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1
12월26일[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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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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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젊디젊은 부제 스테파노의 놀라운 신앙과 신심은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저마다 손에 큼지막한 돌 하나씩 들고 달려온 살기등등한 수많은 적대자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러서 있던 적대자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던진 돌에 한 번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살벌한’ 눈싸움을 하던 중, 큼지막한 돌에 맞아 잠깐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돌에 피가 철철 흐르고,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에게 날아온 돌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수십 개, 수백 개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형방법입니다. 하나하나 맞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과 신음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무수한 돌팔매질을 온몸을 향하는 와중에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가 바쳤던 위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바치셨던 예수님 기도와 거의 흡사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100%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대자들의 끔찍한 돌팔매로 인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가운데서도 스테파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어이없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스테파노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어떻게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그처럼 당당하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순교자들의 당당한 죽음, 그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뵙듯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온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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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그리스도교가 빠르게 확장되어가면서 사도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했던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의 연장이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외쳤으며,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사도들의 하루 일과는 잘 나가는 연예인 못지않은 바쁜 스케줄로 꽉 차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연스럽게 복음 선포의 보조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자질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여겨보았고 동역자로 발탁했습니다.
선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 3가지는 ‘신앙심이 깊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또한 지혜로움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스테파노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한 스테파노는 예수님께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의 복음에 깊이 심취하고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젊음과 열정, 혈기왕성함을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 제2의 예수 그리스도화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스테파노는 그 어떤 사도 못지않은 열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스테파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 그리고 탁월한 능력,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으로 충만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사도들 못지않게 마치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불치병자들을 치유하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변이 대단했던 스테파노는 논리정연하고도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스테파노의 말씀과 행적에 감탄하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스테파노의 대단한 모습에 유다인들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큰 위기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대 ‘말빨’ 세기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던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로부터 교묘한 변증법도 배워 익혔습니다. 율법학교에서 갈고 닦은 율법과 전통에 관한 지식도 대단했습니다. 그밖에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설교 기법, 대화법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판정패도 아니고 1회전 KO패였습니다. 워낙 탁월한 언변을 갖춘 데다 지혜롭지,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사람들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논리가 딸리는 사람들, 기초가 덜된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억지요, 고집이요, 폭력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들이 선택한 것은 불법이요 권모술수였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서 유다지도층 인사들에게 가서 스테파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거짓 증언을 하게 합니다. 그 결과 스테파노는 의회 법정 앞으로 끌려갑니다.
이미 분위기는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과도 같은 각본으로 인해 스테파노의 목에는 꼼짝달싹하지 못할 죽음의 올가미가 걸린 것입니다. 잔인하고 무고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스테파노는 직감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 앞에서 스테파노가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였지만 단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 유명하고 통쾌한 ‘유다 의회 앞 스테파노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의 설교는 차분하고 논리정연했습니다.
오늘 우리 앞으로도 논쟁을 벌이기 위해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그때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지니고 있었던 당당함입니다. 황당하고 어불성설인 그들의 논리에 맞서기 위한 논리 정연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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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저희 성당은 성탄절 미사 때 구유경배를 하고 아기 예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사탕을 하나씩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저도 성탄 밤 미사 때 이런 구절을 뽑았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르 7, 14-15)
제가 죄가 많은 사람인 것은 알지만 이 말씀은 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다른 것을 하나 더 뽑았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 3)
두 구절을 연결시켜보면, ‘죄를 짓지 않고 자신을 깨끗이 보존하면, 성령의 수액이 흘러넘쳐 많은 열매를 맺고 하는 모든 것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스테파노 축일을 맞이하면서 ‘하는 모든 것이 잘된다.’는 의미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연말이 되고 하니, 몇몇의 신자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비롯해 집 안에 안 좋은 일들이 많아서 하느님을 의심하고 그래서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성당 다니면 모든 일이 잘 될 줄만 알았는데 반대로 더 안 좋아지니 집안에 우환이 겹치면 하느님은 안 계신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는 어떤 신자분들도 비신자들에게 성당 다니면 돈도 적게 들고 집안도 잘 된다고 설득하기도 한답니다.
