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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Ⅰ.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7:1-13
1. 그리스도께서 유대보다 갈릴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신 이유(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루살렘과 유대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 해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요 5:16). 여기에는 예수께서 감히 유대 지방에는 갈 엄두도 내시지 못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다니려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겁이 많고 심약해서가 아니라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조치였다. 왜냐하면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들로부터 그를 내쫓으려 하는 자들에게는 등을 돌리실 것이다. 위험이 임박했을 때 안전과 보전을 도모하여 물러나 앉아 위험이 적은 지역에서 섬김을 다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요, 권고할만한 일이다(마 10:23).
정말 상 받을 만한 사람, 공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궁벽한 장소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못한 채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까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우리 주님의 처지가 그러하였다. 그런데 주님은 갈릴리에서 조용히 은둔 생활을 하시지 않고 '다니셨다.' 주님은 이리저리 선을 행하시며 다니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바"를, "하고자 하는 곳"에서 행할 수 없는 처지에서라도 "할 수 있는바"를 "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해야하는 법이다.
2. 초막절이 다가옴(2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초막절은 이스라엘 남자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야 하는 삼대 민족 제전의 하나였다. 이 절기는 그 당시도 경건하게 엄수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제도란 결코 흘러간 옛날 일도 아니며 시간이 오래 흘렀다 해서 구식이 되는 것은 아니며, 광야에서 받았던 은덕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와 형제들간의 담화(3-13절)
이들은 예수께 관심이 있는 척하고 끼어들어 예수님의 처신에 대해 충고하고 나섰다.
(1) 여태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보다 더 자주 대중들 사이에 그 모습을 나타내라는 주장 속에 은폐 되어 있는 저들의 야망과 헛된 영광 :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3절).
1)이들은 이 권유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그곳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후원했으면 하고 바랬으며 그가 갈릴리 제자들과 보내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소용이 없다고 여겼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알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4절).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고자 해왔다고 당연시했다.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때가 큰 인물로 부상할 수 있는 최적기이나이다."
2)복음서 기자는 이것이 그들의 불 신앙의 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그리스도의 육신의 친척이 된 것은 큰 명예임에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명예를 입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예수께서 귀히 여기시는 친척이다.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친척이 된 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도 있었으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3)그들이 예수께 드린 충고에서 무엇이 그릇되었는가? 그들이 그리스도는 자신을 이끌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은 곧 그가 그들을 인도하리라고는 믿지 않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리고 유대 지방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그를 유대 지방으로 가게 하려고 한 일은 그의 안전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주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갈릴리 출신 동료들에 대하여 싫증을 느껴 실제로 이 말은 예수께 그 지방과 결별하기를 바라고 한 말일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은 그가 자기를 대중적 활동 무대에 드러내지도 못하는 저열한 의식의 소유자요, 만일 그가 용기가 있고 위대한 혼을 가지고 있다면 대중 앞에 나섰지 이처럼 위험을 모면하여 시골 구석에서 슬금슬금 피해 다니지 않았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그를 비난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4절)'이라는 말속에는 예수께서 역사하신 기적의 진위에 대한 의심이 게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일들이 고등 법원의 공적인 세밀한 심사를 통과할수 있다면 거기에 가서 이 일들을 행해 보시오"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자기들과 동류의 인간으로, 자기들처럼 육에 속하여 공명에 욕심이 있는 인간으로 취급한다.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이기심이 깔려있었다. 이들은 만일 그가 크게 출세한다면 그 친족들인 자기들은 그 덕을 보게 되리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공적인 의식에 참여하며, 그들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하는데 있다.
(2) 우리 주 예수의 신중함과 겸비함(6-8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들이 한 말은 아주 비속한 아첨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온화하게 답변해 주셨다. 몹시 그릇된 것이 쉽사리 드러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못본 척하시고 그들에게 온화하게 답변해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1)예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사람들과 자신이 다름을 보여주신다.
①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의 때는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절).
쓸모없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겐 시간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즉 언제든지 즉석에서 아무것이든 할 수 있어서 자기를 마음 내키는 대로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야 될 일로 시간이 꽉 차있는 사람들은 흔히 시간에 쪼들려서 다른 사람들이 언제고 매달려있는 것이 아직 할 시간을 못 갖는다. 일에 매달려있는 것이 게으른 자유보다 수 천배 나은 것이다. 무식하고 근시안을 가진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해달라고 처방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현시대는 우리의 시대이지만 그러나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 그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②유대인들이 노리고 있었던 것은 예수의 목숨이었지 이들의 목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그 모습들을 나타냈다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들을 노출시킨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니 이는 너희가 세상에 속했기 때문이다." 거룩치 못한 영혼들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사랑하실 수 없는 존재이며, 사악함이 가득 찬 세상으로써는 도저히 미워할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심으로써 큰 위험에 자신을 내맡기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소홀히 여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움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했는가?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절).
