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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청주] 열매를 맺으려면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탈출 20,1-17
† 복음 마태 13,18-23
★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 계약을
맺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삶의 지침으로 율법을 주시는데,
율법의 첫 부분이 십계명이다. 탈출기의 십계명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구해 내신 하느님에 대한 응답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이에게서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여러 해 전 밭에 콩을 심었습니다. 검은 비닐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에 세 알씩 넣으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콩을 심은 자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저 감자를 심은 자리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한 구멍에서 감자와 콩이 함께 나왔지만, 조금 지난 후에는
감자와 콩 가운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의 씨앗을 처음 받을 때는 반갑게 맞이합니다. 다 좋은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말씀이
싹이 터서 자랄 때가 되자 경쟁자가 나타났습니다. 감자가 땅 속에서
뿌리를 내려 자라려고 하니 콩이 살겠다고 양분을 빼앗아 가고, 콩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니 감자가 땅 속의 공간을 차지합니다. 말씀대로 이웃을
도우며 살려 하니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하고, 말씀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니 휴식을 양보하거나 일을 포기해야 합니다. 감자를 택할까요,
콩을 택할까요?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마음의 밭과 땅에 다른
씨앗이 자라고 있지나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기심과
명예욕, 분노와 원한에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면 그것들이 말씀의 씨앗을
말라 죽게 할 것입니다. 내 밭에 무엇을 기르고 있는지, 내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7월24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마태 13,23)
저희 수도원 앞에 정원 겸 텃밭이 있습니다.
우리 수사님 한분이 정성껏 텃밭을 일구십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농사가 잘 되느냐 안되느냐는 밭을 얼마나 기름지게
잘 만드냐에 달려 있슴을 깨닫게 됩니다.
길바닥에서 어떤 수확을 기대할 수 있고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울창한 밭에서 또 어떤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땅을 만드는 작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운동선수에게는 기초체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도록
어떻게 내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할까요?
저는 말씀과 성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맛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내 안에 받아모시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면
나의 마음의 밭은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낼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영적 성장이나 결실은
더디고 미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말씀과 성체로 시작하는 결실 풍부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마태 13,18-23
우리 삶에 말씀의 씨가 진정 뿌려졌습니다.
이미 말씀의 씨가 있기에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열매를 맺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열매를 맺는 여정을 더욱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씨앗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자신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은
말씀의 씨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는 우리자신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가장 좋은 땅임을 신뢰하게 해줍니다.
사랑받는 우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의 씨를 믿는 것에서 모든 길은 사랑으로 열려집니다.
말씀의 씨앗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기쁨과 희망을 깨닫는
좋은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내 영혼의 텃밭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내 영혼의 텃밭
형제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가뭄 끝 단비처럼 귀에 쏙쏙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이 얼마나 은혜롭던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큰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때로 그 말씀이 얼마나 감명 깊던지
몸과 마음 전체를 흔들어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인해 한
인간이 하느님께로 회심하기도 합니다. 그 말씀 한 마디가 한 사람 인생의
방향을 180도 전환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은총 체험은 우리 삶 안에서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지는 않습니다.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과 내 삶을 늘 연결시키며, 그 말씀을 우리 영혼의 소중한
양식으로 여기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 하느님 말씀으로
인한 우리 삶의 변화요 성장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마음은 크고 작은 자갈들로 가득 한 돌밭 같습니다. 이런
저런 근심걱정의 자갈들이 우리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의 크고 작은 불협화음들, 나를 향한 이웃의 시선에 대한 의식,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상처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우리 내면이 빼곡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릴 작은
틈조차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하느님 말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필기까지 하며 잘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돌아서면 어느새 내면에 숨어있던 의심과
불신의 잡초들, 가시덤불들이 들고 일어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경청하고 진지하게 숙고해서 말씀을 영혼의 피와 살이
되게 하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매일 우리 앞에 던져지는 하느님 말씀 앞에 중요한 관건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저 활자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고 우리 하루 삶의 필수 영양분이 되도록 하는
노력입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작업 한 가지는 우리 내면을 가꾸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잘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라보시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 영혼의 밭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언젠가 땀과 정성과 탄탄한 영농기술로 아름답게 꾸며진 이웃의 텃밭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저희 텃밭은 그야말로
형편없었습니다. 일궈놓은 이랑도 꾸불꾸불, 작물의 상태도 시들시들...
