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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실 리순신을 몰랐다. 입학시험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이 뚫어지게 나를 보며 “자네는 충무공 리순신 장군을 아는가?”라는 질문에 “모릅니다”라고 했다. “세계적 영웅 충무공을 모르면서 해군장교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이 있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혹시 불합격될까봐 조바심했지만 1968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에 합격통지서를 받아 무척 기뻐했다.
1969년 1월 19일부터 신분전환의 특별훈련 6주 동안에 두 시간 조성도 교수로부터 『충무공 정신』 교육을 받은 것이 처음으로 충무공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고, 1학년 1학기에 감동어린 그 강의에 흠뻑 젖기도 했다. 그리고는 해군소위로 임관하여서는 실무생활이 바빠 충무공을 사실 잊은 것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5년이 훌쩍 지나 1978년 여름에 해군대학 지휘참모과정 3개월 동안 다른 과목을 제쳐두고 충무공 해전사를 육하원칙에 따라 정리해봤더니 대학노트 7권에 이르렀다.
이때 노산 리은상의 『국역 리충무공전서』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런 선학자의 덕분에 충무공을 쉽게 다가가게 되었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전투상황에서 전략과 전술의 원칙과 운용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의문 나는 점들을 지금까지도 보충해나가고 있다.
그런 『리충무공전서』는 1795년에 정조대왕 때에 리순신의 유고와 관계 문건을 망라해 규장각 검서 류득공(柳得恭)과 문신 윤행임(尹行恁) 등의 감독·지휘 아래 편집하여 간행된 충무공 리순신의 특집인데, 요즘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적혀 있다.
『리충무공전서』의 구성은 윤음(綸音)과 어제신도비명(御製神道碑銘)에 이어, 권수(卷首)의 첫머리에는 리순신이 임진왜란 때 활약할 당시의 교유(敎諭) 17편, 죽은 뒤에 내린 역대의 사제문(賜祭文) 12편, 깃발(旗)·곡나팔(曲喇叭)·거북선(龜船) 등의 도설, 그리고 리순신의 세보와 연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2건의 귀선도(龜船圖)는 거북선의 크기 및 모형을 알려주는 전형이 되고 있다. 권1은 시 5편, 잡저 10편, 권2∼4는 장계 65편, 권5∼8은 난중일기, 권 9∼12는 부록으로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을 비롯해 리순신의 비문·기문(記文)·제문 및 송명(頌銘) 등을 한데 모았다. 권13·14는 기실(紀實) 상·하로 국내외 전적에서 리순신에 관한 기록을 뽑아 모은 것이다. 끝에는 왕명으로 내각(內閣)에서 편집하고 내탕전(內帑錢)과 어영전(御營錢)을 내려 그 경비를 충당한 내역 및 전서를 보내 수장한 곳을 적은 간기(刊記)가 있다.
1918년에 최남선(崔南善)이 구두점을 찍고 신문관(新文館)에서 2책으로 출간한 것이 있다. 이외에 1931년에 서장석(徐長錫) 등이 권15·16을 추가하여 6책으로 중간한 바 있다.
나는 이 『리충무공전서』를 읽어보면서 답습의 과정이지만, 노산의 번역문을 중심으로 먼저 난중일기를 정독하고, 전투보고서인 장계를 살펴보았다. 감동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싸움마다 다 이긴 비결이 뭔가 머리에 빙빙 돌았다.
번역된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1951년에 설의식이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소속으로 펴낸 『민족의 태양』이 있는데, 비록 일부 발췌 번역이기는 했지만, 최초의 한글 『난중일기』 번역본이라 할 수 있다. 1955년에 북한에서 홍기문이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료총간』 제6집 속에는 「난중일기초」와 「임진장초」』가 실려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리충무공전서』 속의 『난중일기』 전체를 처음으로 한글로 옮겼고, 우리나라에서는 리은상이 1930년대에 투옥되었을 적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1960년에 『국역 주해 리충무공전서』란 이름으로 『리충무공전서』를 번역했는데 그 속에 『난중일기』가 있으며, 1968년에야 리은상에 의해 충무공의 ‘친필일기’까지 반영한 진짜 최초의 한글 번역본 『난중일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뒤로는 한문을 접한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씩 번역했을 정도로 번역문을 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읽으면 읽어갈수록 의문과 의심이 하나씩 더 생겨났다.
