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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로 세움을 받은 모세
출 4: 1-31
출애굽기 4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겠습니다. 1절로 17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고 18절 이하의 내용을 한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1절
로 17절의 내용은 앞서 3장의 내용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모세를 소
명하시고 자신의 뜻을 알리시며 그를 그 백성의 구원자로 세우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
서 앞의 내용과 관련지어서 본문을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이하의 내용은 모
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아론과 함께 자신을 증거하는 내
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증거를 듣고 또 보고 믿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17절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의 사양의 내용이 나오고 있습
니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
서 하나님께서는 타는 불꽃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셨고 모세를 불러 자신의 뜻을 말씀하
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뜻과
그 뜻을 모세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제가 누구인데 바로에
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습니까?"하고 자신을 택하심이 당치 않다
는 첫 번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굳은 약속으로 모세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두 번째 질문을 하므로 그 반응을 보였는데, "백성들이 보내신 이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그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구원하
실 것입니까? 애굽을 심판함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보
화를 자기 백성에게 안기심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소명
하시고 그에게 자신의 구원의 뜻을 말씀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세 번째 반응이 4장 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1"--------" 한 마디로
백성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증거를 대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하
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증거를 주셔야 백성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
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의 불신앙,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가는 것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고 게다가 증거까지 요구하는가'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게
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증거와 완성된 믿음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
문에 쉽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 온 시대, 이미 드러난 증거를 따라 기
록된 말씀이 주는 부요함 가운데 하나님을 믿기에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미 성
령께서 우리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주시는 은혜의 시대를 살기에 얼른 그런 생각이
들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때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드러난 증거를 주어야 믿는 것이지, 이미
그 모든 증거 가운데 성장한 우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모세
와 및 구약의 증거를 요구한 이들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들에게 맞는
믿음의 요구가 있는 것이고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무라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
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갖는 모든 의의 표준과 기준으로 모든 시대를 평가하고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 때는 아이에게 맞는 부모의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무
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믿음이 온 시대를 사는 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요구해서는 안되겠지요? '하나님 저는 도무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도 증거를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들을 교회 가운데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주시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증거를 주시는데 무엇입니까? 첫 째
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증거이고 두 번째는 손에 문둥병이 들고 낫는 증거이고 세 번
째는 나일강의 물을 땅에 부었을 때 그 물이 피로 변하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증거
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그를 보내셨다고 하는 표징으로서
증거들입니다. 표적으로서 증거들인 것이지요. 모세의 권위를 증거하는 권세의 표적들인 것
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러한 표적들을 보이면 백성들이 모세를 믿게 될 것입니다. 과연 하
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그를 보내셨음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애
굽왕 바로는 보고도 믿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이 모든 표적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표적이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과연 모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구
원자라는 사실이 증거 될 것입니다. 곧 이 표적은 그 직무를 증거해 주는 직무의 증거들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표적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실 은혜의
일들을 증거하는 증거들이 될 것입니다. 장차 이루실 언약의 확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자를 세우시고 표적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구원자를 세우셨고 그를 통하여 수많은 표적과 증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입었
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 된 자가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표적으로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표적의 성취로 친히 죽음을 이기고 일어
나셔서 하늘에 앉는 영원한 왕이 되시므로 자신을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표적은
모든 표적을 완성하는 표적이어서 이보다 더 확실한 표적은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므로 원
수를 심판한 이 마지막 표적은 이제 천하만민이 믿어야 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은 동시에 그에 속한 모든 백성에게 장차 이루실 은혜와 생명의 표적이어서 우리의 구원의
의미 자체를 담는 표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표적을 보이신 적이 없고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풍성
한 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이로서 주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보내신 구원자임을 증
거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를 하나님의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하나
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이고 이 표적을 보고도 그를 하나님의 보내신 이로 믿지 않고 거절
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좇아 나는 진노의 심판 가운데 들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의 표적이
이제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확실한 표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 우리를 구원하신 이 하늘의 표적을 증거하고 선포할 때, 세상의 택하신 주의 백성들
은 이 믿음에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10절에 모세의 네 번째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가 말하였습니다.
10"---------"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자신
이 말에 능하지 못하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이런 내가 어떻게 백성들을 설득할
것이며 바로 앞에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과거 백성에게 배척받았던 쓰라린 경
험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그 뼈아픈 경험 속에 가졌던 모든 자신감을
잃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1"-----" 무슨 말입니
까? 입을 지은 내가 말을 주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을 지은 내가 함께 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만든 내가 함께
하고 할 말을 가르칠 것이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드러난 주님의 뜻에 대하여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순종하기를 주저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때로는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이러한 어리석은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
니다. 우리가 주의 뜻에 대해 변명하며 순종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신감 없음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실패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의 한 두
번의 실패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세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
춤거리게 되고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게 되며 회피할 명분을 찾거나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
해 골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시대를 사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혹 모세
는 그랬다할지라도 우리는 모세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가지 못하고 저래서 가지
못하겠습니다.' '이래서 순종하지 못하고 저래서 순종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
세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주님의 부활의 본 자의 태도는 분명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를 본받는 것이 마치 경건의 길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
다. 모세처럼 몇 차례의 거절과 반항을 거쳐서 순종을 해야 진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의 예이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이런 분들은 '나는 이렇게 이렇
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은 두 손들고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이 대단한 간
증거리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를 은혜의
강조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주저함이나 반항 없이 주
를 순종한 것이 더 놀라운 것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즉각적인 순종을 이루며 사는 것이 더
큰 기적이며 교회 가운데 진정 간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제 모세와 같은 태도가 아니라 "주여 저를 어디로 보내시겠나이까? 저를 누구에게
보내시겠나이까?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운 없이 나아가겠습니다."라는 태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시대를 봉사하는 우리의 마땅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13"--------"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는 도
저히 안되겠습니다"하는 것이 모세의 태도입니다. 그는 끝까지 인간적인 생각에 매여 하나
님의 부르심을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히 명령하셨습니다. 14-17"---------"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말씀하셨고 결
국 모세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서 모세는 마지못해 하나님을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무려 다섯 번이나 주저하고 변명하고 망설인 끝에 하나님께서 노를 발
하실 때에야 비로소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망설인
모습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계산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래서
안되겠는데요, 저래서 안되겠는데요" 변명한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죽으심을 앞
두고 "할만하시어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간구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저함이
나 망설임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말
씀하시기를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십자가의 가혹한 죽음일지
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도 기꺼이 순종하셨고 죽음으로서 순종을 이루어 내셨
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순종의 본,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주님처럼 온전한 순종의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여 부족하
지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힘들고 외로운 길이 충분히 예상되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겠나이다"이렇게 순종으로 행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순종하는 백성으로 우리를 만드시고자 주님께서는 죽음의 순종의 길을 가신 것이고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갖 자기 합리화와 변명의 태도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순종하기도 전
에 예상되는 어려움부터 계산하고 주저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자기 비
하 가운데 갇혀 있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주의
뜻이면 하겠나이다" 또는 "주의 뜻이면 하지 않겠나이다"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온전한 순종을 이루는 의의 백성들로서 이 땅을 사실 수 있기 바랍
니다.
