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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건승을 기원하오며 삼가 졸문 1편을 올리오니 笑看 하시고 참고 삼기를 빕니다. 이 글은 조선일보 2018년 3월 7일자에 게재된 ‘필자 선우정부장의 글’의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참화인 임진왜란 직전 1590년 3월초 일본 통신사로 가서 1590 6-11월까지 일본에 머물다 1591년 3월초 귀국보고를 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의 귀국보고의 진실에 대하여 필자가 아는 바를 밝혀 저간의 잘못된 인식을 다시 살피고자 쓴 것입니다. 3월23일 필자가 정중히 전화하며, 사회부장이어서 이명박 사건으로 너무 바빠 반영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찾아보겠다고 합디다. 시비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성찰해보자는 것이니 惠諒 바라나이다.
김 도 현 올림 |
기사 정정 청구
귀 C일보 2018년 3월 7일자에 게재된 ‘필자 S의 글’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은 死者 김성일과 저를 포함한 후손과 그 학맥을 이은 여러 인사들의
명예를 훼손 하였슴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정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귀지의 영향력과 절박성에 비추어 3월 23일까지 조치와 회답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정정요청의 이유와 근거는 아래 ‘C 사회부장께 올리는 서신’으로 대체합니다.
다 음
[선우정 칼럼] "잘못된 報告가 나라를 그르쳤다"
특사단의 부사(副使)로 참여한 학봉(鶴峰) 김성일이다. 그에 대한 문책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정세를 오판한 무능력자로 지금까지 손가락질 받는다.
2018.3.16.
청구인 : 김도현 (김성일의 15대손)
주소 : 서울 강서구 초록마을로 128 (전화 010 6596 7589)
메일 : dododohk@naver.com
수신 : C 발행인, 편집인, S 사회부장 귀하
C 사회부장님께 올립니다.
김 도 현 올림
부장님의 애국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3월7일자 조선일보 칼럼을 읽고, 부장님의 史實 이해와 논리전개가
부장님의 애국열정을 저어할까 하여 저의 소견을 몇 말씀 드리오니
참고하셔서 바로잡으셨으면 하는 충정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사료읽기*
부장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의견과 "(전쟁의) 정세를 보지 못했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그러나 부장님은 다음으로 읽고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반드시 전쟁은 안 일어난다.”
부장님이 읽은 사료를 봅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1일 조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①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②‘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①+②]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①+②]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③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④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⑤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하였는데,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 시키는 것이다.’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하였다.
回泊釜山, 允吉馳啓情形以爲: "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 上問秀吉何狀,
允吉言: "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 蓋誠一憤允吉等到彼恇怯失體, 故言言相左如此。 時, 趙憲力攻和議策倭必來,
故凡主允吉之言者, 皆以爲西人失勢, 搖亂人心, 區別麾斥, 以此廷中不敢言。
柳成龍謂誠一曰: "君言故與黃異, 萬一有兵禍, 將奈何?"
誠一曰: "吾亦豈能必倭不來? 但恐中外驚惑, 故解之耳。
다음과 같이 자세히 읽어 봅니다.
윤길은 ①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며[전쟁발발의 근거와 시기 등을
보고하면서] “②전쟁이 반드시 있다.” 라고 하였다.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같은 내용을 말했다. “성일은 그러한 정형[①+②]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윤길이 ③장황하게 아뢰어 ④민심이 동요되게 하니 5사의
[사태에 적절하게 대응함]에 매우 어긋납니다.” 라고 하였다.
즉 윤길은 ‘①전쟁 발발의 근거와 시기 등(사실보고)와 +②필유병화(의견)’를
말했습니다. 성일은 ‘①전쟁 발발의 근거와 시기 등+②필유병화’를 못
보았다고 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사[유성룡과의
대화와 후술하는 이항복의 회고]를 보면, ②전쟁의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①전쟁 발발의 근거와 시기’에 대한 윤길의 말을 부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②전쟁의 가능성과 윤길이 ①말한 근거와 시기 두 사안을
나누어서 보아야 합니다.