그 첫째는 노산이 그 서문에서 “나는 일찍 충무공의 이름 앞에 ‘민족의 태양이요 역사의 면류관’이라는 말로 최고의 예찬사를 바쳐온 것이다.”라고 밝혀놓은 것에 대하여 충무공이 과연 얼마나 훌륭했으면 이런 말을 붙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충무공은 싸움마다 다 이겼고,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어도 백의종군이라는 족쇄를 차고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도 명량대첩이라는 해전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해군장교로서 북한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비법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고, 충무공을 연구하는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둘째는 「난중일기」의 번역에서 맨 첫 번에 나오는 내용인데, 임진년 1월 1일에 “긴 편전(片箭)”이란 말이 있어 이것이 궁금하여 원문을 보니 “長片箭”이었다. ‘長’이 ‘길다’의 뜻이니 옳은 번역처럼 보이지만, 사실 ‘편전’은 1자 2치로서 45㎝쯤 되는 짧은 애기살이니 이것이 ‘길’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3자 5치로서 90㎝ 안팎의 “장전(長箭)”이 돼버리므로, “긴 편전”이란 말은 “장전과 편전”이라고 번역해야 옳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사서삼경을 번역했고, 역시 『난중일기』를 번역한 서강대 교수 이석호는 “긴 화살”이라고 했다가 “긴 편전”이라고도 하였기에 원문과는 다른 낱말의 번역이라 1997년에 직접 전화로 확인한 적이 있다. 그분의 말씀이 한문으로 “長片箭, 즉 길 장, 조각 편, 화살 전이니 그 글자대로 해석한 것이예요.”라고 하기에 “그러면 그런 긴 편전을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더니, “나는 한학자요, 글자대로 번역하면 실무자들이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라고 하고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나는 무척 실망했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못 번역한 것에 대한 반성이나 각성의 여지가 없음에 대한 실망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렇게 잘못 번역된 “긴 편전”과 “긴 화살”이 한글로만 각각으로 적혀 있으면 충무공의 본디 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보거나 생각이나 해볼까? 그냥 그렇겠거니 하며 모르고 지나갈 뿐이리라 생각하니 “눈을 밟으며 들판 걸어갈 적에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발자취는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고 한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1992년에 해군대학 충무공정신 교관을 맡았을 적에 『난중일기』을 번역을 시도했다. 초서체 원본을 구해보기 위하여 아산 현충사까지 갔으나, 영인본이 있다기에 구하여 번역문과 대조해가면서 확인했더니, 노산은 9곳의 64쪽에 이르는 8843자가 번역에 빠져 있었음에도 “난중일기”에 “완역”이란 말을 붙였다. 이 빠진 부분에는 전투보고서에 해당되는 장계(狀啓)에 실린 것들이 많이 있고,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많이 있었는데, 그런 글 속에 “몸이 불편하여 아침내 누워 앓았다”에서부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라는 대목에서는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내가 만약 이런 경우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그 무엇이 머리를 스쳤다. 조금 뒤에 나오는 글이 “지난번 접전할 적에 분투하였어도 조심하지 않고 시석을 무릅쓰고 먼저 나갔다가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심합니다.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뼈까지 깊이 다쳐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습니다.”라는 글로 내가 번역하였는데, 참으로 흥분되었다. 그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아마도 두 번째 출동에서 첫날인 1592년 5월 28일에 사천해전이 있었는데 그때의 일이라 본다. 글은 매우 간략하게 적혀 있지만, 그 분위기가 무척 긴장되고 급박한 상황이었음이 느껴졌다. 죽을 만큼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히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을 만큼 다친 자리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는 말에서는 나의 온몸이 전율을 일으키며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마치 내가 해전을 지휘하다가 총탄을 맞고 넘어져 다친 곳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러한 글을 놓치지 않고 몽땅 1994년에 처음으로 빠짐없이 번역했고, 2012년에는 누구나 쉽게 찾아 읽어볼 수 있도록 전자책으로 펴냈으니, 명실상부하게 처음으로 『완역 난중일기』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몇몇 사람의 한문에 관한 한 대가라는 분들과의 대화와 열띤 토론이 있었다.