그에 비해 이웃의 텃밭은 질서정연했습니다. 작물들은 너무나 싱싱해서
바로 시장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분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매일 아침저녁 빼먹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밭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내 영혼의 밭을 살펴봅니다.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저런
걱정거리의 잡초로 가득합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상처의 돌로 가득한 돌밭입니다. 대대적인 제 마음의 텃밭 정리
작업을 시작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다음, 네이버, 구글, 야휴, 페이스 북, 트위터’와 같은 것들은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습니다. 내 손에 있는 스마트폰은
웬만한 정보는 쉽게 알려 줍니다. 영화표를 예약하기도 하고, 맛집을
검색하기도 하고, 궁금한 사람들의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합니다. 저도 하루
중에 상당한 시간을 인터넷의 바다에서 검색의 배를 타고 여행을 하곤
합니다. 검색 엔진의 장점이 있습니다. 빠르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마치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처럼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도움이 안 될 경우도 많습니다.
검색엔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독서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마치 오랜 시간 육수를
낸 음식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에 도움을 줍니다. 적어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만큼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검색엔진을 찾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검색엔진도 따를
수 없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우리는 80년 가까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빨리만 가려해서는
도달하기 먼 거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방법, KTX를 타고 가는 방법,
자가용으로 가는 방법, 자전거로 가는 방법, 걸어가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먼 길도 가깝게 느껴지고,
지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운 사람과 함께하면 아무리 가까운
길도 지겹고, 멀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에서도 갈증을 느끼지 않고,
약속의 땅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10계명입니다.
십계명에 사랑을 담을 수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많은 결실을 맺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자를 건 자르고 버릴 건 버려야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옷도 자유, 화장도 자유, 식사도 자유, 뭐든 자유 아닌 게 없습니다.
자신은 잡초에 묻혀 살고 넝쿨에 얽혀 있는데도 아직 자유롭다 보나요?
그래서 문제라는 걸 알아야지요. 군대생활엔 그런 자유 안 되거든요.
갈 길 모르고 조절이 안 되는데 무슨 자유? 다 제동장치가 필요합니다.
수도원 생활만이 아니라 종교인 회사원 진장인 다 길 따라 가야합니다.
마음을 꽃 심을 텃밭 준비로 자를 건 자르고 버릴 건 버려야 자유롭지요.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오 13,2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열매를 맺으려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마태13,18-23)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가13,8)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기름진 땅을 만들기 위해
2015년 나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사람들이 제게 어떻게 새벽 묵상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자주 묻습니다.
아마 2001년부터 너무 오랫동안 써왔기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사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한다는 등의 사목적 이유로
묵상 글을 쓰겠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2001년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를 벗어나서 사회 안에서 생활하다보니 기도에
집중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제가
신부인지 프로그래머인지에 대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었거든요.
사제로 살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매일 영성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벌써 15년째가 되었습니다. 지금 역시
이 묵상 글을 쓰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빠다킹’이라는 이름이 제법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묵상 글을 모아 책까지 출판하면서 누구는
제게 ‘작가’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십니다. 글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사제로 살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 뜻밖의 제 모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문득 그 당시에 간절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간절함이 또
다른 나를 만들 수가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간절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이끄시는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주 우리는 지금의 자리에서 주저앉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주저앉도록 만든 환경에 대해 불평불만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다양한
종류의 토양은 믿는 이들의 영혼이 가지가지임을 나타내고 있지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영혼이 있는 반면에,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땅의 모습을 갖춘 영혼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땅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소위 토양이 좋은 땅을 이야기하지요.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토양이 좋을
수도 있지만, 모든 땅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하는 박토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좋고 기름진 땅을 만들기 위해서
퇴비를 뿌리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로
상징되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영혼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옥토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는 모습, 그리고 이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모습. 바로 내 영혼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램프의 불빛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우리는 램프에 기름을 계속
넣어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의 메시지를 듣길 원한다면,
지속해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마더 테레사).
어제 복날이었지요. 그래서 특별히 복날음식을 먹었습니다.
연대책임
학창 시절에 연대책임이라는 것을 물어서 단체기합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의 잘못으로 책상
위에 올라가 걸상을 들고 있을 때도 있었고 매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히 억울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단체기합을 받게 했던 그 친구를 외면하거나 왕따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체기합의 주인공인 그 친구가 전혀 뉘우치지
않고, 똑같은 이유로 또다시 단체기합을 받게 되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항상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전혀 뉘우침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뻔뻔함은 아닐까요?
죄의 반복을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 죄를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들의 정성어린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때입니다.
성적으로만 줄을 세우려는 모습.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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