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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은 불교의 ‘생명’이다
‘계율은 불교의 생명’이라고들 말한다. 계행이 무너지면 불교는 생명을 잃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계행의 주체는 ‘사부대중’이어야 마땅하지만, 통상 승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불교의 위상은 승가의 위의를 반영한다. 승가의 행이 부처님의 행과 같을 때, 불교는 생동한다. 그래서 재가 불자들은 승가를,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삼보로 존숭하는 것이다.
자광 스님에게 지계는 ‘인천사(人天師)’ 즉 인간계와 천상계의 스승으로서 자격을 갖추는 일이다. 스님에게 지계바라밀은 부처님처럼 사는 일이다. 스님은 ‘계율은 부처님의 행동’이라고 말한다.
삭발 염의한 스님들이 왜 존재하겠어요. 중생 교화를 위해서예요.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기본자세가 바로 계율인데, 그걸 갖추지 않고 무슨 교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먼저 자신부터 청정하게 가꾸어서 인천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계율은 바로 부처님의 행동입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4차 대담에서(2023.01.04)
‘계율은 부처님의 행동이다[律是佛行]’. 자광 스님의 계율관이라 할 이 말은, 스님의 은사이신 학월 경산(鶴月京山, 1917-1979) 대종사께서 입적 며칠 전 펴낸 『삼처전심』이라는 책의 첫 장인 「불교란 무엇인가」의 서두에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禪是佛心], 교는 부처님의 말씀[敎是佛語]”이라는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서 대구(對句)처럼 만들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이자랑, 〈2022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학술세미나〉, ‘학월 경산의 수행과 지계’, 17 참조)
경산 대종사는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함으로써 마무리된 ‘정화불사’의 혼란기에 비구 측 대표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종단 통합 전후에 걸쳐 네 번이나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맡았다. 6년 동안 무문관 수행을 한 선승이기도 했던 경산 대종사의 이(理)와 사(事)의 경계를 허무는 행보는, 청정 율사로서 확고한 계행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계율이 곧 생명이다.”,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승려는 출가 득도자가 아니며, 파계승은 속인보다 못하다.”, “교단의 생명은 계율이 살아있을 때만 가능하다.” 경산 대종사가 지계를 강조하며 한 말들이다.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에서 “계행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고 지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더 위로 오르면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재상의 자리에 오르라는 왕명을 목숨 걸고 거역한 자장 율사를 만날 수 있다.(『삼국유사』, 「의해편」)
율사로서의 단아한 풍모를 지닌 은사 경산 스님(오른쪽에서 세 번째)
경산 대종사가 살았던 일제강점기와 정화불사 무렵 한국불교 교단의 계행은, 조선왕조의 극심한 억불 시기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한 예로, 1925년에 전국의 승려 7,000여 명 가운데 3,000여 명이 대처승이었고, 광복 무렵에는 90%가 대처승이었다. 일본 유학승들이 대처식육을 하는 일본불교 풍토에 젖었고, 1926년 조선총독부에서 본말사법을 바꾸어 대처승도 본말사의 주지를 할 수 있게 한 것이 계행을 바닥에 떨어지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화불사는 단순히 ‘대처 대 비구’가 종권을 두고 다툰 것만이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기 위한 결사이기도 했다. 그 격동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온 경산 대종사로서는, 계행이 무너지면 불교가 무너진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경산 대종사의 지계 정신은 상좌인 자광 스님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니, 스며들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한 집안의 가풍이라는 것은 공기와 같은 것. 호흡지간에 핏속으로 흘러들어 생각 이전의 마음결로 새겨졌을 터. 자광 스님에게 계행이란, 애써 지켜야 할 일이 아니라 숨 쉬는 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행자 시절 자광 스님은 은사 스님으로부터 서당에서 하듯이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우리말 번역본도 없던 시절이었다. 새벽 예불이 끝난 후 아침 공양 전까지, 은사 스님이 먼저 소리 내어 한 줄 읽은 다음 자광 스님이 따라 읽고 나면 뜻을 새겨 주었다. 어떤 애틋한 부자(父子)도 이렇게 하루를 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시절 은사 스님은 정화운동의 한가운데서 총무원 교무부장 소임을 맡고 있었다. 두 스님은, 곧 한낮에 벌어질 갈등 상황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새벽을 맞이했다. 그렇게 10개월에 걸쳐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이듬해(1960. 음. 02.08.) 봄 조계사 대웅전에서 은사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자광 스님은 서릿발 같은 경책으로 계율을 배우고 익히지 않았다. 은사 스님은 상좌들에게도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이런 은사 스님의 삶을 통해서 수행자가 사는 법을 일상적 삶의 질서로 받아들인 것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생각 없이도 지계를 하는, 불방일(不放逸)의 일상. 이른바 ‘경산 가풍(家風)’이다. 이러한 스님의 계행은 25년 동안 군승으로 살면서도 청정 비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한 힘이 되었다.
자광 스님은 1995년 두 번째 삭발식을 했다. 군승으로 포교 일선에 선 지 25년 만에 군복을 벗고 납자의 삶으로 환귀본처(還歸本處)한 것이다. 비록 군복을 입었으나 시종일관 비구였으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종단에서 적격 여부를 확인하는 형식적인 절차만 거치면 되었고, 거리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스님은 군승으로서 보낸 지난 시간을 반조하며 수행자로서의 스스로를 살피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은사 스님이 생존해 계셨다면 당연히 은사 스님께서 다시 삭발을 해 주셨겠지만 이미 열반하신 지 오래였다. 스님은 이런 뜻을 종단에 전하고 종단의 대표인 총무원장 스님이 삭발해 줄 것을 청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니 어떤 공론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며칠이 지나 총무원에서 기별이 왔다. 다음 날 새벽, 당시 총무원장의 거처였던 영화사로 갔다. 그날 손수 삭도(削刀)를 드신 분은 월주 스님(1935-2021)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월주 스님도 종단 개혁의 진통을 막 겪은 다음이었다.
자광 스님에게 계율은 ‘부처님의 행동’이다. 이 세상을 가장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