그 셋째는 『리충무공전서』의 권수 도설에서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라는 글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파악하기에는 어렵기만 하여 아직까지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나은 나의 지식과 해군생할의 경험으로 『원형 거북선과 학익진의 비밀』이란 연구서를 펴내기도 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거북선 복원은 1969년에 동아일보에서 1:6의 축척으로 제작하여 아산 현충사에 기증한 것을 비롯하여, 1979년에 해군사관학교에서 실물 크기의 거북선을 처음 만들었는데 이를 1999년에 남해 노량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서울 한강 거북선, 여수 거북선, 삼천포 거북선 등등 복원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고, 2022년에 해군에서 다시 복원하였지만, 이들 모두 한결같이 실제 운용에서는 의문을 사람마다 가지는 부분이 있다. 특히 배의 “돛대”는 “마스트(Mast)”이니 배의 중심선에 세워져 있으며, 이것을 쉽게 눕히거나 세우는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보니 “龜船布帆竪眠”(귀선포범수면)이다. “포범(布帆)”은 ‘베로 만들어진 돛’이다. ‘돛’은 ‘Sail’이지 ‘Mast’가 아니다. 마스트는 쉽게 눕히고 세우는 구조물이 아니다. 또 ‘竪’(수)는 ‘서다/세우다’라기보다도 ‘옷을 입다’의 뜻에서 ‘돛을 올리다’로, ‘眠’(면)은 ‘누이다’라기보다도 ‘누워서 쉬다/잠자다’의 뜻에서 ‘돛을 내리다’로 해석해야 맞다. 그렇다면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가 아니라, “돛을 올리고 내리기”라고 해야 맞다. 해군에서 청춘을 다 보낸 나의 경험으로 배를 타고 대포를 쏘며 고속정 편대를 지휘한 것이 거북선의 운용에 관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더구나 해군에서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을 조직하여 해군사관학교에 사무실을 두고 거북선 발굴에 나섰을 때 1993년에 처음으로 전통무기 천자·지자·현자·황자·별황자 총통과 불랑기포 및 신기전까지 복원하여 발사시험을 거쳐 시범을 보인 것은 거북선의 2층 구조를 3층 구조로 바꿔야 한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그것은 격군, 곧 노꾼과 총통을 쏘는 포수, 곧 포요원이 같은 공간에서 활동하면 총통을 쏠 때는 노을 젓지 못하고, 노를 저을 때는 총통을 쏘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분리하여 3층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충무공이 처음 거북선을 만들 때에 판옥선에 덮개를 씌워 쇠송곳을 꽂은 것이니, 판옥선의 구조가 그 기본이 되며, 판옥선에는 요즘의 함교[Bridge]에 해당되는 장대(將臺)가 있는 그 바닥이 맨 밑바닥층에서부터 3층이 되는 0-2 갑판인데, 그 뱃전에는 라이프라인(Lifeline)이 있는 부분에 눕혔다 세웠다 하는 여장(女牆)이 있으며, 이 여장의 윗부분에서부터 덮개가 씌워진 것이 거북등이라는 모양새가 되므로, 판옥선처럼 장대까지 있어야 배를 지휘할 수 있는 공간이 있게 된다. 지금 복원된 이름의 거북선은 한결같이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물론 『리충무공전서』의 도설에도 돛대와 장대가 그려져 있지 않으니, 현실성과 실효성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부분이 보완되어 미르머리[龍頭]에서 현자대포로 철환을 쏠 수 있는 구조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이 다시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그래서 충무공이 왜 거북선 만들기에 매달렸을까? 그 머리에는 미르머리[龍頭]를 만들었으니 Dragon이라 할 만한데, 굳이 거북등[龜背]에 방점을 찍어 붙인 이름의 이유는 무엇일까? 거북이란 파충류는 전통적으로 ‘오래 산다’는 장수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상대방, 곧 적군으로 하여금 ‘거북하게 하다’, 말하자면 불편하고도 불안한 생각이 들도록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龜船”(귀선)이라고도 하고 “龜艦”(귀함)이라고도 하는 이름에서 후자는 다름 아닌 ‘거북함’이 되는 것이니, 왜적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무척이나 ‘거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왜놈들은 이를 “盲船”(맹선), 곧 “메구라부네(めくらぶね)”라 하면서, 낮춰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은 눈치를 많이 보지만, 거북선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구 들이닥치며 돌파하는 모습에 두려웠을 것이며, 충무공은 이러한 심리를 아낌없이 활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충무공은 전투결과보고서에다 “비록 왜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쳐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습니다.”