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대 선지식 만암 스님과 같은 분이라고나 할까요” 수산(壽山)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전남 영광군 불갑사를 향해 가는 5시간 내내, 수산스님이 어떤 분이냐는 기자의 전화 질문에 위와 같이 한마디로 표현한 불갑사 주지 만당스님의 말에서 뵙기도 전에 스님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제불교 초전지 모악산 불갑사의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종무소를 찾았다. 수산 스님께 기별을 넣기 위해서다. 잠시 후 대웅전 왼편에서 노스님 한 분이 걸어오시더니 자상하게 물으신다. “어디서 오셨다고? 더운 날씨인데. 우선 내 처소로 갑시다.” 스님을 좇아 스님이 30여년 가까이 주석하고 계시다는 염화실로 들어섰다. 잠시 후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이 들어오셔서 합석했다. 만당 스님은 수산 스님의 상좌이다.
“부처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언행일치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말과 바른 생각 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는 자못 어려워요. 실천이 없는 것은, 제법 울창해 보이지만 목재로 쓸 수 없는 아카시아 나무만 가득찬 산과 다를 게 없어요.”수산 스님은 불자의 첫 도리로 언행일치를 강조하셨다. ‘언행일치’ 이는 스님의 스승이셨던 만암 스님이 가르침을 청하는 스님과 불자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이기도 하다. 수산 스님이 1938년 백양사에서 출가했는데, 이때의 만암 스님의 가르침 역시 언행일치 하라는 것이 첫째였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모름지기 삼독심과 번뇌를 버리도록 끊임없이 정진을 해야하고, 모든 중생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생사 문제도 여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유자재한 도리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중생의 몸으로 남게 되는 거지요.”수산 스님의 평소 생활은 늘 활기로 가득하다. 스님은 지금 꼭 세수 여든이 되셨지만 게으름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신다. 몸과 마음으로 익힌 것을 삶 속에 끊임없이 투영시키고 있는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늘 가르침을 실천으로 행해 모범을 보이신다. 예를 들어 스님은 대중들과 격을 두지 않고 공양을 한 상에서 하신다. 또 봄이면 산나물을 캐기 위해 고령에서 불구하고 모악산 구석구석을 다니신다. 새벽 예불을 거르지 않고 ‘이 뭣고’ 화두를 챙기는 스님의 일상은 늘 불갑사 대중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번은 “조실 스님이시니 공양 자리를 따로 만들겠다”는 불갑사 사중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단호하게 물리치셨다 한다. “여기에 입이 나 혼자가 아니다. 입은 다 똑같다. 노소를 막론하고 입은 다 똑같으니 나물죽 한 그릇이라도 똑같이 나눠 먹어야지, 나 혼자만 좋은 것 먹으면 되겠느냐”스님은 힘들게 공부하셨기에 요즘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환경에서 젊은 사람들이 왜 공부에 등한시하는지 답답하기 그지 없다고 하신다. 도리어 너무 풍족한 것이 때로는 마가 될 수도 있으니 수행자라면 풍족한 환경에 좋아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요즘에야 행자들에게 처음부터 공부를 가르치지만 내가 출가했던 30년대만 해도 행동이 먼저였어요. 말이 필요 없었지요. 행동 하나 보고 중을 만들기도 하고 그만 가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출가했다고 해서 바로 머리를 깎아주지도 않았지요. 나 역시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행자로 5년 정도를 하심하는 온갖 일로 보내고서야 머리를 깎았습니다.” 만암스님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을 공부했고 시봉도 많이 살았다. 특히 꼼꼼하게 일을 잘 하고 성실한 수행 생활을 하는 수산 스님을 흡족해 한 만암 스님은 자주 수산 스님을 곁에 데리고 있으려 해 스님은 선방에 있다가도 만암 스님 곁으로 돌아오곤 했다. 만암 스님은 평소와 같이 저녁 공양을 마치고 서옹 스님(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과 차를 마시다가 열반에 드셨다. 스님은 마치 헌 옷을 벗듯 육신의 탈을 자유로이 벗어버렸다. 만암 스님의 입적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수산 스님이 이를 자주 주위에 상기시켜 주는 이유도 생사불이의 대자유인의 참모습을 좇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다른 이들도 대자유인의 그러한 공심(空心)을 따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수산 스님이 불갑사를 찾아온 불자들에게 자주 “법회에 찾게 한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까닭도 ‘공심’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스님은 “법회를 찾게 한 그 마음자리는 형태가 없는 것인데, 그게 무슨 마음자리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마음이란 본래 형태가 없어, 삼라만상을 삼켰다가 뱉었다 하는 겁니다. 마음이 형체가 있다면 그것을 삼키지 못하죠. 그런 마음의 속성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꼭 소유하고 싶은 게 우리의 속내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습니까. 공에서 만들어졌다 공으로 다시 돌아가니 현상계는 전부 형체나 음성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육신부터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고 하신다. 죽을 때는 소중한 재산, 자손 모두 다 내던지고 가장 소중한 내 몸뚱이까지 내던지고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내 것이라 집착할 것이 도무지 없다고 하신다. 스님은 “마음자리는 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몸뚱이 있을 때 업을 짓고 가게 됩니다. 어떤 업이냐 하면 염불을 외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극락세계에 갈 반야용선을 탈 것입니다. 죽을 때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돈, 명예, 이름 이런 거 가져갈 수 있어요? 아무 것도 못 가져가요. 그런데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건 바로 공덕입니다. 열심히 공덕 지으면 반드시 그 마음자리를 가져갈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만을 위해 지은 업보와 죄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탐진치 삼독을 버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걸 모르고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과보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만암 스님처럼 부처님의 법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살아야 해요.”하신다.