또한 전에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사치에 대해 매스컴에서 한창 때릴 때, 유명한 한 대형교회 목사님은 다윗의 예를 들면서, 그가 양치기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을 알면서 왕도 되고 부자도 되고 자녀도 많이 낳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하느님의 은총인 양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스테파노 첫 순교 축일을 그리스도 탄생 다음 날 지내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하신 것이 세상의 평안과 부귀공명이 아님을 명확히 일러줍니다.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또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제 영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또 “저들이 하는 일을 자신들이 모르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하신 것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기 마련입니다. 스테파노는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가말리엘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똑똑한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되고는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불명예스럽게 요절하게 되고 아마 그 가정도 미움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스테파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의 눈으로 보아서 잘 안 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보십시오. 그 분이 의사로서 잘 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앎으로써 가난한 나라로 가서 고생고생 하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으나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거지 옷을 입고 밥도 빌어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로마 제국도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국교로 삼으면서부터 급격히 퇴락의 길로 들어섰고 오히려 다른 민족들의 침입을 받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된다는 것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신자들이 삶이 어려워지면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그런 것입니다. 스테파노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이태석 신부님이나 모두 빨리 죽게 된 것이 하느님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잘 된 것입니다. 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또 그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새로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으로 삼고 로마의 구속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되고 싶어 했고, 그것을 원하지 않자 그를 죽였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잘 살게 해 주지 못하는 예수님은 자신 안에서 죽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오로지 ‘영원한 생명’뿐이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끝까지 참고 견뎌야만 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약속하시는 것은 가시밭길과 십자가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참고 견뎌야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스테파노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되새겨봅시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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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에서 오는 월간지가 있습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글들이 듬뿍 들어있습니다. 최근에 ‘꿈(CUM)'이라는 월간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어로 꿈은 희망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라틴어 ’CUM'은 ‘함께’라는 뜻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Dominus vobiscum)'라고 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Et cum spiritu tuo)'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혼자서는 이루기 어렵습니다. 꿈은 주님과 함께하면, 이웃과 함께하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꿈을 선포하셨고, 그것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복음 선포의 꿈을 7명의 부제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7명의 부제 중에 한명이었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축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다음 날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기억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두고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은 비록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죽음의 골짜기를 건널지라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월간지 ‘꿈(Cum)'에서 이창영 신부님은 4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세상이 나에게 빚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하고, 부모님은 당연히 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하기 마련이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회당에서 대접받기를 원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칼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온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인과 사제와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받은 것은 되갚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빚지고는 못 산다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받은 만큼만 베푸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만 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갚지 못할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서 보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 유형은 ‘사람들로부터 빚지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주변의 많은 이웃들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자캐오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허영엽 신부가 만나 사람들’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4일 신문에 ‘치과의사 강대건(라우렌시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수도자, 신학생, 사제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선생님께서 ‘사랑니’를 뽑아 주셨습니다. 주일에는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한센인’들의 치아건강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도와준 한센인들이 만 오천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진료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치과의사로 살면서도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네 번째 유형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네 번째 유형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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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가장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그분의 가장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박해하였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매 순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신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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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0장은 예수님의 파견 설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5─7장이 첫 번째 담화인 ‘산상 설교’를 전하였다면, 파견 설교는 두 번째 담화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담화의 일차 청중이었던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청중의 위치에서 머무르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가 되도록 요청받습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선발(10,1-4), 파견과 그들을 위한 가르침(10,5-15)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파견 사명을 수행하면서 마주할 수 있는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구성으로 제자들의 선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또한 이러한 종말론적 경고가 제자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두 가지 상황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외부, 곧 유다인들과 이방인 권력자들에게 박해받는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의 가족들이 분열되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다가올 고난 또는 분열만 예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약속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영, 곧 성령과 사람의 아들은 고난과 박해의 상황에 놓인 제자들을 위로할 것입니다.(10,19-20.23 참조)
오늘은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스테파노가 놓인 박해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박해하는 적대자들에 대한 스테파노의 반응(제1독서 참조)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스테파노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함께 나눈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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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정용 안토니오 신부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본당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 형제님이 주일 아침에 부부피정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길이었는데 부주의로 하마터면 다른 차와 충돌할 뻔했다고 합니다.
놀라 경황이 없었지만 충돌하지 않아 다행이구나 싶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상대방 젊은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온갖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한참 동안 늘어놓더랍니다.
그분은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굽히며 연신 죄송하다고 했지만 그 젊은이가 계속 욕설을 해 내심 불쾌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이 형제님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피정에 참여하고 싶어 죄송하다는 말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 사람도 겸연쩍었던지 더는 계속하지 않고 오히려 죄송하다며 서로 기분좋게 헤어졌답니다. 그는 이 얘기를 피정이 다 끝난 후 나눔 시간에 피정에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피정이 그 때문에 더욱 기뻤노라고.
