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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성도여! 환하게 웃으며 크게 기뻐하라!”
+ 본 문 :느혜미야 8장 8절 - 12절 (구약성경 737쪽)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아멘!
서로 인사 / “잘 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축복한대로 됩니다.”
“당신은 역사의 주역입니다.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주부들은 늘 밥 먹고 나면, 바로 무슨 걱정을 합니까? 다음 끼니 밥상 차릴 걱정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늘 영적 밥상을 차려야 하는 저는, 오늘 설교가 끝나면 내일 새벽기도회 밥상 준비를 하고,
수요예배 설교밥상 준비 걱정하고, 수요예배가 끝나면 또 돌아오는 주일예배 두 번의 밥상을 걱정하고,
무슨 밥상을 차릴 것인가가 결정되면, 기도와 말씀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고 드디어 요리에 들어갑니다.
오늘 주일은 무덥고 짜증나는 여름을 잘 보내기 위해서 “성도여! 환하게 웃으며 크게 기뻐하라!” 는,
행복밥상을 차렸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환하게 웃으며, 크게 기뻐하고,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험을 통해서 얻는 기쁨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안 해본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하기도 했고, 그리스와 터키 전장에서는,
종군기자로 전쟁터를 누비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이 바다낚시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글을 쓰는 작가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고,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씩이나 떨어졌지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세 번 결혼에 실패했고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사냥총으로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고,
당긴 채 쓰러져 드라마틱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입니다.
그는 한 평생 인생의 기쁨, 곧 스릴을 찾아 도전했고, 또 어느 정도 그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그 기쁨이 없어졌을 때, 더 이상 살 용기를 잃어버린 채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참 기쁨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웃어도 억지로 웃는 가식적인 웃음뿐이고, 사람을 만나도 기쁘지 않아 돌아서면 슬퍼지는 그런 시대입니다.
작게는 서로 믿지 못하는 인간관계의 문제요,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좀 엉뚱한 변명 같을지 모르지만, 요즈음은 국가가 웃음이 없는 국민을 만들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기뻐하길 원하고 기뻐하며 살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내 안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그 기쁨이 나를 떠났다고 생각 될 때, 어떻게 기쁨을 회복하며 그 기쁨을 누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웃음과 기쁨으로 충만케 하면, 그 어떤 위기와 문제와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는 늘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느헤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여러분도 오늘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므로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번에 걸쳐 바벨론에서 고향땅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가장 먼저 주전 537년경,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약 5만 명이 돌아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건축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좀 늦어지긴 했지만, 17년 만에 성전건축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눈물로 봉헌식을 올렸던 그 성전이, 바로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지어진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두 번째 귀환은, 첫 번째 귀환 보다 약 80년 후인 주전 458년경에 있었습니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약 5천 명이 돌아왔습니다. 에스라는 돌아오자마자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방여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요.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마저도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방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단순히 혈통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나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자신의 신앙도 잃어버렸고,
온 이스라엘 땅에 우상숭배로 물들였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일반화되어버린, 당시 사회의 영적인 타락을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귀환은 두 번째 귀환이 있은 지, 약 14년 후인 주전 444년경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 귀환의 중심인물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입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주신 사명은,
성벽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성벽은 건축한다는 것은 한 나라의 국권을 세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벽건축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요한 방해와 살해 협박이 끊임없이 가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마음이 되어 52일 만에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성벽공사를 다 끝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흥회를 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8장 1절 이하에 보면, 7월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율법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 6시부터 낮 12시까지, 에스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외치면, 여러 명의 레위 사람들이 군중들 가운데서 선포한 말씀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선포한 말씀과, 레위 사람들이 해석해준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한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아멘!
‘오늘처럼 기쁜 날 왜 우느냐?’ 고 말씀하신 후에, 오히려 축제와 잔치를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먹을 것도 준비하여 실컷 먹고 즐기되, 너희만 먹지 말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나누라고 말씀합니다.
말 그대로 잔치를 크게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기쁨이 넘치는 잔치를 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0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쁨과 웃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귀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우리 삶에 엄청난 힘이 됩니다. 몸이 아픈 사람도 늘 기쁨으로 살면 건강하게 됩니다.
얼굴에 인상을 쓰고 얼굴 찌푸리고 사는 사람보다, 늘 웃으며 기쁘게 사는 사람이 더 건강하게 삽니다.
그래서 암이나 그 어떤 중병에 걸린 사람일지라도, 웃음을 통해서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새터데이 리뷰” 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지낸 ‘노먼 커즌즈’ 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척추를 움직이지 못하는 불치병을 앓다가 전신이 마비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그에게 내린 처방은 진통제와 신경안정제 등, 아주 독한 약들이었는데 그 독한 약을 먹고,
견디다가 그냥 죽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렇게 죽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으로, 나의 이 지독한 병을 반드시 이겨내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가장 큰 힘이 된 것이 바로 웃음이었습니다. 무조건 많이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몇 시간씩 밝은 스토리의 재미있는 영화, 그리고 너무너무 웃기는 영화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보고 잠자리에 들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던 것이 사라지고 편안함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꼽을 쥐고 웃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고통도 염증도 치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전신마비에 이르렀던 그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런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질병의 해부” 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해 강의 도중 심장발작으로 다시 병원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때도 웃음요법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바탕으로 “마음의 치유” 라는 책을 썼는데,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몸이 아프다고 인상 쓰고 다니지 말고, 많이 웃고, 웃음을 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쁨과 웃음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영혼을 밝고 맑게 만듭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했습니다.