이러한 생활을 위해 스님은 불자라면 일상에서 바른 신심을 가져야 함은 물론 이를 말과 행동으로 옮기며 자성을 밝히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스님은 욕심 많은 사람을 꾸짖는 일에 물러섬이 없다. 누구나 자기 욕심을 앞세우다 보면 세상이 혼탁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욕심에서 벗어나는 첩경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일이라며 늘 기도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불법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우리 몸 구석구석에 공급되어야 합니다. 불자들 중에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수행은 제대로 않으면서, 스님들에게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불교는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 종교입니다. 자기가 직접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면 자연히 공덕이 쌓아집니다.”늘 중생포교에 관심이 깊은 스님은 현재 영광군 법성포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마라난타 기념사업’에 온 노력을 쏟고 계신다. 이 땅에 전래한 불교의 뿌리를 찾고 한국불교의 정신을 이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생각에서다. 스님은 영광군수를 수차례 만나, 법성포가 백제불교의 초전지이며 이를 영광군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해 이 사업이 가시화 된 것이다. 스님은 한국 정서의 근본에 무엇이 있는 가를 모두에게 알려주자는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 불갑사 내에서도 지역 주민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사중 스님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항상 말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 역시 만암 스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만암 스님은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우선 절 살림의 내실을 다지고, 여유가 생기면 이를 비축해 두었다가, 가뭄 등으로 사하촌의 경제 여건이 악화되면, 그 정재를 풀었다. 또한 스님들의 울력의 범위를 백양사로만 한정하지 않고, 사하촌까지 확대해 지역 지역민들과 자주 만날 수 있게 해 이로인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도 만들면서 지역민들이 스님들을 믿고 따르게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있다는 수산 스님은 “스승께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노력해오고는 있지만, 아직 그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했습니다. 만암 스님은 워낙 언행이 일치하고 늘 겸손했으며 공심으로 일을 처리하니 누구나 다 추앙할 수밖에 없었지요. 만암 스님은 항상 대중들과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당신 개인에게 해 끼치는 일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남에게 해 끼치는 일은 크게 경책하셨어요. 그 분만큼 공과 사가 분명했던 스님도 없다고 봅니다. 또 거짓된 행동이나 신심을 위장하거나 거짓말은 금방 아셨어요.”요즘처럼 누구나 어렵다고 하며, 갈등이 많은 때일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스님은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다욕(多欲)은 괴로움이라고 했고 생사피로가 탐욕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소욕(少欲)해 담담히 살아가면 몸과 마음이 자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예로 드셨다. 항상 남과 비교해 적게 가진 것을 괴로워하고 물질에 집착한다면 평안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부터 비워버려야 합니다. 나부터 비워버리면 남을 도와주었다 해도, 내가 남을 도와주었다는 상이 없어야죠. 오히려 내가 못 미쳤구나, 내가 복을 못 지어서 더 못 주는구나 이러한 미안한 생각을 가지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뭐 좀 냈다고 텔레비전에 사진 내고 신문에 큼직하게 이름 내고 하는 것은 복을 짓는 게 아닙니다. 우선 나부터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아집을 버리면 모든 게 편하고 화해가 저절로 됩니다. 아집이라는 것은 제가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는 것인데 수행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버려라 하는 것은 내가 잘 났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내가 조금 지고 들어가라는 것이지요. 무슨 일을 하든 사심이 없고 아집을 버리고 오로지 공심으로 추진하면 다 수긍하고 따르게 되어 화합이 저절로 됩니다”.
