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장주지몽(莊周之夢)과 장자(莊子)
중앙일보
입력 2024-04-30
에버랜드 나비. 김상선 기자
상선약수(上善若水). 약수 터 명칭이 아니다.
노자(老子)는 인생의 끝자락 즈음, ‘물처럼 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 간단한 결론에 도달했다.
봄이 나무라면, 여름은 불이다. 물은 겨울을 상징한다.
노자는 약 5000 자 분량의 도덕경(道德經)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소의 등에 걸터앉은’ 삽화 등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인물이다.
어쩌면 노자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 영원히 머물지도 모른다.
그의 젊은 시절이나 생몰(生沒) 연대를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가(道家) 사상의 발제 문(presentation statement)만 남기고 속세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장자(莊子)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본명은 장주(莊周), 초(楚) 나라 귀족 출신이다.
사연이 있어 초 나라를 떠나 송(宋)나라 등 이국(異國)을 떠돌았다.
그의 생애는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때론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장자는 실존 인물이다. 근대화 이전 중국에서 단순히 문장력이라면 장자와 맹자를 으뜸으로 꼽는다.
이번 사자성어는 장주지몽(莊周之夢)이다.
앞의 두 글자 ‘장주’는 ‘장자의 이름’이다. ‘지몽’은 ‘~의 꿈’을 뜻한다. 이 둘을 연결하면 ‘장자의 꿈’이 된다.
이 사자성어는 장자 가 꾼 꿈에서 유래했다. 장주지몽을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쓰기도 한다.
‘호접’은 ‘호랑나비’의 한자어다. 호접지몽을 세 글자로 ‘호접몽(胡蝶夢)’으로도 쓴다.
하루는 장자가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한 장면들이었다.
자신이 나비가 되어 허공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그런 내용이었다. 꿈이 깨고 장자는 의심한다.
‘나비도 수면을 취하긴 하니까 꿈도 꾸겠지. 그렇다면 거꾸로 지금 이 현실은 혹시 나비의 꿈속 세계가 아닐까?’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장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우화(寓話)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약 10만 자 분량의 장자는 내편·외편(外篇)·잡편(雜篇)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내편은 장자의 저술이고, 외편은 장자와 제자의 공저다. 잡편은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것으로 본다.
장자는 구체적인 이슈를 두고 유가(儒家)든 명가(名家)든 누군가 와 논쟁을 펼쳤다.
일부 우화에서 비유가 과하거나 괴이한 것을 빼곤 그를 솜씨 좋은 소설가로 볼 수도 있다.
‘인간세(人間世), 소요유(逍遙游) 등 자신의 글 속에서 전무후무한 판타지 초현실 세계와 현실 사이를
장자는 깃털처럼 가볍게 왕래한다.
수학자들은 ‘안 보이는 세계’를 보는 재주를 갖고 있다. 그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수월하게 왕래한다.
심지어 ‘각각 어디쯤이고, 서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일까’를 암산으로 얼추 짐작한다.
과거에 이런 경지까지는 오직 수학자만이 해낼 수 있었다. 요즘은 컴퓨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무리해 보여준다.
장자의 ‘호접지몽’ 우화에는 수학적 요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자가 꿈꾸기 전의 일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가 늘 목격하는 이 세상이 ‘실수(實數)의 세계’다. 나비가 꿈을 꾸기 전의 그 세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의
이 일상이야말로 허수(虛數)의 세계일 수 있다. 우주의 눈으로 보면 음양(陰陽)의 기호만 바뀌는 셈이다.
수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의 절묘한 교집합 텍스트 사례다.
철학자 장자는 도덕경을 통해 노자와 대화하며 깊이 깨우친 바가 있었다.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깨달음을 더 쉽게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막막했다.
장자가 이론보다 우화에 집중한 이유다. 직관에 기반한 지혜 전수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노자는 물소를 타고 미 개간지의 밭을 쟁기질 했다.
장자는 나비가 되어 구만 리 장천(長天)을 날며 씨를 뿌렸다.
지금 AI 시대에도 이 동방불패의 ‘무위(無爲) 사상’은 동양적 사유의 튼실한 한 축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서양에는 기원전 323년 사망한 디오게네스가 있다.
플라톤의 고급 침실에 들어가 자신의 맨발에 잔뜩 묻은 흙을 닦았다는 이 ‘노숙(露宿) 철학자’에게도 필요한
것은 많지 않았다.
장자가 남긴 우화와 디오게네스가 남긴 일화는 ‘초월(超越)과 놀라움’에서 서로 맥이 통한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다음 검색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