악한 세상이 이루어내는 업적이란 악한 행사이다. 나무를 보면 그 열매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는 판결은 세상으로써는 대단히 불쾌하고 성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에 대한 반기를 드는 원인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연막을 친다고 하더라도 그 적대시하는 마음의 실제적인 원인은 복음이 죄와 죄인에 대하여 그 실상을 증거하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의 사악한 흐름과 풍류가 되어 세상의 선심을 따내는 것보다는 그 사악함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나섬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사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예수께서는 당분간 갈릴리에 남아계시겠다는 생각에서 이들을 물리치신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명절에 올라가는 것을 말리지 않으셨거나 동행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행사에 참석하거나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제껴 놓고 급히 간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상경할 필요가 있는가? 중대한 행사에 오갈 경우 오염된 교제로 인하여 귀중한 정열이 식지 않도록 동료를 택하고 동행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절). 예수께서는 "나는 아예 상경하지 않겠다"고 하신게 아니라 "아직은 상경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하신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8절).
(3) 그리스도께서 자기 때가 올 때까지 갈릴리에서 유하심(9절) :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고자 하셨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침착하게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경솔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때가 오자 명절에 참석하심
1) 예수께서 올라가신 때 :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10절).
예수께서는 그 형제들이 상경한 후 뒤따라 올라가셨다. 세상에 눈이 어두운 그 형제들이 먼저 올라간 후 나중에 예수께서는 가셨다. 문제는 "누가 먼저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누가 보다 합당하느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중심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 앞서 누가 도착했느냐는 문제될 바가 아니다.
2) 어떻게 그가 올라가셨는가? 예수께서는 마치 자기를 감추시듯,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셨다. 효과적으로 성사되는 하나님의 일이란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은밀히 하되 절대로 미혹시키지 말아야 한다.
(5)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사이에 들끓었던 예수께 대한 기대(11-14절) :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은 예수께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절).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리라 생각하여 그를 한번 보았으면 하고 기대하였다.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도 익혀놓을 기회가 온다면 대단히 기뻐할 그런 심정이었다. 유대인들은 명절 중에 예수를 찾았다. 명절 중에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어쩌면 그들의 기다림이란 예수를 사로잡기를 원하는 원수의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가 어디 있느냐, 그 친구 어디 있어?"라고 떠들어댔다. 이와같이 비꼬면서 업신여기게 그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로써 좋아라 하였다. 무리들은 예수께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달랐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12절).
그리스도에 대한 지배층의 적대 감정은 그에 관한 소문을 더욱 크게 퍼뜨렸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대에 부딪침으로써 오히려 설자리를 얻은 것이다. 복음은 모든 곳에서 비방을 받음으로 해서 사방팔방에 복음에 대한 말이 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더욱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 수군거림은 그리스도를 적대하여 한 수군거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관한 이야기였다. 즉 어떤 이들은 지배층이 그리스도를 지지하지 않으며 격려하지 않음으로 해서 지배층에 대하여 수군거렸으며 또 어떤이들은 그들이 예수를 억누르거나 금하지 못했다고 수군거렸다.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은 논쟁과 논란의 주제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눅 12:51,52).
그러나 감옥과 같은 전제 정치에 의해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동의하는 것보다는 자유와 참견에 의한 떠들썩함과 논쟁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어떤이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실이었지만 전체에 비해볼 때 대단히 한 부분에만 한정된 판단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전혀 나쁜 생각을 갖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견해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말한 내용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그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대단히 악한 자였다. 대제사장들이 그를 반대하고 헐뜯는 이유가 바로 그 기적에 밝혀지지 않은 어떤 속임수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집권층이 두려워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누는 것도 꺼려하였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3절).
무리들은 예수가 좋다는 말도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서는 전혀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못하였다. 예수께 대해 좋지 않게 얘기하는 것이 전혀 좋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입에 떠올림으로써 공연히 고통당하는 일을 피하고자 하였다.
Ⅱ.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자신에 대한 변증 7:14-36
1.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행하신 대중 설교(14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예수께서 이때 어떤 설교를 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 관찰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가 '명절 중간'이었다는 점이다. 왜 예수께서는 말씀 선포를 위해 좀 더 일찍 성전에 등단하지 않으셨을까? 그 이유는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에 항상 그래왔듯이 며칠 동안 초막에서 그들이 지낸 후에 사람들이 좀 들을 여유가 생겨 그리스도의 말씀에 좀 더 잘 귀 기울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둘째는, 나타나시되 우호적인 동시에 그를 볼 수 있는 시기를 택하느라 그랬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런 식으로 이제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까? 이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에게 창피를 주려했음이 분명하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이심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할 일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으심으로써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셨다. 그들의 직무는 바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의 계율이나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 백성들을 가르친 것이다.