잠언 17장 22절 말씀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즐거움만큼 좋은 약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쁘게! 늘 웃으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는, 웃음의 효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한번 크게 웃을 때, 평상시 움직이지 않던 근육 중 230개 이상이 움직이고,
이로 인해 혈액순환이 활발해져 산소와 영양분이 피부에 전달돼 피부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젊고 건강하게 사시려면 어찌하든 많이 웃으시고, 항상 재미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물론 웃음과 기쁨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웃음과 기쁨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기쁨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것이라면, 웃음은 그 본질로부터 나오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애매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기뻐서 웃습니까? 웃으면 마음이 기뻐집니까?
정답은 둘 다 0, 둘 다 맞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쁘면 웃음이 나오고, 웃으면 마음이 기뻐집니다.
논리적으로는 마음이 기뻐야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쁘지 않아도 웃으면 마음이 기뻐집니다.
어린 아기들이 해맑은 얼굴로 웃는 모습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천사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눈망울 초롱초롱한 천사의 모습과 같은 아기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웃으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다 울면서 태어납니다. 웃으면서 태어난 아기를 보신 분 계십니까?
다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렇게 울면서 태어난 아이들이 천사처럼 방긋 웃는 것은 다 학습된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물론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웃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애교 - 온갖 재롱을 다 부립니다.
아이를 웃게 만드는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까꿍” 입니다. ‘까꿍’ 소리에 아이는 방긋 웃습니다.
이 까꿍은 어른들도 웃게 만듭니다. 옆에 사람을 보고 까꿍 해보겠습니다. “까꿍!” / 여러분 까꿍!
웃음은 배워야 합니다. “까꿍” 하면서라도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얼굴에 웃음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까꿍 요법이 잘 안 될 때에는 고개를 몇 번 저으면서 ‘도리도리 까꿍’ 이라도 해서 웃겨야 합니다.
“까꿍” 요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또 하나의 웃음 요법이 있는데, 그것은 간지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왜 간지럼을 타게 만드신지 아십니까? 웃으면서 살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늘 웃으며,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에도 눈물 질질 짜면서 나오는 것보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도 우리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데, 자녀인 우리가 늘 울상을 짓고 있으면 주님 마음이 기쁘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항상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셨습니다.(살전 5:15)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인상 쓰며 얼굴 표정이 굳어 있는 체로 사는 것,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항상 웃고 사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반대로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을 나 홀로 지고 가는 사람처럼, 항상 굳은 얼굴로 인상을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웃으며 삽시다.
그러면 언제 기뻐해야 합니까? “항상 기뻐하라.” -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라.’ ‘건강할 때만 기뻐하라.’ 아닙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건강을 잃고 고통스러울 때 기뻐하면 건강이 회복됩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뻐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불평스러운 마음이 들 때에 기뻐하고 웃어버리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들만 생깁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하면 안 됩니까? 아무리 부모라도 자녀들을 노엽게 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므로,
기쁘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기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자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기뻐 웃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에도 기쁜 마음으로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행복하면, 하나님도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근심 걱정 다 짊어진 채, 인상 팍 쓰고 앉아 있으면, 그 예배는 열납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영생도 얻었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찬송할 때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때도 열납 된 줄로 믿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예배를 두고 오늘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주님의 날에는 특별히 기뻐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면서 짜증내면 안 됩니다.
주일은 어느 날보다도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많이 웃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은 잔칫날과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을 얻어 일주일을 승리하며 잘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해야 할 주일부터 기분이 상하고 짜증나면, 한 주간 내내 삶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여러분! 주일에 많이 웃으며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쁘게 웃으며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러도 기쁘게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봉사를 해도 기쁘게 봉사를 하고, 누구를 만나든,
환하게 웃으시면서 기쁨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의 부자” 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기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웃으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아가다가 이런 일 저런 일 당하고 살다보면, 기뻐할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 어떤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신다면, 나를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주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누가복음 10장 21절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셨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도,
보내주시면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으면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191장 1절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영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여 “힘들고 지쳐도 웃어요. 우!” 주님과 함께 늘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늘 행복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살았습니다.
그 행복한 스승은 단 한 순간도 그 얼굴에 불행한 기색이나 어두운 그늘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 스승이 나이가 들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웃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늘 행복한 모습으로 웃기만 하던 스승’ 이 궁금했던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조금도 없으십니까? 죽음을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예전엔 너처럼 불행하다는 생각에 늘 우울해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오늘 주어진 내 삶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아침에 눈을 뜨면,
나 자신에게 물었지. 자 오늘은 어떤 삶을 선택하겠느냐? 불행이냐 행복이냐? 찡그림이나 웃음이냐?”
여러분! 그렇습니다. ‘웃으며 사느냐? 찡그리며 사느냐? 행복하게 사느냐? 불행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웃음을 선택하고 행복을 선택하면, 우리는 늘 웃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무덥고 짜증나는 여름! 사랑하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을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늘 기쁨과 웃음과 행복을 선택하여, 여러분의 삶에 기쁨과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여러분 때문에, 모두가 기쁨과 웃음과 행복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기쁨과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가족들이, 여러분의 직장이,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교회가 기쁨과 웃음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자녀들인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항상 기뻐하고, 항상 웃고, 항상 행복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항상 기쁘게 하고,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