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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6
#기독론
구약의 성도들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으시나 장차 존재하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은것이 아니라,당시에는 하늘에 계시나 장차 이땅에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것이다.
#회심 #삭개오 #에서
내생각에,삭개오나 십자가의 강도는 갑작스럽게 회심한것 같지는 않다.도리어 오랜동안 도저히 죄용서와 구원을 바랄수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한탄에 빠져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회심을 하게 된것이라 본다.이와 비슷하게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고 환대한것도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아니라,50여년동안 서서히 자신의 망령된 잘못과 죄악을 깨닫고 회심에 이르러서 야곱을 반가이 맞아줄수 있었을것이다.
#혼인잔치
내생각에,왕의 혼인잔치에 갑자기 초청받은 사람들이 입은 예복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나 칭의도 아니고 성도들의 순종과 선행도 아닌것 같다.만약에 전자라면 참석자 중 예복을 입지않아 쫓겨난 자가 있으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해당될것이고,후자라면 갑자기 초청받은 사람들은 빈천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복이 없었을 것이며 설령 예복이 있다한들,바로 잔치에 가지않고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고 간다는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따라서 참석자들의 예복은 잔치를 주관한 왕이 그들에게 준것으로서,교회를 중심으로 시행되는 복음사역의 외형적인 요소들,즉 예배나 설교나 성례나 구제 등으로 보는것이 가장 타당해보인다.그렇다면 예복을 입지않아서 쫓겨난자는 사도들이 경고한바 성령의 좋은것들을 맛보았으면서도 결국엔 복음과 교회를 저버린 배교자라고 볼수있다.
#벨기에신앙고백서 16.#선택
We believe that-- all Adam's descendants having thus fallen into perdition and ruin by the sin of the first man-- God showed himself to be as he is: merciful and just.
우리가 믿는 바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첫 사람인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과 멸망으로 떨어져 버렸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당신의 긍휼하시고 공의로우신 성품 그대로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He is merciful in withdrawing and saving from this perdition those whom he, in his eternal and unchangeable counsel, has elected and chosen in Jesus Christ our Lord by his pure goodness, without any consideration of their works.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아담의 후손들 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변하지 않는 의논하심으로 선택하시고 고르신 사람들을 이 영원한 형벌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만의 순전한 선하심에 의한 것이지, 선택받은 사람들의 무슨 공로를 고려하신 것은 아닙니다.
영원 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성도들을 미리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 이 영원 전 구원협약에 하나님의 세 위격들뿐만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참여하셔야 하시는 이유는, 실제로 이 땅에서 구원사역을 몸소 이행하셔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구원받는 성도들의 영원 전 예정과 선택이라는 성경의 진리는 사람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사람의 수이기도 하며 짐승의 수인 666의 지성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죄의 조성자 또는 죄의 근원자라 치부하기도 하고,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자유의지와 행위에 두기도 하며,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절대로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면서 교묘하게 스스럼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첫번째는 그리스도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핀 저주받을 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성령모독이고, 두번째는 행위구원을 약속하는 로마카톨릭을 비롯한 이방종교들과 같으며, 세번째는 영혼없는 죽은 몸과 같이 행함없는 죽은 믿음으로서 전부 영원 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되고 예정된 성도들의 믿음과는 무관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선택하신 성도들에게 주시는 참된 믿음이란, 설령 사람의 지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죄의 원인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서 보내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성도 스스로 믿음을 가질수도 선을 행할수도 없으나 성령께서 강압적으로나 억지로나 일방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을 새롭게 하셔서 자원하는 의지로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며, 구원의 확신을 방종의 근거로 삼지 않고 도리어 넘어질까 두려워하며 조금씩 점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정하신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해지기를 힘쓰게 하는 것이다.
소돔에서 살다가 패가망신하고 홀로 살아님아 술에 취해 두 딸과 근친상간을 저지른 롯이나, 이스라엘의 사사이면서도 음욕의 방탕한 죄에 빠져 살다가 블레셋에 잡혀 눈이 뽑혀 포로가 되었던 삼손이나, 유다 왕국을 잔혹하게 멸절시키고 교만함에 취해 살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나, 유다 왕국의 모든 왕들 중에서도 가장 패역부도했던 므낫세 왕이나 그 행위로만 본다면 구원은 커녕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인물들도 영원 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며 협약을 맺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선택 예정이 불공평하다거나, 자기의 행위를 저들보다 낫다고 여기거나, 저들만큼 죄를 지어도 자기는 여전히 구원받을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구원받기로 선택되지 못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He is just in leaving the others in their ruin and fall into which they plunged themselves.