2. 유대인과의 성전(15-36절)
(1)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1)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유대인들의 대단한 놀라움 :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15절).
우리 주 예수는 선지 학교나 문하에서 교육받은 일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으므로 사람에게서 지식을 전수 받을 필요도, 얻을 필요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적이 없었음에도 글을 아셨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영감에 의해 얻을 수 없어도 보통의 방법으로 애를 써서 지식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그러한 학식은 비록 그가 배우지 않았음에도 진실로 위대하고 기이하게 보였다. 어떤 이들에겐 예수께서 무학자였다는 사실로 해서 그의 영광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그 사실을 헐뜯고 깔보아 업신여기기 위해 꺼냈으리라. 그런 사람들의 눈엔 주께서 갖고 계신 지식은 무엇이냐, 그가 대학에 다닌 적도 없고 학위도 따지 못했으므로 결코 진짜 지식으로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은 예수가 마술로써 그런 지식을 배웠을 것이라고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그런 대학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마술사로 생각했을 것이다.
2)그에 대한 주님의 세 가지 주장
①거룩한 것이라는 사실 :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결코 배운 적이 없지만 자신의 교훈은 배우지 아니한 그러한 류의 가르침이라고 나서자 그것이 마음속에 걸림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은 신성한 계시였던 것이다. 또한 이 교훈은 나를 중심으로 내게 된 것도 아니요, 최종적으로 내게 이끌려고 하는 것도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이끌기 위함이다.
②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릴수 있는 사람들은 신실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소원하며 애쓰는 자들이라는 사실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첫째, 그리스도의 교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기꺼이 조사해 보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둘째, 누가 이러한 탐구에 성공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 적어도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따르고자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실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식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 즉 예수께서는 '행하려 하면 알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자기들 속에 가지고 있는 빛을 더욱 밝게 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호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의 규례에 기꺼이 순복하는 사람이 신성한 빛에서 나온 광채를 쉽사리 승인하게 되는 것이다.
③이에 비추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자로서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는 사실 : 여기에서 우리는 속이는 자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 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절).
속이는 자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위임받지도 않았고 지시받은 것도 없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다. 즉 근거도 없이 자기의 뜻뿐이며 영감이라고는 한구석도 없이 상상에 의한 것일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순전히 자기 영광만 문제거리로 삼는다. 자기 본위의 사람들은 자기 얘기 외에는 늘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의 가르침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속이는 자들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 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우리가 진정 대접하고 영접해야 할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주님의 교훈의 성격이었으며 그의 모든 담화의 취지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참되다는 증거였다. 교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불의를 행하며 사람에게는 속임수로써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참되며, 자신이 말한바 그대로임을 나타내 보이셨다.
(2) 그들은 범법에 대하여 얘기하는데 그 범법 행위란 주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반박하고 나서신다(19절). 그들 자신이 모세 율법을 깨뜨린 사악한 인간들이면서 어떻게 부끄럽게도 모세 율법을 어겼다고 주님을 비난할수 있는가?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
그러나 그들 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으므로 그들이 사악한 것이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태만은 널리 가득 찬 현상이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은 교회를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결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처럼 율법을 자랑했으며 그에 대한 열심을 가장했으나 그들 중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너희는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보통 타인에 대해 협잡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욱 죄악이 심한 법이다. 핍박과 폭력에 호소하여 자기들을 유지해 나가고 자기 유익을 구축해나가는 자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꾸며낼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들은 아니다.
2)이 때 불손하게도 백성들이 그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이 말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집권층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그들은 저들이 그를 죽이기까지라는 그런 잔인한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이 말은 그들이 우리 주 예수께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거짓말 귀신이 씌였다.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좋지못한 사람이다." 또는 아니면 "당신은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약한 사람이구료, 당신은 까닭없이 혼자서 두려워하는 것이오"라는 말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발작적인 광란이나 말이 없는 우울증은 대개 사탄의 역사이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께 "당신은 미쳤군요, 머리에 이상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나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모함을 당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은 업신여기고 얕잡아 보는 것을 견디어야 하며 그 업신여기고 얕잡아 보는 것에 신경을 쓰거나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며 그에 대하여 분을 크게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탄원의 형식과 변호 형식으로 변론하신다.
①예수께서는 기적에 대한 그들의 느낌에 호소하신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21절).
너희는 그 일이 실로 굉장하다고 놀랄수 밖에 없었다.
②예수께서는 다른 예로써 그들이 지켜온 행동 강령에 호소하신다. "내가 안식일에 한 사역을 하자 너희는 모두 큰 놀라움 속에 사로잡혔으며 경건한 사람이 감히 그러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굉장히 이상한 일로 여기고 있지 않느냐. 너희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어린아이에게 할례 베푸는 일이 법적으로 타당하다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더욱 타당한 일이요, 선한 일이 아니겠느냐."