情勢와 形象을 못 보았다고 체험한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①전쟁 발발의 근거와 시기’의 내용을 기록한 ‘전일의 치계’에 대한 사료는
현재 전혀 존재하지 않고, 최대한 사료를 찾으면 다음 3가지가 있습니다.
(1)선조실록30년 1월23일조
(2)선조실록 선조33년 1월29일조
(3)서애집.
즉 (2)는 윤길이 전쟁이 일어난다고 본 근거이고,
(1) (3)은 전쟁 발발 시기에 대한 것입니다.
(1)은 전쟁 발발 6년 뒤 선조의 회고담으로 “황윤길은 왜적이 우리사신의
(2)발자국을 밟으며 온다(接迹而來)”고 한 전쟁 발발 시기에 대한 기록이고,
(2)는 전쟁 발발 9년 뒤 이항복이 선조 앞에서 말한 회고담으로 “윤길이
우리 배 보다 큰 적선이 매우 많다고 했는데 싸움터에서는 못 보았다”는
황윤길이 전쟁준비로 보았다고 거론한 기록입니다.
(3)은 유성룡이 김성일과 나눈 대화를 아들에게 전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황윤길이 적이 우리사신의 발뒤꿈치를 밟듯이 온다(似若倭踵使臣而來)고
말하니”인데, 황윤길이 전쟁 발발 시기를 말한 것입니다.
흥미 있는 것은 선조와 유성룡이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
“황윤길이 왜적이 사신의 ‘발자국’ 또는 ‘발뒤꿈치’를 밟으며 또는
밟듯이 온다”고 말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즉 전쟁발발이 ‘발’과 ‘밟다’란
단어를 공통적으로 기억해 내면서, ‘발자국’ 또는 ‘발 뒷굼치’를 ‘밟고’
또는 ‘밟듯이’온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訒齋集(崔晛)의 기록을
살피면 “어전에서 유성룡은 김성일이 ‘일본사신이 돌아간 뒤에야 움직일 것이고,
금년 안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보고가 아닌 의견[以爲 必有兵禍]입니다.
②‘필유병화’를 김성일이 전면 부정하지 않았다는, 즉 부분부정이었다는 근거는
유성룡이 김성일과 나눈 대화의 기록에서 명백합니다. 이 기록은 다음 사료를
보면 선조 앞에서도 진술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왕 앞에서 말한 사실이
없는 것을 ‘탑전’에서 말했다고 거짓으로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事實은 후일 선조가 패전책임의 회피를 위해 ‘김성일이 왜적이
절대 오지 않는다’ 등으로 기억을 왜곡 표현하고(기억을 입력 저장 인출하면서
인출시점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하여 인출-말하게 되는 보통사람에게
있는 심리학적 현상) , 이를 기록왜곡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이에 당시 책임 있는 조선조정 신료 들이 동조합니다.
[예컨대 최근일이지만 6.29선언에 대하여 전두환 노태우 두 전대통령을
일시와 상황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음이 각자의 회고록에 나타난다)
최 현(崔晛 1563∼1640)이 쓴 『인재집』
왕이 정원에 말하기를 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왜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여
대비를 소홀히 하여 이러한 적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승 유성룡이
탑전에 나아가 말하기를 “성일이 일본에서 돌아 왔을 때 소신이 직접 물어
보기를 ‘왜적이 올 것인가?’ 하니, 성일이 대답하기를 ‘왜가 끝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움직인다 해도) 회례사(현소일행)가
돌아간 뒤에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곧 바로 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심을 요동시킵니다. 이것이 그가 금년에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上下敎政院曰。誠一還自日本。嘗言倭不足憂。使邊備疏虞。致此賊變。予將鞫之。
其令禁府拿致。柳相成龍。於榻前進言曰。誠一之回自日本也。小臣親問曰。
倭賊其來乎。誠一答曰。某非以倭爲終不來也。謝使回還。乃敢動兵。
或云隨後卽至。以動人心。此某之所謂今年不出云爾。
김성일의 이와 같은 언사가 나오게 된 경위를 아는 데는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주도한 이식의 글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들(일본측)은 바야흐로 (우리사신을) 업신여기고 사나운 쪽으로 방향을
돌려 온갖 형태로 날 뛰었다. 동행한 여러 사람들은 겁에 질려 지조가
흔들리니 저들은 점점 더욱 우리를 깔보았다. 선생(이하 김성일)은
일개 부사로서 그 사이에 꿋꿋하게 서서 결연하게 예로서 자신을 지켰다.
