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5~7)
히브리서 10장 5~7절까지는 시편 40장 7~9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로 번역된 '튀시안 카이 프로스포란
우크 에텔레사스'(thysian kai prosphoran uk ethellesas;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에서 서술어 '에텔레사스'(ethellesas; you desired)라는
2인칭 단수 부정(不定) 과거에 '우크'(uk; not)가 붙었다.
구약 성경에는 본문과 유사한 표현들이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빌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임의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0) 라고 지적하였다.
제사 제도를 제정하고 허락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었다. 그 제사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범죄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무수한 제사를 드리면서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1,11~13)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 자체를 목적으로 착각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제사드리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서간의 수신자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을 버리고, 구약의 제사 제도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소마 데 카테르티소 모이'
(soma de katertiso moi; but a body you prepared for me)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오즈나임 카리타 리'(oznaim karitha li)로 표기되어 있고,
새 성경 시편 40장 7절에는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본래 '순종하도록
했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 나왔다.
즉 유대인들은 종을 부릴 때 6년 동안만 일하게 하고, 일곱째 해에는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했다(신명15,12).
그러나 종이 주인을 평생토록 떠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를 밝히게 되면, 주인은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평생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다(신명15,16.17).
따라서 종이 자발적으로 자기 귀를 뚫도록 주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가 평생 기쁨으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기겠다는 표시였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뚫으셨습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70인역(LXX)의 경우를 살펴보면,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주님의 뜻을 기꺼이 복종하겠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말이 '귀를 열어 주셨다'라는 표현과 같다는 견해를 가진다.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본문을 설명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도록
주님께서 그 수단으로써 한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가 될 것이다.
한편, '마련해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카테르티소'(katertiso)는 2인칭 단수 동사로서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도록 새 계약의 제물,
곧 '몸'을 준비하신 분은 구속 사업의 경륜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느님이신 것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제물'에 해당하는 '홀로카우토마타'(hollokautomata)는 '전부'를 뜻하는
'홀로스'(holls)와 '불사름'을 뜻하는 '카우토스'(kautos)의 합성어인 '홀로카우토마'
(hollokautoma)의 복수형으로서 '모두 태워 드리는 번제물'을 의미한다.
이 제사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 1장 8절, 9절, 12절, 13절 등에 잘 나와 있다.
또한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유도케사스'(uk eudokesas;
you were not pleased)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 또는 '동의하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 나타내시는 반응이다. 구약의 제사는 모두
동물을 제물삼아 드린 제사였다. 이 제사들로는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종교 혹은 예배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인데, 구약의
제사들은 한 사람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다(히브10,1).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바로 그 하느님께서 제사
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제사로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제사의 한계성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완전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구약 제사와 다른 그 무엇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엄중한 죄의 결과를 경계하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측면에서, 그리고 장차 올 새 계약(신약)에 대한 일시적인 예표를 삼고자 하는
측면에서 제사 제도를 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순종을 원하셨고
(1사무15,22.23; 시편51,18.19), 백성들이 그 제사 제도를 통해 죄에서 떠나는 것
(이사1,11~17; 호세6,6)과 장차 올 온전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두루마리에'
'두루마리'로 번역된 '엔 케팔리디 비블리우'(en kephallidi bibliu;in the volume
of the book; in the scroll; the roll of book)는 '두루마리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 언급된 두루마리 책은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을 기록한 신명기 17장 14~20절,
또는 순종에 대해 기록한 신명기 28~30장을 지칭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이 견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점에
비추어 볼때(요한5,39),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사실 몇몇 성경 구절들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책, 어떤 장이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에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는 구원사를
전개해 가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필리2,8).
따라서 '이루러'로 번역된 '포이에사이'(poiesai; to do)는 '포이에오'(poieo)의
부정사이다.
'이루다','행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포이에오'(poieo) 동사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해당하는 '텔레마'(thellema;will)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갖는 관계의 일면을 본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셨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하신 내용 가운데도
그분의 이러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마태2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