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도 바꿔 달고 원훈도 새로 만들어봤지만, 국정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벌인 민간인 불법 사찰과 정치 개입은, 과거 어두웠던 군사독재 시절 정보기관의 비뚤어진 모습과 본질에서 다를 게 없다. 그런 국정원을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들어 처음 나온 것도 아니다. 그런데 국정원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국정원 개혁의 '흑역사'를 짚어봤다.
잘 알려졌다시피, 국정원의 전신은 5.16쿠데타 세력이 만든 중앙정보부(중정,1961)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을 내세웠던 중정은, 용공 조작 등을 통해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와 조직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1967), 최종길 교수 고문살해사건(1973),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1974),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1975)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이후 신군부는 중정의 간판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1981)로 바꿔 단다. 10.26 사태로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그러나 '피차일반' 쿠데타 세력의 사고방식 속에서 가동된 안기부가 과거 중정과 다를 리 없었다.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1985)을 둘러싼 의혹이나 이선실 간첩 사건(1992)의 대선 및 정치 활용 의혹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보기관 개혁이 비로소 제대로 논의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후반 들어서다. 과거 중정에 의해 납치(1973)돼 수장 직전 풀려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며, 안기부 청산은 시대적 요구로 떠올랐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당시 부장 권영해)가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의 돈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이른바 '북풍 사건', 그리고 안기부 돈을 선거에 활용한 '안풍 사건' 등도 안기부 개혁 요구를 높였다.
김대중 정부는 '작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내세우며 안기부를 국가정보원(국정원,1999)으로 개칭했다. 동시에 국정원장의 직급을 부총리에서 장관급으로 하향 조정하고, 부훈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외 별다른 개혁이 진척되지는 않았다. 국정원 산하 국내 파트와 대공 수사권은 그대로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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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0월 11일 열린 안기부 국회 국정감사에서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이 선서하고 있다. ⓒ연합뉴스 |
참여 정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돌이켜보면 항상 정보기관 개혁의 핵심 쟁점은 '국내 파트와 대공 수사권' 부분이었다. 이는 정보기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권력'에 의해 언제든지 국내 정치나 선거에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안에서조차 국내 파트나 대공 수사권 등은 다른 기관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말이 나왔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인사가 거의 없다.
이런 문제점을 잘 인식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정원의 국내 사찰 업무를 중단하고 해외 정보만 수집·분석하는 '해외 정보처'를 신설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국정원 내 국내 파트와 대공 수사권은 참여정부 때도 그 생명을 유지했고, 국정원 제도 개혁은 실패로 결론 났다.
참여정부가 이전 정부들에 비해 개혁 의지가 눈에 띄었던 건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부 출범과 동시에 지난 시절 계속돼 온 국정원장의 대통령 주례 대면 보고를 폐지했다. 또 야권의 거센 반발에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고영구 변호사를 원장으로,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국정원 개혁 청사진을 그렸던 북한 문제 전문가 고(故) 서동만 교수를 기획조정실장(기조실장)으로 인선하며 강한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한나라당은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이같은 개혁 조치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반발 논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종북 세력'의 활동을 제어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라는 게 핵심이었다. 한나라당은 국정원 인사청문회 자리를 사상 검증 무대로 만들었으며, 특히 서동만 기조실장에 대해 이념성과 전문성 등을 문제 삼으며 '색깔론 공세'를 펴기도 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과거사위, 위원장 오충일)를 출범시킨 것도 참여정부의 '쾌거'이긴 했다. 출범 때는 국정원 스스로 어두운 40년 역사를 '고해성사'해낼 수 있을 것인가란 의문이 많았던 게 사실이었지만, 과거사위는 보수 세력과 과거 안기부 출신 인사들의 비난과 반발을 뚫고,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KAL기 폭파사건, 미림팀 도청 사건 등 국민적 의혹이 많은 사건 진실 규명에 매진했다. 활동을 접던 2007년엔 조사 결과를 6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당시 과거사위 민간위원으로 활동했던 안병욱 전 가톨릭대 교수는 얼마 전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국정원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의지는, 지금 생각해도, 추호도 의심할 바 없이 명확했다. 그런 신뢰나 의지가 확인됐기 때문에 우리(민간 위원)가 들어가서 일했던 것"이라며 "그만큼 당시 국정원 측의 상황은 절박했다"고 회고했다.