오종욱 기자 **********************
수산스님은? 평생 ‘이 뭣고’ 화두참구 마라난타 기념사업 추진 세수 80 이신 요즘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예불을 모시는 수산 스님은 참선과 계행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수행자다. 평소에도 가능한 눕지 않고자 한다는 스님은 만암 스님이 내려준‘이 뭣고’화두 참구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검소하기 그지 없는 수행자로 정평이 나 있다. 스님은 “어떤 선지식은 ‘이 뭣고’ 화두에다 온갖 말을 다 갖다 붙이는데 그게 다 병통을 만드는 원인이야. 육조 스님께서 ‘이 뭣고’ 앞에 갖다 붙인 말도 실제로 참구해 들어가는 데에는 조금도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야. 다만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만 끊이지 않게 하면 돼. 그래야만 옳게 직입을 할 수 있어. 그런 가운데에서 세상일이고 참선이고 하다보면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라고 의심하는 주인공마저 없어지고 알 수 없는 의심덩어리만 온 법계에 가득할 때가 올 거야. 그런 경계에 다다르면 대장부의 일을 마칠 때가 된거지. 그렇다고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니야. 미세한 번뇌의 뿌리까지 남김없이 녹인 후에야 구해탈(俱解脫)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고, 전법도생(傳法度生)을 할 수 있다”고 늘 강조하신다. 192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1938년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의 상좌인 법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봉하·만암 스님에게서 사미·비구계를 받고 수덕사, 정혜사, 다보사 선방에서 정진했다. 이후 고불총림 백양사와 부안 개암사, 완도 신흥사 등의 주지를 지냈고, 정광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스님은 불갑사 염화실에 주석하고 있으며, 백제불교의 뿌리를 찾는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광군 법성포를 중심으로 ‘마라난타 기념사업’ 추진에 헌신하고 있다.
“근대의 대 선지식 만암 스님과 같은 분이라고나 할까요” 수산(壽山)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전남 영광군 불갑사를 향해 가는 5시간 내내, 수산스님이 어떤 분이냐는 기자의 전화 질문에 위와 같이 한마디로 표현한 불갑사 주지 만당스님의 말에서 뵙기도 전에 스님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제불교 초전지 모악산 불갑사의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종무소를 찾았다. 수산 스님께 기별을 넣기 위해서다. 잠시 후 대웅전 왼편에서 노스님 한 분이 걸어오시더니 자상하게 물으신다. “어디서 오셨다고? 더운 날씨인데. 우선 내 처소로 갑시다.” 스님을 좇아 스님이 30여년 가까이 주석하고 계시다는 염화실로 들어섰다. 잠시 후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이 들어오셔서 합석했다. 만당 스님은 수산 스님의 상좌이다.
