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79]‘핸드폰 연하장’시대 유감
성탄절과 연말연시만 되면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 보내기에 정성을 쏟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그랬을 터. 이제 썰물처럼 사라진 풍습이라고나 할까? 이상한 일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어쩐지 안될 것같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내가 덜떨어진, 바보 천치임에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핸드폰에 문자나 카톡으로 대신한다. 한없이 편하다. 한꺼번에 수십 통도 보낼 수 있다. 교보문고나 문구점에서 카드를 골라 ‘손편지 인사’를 하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유명짜하던 카드사들은 어떻게 먹고 살까? 그것도 은근히 걱정된다. 청첩장이나 부고도 디지털로 제작, 휴대폰으로 보내면 그만이다. 이제는 아예 <마음 전하실 곳>이라며 은행 계좌번호를 명기한다. 솔직히 간편해서 좋기는 한데, 어쩐지 너무 노골적인 것같기도 하고 허전하고 찜찜하다.
그건 그렇고, 오늘 참 기분좋은 연하장 두 개를 전각예술가 친구로부터 받았다. 한 장은 작은 액자 안에 넣어 우편으로, 또 한 장은 카톡으로. 이건 정말 사정없이 고마운 선물이다. 너무 멋져 함박웃음이 절로 났다. 내년이 토끼해 계묘년이란다. 달나라 옥토끼 부부가 우리를 위해 불로장생하는 ‘약藥방아’를 찧는 모습을 돌에 새겼다. 이른바 ‘옥토도약 玉兎擣藥’ 작품이다. 소품이지만 정말 멋지다. 우편으로 받고, 카톡으로도 받았으니 '기쁨 두 배'였다. 금상첨화. 나와 아내의 이름까지 직접 썼으니 1년내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내준 이의 마음에 보답하리라. 인간을 넘어 월궁月宮의 토끼부부조차 우리 부부를 위해 약방아를 찧고 있다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 구절 '부부夫婦'의 한자를 '부부婦夫'로 쓴 까닭은 어느 집이나 '아내가 먼저'이기 때문이리라. 'Happy wife, happy life' 즉, '아내가 행복해야 내 인생이 행복하다'는 뜻이라는 시쳇말처럼, 요즘의 '남자들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인명재천人命在天)' 게 아니고 '아내들에게 달렸다(인명재처人命在妻)'는 데 무슨 말을 더하랴.
한때는 연하카드나 연하장 값만 10여만원을 넘기기 일쑤였다. 게다가 일일이 붓펜으로 사연을 달리해 밤을 새워가며 100여장을 쓰기도 했다. 존경하는 1945년생 선배는 고위공무원(문광부 차관보)이었는데, 해마다 1000여장을 직접 쓰느라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양반도 요즘엔 손뗀 적이 오래되었으리. 이 분에게 연하장을 받은 기분은 너무 유별나 삼삼하기까지 했다. 그게 어디 보통 정성이던가. 무릇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최소한’ 이 정도(성의와 정성)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나의 아내를 만난 것은 순전히 연하카드 덕분이었다. 친한 친구에게 보내면서 이왕 보내는 김에 친구의 여동생이 생각날 게 무어람! 그 친구에게 ‘야리꾸리’한 문투로 한 장 더 보낸 것이 사귐의 계기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무슨 멋이 들어 연필로 썼다. 기대도 안했는데, 답장이 온 것이다. 그 친구도 약간 ‘야리꾸리’한 문투였다. 야리꾸리한 문투라는 것은 어딘가 ‘여운’이 남았다는 뜻이다. 연필로 쓴 편지에 ‘속았다’는 푸념을 오래도록 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때는 서로 좋았던 것만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지금 내 아들뻘도 더 되는, 젊은이들은(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우리들처럼 ‘손편지’를 주고 받을까? 아니, 전혀 주고받을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런 시간낭비를 할 것인가? 아마도 없을 것같다. 세상은 오로지 손바닥만한 휴대폰 하나가 A에서 Z까지 커버를 하지 않는가. 편지 한 통 쓰겠다고 밤새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고민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지던 그 시절의 가슴 떨림, 설렘, 두근두근, 기다림 등등등등, 그런 장면이 ‘응답하라 1988’ 드라마에 여실히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 설렘이 없다는 것은, 어쩐지 뭔가 앙꼬 빠진 찐빵처럼 조금은 슬픈 것같다. 하지만, 트렌드가 그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사실 할 말도 없고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조금은 우리 삶의 어딘가에 ‘아날로그’가 조금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갸날픈 바람이다. 그런 바람과 희망사항을 어느 신문에 독자칼럼으로 쓴 적도 있다. https://www.khan.co.kr/opinion/readers-opinion/article/201112261038345. 오늘이 양력으로 섣달 그믐날이라고 책상에 앉으니, 무단시(매급시) 그 졸문이 떠올랐다. 손편지를 서너 통이라도 서로 주고받는다면, 어쩐지 세상이 조금은 ‘물기’가 있어 우리네 삶이 촉촉해질 것같다는, 윤택해질 것같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전 조선의 선비들은 ‘척독尺牘’이라는 고유의 문학양식이 있었다. 척독은 오늘날의 엽서에 쓰는 짧은 글이거나, 더 현대적인 오늘날의 트위터 등 SNS에 해당할 것이다. 그 척독에는 멋과 풍류가 담겨 있었다. 속된 말로 ‘주고받는 편지 속에 싹트는 우(애)정’ 이런 것이었으리라. 척독이 사라진 현대는 삭막하다. 쓸쓸하다. 생각해 보라. 지금 당장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세상과 불통을 넘어 '완전 절연絶緣'되는 게 명약관화하다. 그 멘붕은 오래, 길게 가지 않던가. 그러니 이게 될 말이고 될 일인가? 아들 딸의 전화번호는커녕 아내의 전화번호만 외워도 괜찮다. 집전화가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주머니속에 전화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지청구를 주겠지만, 왕년에는 30개를 넘어 50개 전화번호도 너끈히 외웠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목적지를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하지만 예전엔 전국지도, 도별 지도는 운전자에게 필수품이었다. 내비는 우리 모두를 ‘길치’로 만들어버렸다. 지도를 파는 회사의 흥망성쇠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섭게 변하고 있는 세상이, 나는 왜 두려운 것일까? 왜 나는, 나훈아의 노랫말처럼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죽어도 오고마는 또 내일이 두려운’ 것일까? 아지 모게라!
Happy new year! Welcome to 2023!
첫댓글 몸매를 보니 MZ세대 토끼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