태에서 항복하게 된다.
5개월간의 전투에서 독일은 동맹군을 포함해 85만여 명의 전력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이를 기점으로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밀리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뒤집어놓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UP↑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