첫째, 할례의 발생과 기원 :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22절).
할례는 주어진 것이요 이스라엘은 그것을 받았다. 하나님의 규례, 특히 언약의 인증으로써의 규례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서 받게 된 것이다. 할례는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또한 모세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조상 때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그 규례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한다는 한 표징으로써 멀리 이방에까지 이르게 될 아브라함의 축복의 일부로써 오래전에 정해진 것이었다.
둘째, 할례법이 안식일법에 우선한다는 점이다. 안식일에 태어난 아이는 틀림없이 다음 안식일에 할례를 받았던 것이다.
셋째, 이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이끌어내신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23절).
"생각해 보라, 이러한 사실이 너희 자신에게 용납되면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여기에 쓰인 '노여워한다'는 말은 극도의 분을 품고 원한에 사무쳐 노기를 드러냈다는 말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면 이는 매우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베푸는 사실과 자신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을 대비시키신 것을 살펴보자.
할례는 단지 의식적인 제도에 불과했으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자연법에 따른 선행이었다. 할례는 상처를 내는 것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는 오로지 할례 한 부분의 완치에만 저들의 관심이 있으며 그 부분이 다 나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어린아이는 다른 질병에 언제 걸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을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온전케 하셨다. "나는 사람의 전신을 온전하게 했으며 건전하게 하였다." 즉 온몸이 치료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을 치료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훈계하심으로써 그 영혼까지 고치셨으니 그야말로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하신 것이다.
3)예수께서는 하나의 법칙을 세우심으로써 이 변론을 마치신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24절).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적용될 수 있다.
①좁게 보아 저들이 율법의 위반이라고 법석을 부린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행위에 적용시켜 볼 때, 이 말은 편파적으로 판단하지 말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일 수 있다(신 1:17).
②넓게 보아 이 말은 저들이 마음속에 걸림이 된 그리스도와 그의 설교에 적용시켜 볼 수도 있다. 거짓된 것들이 보통 외견상 판단할 때 가장 좋은 것처럼 보이며 언뜻 보기에 아주 그럴듯하게 보인다.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얻은 명성과 평판으로써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옳게 보였던 것이며(마 23:27-28), 사람들은 외양을 보고 그들을 판단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인다 해서 모두가 진짜 성도라고 속단하지는 말라." 사람의 외모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판단했던 그 사람들은 정당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였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증거하셨으며 주님 안에서 성경이 성취되었다면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판단하고 그를 영접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던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되 외모에 의해서, 직함에 의해서, 세상의 유명에 의해서, 떠들썩 한 과시에 의해서 판단해서는 절대로 안되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가치와 그 사람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와 그 은혜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3) 그리스도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해 그들과 말씀을 나누신다(25-36절).
1)그는 어디에서 왔는가(25-31절).
①예루살렘 주민 중 일부가 예수의 출신지에 대해 반론을 편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예수께 대하여 편견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25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가장 환영을 해줄 만한 사람들로부터 조금도 환영받지 못한 때가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속담이 생긴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교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과는 멀다."
㉠당국자들이 주님을 그냥 내버려 두자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들을 중상하였다.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25절).
"그런데 왜 그들이 그 자를 죽이지 않을까?"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26절).
여기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당국자들의 화를 돋구기 위해서 간교하고도 악랄하게 두 가지 사실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첫째, 당국자들이 예수의 전도를 모르는 체하고 슬며시 인정했다고 그들은 당국자들을 업신여겼다. "만약 우리의 당국자들이 이토록 당하고만 있다면 어쩌면 그들은 그 어느 누가 자기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해도 감사하게 될거야" 흔히 권위와 정권을 지켜야한다는 명목하에 가장 악랄한 핍박이 수행되어 왔던 것이다.
둘째, 여기에서 그들은 당국자들의 판단에 의혹을 갖는다. "그들은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것은 비꼬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그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 먹었지?"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신앙심과 신앙고백이 약화되어 결과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명성을 잃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마음에 쏠리지도 않게 되어 그것을 핍박하고 반박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는다. 이와같이 자극을 받았는데도 지배층이 그리스도를 체포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아직도 그의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리시기까지는 아니하시지만 탄성을 발하게 하여 사람들의 손을 묶어놓으시기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더 큰 악의를 표출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노라."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7절). 그 사람들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 안다고 해서 그를 멸시하였다. 친분은 업신여김을 낳는 법이며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고 있을 경우 그 사람들의 유용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했으니 이는 그리스도가 자기 나라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이유로 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어야 했다.