언뜻 들으면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제겐 매우 가슴 벅찬 일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과 세상살이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증거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그분의 인내가 그리스도 때문이었으니 과연 위대한 신앙 증거가 틀림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곤경에 처하거나 죽기보다는 나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정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가급적 불리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나는 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습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 때문에 뭇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더 나아가 부당한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뒷전으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에게도 탓을 돌리지 않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스테파노는 그리스도 때문에 죽음마저 껴안게 됐지만 ‘나 때문에’라는 논리에서 죽고 비로소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구원의 품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마태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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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딱 한 걸음>
마태오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딱 한 걸음>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주님의 길을 걷는데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물러서거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주저하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묵직하고 또렷하게 내딛는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정의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딛는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평화에 대한 불타는 희망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딛는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딛는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딱 한 걸음은 또 다른
딱 한걸음으로 이어져
마침내 그곳에 닿으리니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주님의 길을 걷는데
딱 한 걸음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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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순교>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우리는 어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을 경축했고, 오늘은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를 기념함으로써 인간이 온전히 하느님께 다가감을 묵상합니다.
성탄의 기쁨도 잠시, 우리는 오늘 고통스런 순교를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 역시, 성탄을 맞이했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죽음까지 각오하는 신앙의 단호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순교를 통해 박해를 극복한 순교자들을 남다른 사랑과 존경으로 칭송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박해나 순교는 지나간 교회 역사의 처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한 장면쯤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박해 때문에 순교나 배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따르기 때문에, 우리를 채찍질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심문할 총독들과 임금들, 우리의 증언을 요구하는 다른 민족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 신앙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그리스도 신앙과는 반대되는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들은 우리와 동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밖에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려보는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하느님보다는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생각이나 행동, 그리고 이를 강요하는 사람이나 사회적 분위기, 이 모두가 바로 박해자요 우리와는 다른 민족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실생활에서 사랑과 정의의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우리 자신도 박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박해시대에는 죽음으로써 순교했다면, 지금은 삶으로써 순교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지난 박해시대보다 지금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큰 위기와 혼돈의 때인지 모릅니다.
박해시대는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문제가 분명했기에 그리스도인의 선택 역시 분명했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증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된 신앙의 증거인지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성령께 내어맡길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에 얽매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으니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세속적 가치와 이기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삶의 순교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 강론을 마치며 ‘순교와 배교’라는 묵상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와 배교>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순교입니다. 제 목숨 살리기 위해서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 배교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것이 순교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느님으로 받드는 것이 배교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순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제 배 채우는 것이 배교입니다.
하느님 닮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순교입니다.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 하느님 닮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배교입니다.
겸손한 마음과 청빈한 삶으로 하느님께서 빚은 피조세상과 벗하여 더불어 사는 것이 순교입니다. 한없는 탐욕을 채우려 하느님 담고 있는 피조세상을 처절히 짓밟는 것이 배교입니다.
순교, 핏빛 처참한 과거도 아니고 미지의 불확실한 미래도 아니며 지금여기에서 끊임없이 내려야할 그리스도인의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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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을 지키는 일>
죽음에 직면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어디가 조금 아파도 걱정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를 꾸중하십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마태8,26).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7,55). 하며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7,59-60). 하고 외쳤습니다. 참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걸었던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느냐?”(성 에드몬드).
용서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이상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음으로써 믿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이 고난을 겪으셨으니 제자가 또한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갈 것이고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미움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비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니 그대로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마태10,16).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른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 믿음 안에서 부드러움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10,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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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가장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그분의 가장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박해하였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매 순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신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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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참으로 부러운 자유>
어제 저는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오르게 되는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말씀드렸고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의 신비를 잘 사는 것은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한 사람의 탁월한 본보기 가운데 하나가 스테파노이고, 그 결과로 스테파노가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 순교는 주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의 교환이라는 점을 우리 교회는 오늘 기념하는 겁니다.
성탄 팔부 축일 첫날 왜 우리 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 축일을 지내는지 우리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스테파노는 죽어 하늘에 올라 천상에서 탄생했을 뿐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늘을 본 사람이고, 자기만 하늘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하늘로 눈이 향해 있는 스테파노와 스테파노에 눈이 꽂혀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고, 하늘에 눈이 열려 있는 스테파노와 하늘에 귀를 닫고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적대자에게 대적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고, 그저 하늘을 향하고 하늘을 같이 보자고 초대할 뿐인데 그런 그를 적대자들이 적으로 삼고 적대시할 뿐입니다.