격분하지도 않고 꺾기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저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넋을 잃어버리게 하여 스스로 자기의 종을 죽여서 사죄함에 이르렀으니
당시 일행 가운데는 오직 선생만을 의지하였을 뿐이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보고할 때 동행한 사신들이 저들에게 유순하고 나약하게 대처한 치욕을
호도하기 위하여 적정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선생은 그들과 더불어
서로 논란하다가 말이 좀 지나쳐, 드디어 책잡힌 것이다.
요컨대 적의 실정에 모두 밝지 못했기 때문이고 조정이 애당초 선생의
말씀을 받아들여 방비를 철수하고 도적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 이상
그 형세가 기울고 사정이 긴박하여 미쳐 조처할 겨를이 없어서였지,
그것이 선생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해사록 발)
새로 요약합니다.
정사는
1.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2.발발 시기는 초 임박했고
3.그 근거는 ‘적선이 우리 배 보다 크고 많은 것을 보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사는
1.왜가 끝내 오지 않지는 않겠지만(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2.그 시기가 우리 사신의 발자국(발뒤꿈치)을 밟으며(밟듯이) 일어나는 것
(일본사신이 국내에 있는 동안 금년1590년에 왜가 침략하려는 것)과
3.그 근거로 말한 우리 배 보다 큰 적선이 많은 것은 못 보았는데,
4. ①정사의 설명은 장황하며, ②이것이 민심의 동요를 불러오니,
③사태에 대한 마땅한 대처와는 거리가 멀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둘 또는 셋 또는 넷, 다섯으로 나누어 기술해야 할 명제를
하나로 묶어서, ‘부사는 전쟁은 안 일어난다고 말했다’ 로 묶는 것은
논리 전개의 오류이고, 과잉단순화로 전체로는 모순된 명제가 됩니다.
3. 실제로 통신사 일본체류기간에는 침략준비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통신사가 이를 관찰할 수 없었습니다. 부사는 못 본 것을
못 보았다고 진실을 보고했습니다.
통신사들이 일본에 체류한 1590년 6월-11월 기간에 豊臣秀吉은 내전의
마지막 전투와 궁실 수리 중이었습니다. 어떤 침략전쟁준비도
일본에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신은 이를 관찰하거나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전쟁준비는 사신이 일본을 떠나 조선에 와서 귀국보고를 한 3월초보다
6개월 뒤인(윤3월이 있었음) 1591년 8월6일 수길의 아들이 급사한 이튿날
명 침략결의를 측근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鹿苑日錄1591.8.6.-北島万次
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재인용) 물론 수길이 대륙침략야망을 발설한 것은
훨씬 전부터 있었지만, 과연 그 야욕을 토로한 수길이 부인 北政所에게
쓴 편지, 예수회소속 선교사에게 한 말, 대마도주에게 보낸 朱印狀 등을
보거나 알거나, 그 실현 가능성을 믿은 사람이 과연 일본 안에서도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후로이스, 일본사) 우리 사신이 그러한 정보를
접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못 본 것을 못 보았다고
보고하는 것은 진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다만 김성일이 京都의 舟山에 올라 일본 국도를 내려 보고 쓴 시에
수길의 호전성을 말하며
“예로부터 (전쟁을)안 그치면 스스로 불타는 법/
일본 안에서 겨룰 자 없다고 자랑 말라/
시 지어 오랑캐 왕 경계시켜 주려하나” 라고 하고,
친교를 나눈 일본 고승 宗陣이 그에게 준 시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정벌이 없기를 다시금 바라네(更冀無征伐)” (해사록)
이것이 수길의 야망을 뜻한다면, 이 구절을 읽고 우려는 했겠지만
조선침략으로 연장될 것을 단정 확신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은
통탄 스럽지만 사실일 수 있습니다.