4장 구속사 강해
모세의 사역에 담겨 있는 구속의 성격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한 가장 적합한 인물로 모세를 선택하셨다.
모세는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을 일깨우려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민족적 수준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미달된 상태였다.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을 되찾는 운동에 실패한 모세는 미디안에서 40여 년 동안 목자로서 생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미 뼈저린 실패를 안고 있는 모세로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는다는 사실이 몹시 부담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확인했지만(출3장) 막상 자신이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 일에는 극구 사양하고 나섰다.
1.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
모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고 변명하며 애굽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며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출4:6)고 하며 모세가 애굽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오기를 독려하셨다.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손에 쥔 모세였으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고 하며 한사코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이러한 모세의 태도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다. 그렇지만 이미 40여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행하였던 행위를 본다면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모세가 잘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가 자꾸 변명을 하자 아론을 함께 보내시겠다고 하심으로서 모세가 더이상 변명하지 못하게 하셨다.
모세가 애굽에서 할 일에 대해선 출애굽기 4장 21-23절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팍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4:21-23)는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의 장자로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에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이를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로 잡고 있기 때문에 바로의 장자를 죽이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낼 것이라고 선포하는 일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사명이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소유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비록 지금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으나 본래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백성이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을 보내어 달라는 요구를 바로에게 선언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자신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를 거역하고 끝까지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형벌을 내리시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에 대해 거역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애굽으로 들어갔다.
2. 유월절의 의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을 향하는 중에 잠시 숙소에서 잠자리를 준비하게 되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그곳이 어디인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론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만난 것을 볼 때(27절), 이 숙소는 애굽의 국경 지역으로 시내산 근처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겠다고 피의 보복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24절)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에 '모세'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가 '그'라는 삼인칭 대명사라는 점에서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십보라가 아들에게 급작히 할례를 행함으로써 무사히 지나간 것으로 볼 때(25절)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신 사람이 모세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모세가 미디안에서 아들을 얻은 후 할례를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었지만 당시 이방의 나그네로 살고 있는 모세로서는 아들의 할례를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본문 23절에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연관지어 볼 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모세의 아들들 때문에 모세를 죽이시려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 21절에서 모세에게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이적인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22-23절) 이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는 것은 애굽 땅의 모든 장자들이 당할 죽음의 위협, 즉 유월절에 발생할 사건을 모세로 하여금 미리 체험하게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모세로 하여금 유월절을 미리 체험하게 함으로써 유월절의 기본 원리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정에 예비적 유월절을 시행하셨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히 11:28)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 경험을 통하여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 규례를 분명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십보라가 말한 '피 남편'은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라"(26절)는 말씀과 연관지어 해석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남편'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하탄'( )으로서 그 뜻은 신랑을 의미한다. 히브리어에서 남편이란 말은 '이쉬'( ) 혹은 '바알'( )로 기록된다. 그런데 한글 개역에서 유독 본문에서만 '하탄'을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은 '그'를 모세로 번역했기 때문에 문맥의 흐름을 맞추기 위한 부자유스런 번역이 되고 말았다.
본문의 '피 신랑'이란 의미는 이스라엘의 혼인 관습과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혼인 초야에 신부의 순결을 증명하는 핏자국을 제시하도록 되어 있다(신 22:13-21). 신부는 정숙한 처녀의 핏자국을 제시해야 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부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핏자국이 보이지 않을 경우 신부를 사랑하는 신랑이 대신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하여 그 피로 신부의 생명을 살리게 되는데 이것을 '피 신랑'이라고 하였다. 신랑은 할례의 피로 신부에게 법적인 보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가리켜 '피 신랑'이라고 한 것은 할례의 피가 자기와 가정을 하나님의 손에서 건져내었음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월절에 담겨 있는 신비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신부 이스라엘과 혼인하는 잔칫날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신부 이스라엘의 죄악을 덮으시고 구속하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와 그의 가족은 할례의 피를 통하여 죽음에서 놓이게 된 이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과 신부 이스라엘의 혼인을 상징하는 유월절 사건을 예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피 신랑'의 의미는 후에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에게서 재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와 일맥상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