적대시라는 말을 우리는 오늘 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적으로 대하는 눈 또는 시선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적대시합니까? 같이 하늘을 봤으면 적대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적대시하지 않았으면 하늘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오늘 독서에 묘사된 적대자들의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당에 속한 몇 사람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의 행위는 이렇듯 시선이 사람으로 향하고, 사람을 적으로 대하고, 달려들어 논쟁이나 벌이고, 화를 내고.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그런 것뿐입니다.
이런 그들과 달리 스테파노는 그들에게 말려들지 않고, 걸려들지 않습니다.
하늘에 시선을 둔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자고 초대하는 사랑은 있지만, 그들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들과 갈등할 이유나 싸울 이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스테파노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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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본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보십시오.”라고 오늘 우리를 초대합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우리도 보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스테파노의 박해자들처럼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보라고 하는 그만을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우둔한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나 스테파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전혀 조심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며 자기가 보는 하늘을 같이 보자고 초대합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은 화가 머리까지 차올라 스테파노를 죽이려 이를 갑니다.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스테파노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면 하늘이 보이고, 분노로 가득 차면 사람만 보입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와 사람들의 이러한 차이를 아주 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러니까 내 안에 무엇이 차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분노는 나를 채우는 것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내 안에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지 않고 육의 영이 있게 되면, 순 우리말로 썩어빠진 정신으로 내가 가득 차있으면, 욕,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온갖 욕심이 덩달아 차게 되고, 분노, 서운함, 원망, 시기질투와 같은 온갖 악감정이 가득 차게 되지요.
그런데 육의 영, 썩어빠진 정신 때문에 이런 것들로 가득 찰 때 우리의 눈이 향하는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자연적으로 하늘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고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에게로 눈이 향하지 않겠습니까?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수도 공동체들을 반성을 하면 같이, 공동체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수도자들도 종종 같이 하느님을 보고, 같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에 실패하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기대하고, 상처받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맙니다. 수도자들인데도 그 영(spirit)이 육의 영, 세속적인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테파노가 같이 보자고 초대한 하늘을 같이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스테파노처럼 “자, 저 하늘을 보십시오.”라고 초대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초대할 때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같은 영을 지녀야 합니다. 곧 기도와 헌신의 영과 주님의 영을 지녀야 합니다.
성녀 클라라의 전기를 쓴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얘기를 할 때 같은 영이 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렇게 만났을 때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따라 같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제일 사랑하는 그림 중의 하나가 바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같이 하늘을 바라보는 그림인데 이 그림처럼 우리 수도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도 같이 하늘을 바라보게 되기를 오늘 스테파노 축일에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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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 -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오니,
진실하신 하느님 주님이시여
당신은 저를 구원해 주시리이다.”(시편31,6)
오늘은 어제의 주님 성탄에 이어 첫순교자 성 스테파노 천상탄일입니다. 저는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의 주님을 연상했습니다. 성탄이 값싼 은총이나 낭만이 아닌 십자가의 현실임을 오늘 새로이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34년 동안, 요셉 수도원에 정주한 이후 요즘처럼 계속되는 강추위는 처음입니다. 예전 어렸을 때 눈도 많고 몹시도 추웠던 50년대 겨울이 생각납니다. 강추위 중에도 아름다운 빨간 불꽃같은 사랑의 선물, ‘포인세티아’도 받았습니다. 자꾸 잊어버려 다시 확인한 이름입니다. 꽃말은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축복, 행복, 제 마음은 불타오르고 있어요.”란 뜻이라 합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24년전 1998.12.25. 성 샤르트르 바오로회 김카타리나 수녀님에게 받은 빨간 칸나꽃 선물에 즉시 썼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아마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주님 사랑도 이러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22년전 2000년 봄에 쓴 “성 요셉”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주차장 앞 성요셉상 배경에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던 연산홍을 보며 쓴 시입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빨갛게 불타오르는
사랑의 연산홍!”-2000.5.10.
성 요셉의 가슴에 빨갛게 불타올랐던 주님 사랑이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랑의 순교자 성 요셉이란 생각도 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요셉,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를 닮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76세 고령에 부원장직과 주방장직을 맡고 있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 사랑의 전사, 스테파노 수사님입니다.
