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길을 만들고, 바다가 시간을 품다
제주에는 눈으로 보는 풍경보다 마음으로 오래 남는 길이 있다. 신창풍차해안도로가 그랬다. 처음 그 길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맞아준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람이었다. 바람은 먼저 얼굴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흔들고, 이내 마음속까지 조용히 들어왔다.
길은 바다를 따라 유연하게 휘어진다. 검은 현무암 해안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맞닿고, 그 위로 새하얀 풍력발전기가 하늘을 향해 팔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날개는 쉼 없이 천천히 돌아간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 움직임은 마치 제주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닮아 있었다.
도시는 언제나 시간을 쫓는다. 신호등은 서두르라고 말하고, 시계는 늦었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이 길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자동차도 조금 천천히 달리고, 사람들도 걸음을 늦춘다. 바람이 빠를수록 사람은 오히려 느려지는 곳, 그 역설이 신창풍차해안도로의 매력이다.
차를 세우고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는 검은 바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하얀 포말을 피워 올린다. 수천 년을 같은 자리에서 밀려왔다가 물러간 파도는 한 번도 같은 모양을 만든 적이 없다. 사람의 하루도 그렇지 않을까.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모두 다른 표정을 품고 있다.
풍력발전기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조형물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생명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억지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순응함으로써 세상을 밝히는 힘을 얻는다. 사람도 때로는 삶의 바람을 이겨 내려 애쓰기보다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의 색이 조금씩 달라진다. 햇살이 비추는 곳은 옥빛으로 빛나고, 구름이 드리운 곳은 짙푸른 남색으로 가라앉는다. 같은 바다인데도 순간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쁨과 슬픔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에 비치는 빛의 차이일 뿐이다.
길가에는 낮은 돌담이 이어지고, 그 너머 초록 들판이 펼쳐진다. 바다와 들판 사이를 바람이 자유롭게 오간다. 그 바람은 꽃을 흔들고 풀잎을 일으키며 여행자의 옷깃까지 살며시 스친다. 제주의 바람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법을 안다.
한참을 걷다 뒤돌아보니 풍력발전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멀리서는 모두 같은 모습처럼 보였지만, 하나하나 바라보니 조금씩 방향이 다르고, 회전하는 속도도 달랐다. 같은 하늘 아래 서 있어도 각자의 바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저마다 다른 시간을 견디며, 다른 꿈을 향해 돌아간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바다는 황금빛을 머금었다. 흰 풍차는 붉은 노을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낮에는 바람을 그리던 풍경이 저녁에는 빛을 그리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자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그림을 완성하지만 어느 것도 서두르지 않는다.
문득 오래전 제주 사람들이 바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람은 농사를 어렵게도 했지만, 구름을 데려오고 바다를 살리고 섬을 숨 쉬게 했다. 삶도 그렇다. 힘든 시간이 때로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불어오는 모든 바람이 시련만은 아니다.
신창풍차해안도로는 단순히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었다. 바람이 에너지가 되는 곳이었고, 길이 풍경이 되는 곳이었으며, 자연이 삶을 가르치는 교실이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바다를 본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았고, 풍차를 본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생각했다.
여행은 낯선 곳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라고 한다. 신창풍차해안도로에서 만난 바람은 내 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 주었고, 끝없이 이어진 해안길은 앞으로 걸어갈 삶의 길을 조용히 비추어 주었다.
제주를 떠난 뒤에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진 속 풍경이 아니었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던 바람의 소리, 쉼 없이 돌아가던 하얀 풍차, 그리고 바다를 따라 천천히 이어지던 길이었다. 그 길은 지금도 마음속 어디선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람을 품고 살아가지만, 결국은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제주의 신창풍차해안도로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