②이 반론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28,29절)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자유롭고 담대하게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치셨다.' 예수께서는 그 백성들의 마음의 완고함을 슬퍼하시며 자신의 진심을 토론하시기 위하여 여태까지의 강론보다 더 큰소리로 이것을 말씀하셨다. 진리에 대한 뜨거움이나 열정이 눈꼽만큼도 없는 곳에서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격렬함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들에게 흥분된 말로 가르칠 수도 있지만 부드러운 말로 가르칠 수도 있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도록 하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말에 대하여 일면으로는 시인하시면서 험담에 대하여 대답하신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절).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또한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나사렛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로 생각함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에 대하여 보았던 것과 알고 있었던 것이 그들이 알았어야 했던 전부는 아니라고 부인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가 자신을 보냈는지, 그들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신다.
첫째, 자신이 스스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셋째, 빛이 태양에서 나오듯 자신이 성부에게서 왔다는 사실이다.
넷째,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는 참되시다는 사실이다. 그 아버지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었는데 약속하신 하나님은 참되셔서 그 약속을 이행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참되시며 이방인들까지 불러모으시는 가운데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다섯째, 이 불신앙의 유대인들은 그 아버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절).
심지어 지식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대부분 하나님께 대하여는 아주 무식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째,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친숙하게 아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노니(29절).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었으며 자기가 해야 할 사역에 대해서도 일말의 무지도 없으셨다.
③이 말이 그의 대적들에게 일으킨 격분 :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30절).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사람들을 사슬에 묶어놓고 계신다. 아무리 핍박자의 성질이 자극되었을지라도, 그리고 사단이 그 마음에 가득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묶어놓으심으로써 그 악의를 무력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종들은 때로 분별할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수단에 의해 놀랍게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자기 시간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 사역자들의 사명인 증거의 의무를 다하기 전까지는 세상과 지옥의 그 어떤 권력도 그 사람들을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④그리스도의 말씀이 몇몇의 청중에게는 선한 결과를 맺음 :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절).
복음은 반대 받는 곳에서조차도 커다란 선을 이룬다. 예수를 믿었던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결코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었으며 대세는 아주 강력하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은 무리 중에서 나왔다. 우리는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의 복음의 성공을 척도로 삼아 복음의 번영을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며 가난한 자들만 복음을 영접했다 해서 수고가 헛되이 돌아갔다고 여겨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31절).
그들의 신앙은 얼마나 연약하였는가. 이들은 사마리아인들이 단언했듯이 "이 사람은 진정 그 그리스도시다"라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라고 논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그 메시야가 아닐까?" 그들은 그 점을 믿고 있었지만 떳떳하게 인정할 용기는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아무리 연약한 믿음이라도 참된 믿음일 수 있으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일 수 있다.
2)주님은 어디로 가시게 되는가(32-36절).
①예수께 대항하기 위한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모의(32절) : 그들에게 그들의 밀정을 통하여 들어온 백성들이 수군거린다는 정보와 백성 중에 상당수가 예수를 존경하고 귀히 여기고 있다는 정보는 그들을 자극하기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단지 귀엣말로 이같은 말들을 나누었으나 바리새인들은 그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가 이와같이 흥하게 된다면 분명히 자기들은 망하리라고 예민하게 느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이 세운 계획은 예수를 체포하여 수감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32절).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양치기를 제거하는 방법이다. 바리새인들은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으므로 대제사장들과 야합하였다. "지혜로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듯이" 유대 교회도 그 지혜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②이에 대한 우리 주 예수의 강론 :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33,34절).
이 말씀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처럼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 자신을 향한 밝은 면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위안을 삼으시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잠간 동안 계시리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수행하셔야 할 싸움은 곧 끝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내면서 같이 있던 사람들은 친구나 적을 불문하고 잠시 잠간 함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시 동안 찌르는 가시와 쏘는 덩굴과 함께 지내야만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것은 잠시뿐이요 우리는 곧 가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내신 이에게 갈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불어 내 할 일을 마친 후 나를 보내신 분께 갈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영원히 하나님께 나아가 함께 있으리란 사실로 위안을 삼게 하자.
셋째, 박해자들 중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34절).
영화롭게 된 성도들에게 덧붙여지는 행복은 그 성도들이 이제는 사탄이나 사악한 그의 아랫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흑암이요 어두움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오랫동안 그들에게 괴로움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당하시고 그들에게서 떠나가실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싫증을 느끼는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욕구이다.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선택을 후회할 때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그 사람들은 헛되이 메시야의 모습을 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그를 만나게 될 것이지만 지금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메시야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죄와 불신 탓에 무력하게 된 것이다. "너희는 믿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 하늘나라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조금도 없을 것이다.
③이 말씀에 대한 저들의 논평(35,36절) :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35절).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의 고의적인 무지와 맹목성 : 예수께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즉 자기를 보내신 이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저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는가?" 그리고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경고에 대한 저들의 당돌한 멸시 :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는 두려운 말씀을 대하고서도 떠는 대신에 그들은 그 말에 대하여 희롱하고 조롱거리로 삼아버렸다.