정사의 전쟁 초급박 주장은 “황정사가 일본사행 중 대표책임자로서
恇㥘失體한 자기의 과오들을 엄폐하려는 행위”(李佑成교수)란 지적이
있기도 하고, 북인이 주도한 선조실록과 서인이 주도한 선조수정실록에
황정사의 사행활동을 비평한 기사가 있지만, 황정사가 신비로운 직관·감각·
예감으로 초임박한 전쟁 가능성을 확신하고 이를 진술했다면 이는 ‘체험한
사실을 보고한다는 보고’와는 다른 차원의 豫知 豫言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4. 부사는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실을 말했습니다.
부장님은 ‘그(김성일)가 민심 동요를 우려해 본심과 다른
의견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통신사보고의 동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趙憲의 상소문에는
‘사신들이 부산에 도착하자 즉시 올린 치계(선래역관이 가져온
수길의 답서와 정사의 보고문)가 호서, 호남에 전파되어서
사류는 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백성들은 모두 들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보고서 내용이 전부 유출되어 민심이 들끓었다는 것입니다.
김성일은 상경 길에 그 현장들을 당연히 목격하고 심각히 고민했을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바 이항복은 어전에서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김성일이
깊이 걱정하며 ‘남쪽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큰말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혹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그의 말은 이를 염려한 것이니
어전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잘못 전달된 것일 것입니다(必爲誤達也).”
(선조실록 선조28년 2월6일)
‘김성일이 본심과 다른 의견을 말했다’가 아니라
‘본의와 다르게 전달되었다’ 입니다.
5 보고는 전쟁대비 여부를 결정한 최종보고가 아니었습니다.
부사의 보고로 대비를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부장님은 “그러다 무방비로 일본에 당했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통신사의 복명보고는 전쟁 대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여부를 결정한
임란 전 최종보고가 아닙니다.
계속 추가로 정보를 확인해야 할 최초첩보입니다.
직접적으로는 바로 통신사가 가져온 수길의 답서에 明 침략의도가
명백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답서를 김성일은 일본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항의·요구하여 일부는 고쳤으나 중요대목은
좌절되었습니다. 정사와 서장관은 玄蘇의 기만적 해석을 수용하자고
주장하며 부사의 요구를 묵살하였습니다.
조선조정 또한 수길의 답서를 받아 보고 침략의도를 분명히 읽고
답서를 보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1일)
선위사 吳億齡이 현소 柳川調信이 말한 침략의도를
조정에 보고했습니다.(선조수정실록 선조3월1일)
어전보고 뒤 황윤길과 김성일은 왕명과, 비변사의 ‘갈구리로 파듯
자세히 알아보고[鉤察情形] 대책을 세우라’[以備策應]는 의론’에 따라
현소와 면담하고 침략의도를 다시 듣고 이를 꾸짖었습니다.
당연히 조정에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윤3월1일. 징비록)
다시 宗義智가 침략의도를 우리 변장에게 통고했고
이것도 보고되었고 (선조수정실록 5월1일),
明에 이러한 사실들을 알리는 陳奏과정에서 명도 알고 있음이
여러 차례 확인되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4 5월 10월1일).
따라서 통신사 보고 때문에 전쟁대비를 못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명에 대하여 조선과 일본의 내통설을 해명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후일 명 원군엔 도움이 되었지만), 일본의 전쟁동향에 대한
추가 정보수집과 확인이 없었음은 통분 스럽지만 사실입니다.
전쟁을 막진 못 했지만 피해를 줄이기는 했을 것입니다.
6. 조선도 나름대로 대비했습니다. 초기 패전은 군사력 격차 때문입니다.