“부처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언행일치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말과 바른 생각 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는 자못 어려워요. 실천이 없는 것은, 제법 울창해 보이지만 목재로 쓸 수 없는 아카시아 나무만 가득찬 산과 다를 게 없어요.”수산 스님은 불자의 첫 도리로 언행일치를 강조하셨다. ‘언행일치’ 이는 스님의 스승이셨던 만암 스님이 가르침을 청하는 스님과 불자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이기도 하다. 수산 스님이 1938년 백양사에서 출가했는데, 이때의 만암 스님의 가르침 역시 언행일치 하라는 것이 첫째였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모름지기 삼독심과 번뇌를 버리도록 끊임없이 정진을 해야하고, 모든 중생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생사 문제도 여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유자재한 도리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중생의 몸으로 남게 되는 거지요.”수산 스님의 평소 생활은 늘 활기로 가득하다. 스님은 지금 꼭 세수 여든이 되셨지만 게으름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신다. 몸과 마음으로 익힌 것을 삶 속에 끊임없이 투영시키고 있는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늘 가르침을 실천으로 행해 모범을 보이신다. 예를 들어 스님은 대중들과 격을 두지 않고 공양을 한 상에서 하신다. 또 봄이면 산나물을 캐기 위해 고령에서 불구하고 모악산 구석구석을 다니신다. 새벽 예불을 거르지 않고 ‘이 뭣고’ 화두를 챙기는 스님의 일상은 늘 불갑사 대중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번은 “조실 스님이시니 공양 자리를 따로 만들겠다”는 불갑사 사중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단호하게 물리치셨다 한다. “여기에 입이 나 혼자가 아니다. 입은 다 똑같다. 노소를 막론하고 입은 다 똑같으니 나물죽 한 그릇이라도 똑같이 나눠 먹어야지, 나 혼자만 좋은 것 먹으면 되겠느냐”스님은 힘들게 공부하셨기에 요즘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환경에서 젊은 사람들이 왜 공부에 등한시하는지 답답하기 그지 없다고 하신다. 도리어 너무 풍족한 것이 때로는 마가 될 수도 있으니 수행자라면 풍족한 환경에 좋아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요즘에야 행자들에게 처음부터 공부를 가르치지만 내가 출가했던 30년대만 해도 행동이 먼저였어요. 말이 필요 없었지요. 행동 하나 보고 중을 만들기도 하고 그만 가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출가했다고 해서 바로 머리를 깎아주지도 않았지요. 나 역시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행자로 5년 정도를 하심하는 온갖 일로 보내고서야 머리를 깎았습니다.” 만암스님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을 공부했고 시봉도 많이 살았다. 특히 꼼꼼하게 일을 잘 하고 성실한 수행 생활을 하는 수산 스님을 흡족해 한 만암 스님은 자주 수산 스님을 곁에 데리고 있으려 해 스님은 선방에 있다가도 만암 스님 곁으로 돌아오곤 했다. 만암 스님은 평소와 같이 저녁 공양을 마치고 서옹 스님(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과 차를 마시다가 열반에 드셨다. 스님은 마치 헌 옷을 벗듯 육신의 탈을 자유로이 벗어버렸다. 만암 스님의 입적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수산 스님이 이를 자주 주위에 상기시켜 주는 이유도 생사불이의 대자유인의 참모습을 좇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다른 이들도 대자유인의 그러한 공심(空心)을 따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수산 스님이 불갑사를 찾아온 불자들에게 자주 “법회에 찾게 한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까닭도 ‘공심’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스님은 “법회를 찾게 한 그 마음자리는 형태가 없는 것인데, 그게 무슨 마음자리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마음이란 본래 형태가 없어, 삼라만상을 삼켰다가 뱉었다 하는 겁니다. 마음이 형체가 있다면 그것을 삼키지 못하죠. 그런 마음의 속성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꼭 소유하고 싶은 게 우리의 속내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습니까. 공에서 만들어졌다 공으로 다시 돌아가니 현상계는 전부 형체나 음성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육신부터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고 하신다. 죽을 때는 소중한 재산, 자손 모두 다 내던지고 가장 소중한 내 몸뚱이까지 내던지고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내 것이라 집착할 것이 도무지 없다고 하신다. 스님은 “마음자리는 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몸뚱이 있을 때 업을 짓고 가게 됩니다. 어떤 업이냐 하면 염불을 외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극락세계에 갈 반야용선을 탈 것입니다. 죽을 때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돈, 명예, 이름 이런 거 가져갈 수 있어요? 아무 것도 못 가져가요. 그런데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건 바로 공덕입니다. 열심히 공덕 지으면 반드시 그 마음자리를 가져갈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만을 위해 지은 업보와 죄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탐진치 삼독을 버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걸 모르고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과보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만암 스님처럼 부처님의 법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살아야 해요.”하신다.