셋째, 그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뿌리 깊은 악의와 분노 :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혹시 예수가 자기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지나 않는가 하고 염려했을 따름이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넷째,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오만스런 업신여김 :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이들을 '헬라인 중에 흩어져사는 자들(35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사람이 그들을 미혹하려 하는가?" "그가 가서 그들을 가르치고 자기의 교회를 설명하려는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명성을 독점하려고 매우 투기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예수가 이방인을 가르치러 간다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과 사도들을 쓰셔서 진지하게 그 일을 이루셨던 것이다.
Ⅲ. 위대한 복음의 초대 7:37-44
1.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석(37-39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구절에 나타난 말씀은 예수께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셨던 내용에 대한 간략한 언급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복음 전체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그리스도께 나오라는 복음의 초대가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와 행복에 대한 복음의 약속이 들어있는 것이다.
(1) 예수께서 이 초빙을 하신 때 :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37절).
이 절기에는 대단한 인구가 밀집하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에게 초청장이 발부된다면 그중 몇 사람이라도 그 초대에 응하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 사람들이 귀향을 서두르는 때가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간직하고 가도록 송별사로 그 사람들에게 하셨다. 바야흐로 큰 회중이 뿔뿔히 흩어지는 때였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거나 모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고려해 본다면 떠나가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혹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나 있다면 헤어지는 이때야말로 그 말을 해야하는 시간인 것이다. 집회의 마지막 순간에 생기로 넘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절기 마지막 날에' 이 제의를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번 그 사람들에게 시도하실 때 그 말을 청종하는 사람들은 살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절기가 있기까지는 앞으로 반년이 남아있었는데 그동안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덤 속에 누워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2) 어떤 방법으로 이러한 초대를 하셨는가.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37절).
이는 그리스도의 진지함과 간절함을 나타내주고 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은 설교자로 하여금 생동감 넘치게 하여 준다. 예수께서 원하신 바는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알아듣고 이 초대에 응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더 잘 전해지도록 '서서 외치셨다.' 이교의 신탁은 조그맣고 혼자나 알아들을 수 있는 웅얼대는 소리로 은밀하게 전달되었으나 복음의 계시는 '서서 외치는' 이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3) 초대의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초대되었다. 그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절).
누구든지 진실로 영원히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에게 전념하라."
1)초대된 사람들은 '목이 마른' 사람들이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①그 사람들의 내적.외적인 핍절 상태를 의미함 : 즉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평화를 위해 가난과 질고로 인해 그리스도께 나오라"는 말이거나 "신령한 축복을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내게 오면 채워지리라"는 뜻이다.
②영적인 행복을 향한 저들의 영혼의 애타는 상태를 의미함 : 그 누구든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이는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이다.
2)초대의 말씀 : 내게로 와서. 목마른 사람은 생명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자.
3)약속된 만족 : "내게로 와서 마시는 자는 신선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시 힘을 공급받으리라."
(4) 이 자비 넘치는 부르심에 첨가된 은혜의 약속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
1) 여기에서 보아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를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에 의해 하나의 그리스도를 조작해서는 안 되며 성경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2) 또한 그리스도께 나아온 목마른 영혼들이 어떻게 마시느냐 하는 점을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의 행로에 있던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지만 믿는 자들은 그들 속에 있는 바위 즉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시게 된다. 이는 현재의 만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구히 지속적인 위로를 위해 예비 된 것이다. 생수, 즉 흐르는 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므로 살아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성령의 은혜와 위로가 살아있는 즉 흐르는 물로 비유되고 있다. 바로 생수의 강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성령의 위로는 풍성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흘러 세찬 물줄기와 같이 의심과 두려움의 어떠한 반대도 꺾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와 위로는 믿는 자의 심령에서 흘러나온다. 마음에는 은혜의 원리가 심겨져 있는 것이며 성령이 거주하시는 그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영혼 안에 있는 은혜와 위로의 샘들은 시냇물을 낼 것이다. 그 배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은혜와 위로는 스스로 증명한다.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샘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시냇물에 의해서 알 수 있듯이 성결한 마음이 성결한 생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은혜와 위로는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를 전달할 것이다. 선한 사람은 모두에게 선을 끼치는 것이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는 이 말씀은 이러한 취지로 구약에 쓰여진 어떤 약속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구약 안에는 그러한 약속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초막절 끝날을 성대하게 치루는 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물붓는 행사"라고 일컬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 그릇을 취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떠다가 나팔을 불며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면서 성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제단으로 나아가 여호와 앞에서 할 수 있는 온갖 기쁨을 표현하면서 그 물을 부었다. 우리 구주께서 이러한 관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된다. 신자들은 우물에서 떠온 물그릇 정도의 위로가 아니라 그들 속에서 흘러나오는 강 같은 위로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5) 이 약속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주석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절).