무방비로 일본에 당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조선도 나름대로
李舜臣 權慄을 절차를 뛰어넘어 발탁하였고 성지를 구축하고 병기를
점검하는 등 나름대로 대비를 했습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은 인구에서
4배 이상 경제력에서도 그 이상 차이가 났고, 일본의 육군은 50만에
달하는 전문무사이고 100년에 걸친 실전경험을 가졌고 군수병참을
전문 대상인이 담당하고 철포 등 서양식 무기를 실전 사용한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요컨대 국력 군사력 격차로 초기 패전은
불가피 했습니다. 明이 淸에게 지고 秀吉이 家康에 지고 唐나라
隋나라가 高句麗에 패배한 이유는 군사력 차이입니다. 정유재란
병자호란은 왜 당했습니까? 6.25 진주만기습도 사전에
정보를 갖지 못했습니다. 캐네디는 1963년 11월 월남을 다녀온
외교관과 장군에게 같은 나라에 다녀왔느냐? 고 물었고
(케네디도서관비밀녹음테이프-서울신문 2012년 1월26일),
미 CIA는 1950년 6.25발발과 중공군참전에 대해
여러 차례 오보를 올렸습니다.(미국CIA의오판자기비판보고서-
연합통신 2010년 6월17일). 요컨대 첩보와 정보엔 있다 없다가
상존 혼재하고, 추가확인을 통한 판단은 최고결정자의 몫입니다.
보고자에게 책임을 묻고, 더구나 정직한 정보를 후일 오보로 몰아
책임을 묻는 것은 안보판단의 금기일 것입니다.
7. 부사는 개관적 구체적 보고를 했고 정사는 주관적 의견을 말했습니다.
부장님은 “똑같은 장면을 본 정사(正使) 황윤길은 도요토미에 대해
‘눈이 반짝이고 담력과 지략이 있다’고 했다. 학봉은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했다.”라고 하며,
학봉의 ‘편견’을 나무랐습니다.
눈이 반짝인다는 것은 주관적 인상비평입니다. 수길의 용모를 ‘원숭이’
‘털빠진 쥐’[猿、禿げ鼠]로 불렀다는 것은 그의 상전 織田信長부터
시정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유명한 사실입니다. 김성일의 관찰은
편견이 아닌 객관적 구체적입니다. 다만 ‘담력과 지략이 있어 보인다’‘
두려워 할 위인 여부’는 관찰자의 주관입니다. 정 반의 다양한 첩보와
견해는 정확한 정보를 추출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청자가 화자를
객관화하여 새로이 인식해야 할 점입니다. 정사의 주관적 견해가
김성일이 “황윤길 허성의 일본에서의 처신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포사怖死’ ‘파사怕死’ 두 글자 때문에 온갖 실수가 나왔다”고 평한
연장인지, 황윤길의 직관과 통찰 인지는 역시 화자에 대한 청자의
평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보고와 판단을 구별해서 본다면, 보고는 김성일이 진실한 첩보에 가깝고
판단은 각자의 주관이므로 청자들이 화자를 평가하여 다시 인식할 것입니다.
전쟁발발시기에 대한 판단도 정사보다 부사의 판단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지금까지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근거 없는 학설 아닌
부장님은 “그들의 당파성도 나라의 운명을 비틀었다”고 하며, ‘보고와 당파성’
‘정 부사선발과 당파’를 연결시켰습니다. 정사 부사가 오늘의 여당 야당처럼
발탁되고, 보고 또한 당론에 따르고, 의견도 그렇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추측입니다. 당시에는 국위선양을 의식하여 글 잘하는 사람위주로
선발했다. 황윤길은 글잘하는 것으로 선임되었고
(允吉本鄙人 以辭華應選使价非其任也 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1일),
제술관 車天輅는 시, 사자관 李海龍은 글씨로 당대 최고로
선조가 직접 선임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2월3일). 이런 기록은 있지만
당파가 고려되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황윤길은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명 변무사 서장관 병조참판을 지내고
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에 특수하였으나 미취이졸’이라고 비문에 쓰인
(실록등에서는 확인 안 됨)명문출신으로 사신 결정 때 첨지 당상관입니다.