라고 거북선의 함포전의 비밀을 알려줬던 것이다. 왜적들은 당시에 상대방 배에 올라가서 칼싸움하는 백병전이었으니, 유효사거리가 200m쯤 되는 조총에 조선 사람들은 기가 죽었을지라도, 충무공 함대는 최대사거리 1㎞가 바로 유효사거리가 되는 대형총통으로 학익진을 벌여서 아군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대포를 마구 쏘아 적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세계에서도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전투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척 감탄했고,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본받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 넷째는 충무공 함대의 첫 번째의 출동으로 옥포해전에 이은 합포해전에 관한 충무공함대의 이동로의 문제이다. 임진년 5월 4일 새벽에 전라좌수영에서 출발하여 6일 오전 8시에 경상우수사 원균을 한산섬에서 만나고,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서 함께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일제히 출발하여 왜적선이 있다는 천성·가덕으로 가다가 12:00쯤에 옥포에 왜적선이 있다는 우척후장의 신기전 발사의 신호를 받고는 “침착하라!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태산처럼 하라! 적에게 쏘기만 하라!”라고 군사들을 다독이며 들어가 옥포해전을 하여 첫 승리를 통쾌하게 거두었다. 여기서 충무공 함대의 이동을 보면, 일본의 아리마 세이호(有馬成甫)는 견내량을 지나 거제도 북쪽을 지나간 것으로 해전도를 그렸지만, 노산 리은상은 거제도 남쪽 바다를 지나간 그림을 그렸다. 이 두 그림은 충무공의 함대가 거제도 북방으로냐? 남방으로냐? 하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단 말인가? 누구나 먼저 읽게 된 것에 동의하거나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확히 판단한 문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옥포해전을 끝내자 “날이 저물어가므로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군졸들에게 나무하고 물을 긷게 하여 밤을 지냈다.”라는 “退駐永登”(퇴주영등)이란 말이다. 이 “退”는 지나갔던 곳으로 다시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글자 하나로써도 충무공 함대는 이미 거제도 북쪽으로 지나와서 옥포해전을 끝내고 되돌아 나와 지나왔던 길에 있는 영등포에서 밤을 지내려 했던 것이므로, 리은상의 “옥포해전도”는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옥포해전에 이은 합포해전이 있었다. 바로 이 ‘합포’가 어디냐? 하는 이견이 있는데 대개 마산쪽 사람들은 마산 산호동 근처를 가리키고, 진해쪽 사람들은 진해 합개 또는 학개라고 한다. 후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데, 합포해전 터가 진해라고 밝힌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동안 리은상의 글에서 벗어나지 않은 때문이다. 이 합포해전의 충무공함대의 이동을 보면 7일 그날 옥포해전이 있은 뒤의 일이고, 아주 잠깐 영등포에 있을 때 “오후 네시쯤 멀지 않은 바다에 왜적선 5척이 지나간다.”라는 첩보를 받고, 충무공이 함대를 거느리고 “따라 쫓아가서 웅천땅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 가버려” 모두 다 쳐부수고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이 “熊川地合浦”(웅천지 합포)라는 말과, “不遠海中”(불원해중)에서 합포의 해전터를 찾아야 한다. 이때의 노를 젓는 배의 이동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물때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합포해전의 ‘합포’를 마산쪽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를 애써 무시하는 것 같다. 먼저 거리를 보면, 영등포라는 구영리에서 마산 합포라는 산호동까지는 거리가 13마일로서 24㎞이며, 웅천땅 합개/학개까지는 4마일로서 7.4㎞이다. 이미 후자가 ‘멀지 않는 곳’이라는 말에 부합한다. 판옥선의 속력은 최대 3노트, 보통 2노트인데, 이동속도를 2노트로 보면, 마산쪽까지는 6.5시간이 걸리고, 진해쪽까지는 2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조류의 유속을 생각하면 그 시각에는 썰물이 되어 적어도 1노트 안팎의 역조를 받게 되어 그 이동시간은 배가 걸리게 된다.