즉 성령의 선물과 은혜, 위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기적적인 선물을 받았으며 믿는 모든 자는 성령의 성결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는다. 믿는 사람의 속에 거하시면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살아있는, 흐르는 물의 샘으로써, 그 샘에서는 물처럼 시원하게 하며, 깨끗이 씻겨주며, 열매를 맺게 하고, 해갈을 식혀 주는 풍성한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성한 성령의 역사는 약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절).
예수께서 영광을 받을 것은 확실한 일이었지만 아직은 수욕과 멸시의 상태에 계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시길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지식이 명확성과 은혜의 충만함을 비교해 볼 때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더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성령의 보증과 첫 열매는 주신바 되었으나 그 충분한 수확은 아직 이르지 아니했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아직은 온 세계, 이방 지역에까지 흘러넘치도록 이르러야 할 생수의 힘찬 강 줄기로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때론 그의 영화라고 불려진다. 이는 그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께서 원수를 정복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처럼 성령이 아직은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성령이 주어질 것은 약속되었다. 비록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이 오래도록 연기된다 할지라도 선하신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의지해서 살아갈 약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이 말씀의 결과(40-44절)
일반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의견의 차이로 나타났다.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3절).
무리 중에서 견해 차이가 심하여 격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 차 만큼이나 감정 대립도 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전하러 오셨으니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그의 복음을 반대하여 무리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체내에 있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약을 투여하여 진통이 일어났다 해서 약을 원망할 수 없듯이 그러한 소동 역시 복음 탓이라고 할 수 없다.
(1) 어떤 자들은 예수를 받아들였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40절).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메시야의 전령이다. 예고자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41절)
다른 이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라"(41절) 메시야 본인이시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갖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살아있는 신앙에는 부족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할 나위없이 좋은 평가를 예수께 대하여 내리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만큼 감동을 받지는 아니하였다.
(2)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 대하여 거슬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그 그리스도"라는 이 위대한 진리가 발표되자마자 이 진리는 심한 반대와 반박을 받았다. 그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 예수의 출신과 성장 배경이 갈릴리였다는 사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모든 주장을 일축해 버리기에 충분하리라 여겼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41,42절).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성경에 대한 칭찬할만한 지식 : 이 사실은 평민조차도 전통적인 해설에 따라 알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서기관들이 전통적인 주석을 내린 것이었다. 어떤 오염된 생각을 신봉하고 그런 생각들을 변호하는데 열의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들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 하나 실상은 왜곡되게 가르침 받은 것이외에는 거의 성경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주 예수께 대한 죄가 될만한 무지 : 이 사람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지나간 논쟁이라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더 조사를 해봄으로써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며 베들레헴이 출생지였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을 뻔하였다.
(3)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 대하여 분을 일으키며 체포하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다(44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대단히 달고 은혜스러운 말씀이었으나 그로 인하여 그 사람들은 예수께 대하여 더욱 분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의 원한이 항상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듯, 때때로 왜 그 원한이 실천되지 못하는지도 헤아릴 수 없다.
Ⅳ. 그리스도에 대한 아랫사람들의 증언 7:45-53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날이 그 절기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종교 행사에는 전혀 참석하지도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예수를 억눌러버릴까 궁리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해 놓고 그리스도가 죄수가 되어 자기들에게 끌려오길 기대하면서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32절).
1. 그들과 빈손으로 돌아온 아랫사람들 사이에 오간 대화(45-49절)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1) 그들은 자신들이 발부한 체포영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그 아랫사람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45절). 그들은 자기들의 부하들이 이와같이 자기들을 실망시킨데 대하여 안절부절하였다.
(2) 아랫사람들의 이유 :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46절).
여태껏 그 누구도 그리스도와 같이 그런 지혜와 권능, 은혜와 그 명쾌한 설득력, 그 매혹적인 달콤함을 가지고 말했던 이가 결코 없었다는 말은 매우 위대한 진리였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아랫사람들은 도리어 예수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게 된 것이었다. 아랫사람들은 예수를 모세의 자리에 앉았던 모든 사람보다 앞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악인의 양심에라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호위를 받으셨다. 아랫사람들이 그들의 주인과 선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하자, 그 주인들과 선생들은 그리스도가 영예롭게 되는 것을 조금도 참고 들을 수 없었지만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호감을 가졌으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아랫사람들이 그 주인들에게 반대 증거를 하였던 것이다.
(3)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아랫사람들을 확보하고 그들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편견을 배태시키려고 노력한다.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1) 만일 아랫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용납한다면 그들은 속게 될 것이라는 사실 :
기독교는 그 발생 초기부터 굉장한 속임수로 세상에 선전되었으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사기당한 사람취급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이 그 아랫사람들을 깨우쳐 주기위해 했던 아첨하는듯한 말을 살펴보자.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너희같이 분별력있는 자들이 그럴수 있느냐?"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스스로 높게 평가하도록 설득하여 그리스도께 대하여 편견을 가지도록 애쓰고 있다.