(☞관련 기사 보기 : "'이명박근혜' 국정원, 박정희 때로 회귀한 까닭은…", "우린 전두환 각하 분신"…국정원 DNA 안 변했다)
안기부 엑스파일 터지자, 박근혜 "국정원 재설계해야 한다"참여정부 시절, 국정원 개혁 논의가 급물살을 탔던 큰 계기는 2005년 '삼성 엑스파일 사건'이었다. 사건이 터지자, 정권과 언론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삼성 공화국'의 실체에도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기부 불법도청이 김대중 정부에서도 자행됐단 사실에 파장은 더욱 커졌다.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은 재벌-정권-언론의 3각 커넥션을 '물타기' 하기 위해 불법도청 문제에 집중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2005년 7∼8월 "어두운 과거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국정원이 국가를 위해서만 일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국내외적으로 안보·정보환경이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국정원을 재설계해야 한다" 등의 말을 쏟아냈다. 물론 한나라당이 진짜 의지가 있었는지는 별개 문제다.
엑스파일 여파로 정치권에선 국정원 제도 개혁을 위한 법안 발의 봇물이 터졌다.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4월 전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앞서 열린우리당에서도 임종인 당시 의원 대표발의로 전부개정안이 나왔다. 이 가운데 노회찬, 임종인 법안은 그간의 논의 흐름대로 국내파트 해체와 수사권 폐기 등을 담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나온 법안(정형근 대표 발의)에는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과 해외 정보 수집, 공안정보 수집 권한과 수사 권한을 모두 유지케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만 국정원에 대한 통제 강화 차원에서 △국정원 대공수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 강화 △예산안 첨부서류 국회 제출 의무화 등이 들어가긴 했다. 2003년 국내파트 폐지와 수사권 이관(홍준표 당시 의원) 등을 외쳤던 데 비교해봐도 한참 퇴보한 셈이다. 퇴보한 2006년의 이 개정안에는 김기춘 현 대통령 비서실장(당시 여의도연구소장)과 김무성, 홍준표 당시 의원 등이 서명했다.
노무현, 권력자의 선한 의지에 기댄 소극적 개혁으로 마무리그렇다면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개혁 노력은 왜 실패로 돌아갔을까? 정치권이 국정원 제도 개혁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때, 청와대는 외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봐야 한다. 2006년 3월 노 전 대통령은 "지금처럼 가면 제도적으로 큰 개혁을 안 해도 되는 수준"이라고 말해, 국정원 제도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일각에선 '노무현 정부 들어 진행된 국정원 탈권위·탈정치화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평이 나왔지만, '보수 세력의 눈치를 봤다'는 평도 만만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태도를 두고 신기남 당시 정보위원장은 2006년 4월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국정원 개혁 문제가 설(說)만 난무하고 실제 진전이 없"다며 "(참여 정부에서도) 또다시 타성에 젖은 말만 나와서 안타깝"다고 평했다.
(☞관련 기사 보기 :"국정원 개혁, 참여정부서도 타성에 젖은 말만 나와")정권 말엔 인사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부산 출신인 김만복 국정원 1차장을 국정원장으로 인선한 것이었다. 정권 초 기조실장을 지냈던 서동만 교수는 당시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 자기 출신 지역 인사를 원장에 앉힘으로써 '국정원의 정치화'를 불가피하게 불러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보기 : "'김만복 국정원'은 정치화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정원 개혁이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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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연합뉴스 |
MB의 국정원, 권력과 조직 보위를 향한 무명의 헌신?참여정부의 국정원 개혁은 권력자의 선한 의지에 기대는 소극적 개혁으로 종결됐다. 당시 근본적 처방을 받지 못했던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 들어 빠른 속도로 과거로 회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원훈을 바꿔 달았지만, 결국 '권력과 조직 보위를 향한 무명의 헌신'만을 남겼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 그는 후보 시절부터 별다른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말 시민 단체들이 대선 후보들에게 보낸 공안 기구 개혁에 관한 질의서에 대해, 박근혜 당시 후보는 검찰 개혁에는 일부 의견을 냈으나 국정원 개혁에선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관련 기사 보기 : "국정원 개혁" 질문에 朴 "묵묵부답", "장성 출신 남재준, 군과 국정원 차이 몰라") 비극은 결국 찾아왔다. 국정원은 대선 개입 의혹으로 전직 원장이 법정에 서게 돼는 수모를 겪게 됐다.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셀프 개혁'을 주문하며, 국정원 제도 개혁 의지가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럴수록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숫자는 늘어갔다. 국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석기 내란예비음모 사건'을 터트렸다.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는 평들이 나오고 있다. 역설적으로 보면 이는 개혁에 대한 '반동' 정서가 국정원 내부에 퍼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과 '자기 조직'을 향한 헌신은 이제 교정돼야 한다. 역대 정권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국정원 개혁'은 지금, 더 절실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