이러한 생활을 위해 스님은 불자라면 일상에서 바른 신심을 가져야 함은 물론 이를 말과 행동으로 옮기며 자성을 밝히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스님은 욕심 많은 사람을 꾸짖는 일에 물러섬이 없다. 누구나 자기 욕심을 앞세우다 보면 세상이 혼탁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욕심에서 벗어나는 첩경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일이라며 늘 기도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불법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우리 몸 구석구석에 공급되어야 합니다. 불자들 중에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수행은 제대로 않으면서, 스님들에게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불교는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 종교입니다. 자기가 직접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면 자연히 공덕이 쌓아집니다.”늘 중생포교에 관심이 깊은 스님은 현재 영광군 법성포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마라난타 기념사업’에 온 노력을 쏟고 계신다. 이 땅에 전래한 불교의 뿌리를 찾고 한국불교의 정신을 이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생각에서다. 스님은 영광군수를 수차례 만나, 법성포가 백제불교의 초전지이며 이를 영광군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해 이 사업이 가시화 된 것이다. 스님은 한국 정서의 근본에 무엇이 있는 가를 모두에게 알려주자는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 불갑사 내에서도 지역 주민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사중 스님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항상 말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 역시 만암 스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만암 스님은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우선 절 살림의 내실을 다지고, 여유가 생기면 이를 비축해 두었다가, 가뭄 등으로 사하촌의 경제 여건이 악화되면, 그 정재를 풀었다. 또한 스님들의 울력의 범위를 백양사로만 한정하지 않고, 사하촌까지 확대해 지역 지역민들과 자주 만날 수 있게 해 이로인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도 만들면서 지역민들이 스님들을 믿고 따르게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있다는 수산 스님은 “스승께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노력해오고는 있지만, 아직 그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했습니다. 만암 스님은 워낙 언행이 일치하고 늘 겸손했으며 공심으로 일을 처리하니 누구나 다 추앙할 수밖에 없었지요. 만암 스님은 항상 대중들과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당신 개인에게 해 끼치는 일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남에게 해 끼치는 일은 크게 경책하셨어요. 그 분만큼 공과 사가 분명했던 스님도 없다고 봅니다. 또 거짓된 행동이나 신심을 위장하거나 거짓말은 금방 아셨어요.”요즘처럼 누구나 어렵다고 하며, 갈등이 많은 때일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스님은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다욕(多欲)은 괴로움이라고 했고 생사피로가 탐욕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소욕(少欲)해 담담히 살아가면 몸과 마음이 자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예로 드셨다. 항상 남과 비교해 적게 가진 것을 괴로워하고 물질에 집착한다면 평안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부터 비워버려야 합니다. 나부터 비워버리면 남을 도와주었다 해도, 내가 남을 도와주었다는 상이 없어야죠. 오히려 내가 못 미쳤구나, 내가 복을 못 지어서 더 못 주는구나 이러한 미안한 생각을 가지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뭐 좀 냈다고 텔레비전에 사진 내고 신문에 큼직하게 이름 내고 하는 것은 복을 짓는 게 아닙니다. 우선 나부터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아집을 버리면 모든 게 편하고 화해가 저절로 됩니다. 아집이라는 것은 제가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는 것인데 수행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버려라 하는 것은 내가 잘 났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내가 조금 지고 들어가라는 것이지요. 무슨 일을 하든 사심이 없고 아집을 버리고 오로지 공심으로 추진하면 다 수긍하고 따르게 되어 화합이 저절로 됩니다”.
오종욱 기자 **********************
수산스님은? 평생 ‘이 뭣고’ 화두참구 마라난타 기념사업 추진 세수 80 이신 요즘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예불을 모시는 수산 스님은 참선과 계행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수행자다. 평소에도 가능한 눕지 않고자 한다는 스님은 만암 스님이 내려준‘이 뭣고’화두 참구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검소하기 그지 없는 수행자로 정평이 나 있다. 스님은 “어떤 선지식은 ‘이 뭣고’ 화두에다 온갖 말을 다 갖다 붙이는데 그게 다 병통을 만드는 원인이야. 육조 스님께서 ‘이 뭣고’ 앞에 갖다 붙인 말도 실제로 참구해 들어가는 데에는 조금도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야. 다만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만 끊이지 않게 하면 돼. 그래야만 옳게 직입을 할 수 있어. 그런 가운데에서 세상일이고 참선이고 하다보면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라고 의심하는 주인공마저 없어지고 알 수 없는 의심덩어리만 온 법계에 가득할 때가 올 거야. 그런 경계에 다다르면 대장부의 일을 마칠 때가 된거지. 그렇다고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니야. 미세한 번뇌의 뿌리까지 남김없이 녹인 후에야 구해탈(俱解脫)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고, 전법도생(傳法度生)을 할 수 있다”고 늘 강조하신다. 192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1938년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의 상좌인 법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봉하·만암 스님에게서 사미·비구계를 받고 수덕사, 정혜사, 다보사 선방에서 정진했다. 이후 고불총림 백양사와 부안 개암사, 완도 신흥사 등의 주지를 지냈고, 정광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스님은 불갑사 염화실에 주석하고 있으며, 백제불교의 뿌리를 찾는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광군 법성포를 중심으로 ‘마라난타 기념사업’ 추진에 헌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