매해 친필 성탄카드를 보내 주는 이기헌 ‘사랑의 주교님’도 떠올랐고,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애국자인 영원한 청년 ‘사랑의 사제’ 83세 고령의 함세웅 신부(1942- )가 보내준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서예집도 어제 오후 감명깊게 독파讀破했습니다. 친필 인사 글씨에서도 요셉수도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느꼈습니다.
“찬미 예수님, 성 요셉수도원 수사님들께. 함께 기도합니다. 2022.12 성탄 함세웅”
진짜에는 반드시 사랑이 앞에 붙습니다. 사랑의 성사, 사랑의 기적, 사랑의 시인,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수행자, 사랑의 순교자등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라 정했고 부제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의 2022년 성탄 메시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를 택했습니다. 성탄 메시지중 일부 인용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진 아기 예수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얼기설기 엮어진 마구간 지붕 사이로 밤하늘의 별들이 들어옵니다. 아기 예수님의 그 맑은 눈동자가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발밑만 보지 말고, 가끔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네 삶이 고달프고 팍팍하여 그저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눈을 들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봅시다. 눈앞의 가치, 피상적인 가치를 넘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라고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온통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뒀기에 아무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주님 사랑의 전사로 항구할 수 있었고 마침내 주님의 전사戰士로써 사랑의 순교로 전사戰死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싸우다 죽어야, 전사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객사나 사고사가 아닌 사랑의 전사戰死입니다.
하늘 은총 가득했기에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고, 그 누구도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주 예수님을 닮은 행적이었습니다. 복음 말씀대로 아버지의 영이 늘 함께 했기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런 걱정도 안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대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순교자 스테파노를, 또 정주의 살아 있는 순교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낼 수 있는 인내력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오로지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둘 때 비로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 스테파노의 다음 장면이 이를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늘 하늘에 계신 주님께 마음을, 눈길을 두고 살았던 성 스테파노였습니다. 성인의 전 삶이 그의 임종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임종어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과연 우리의 임종어는 무슨 말마디가 될까요? 참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이,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바로 스테파노가 순교한 순간 하느님은 비장祕藏의 무기를, 바로 바오로 사도가 될 순교의 증인 사울을 예비합니다. 다음 묘사안에 빛나는 하느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지혜가 빛납니다. 성문 밖에서 스테파노의 죽음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흡사합니다.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오늘의 첫 순교자 축일이 참 많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참으로 하늘에 계시면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시편118,26.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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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성령 받기!>
오늘 복음(마태10,17-22)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안으로 파견된 사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는 전례 등급으로 볼 때, '주님부활대축일' 다음으로 높은 등급에 놓여 있는 '주님성탄대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함께 성탄을 축하하면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이 큰 기쁨을 팔일 동안 나눕니다.(성탄 팔일 축제)
그런데 오늘은 기쁨이 아니라 교회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참으로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 스테파노의 죽음이 신앙의 역설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하고 있고, 그 모범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식탁 봉사를 위해 뽑힌 일곱 부제 중 한 명이었던 스테파노는 사도행전의 말씀인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고,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았고, 예수님 말씀처럼 박해를 이겨냈고, 예수님을 닮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십니다."(7,5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7,59-60)
믿는 이들이 행하는 모든 영적 행위(신앙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 이것의 최종 종착은 '성령 받기'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이끄심에 나의 온 존재를 내어맡기는 삶'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예수님을 많이 닮은 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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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qZmT9FMzd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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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성탄 안에는
또 다른 성탄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순교의
사랑입니다.
성탄도
순교도
우리가 가야 할
사랑의 길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목적지를 모르기에
삶의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성탄이며
모든 것을
버리는
순교입니다.
내려놓고 비우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곳에
자아의 죽음도
어김없이
따라옵니다.
사랑하는 법을
성 스테파노
순교자를 통해
배웁니다.
기꺼이
가장 좋은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탄입니다.
사랑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랑의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삶과 죽음을
잇는 사랑의
성탄입니다.
먼저 내려오신
예수님 성탄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사랑입니다.
누가 성탄이고
누가 순교인지의
구분이 아닌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성탄과 순교가
만나면
하늘 나라의
신비가 됩니다.
모든 시간은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구원의 주소지와
영혼의 현주소를
새롭게 만납니다.
영원하신 분이
유한한 우리의
목숨 안으로
들어오셔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해맑은 아기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이며
사랑의 역사입니다.
삶과 죽음을
여시는
구원의
성탄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풀 수 있는 것은
용기(勇氣) 있는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 길을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기쁘게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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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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