(귀국후 행적이 묘연하였는데, 장수황씨족보 소재 비문에 의하면
‘후손이 강원도 양구에 잠적하여 옛 족보에 후손이 없는 것으로
기재되었으나 최근 확인되어 1995년 墓儀를 갖추었다’고 함)
김성일은 退溪가 선조에게 천거한 고제로 중국사신을 다녀왔고
함경도순무어사로 국경의 국방현장을 체험한 사성 당하관이었습니다.
서장관 許筬은 부친 許曄 형제 許葑 許筠 許蘭雪軒 등 허씨5문장으로
이름난 천재집안출신으로 통신사 논의가 분분할 때 사신을 보내는 것이
유익하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는 동인으로 분류되었지만 서인으로
분류된 정사와 모든 사행 처신을 함께 했습니다.(허성은 이후 明 사신
예조 병조판서를 역임) 황 정사 허서장관은 명문관료출신으로 재지산림
출신아라고 할 김부사와는 당파 차이보다 처세관 학맥의 차이가 사행대처의
차이로 나타났고 이것이 보고의 차이로 연장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정 부사 보고의 차이를 당쟁과 결부시킨 것은 조선시대에는 없었고
(安邦俊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金時讓(1581-1643)이 김성일을
비판했지만 안은 서인 김은 남인으로 분류됨),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시작했습니다. 당쟁이 원인이라면, 정사가 먼저 전쟁이 없다고 말했다면
부사는 전쟁이 있다고 했을 것이란 말입니까? 설사 어떤 의견판단이
맞고 틀리고 간에 자기의 의견 판단을 말한 것이지 오늘날 정당 당론을
따르듯 보는 것은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조선의 패망이 민족성당쟁
때문이라는 일제 식민사관에 오늘 우리가 당쟁이 있었던 조선시대보다
알게 모르게 깊이 젖어서야 되겠습니까? 동인으로 분류되는 허성은
서인인 황윤길과 사행의 모든 처신과 보고의견을 일치했고, 실록기록에
보이는 바, 김성일의 민심안정론을 옹호한 李恒福(1556-1618)과 김성일의
사행기록인 ‘海槎錄’발문에서 김성일이 일본사행의 전범이 되었다고 쓴
李植(1584-1647) 또한 서인으로 분류됩니다.
9 통신사 파견은 풍신수길이 대마도에 조선왕을 내조시키라고 강박한 것을
대마도가 일본신왕축하사절 요청으로 바꾼 대마도의 속임수외교의
간청에 응하여 결정되었고 정세탐색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명령을 받고 일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을 '복명(復命)'이라고 한다.
대북 특사단의 복명은 옛 대일 특사단의 복명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어제 밝힌 그들의 복명은 학봉의 평화론보다 시대착오적이다.
부장님의 이글을 사료에 비추어 다시 봅니다. 당시 통신사에게 지워진
사명은 정세탐색이 아니었습니다. 후일 왜란이후에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없었음은 사료에서 명백합니다.
수길의 조선왕 服屬來朝 요구를 경제를 대마도에 의존하는 대마도가 생존을
위해 궁지에 몰린 나머지 일본신왕 축하사절 요청으로 바꾸고, 叛徒 沙火同
압송과 피로인 쇄환이란 조선의 요구조건을 실현하면서 사신파견을 간청한
속임수외교에 속아서 응한 것입니다. 조정의 중론은 일본신정권이 무력으로
등장하여 ‘예의의 나라조선의 귄위를 빌리는 借重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조실록,선조21년 2월3일. 22년 8월1일) 왕명이나 통신사활동 어디에도
일본정세탐색은 없었습니다. 통탄스럽지만, 일본정세파악에 관심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 당시 조선왕조 전체의 한계였습니다.
10. 선조와 조정은 패전책임의 희생양으로 ‘김성일 보고’를 삼았습니다.