2) 만일 복음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자기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되리라는 사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종교에 있어서도 제일 높은 사람들의 본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4) 이 아랫사람들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도록 유혹을 받았다.
1)만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면 이는 지위와 명성이 있는 자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 된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48절).
관리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믿기까지 하였으나 그를 고백할 용기는 결핍되어 있었다(요12:42).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세상에서 낮아질 때 복음의 대적이 실제 이상으로 복음을 낮게 평가하여 제시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당국자들과 바리새인 중에 그리스도의 편에서 그를 옹호한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도는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훈이었다. 그리고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무도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편견을 따르게 만들었다.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는데도 그리스도를 여전히 믿는 사람들은 괴팍한 사람들이요 유행에 뒤떨어진 천박한 사람들일 것이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유행 때문에 기꺼이 저주에 빠지는 것이다.
2) 업신여김받는 품위가 낮은 사람들과 연관을 맺는 것이 된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절).
첫째,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냉소적으로 그리고 모욕적으로 "이 무리"라고 일컬으며 신자들을 욕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지혜는 종종 비천한 것들, 세상에서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우매는 보통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업신여기고 천대시하여 왔다.
둘째, '그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그들의 비난은 얼마나 부당한가. 그러나 그들이 이와같이 업신여겼던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선지자들 역시 그들이 알았던 곳보다는 훨씬 더 율법에 능통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학문이 없고, 평범하며 정직한 많은 제자들이 위트와 학식이 있는 어떤 학자들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건전하게 그리고 유용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을 비난한 것은 백성들보다 더 잘 가르쳤어야 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셋째, '이 무리는 저주받은 자로다'라고 얼마나 권위주의적으로 믿는 자들에 대하여 선고를 내리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선고를 내리려고 시도할 수도 없는 존재요 정죄하기에도 적합하지 못한 존재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분노를 표현하고, 자기들의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게 하여 믿는 자들과 상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은 저주받은 자로다'라는 끔찍한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 니고데모의 항의(50-53절)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니고데모는 그들의 부당한 의사 진행에 대하여 정당하고 합리적인 반대를 한다.
1)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담대히 반박하고 나선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였다(50절). 비록 니고데모는 예수와 함께 지내었고 예수를 선생으로 모셨지만 여전히 의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그의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함으로 여긴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기회가 있었으며 유대인의 분노의 물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기회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즉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은 것은 그의 지혜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계 각층에 자기의 남은 자들을 두고 계시며 가장 악한 처지와 사회 속에도 다소의 선을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 그는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밤에 예수께 찾아 왔지만 사건이 생기자 그는 담대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변호에 나서 공회 전체에 반대한 것이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겁이 많던 많은 신자들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기있게 장성하게 된다. 그러나 니고데모처럼 위급한 경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담대히 나설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 어느 누구도 니고데모의 예를 빙자하여 자기들의 신앙의 위장을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니고데모는 홀로 담대히 나섰기 때문이다(참조, 요 19:39).
2)니고데모의 반대 주장 :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절).
니고데모는 유대 율법의 원칙과 정의라는 거역할 수 없는 법칙에 의거하여 '사람은 누구나 판결받기에 앞서 자기를 변호할 권리가 있다'고 신중하게 주장한다. 앞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을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자들'이라고 비난했었지만, 여기에서 니고데모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무지한 자라고 번복하고 있다. 여기에서 율법은 '듣고 알고 판결하는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공정한 재판에 의하여 진상을 자세히 검토해 보기까지는 아무도 율법에 의거하여 형을 언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재판장에게 귀가 두 개 달린 이유는 양측의 주장을 다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한 말이나 소문, 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한 행위에 의하여 재판을 받아야하는 법이다. 외모가 아닌 사실에 입각하여 재판되어야 한다. 정의의 검을 사용하기 전에 정의의 저울이 먼저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이 반박에 대한 대답 : 여기에서는 니고데모의 반박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 전혀 없다. 그들은 욕설을 퍼붓고 비난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추구했어야 할 사실을 은폐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치에 맞는 말을 거부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 논리가 자기들의 경우에는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어떻게 그들이 니고데모를 트집 잡아 따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52절).
1)그들이 주장하는 근거의 허구성 :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었으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온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역시 거짓이었다.
2)이러한 허구적 기초에 근거한 저들의 주장이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세상에 어떤 지체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이 자기 조국의 가난함과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움에 대하여 더 악하게 대한 적이 있던가? 그리고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온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갈릴리에서 그 어떤 선지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3) 이에 서둘러서 재판을 연기함 : 이들은 혼란에 빠져 황급히 회담을 중지하고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은밀한 음모와 술수는 모두 평범한 정직한 말 한마디에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이다. 이들은 니고데모의 말에 답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니고데모의 말에 경청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