나는 이러한 바다 생활의 경험을 임진왜란 해전에 적용하여 해전을 분석해왔다. 특히 합포해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1990년 진해항만방어전대장을 하면서 진해만을 지키는 임무가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때 제1 수역내로 몰래 들어와 불법조업하는 어선을 붙잡는 일이 무척 성가시고도 힘들었는데, 그때 경비정이 불법어선을 추적한 곳이 “합포”라는 곳이었다. 나도 합포를 그때까지만 해도 마산인 줄로 알았기에 경비정장의 말을 듣고 마산 산호동까지 확인할 뻔했다. 그러자 경비정장이 다급하게 전화로 말했는데, “합포는 마산이 아니고 수치 바로 옆입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해도에서 찾아보니 그런 지명이 없어 육도를 찾아보았더니, 그 지명이 있어 승용차로 바로 가서 확인한 적이 있고, 이로써 뒷날에 논문으로 합포해전을 다루면서 그 위치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처음 각인된 인식이 평생을 좌우하며, 그로 말미암아 오류에 익숙한 상식에 젖어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버릇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식의 순수성이 잘못된 각인으로 말미암아 그 본질을 압도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본보기가 옥포해전의 이동로와 합포해전의 위치에 대한 상식의 현주소라 생각한다. 언제까지 갈 것인가? 잘못 해석한 글월 때문에 순진한 독자들이 오류에 젖는 불행을 겪게 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시 한번 서산대사의 들판의 눈길을 밟는 모습이 생각난다.
그 다섯째는 「선무 1등 공신으로 책정하는 교서」에 첫마디가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라는 말인데, 쭉 읽어보니 선조 임금에 충무공에게 잘못한 사과문이란 느낌이 들었다. 일일이 자신의 잘못으로 충무공이 여러 불이익을 받았다는 대목이 눈에 보였다. 임금이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랬을까? 충무공의 죽음까지도 “그대를 통곡하는 눈물은 마땅히 저승에까지 사무칠 것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울분이 북받쳐왔다. 선조 임금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에이 미친놈!”이라며 투덜대며, 그런 훌륭한 장군을 그토록 못살게 굴었는가 하는 핀잔이라 할까. 그러면서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제문을 보고서는 그래도 한 가닥의 양심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을 두드리며 눈물을 훔친 적이 있다.
그래서 똑같은 글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보물로 지정된 부물 제1564호 「선무공신 교서」를 보았다. 그 첫 줄에 직함이 적혀 있는데 실제로 직위를 수행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는 적혀 있지만, 이어서 적여 있어야 될 “겸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는 빠져 있다. 이것은 비록 겸직이지만,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가장 중요한 직위인데, 이것이 빠진 것에 대해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 때문에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이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 누구에게서도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들어보지 못했다. 쭉 더 읽으면서 “백의종군을 따르게 했다”는 한문이 『리충무공전서』에서는 “從白衣”, 「선무공신교서」에서는 “縱白衣”였다. 한글로 소리는 똑같이 [종백의]이지만, ‘從’과 ‘縱’은 그 뜻이 ‘멋대로 하다’의 뜻으로는 서로 바꾸어 쓰기도 하지만, ‘따르다/종사하다’의 뜻으로는 바꾸어 쓰지 않으며, 반드시 ‘從’으로 쓴다. 이 글자에서 보면 「선무공신교서」가 신뢰성이 더 떨어진다.
게다가 이보다 먼저 첫 출전을 하면서 실시했던 조치로서 “남쪽 고을의 지휘관을 빨리 달려오게 했다.”라는 말에서 ‘남쪽 고을’의 원문이 “南郡”이라 그냥 넘어갔지만, 「선무공신교서」에서는 그 자리의 글자가 “常郡”(상군)이다. 이 ‘常’자에 ‘남쪽’이라는 뜻이 있는가? 그 어떤 옥편이나 사전에도 없다. 그런데 「선무공신교서」에 왜 이러한 글자가 들어있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그 교서 전체까지 나로서는 믿음에 이상현상이 생겨났다. 내자가 내게 붙여준 별명이지만, 바로 의심병이다.