김성일은 안일한 평화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김성일은 귀국 뒤 3차나 차자를 올려 내정개혁을 통한 민생민심안정 국방력
강화를 주장했습니다. 왕 측근의 비리, 관리의 수탈, 貢賦 軍役 防納 국방비리
등 時弊를 가차 없이 고발하며 개혁을 호소했습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11월) 그는 북풍한설 속에 국경최북단 함경도의 국방현실을
살폈고, 일본사행중 결연히 일본 關白은 僞皇의 신하이지 조선 왕과
대등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庭下拜 대신 楹外拜를 관철시켰습니다.
안일한 평화론자가 아니었습니다.
11.국정책임자와 국민은 ‘희생양 사냥’이 아닌 국력과 군사력에
안보의 기초를 찾아야 합니다.
저의 이 짧은 글은 타의가 없습니다. 孫子의 말처럼 자고로 兵은 국가 존망이
걸린 대사입니다. 국력과 군사력 그리고 국민의 신뢰가 핵심입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선조와 함께 책임져야 할 조정이 임란초기의 패전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으로 ‘김성일의 보고’를 삼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김성일의
전쟁가능성 부분부정을 전면부정으로 바꾸는(賊未易至징비록→
賊必不能來실록)기억왜곡(autobiographical memory)이 일어나고
기록왜곡으로 이를 굳히고(실록의 임란보고관련 기록은 징비록과 표절이라
할 만큼 표현이 정확히 일치하는데 김성일 책임과 관련해서만
변조되어 있음), 다시 일제식민사학이 일본의 침략 조선의 패망을
침략보다 조선의 무능에 책임을 돌리려고 만든 민족성당쟁론이
이를 확대하고, 해방 뒤 지금에 이르도록 대결적 정쟁에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를 왜곡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제 16대 대통령선거에서 1971년 4월17일 대구수성천변 유세장에서
박정희후보는 김대중후보를 공격하기 하는데 이 예화를 인용했다.동아일보
1971.4.19. 그 뒤 공화당 대변인 김창근은 영남유림에게 사과하고, 김성진
공보부장관은 사과의 의미에서 김성일 제향서원인 임천서원 중수비를 정부가
지원하도록 했다.) 임란통신사 보고의 당쟁론적 해석은 史實오인,
사실과 논리의 과잉단순화, 논리오류가 가득한 속류 평론 정객의 주장
시사잡담 대중설화의 좋은 재료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12. 세상은 김성일을 부장님과 달리 봅니다.
부장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특사단의 부사(副使)로 참여한 학봉(鶴峰) 김성일이다. 그에 대한 문책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정세를 오판한 무능력자로 지금까지 손가락질 받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김성일은 임란을 만나 초유사 관찰사로 “충의가 분발하고 어리석은 남녀도
눈물을 흘릴” 초유문으로 의병을 초모하고(선조수정실록 선조26년 4월 1일),
“관군과 의병이 갈등했지만 김성일 만은 요령과 조화를 얻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1일),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입구에 웅거하고 김성일 등은 진주관요를
지켜 2도의 함락을 막아 국가가 이 두 도에 의지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1일)는 전공을 세우고, 진주 “군막에서 죽으니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 김성일은 옛날의
遺直이라 할만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4월1일)
김성일은 선조의 계속적 폄하에도(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 12월27일,
선조 28년 2월6일, 선조 28년 6월10일, 선조 36년 8월19일)불구하고,
직신으로 殿上虎(대궐의 호랑이)란 별명을 얻어, 당대 뿐 아니라 후대까지
회자되었습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2년 5월1일. 인조실록 인조 24년
11월18일. 숙종실록 숙종 5년 9월15일, 숙종17년 10월5일,
영조실록 영조 16년 7월8일, 영조18년 1월11일, 영조28년 7월12일)
1609년 8월23일 왕(광해군)이 賜祭文을 보내어 이렇게 기렸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사신을 가자 섬 오랑캐 혼이 모두 달아났다네, 몸 내던져
싸움터를 누비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네”. 鄭經世는 “지난날 공이
겪은 어려움 하늘이 어찌 공을 막은 거겠나 뜨거운 불로 옥을
불태우면서 공의 덕을 시험하여 본 거였다네”(신도비명)라고 신고에 찬
일생을 말했고, 鄭球는 “덕행과 勳業은 백대에 빛난다”(묘방석)고 했습니다.