또 충무공이 “함대를 독려하여 무릅쓰고 들어가다”라는 말에서 원문이 “罙入”인데, 「선무공신교서」에는 글자 모양이 비슷한, 같은 소리의 [미입] “冞入”이다. 그 모양이 ‘木’과 ‘米’자의 차이인데, 같은 소리 [미]의 ‘罙’와 ‘冞’의 뜻을 보면, 후자 ‘冞’는 ‘깊숙이 들어가다’이고, 전자 ‘罙’는 ‘무릅쓰고 들어가다’이다. 어느 것으로 쓰더라도 뜻이야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 ‘罙’가 더 의지가 강하고 당차며 적극적 행동이다. 그래서 『리충무공전서』의 글에 오히려 더 신뢰성이 갔으며, 비슷한 글자이지만 그 의미가 매우 다르게 느껴짐을 보면서 글을 쓸 때에는 글자 하나라도 똑바로 밝혀서 똑바로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나머지 글자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읽어가면서 보니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포함한 특전이 “먼 후손에게 미치도록 한다”는 말의 ‘먼 후손’의 글자 “苗裔”[묘예]에 대해 별다른 느낌 없이 지나갔으나, 「선무공신교서」에는 뜬금없이 “萌裔”[맹예]였다. ‘苗’[묘]와 ‘萌’[맹]은 식물의 ‘싹’이란 뜻에서는 같이 쓸 수 있지만, 사람에 빗대어 쓰는 말로는 ‘苗’자는 ‘후손·후예’의 뜻이 있고, ‘萌’자는 ‘백성·서민’을 뜻으로서 그 의미가 다르게 쓰이며, 이 ‘萌’자로서 ‘후손’의 뜻으로는 쓰인 사례가 아직은 없으니, 이 또한 「선무공신교서」에 대한 실망이 겹쳐 들기도 하였다. 이 「선무공신교서」가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2008년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원형대로 복원된 것인데, 이때 이러한 글자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관계관들이 이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그대로 둔 것인지, 모르고 지나갔는지조차 바다를 낀 진해 땅끝에 농사짓고 시를 읊으며 사는 촌부로서는 궁금은 하지만 알 길이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충무공이 선조 임금으로부터 얼마만큼의 특전 내지 특혜를 받았을까? 하는 것에 이르자, 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무공신 3등에게는 맨 먼저 경호원에 해당하는 “반당(伴倘)이 4명”과 관노비에 해당하는 “구사(丘史) 2명”이 나오는데, 「선무공신 교서」에는 그 1등에게 그런 내용이 실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3등에게 준 특전이 1등에게는 왜 없을까? 이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런데 『선조실록』 권180 선조 37년(1604) 10월 29일(을해)에 보면, 선무공신 교서를 내려줄 때에 대중 앞에서 낭독한 별도의 교서라는 「선독별교서(宣讀別敎書)」가 있는데 거기에는 “賜伴倘十人 奴婢十三口 丘史七名 田一百五十結 銀子十兩 內廐馬一匹”라고 하여 “반당 10명”과 “구사 7명”도 함께 적혀 있다. 그렇다면 「선무공신 교서」에는 1등에게도 숫자가 다를 뿐 3등과 다름없이 충무공에게 내려져 적혀 있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선무공신 교서」는 처음부터 절차에 따라 시간을 두고 충무공의 공적을 따지며 그 공적에 따른 특전을 내려준 증거문서여야 함에도, 뭔가 시간에 쫓겨 급조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 「선무공신 교서」가 시간에 쫓겨 작성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를 차근차근 다음날 따져야겠다. 다음날 더 밝히고 싶은 것은 덕수 이씨의 족보에 하사품에 들어 있는 “田一百五十結”, 곧 경작지 밭 150결이 어느 곳 어디의 땅이라고 적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없겠지만, 1결이 축구장 하나 크기라면 그 축구장이 150개나 되는 넓이의 땅은 무척 넓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다.