1689년 숙종은 시호 文忠公의 諡註를 ‘道德博聞 曰 文 危身奉上 曰 忠’
이란 최고수준으로 내렸습니다. 경상 전라 9개 서원(안동 호계 사빈 임천,
의성 빙계, 나주 경현, 하동 영계, 진주 경림, 영양 영산, 청송 송학)에
위판이 모셔졌습니다.
퇴계는 그를 “行高學精”하다고 했고(퇴계언행록), 李家煥은 “천만인을 대변한
公言, 천만인이 두려워 못하는 말을 한사람이 말한 公言”(금대유고)을
그가 했다고 썼습니다. 李玄逸은 퇴계의 衣鉢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직손 방손 친인척 가운데는 李相龍, 金東三, 金昌淑, 金興洛 등 우리
독립운동원훈을 포함하여 100여명이 독립운동유공자에 서훈되었습니다.
李佑成은 ‘의병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역사를 이어온 공론을 몇 자의 글로 뒤엎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13. 안타깝습니다. 글을 바로 잡으십시오.
안타까운 것은 豊臣秀吉의 칼빛 번득이는 사지에서 포사 파사의 겁에 질린
사신 일행 가운데 홀로 외롭게 조국의 위엄과 대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종내에는 왜적과의 싸움 가운데 순국한 분이 당하는 훼예 때문이 아니라,
진정 위중한 국가안보 담론이 誣說과 왜곡된 당쟁론적 역사인식에 기초한
책임 떠넘기기 희생양사냥으로 성찰 없이 반복되면서 올바른 국가위기
관리와 국론조성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는 현실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장님이 글 말미에 쓴 “편견, 당파, 비겁. '실보오국(失報誤國)'은
옛말이 아니다”는 것은 김성일의 일생 일본사행과는 정반대의 사실입니다.
14. 김성일과 조선의 시대적 한계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大航海시대의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華夷질서의 동요,
일본의 국력과 군사력에 대한 인식,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일본의 병가적
무사의 사고의 차이 등등에 김성일의 이해 부족을 지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도 넘지 못한 조선의 한계였습니다. 또한 사신단이
일치단결하여 김성일과 함께 따지고 지켰다면 수길의 진로를 변화시키고
(이우성교수), 또는 김성일이 정사 서장관을 설득시켜 보다 과감하게 대마도
속임수외교를 폭로시켰다면 사신단은 옥쇄할 수도 있겠지만 수길의 야욕을
파탄시켰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애국애민, 誠信의 외교노력, 無畏의 용기, 강직한 실천을
당쟁적 보고의 장본인으로 폄하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이 잘못은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넘는 명예훼손입니다.
오늘날 다시 이 문제를 주목하고 명확히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과거 또는 개인의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 엄중한 안보관의 기본을
재인식하기 위해서이고, 지난날 한일합방조인의 날 寺內통감이 하늘을 우러러
풍신수길을 기리고, 일본의 세계와 한국을 향한 침략이 풍신수길의 임란을
원류로 하고 있음을 상기하고, 安倍 일본 총리가 올해 명치유신 150주년을
맞아 세계와 한국침략질주의 출발인 명치유신을 새롭게 찬양한 현실을
상기해서입니다.
(본의 아니게 실언 결례가 있다면 용서를 비오며, 저의 생각과
이 글은 진실에 당면하면 언제든지 수정 사과하겠습니다.)
부장님께서 필요하시면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임란의병과 진주대첩)
https://youtu.be/RgZEm0TzuEo?list=PLE4RbyH4Xm17CHYv93SBMFT-roA3ayh7e
(임란직전 경인통신사행과 귀국보고 재조명)
https://youtu.be/2Mcp8yvWpAc?list=PLE4RbyH4Xm16SvEv1UmnqQO12JA8ZwSW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