그 여섯섯째는 「전라좌수영대첩비」에 대한 것이다. 이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리충무공전서』을 읽고서부터인데 정작 우리는 그냥 「좌수영대첩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노산 리은상의 1960년에 간행된 『국역 리충무공전서』에 번역문에는 한자로 「전라좌수영대첩비」라고 해놓고 설명문의 사진 옆에는 ‘전라’가 빠진 「좌수영대첩비」라고 했고, 미주의 【참고】란에는 “이 좌수영대첩비는 실상 그 이름이 「이공수군대첩비」요 충무공의 본영이 좌수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비석을 세우면서 편의상 이름한 것뿐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우리가 잘 모르고 지낸 것은 우선 비석을 보더라도 그 한문을 읽어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노산의 설명이 있으면 그것이 각인되어 상식으로 되버려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버릇이 있다. 노산이 소개한 「이공수군대첩비」라는 이름도 정작 그 비문을 보면 빗머리에 전자(篆字)로 새겨진 「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고 되어 있어 “통제”라는 글자가 더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인지 문화재청에서 2010년 12월 27일에 이름을 고쳐 부르도록 팻말을 붙여 “「좌수영대첩비」에서 「여수통제리공수군대첩비」로 명칭 변경”이라고 하여 또 다른 이름이 생겨났다. 그러니 하나의 비석에 「전라좌수영대첩비」「좌수영대첩비」「통제리공수군대첩비」「여수통제리공수군대첩비」라고 4개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총독부에서 파괴목록에까지 넣었던 것으로서 1919년에 발행한 『조선금석총람』에 실린 것을 보면 247번째에 “麗水 李舜臣左水營大捷碑”(여수 리순신좌수영대첩비)라고 했으니 모두 5개의 이름이다.
그 이름이야 어떻게 불리든 중요한 한가지는, 내 생각으로는 매우 심각한 것이지만, 비문의 첫줄 맨 아래쪽에 “諡忠武”(시충무)라고 적혀 있다. 시호가 충무라는 것인데 이 『리충무공전서』 권10 「전라좌수영대첩비」에는 없는 것이지만, 빗머리에 「통제리공수군대첩비」라고 새겨진 것은 오성 리항복이 1615년(만력43)에 쓴 것을 1620년(광해군12)에 세운 것이니, 시호 교지를 내려서 받은 때가 1643년(인조21)이다. 그러면 공식 시호를 받은 때보다 28년 전에 이미 시호 충무를 사용했다는 말이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를 알고 싶어 1993년 여름에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조성도 교수께 찾아가 이 사실을 묻고는 답변을 기다렸지만, 세월이 흘러 끝내 말없이 하늘로 가버리셨다. 이러한 일이 벌써 30년도 더 지났으니, 어저면 잊고 지냈다가 2024년 8월 27일(화) 저녁에 리순신리더십 국제센터 한산관에서 지역유산 연구원 이수경 박사의 특강 <400년 시간을 잇다, 리순신 문화유산>이 있었는데, 그때 이 비석에 새겨진 글자 ‘시호 충무’에 대해 의문을 말했을 뿐 다른 해명은 없었다. 그래서 이틀이 지나서 메시지를 보내어 그 의문을 풀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분도 나만큼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지만, 솔직히 그 사람인들 뾰족한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답변이 없다. 시호를 내려준 시기보다 28년 전에 이미 그 시호를 사용했다는 것이 되는 사실을 그 비석을 보고서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있을까? 읽어내기라도 할까? 설사 한문을 읽었다고 해도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을 누가 밝힐 수 있을까? 이름이 5가지나 되는 비석도 특이하지만, 이러한 의문에 빠지니 무척 답답하다.
나는 1978년 이래 반세기가 되도록 이렇게 『리충무공전서』를 옆에 두고 읽고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도리어 의심병만 늘어나는 것 같고, 존경하는 세계적 영웅에 대해 마치 흠집을 내는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불편하다. 그래도 이를 어쩌랴! 나는 무엇이든 옳은 지식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사명감으로 충무공을 보면서 살아간다. 누군가 어서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을 기다리며.
[양해의 말씀 : 이 글에는 두음법칙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에 두음법칙이란 말이 없고, 세계 어디를 가든 어떤 소리도 적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 때문이다. 『한글맞춤법』이란 족쇄로 훈민정음의 뜻을 꺾지 말아야 한다.]
- 『경남문화』 제5호, 경상남도문화상수상자회, 212~227쪽.-
첫댓글
선생님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