하나님께서는 또한 공의로우셔서 구원받기로 선택되지 못한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스스로를 멸망과 타락에 내던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술사 발람은 여호와 그리스도를 힘입어 예언과 축복과 저주의 신령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수령들을 바알브올의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에 빠뜨렸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아무리 예언과 방언과 귀신쫓음과 병고침 등 부정할 수 없는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참된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을 저주한다거나 해악을 끼치기 위해서 계략을 세우는 자들은 발람처럼 죽임을 당하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남들보다 탁월하고 높은 지위와 부귀영화를 가졌다고 해서 교계에서나 교회에서 부당하고 불법적이며 불의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교세를 휘두르는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은 이세벨과 같이 멸망당할 자들이다. 정치투쟁집회를 일삼는 목사들과 그 추종자들, 유신진화론자들, 스스로를 가나안 신자라 칭하는 무교회주의자들, 복음 사역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목사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 거짓 회개자들, 점집을 드나드는 교인들, 신천지 같은 이단에 빠져버린 교인들, 오랜동안 몸담았던 교회를 스스로 떠나버리고 신앙생활 자체를 놓아버린 교인들, 복음 사역이 순수함을 향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변질되어가는 목사들, 신앙이 점점 순수하게 겨룩해져가는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버리거나 오랜동안 그 상태에 머물러있는 교인들은 스스로를 멸망과 타락에 내던지는 버림받은 자들이다.
#20220206
#요한계시록 #Revelation 1:15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鍛鍊한 빛난 朱錫 같고 그의 音聲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His feet were like bronze glowing in a furnace, and his voice was like the sound of rushing waters.
et pedes ejus similes auricalco, sicut in camino ardenti, et vox illius tamquam vox aquarum multarum :
καὶ οἱ πόδες αὐτοῦ ὅμοιοι χαλκολιβάνῳ ὡς ἐν καμίνῳ πεπυρωμένης, καὶ ἡ φωνὴ αὐτοῦ ὡς φωνὴ ὑδάτων πολλῶν,
선지자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목격한 영광스러운 인자의 팔과 발은 빛나는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허다한 무리의 소리와 같다고 묘사하였는데 이는 요한 사도가 목격한 영광의 주님의 발과 음성의 모습과 동일하다. 따라서 선지자 다니엘이 목격한 영광의 인자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전에도 영광의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주석은 놋을 의미하는데 풀무불에 연단한 놋은 견고하고 단단하며 그것을 매끄럽게 가공하면 금처럼 빛이 난다. 따라서 주님의 발이 풀무불에 연단한 빛나는 놋과 같다는 것은 그분의 역사와 섭리가 그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고 꿋꿋하며 사도 바울이 가르친 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을만큼 명약관화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셨을 동안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꿋꿋하게 두 다리로 이동하셨다. 성육신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 손수 지으신 아담과 함께 거니셨고 아브라함을 만나시려고 두 천사와 함께 걸으셨으며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려고 먼 길을 걸어오셨다. 모세에게는 산 위에서 친히 그 모든 영광을 드러내시며 걸으셨고 이사야 앞에서는 높은 보좌에 앉으셨으며 에스겔과 다니엘에게는 영광의 인자로서 나타나셔서 서 계셨다. 하늘에 계셔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음성은 지구의 모든 물이 한꺼번에 흐르는 것보다도 더 웅장하고 위엄이 넘칠 것이나 요한 사도가 들은 음성은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크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웅장한 주님의 하늘의 음성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들을 수가 없으므로 통상적으로는 아무리 경건한 성도라 하더라도 경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 항상 이렇게 많은 물소리와도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사도 시대 이후로는 주님께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특정한 성도에게 큰 음성으로는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기록된 성경과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요한 사도처럼 어떤 신비한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으려 하기보다는 성경과 성령으로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더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80206
#브나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 열왕기상 1:36-37
성경의 훌륭한 인물이 여럿 있지만서도, 난 개인적으로 이 ‘브나야’라고 하는 인물이 참으로 애착이 간다.
그는 다윗의 삼십 용사들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의 무용담으로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죽이고 구덩이에 혼자 들어가서 젊은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았으며 애굽의 장대한 자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죽이기도 하였다. 그는 대대로 용사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다윗의 정예부대인 삼십 용사 중에서 첫 삼인의 뒤를 이어 둘째 삼인 용사의 반열에 들기도 하였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는 다윗의 친위대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대에서는 군사령관으로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브나야를 참으로 좋아하는 이유는 비단 그의 걸출한 무용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록 매우 뛰어난 용사이긴 했지만, 첫 삼인 용사들에게는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보다 더 우수한 용장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브나야가 다른 삼십 용사들보다 더 두드러지는 요인은 무엇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바로 그의 변하지 않는 충직함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충직함은 그저 인간 기준의 그런 충성심(물론 그런 충성심도 대단한 것이다.)이 아니라, 다윗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 서 있는 그런 충직함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열왕기상 1:36-37의 브나야의 신앙고백이라고 본다. 브나야는 자기가 모시는 군주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그가 다윗을 섬기기 시작할 때부터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순간, 자기도 다윗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고, 이전에는 인간의 충성심으로 다윗을 섬겼었다면, 하나님을 믿은 이후부터는 신앙으로 다윗을 충성스럽게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브나야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다윗에게 충성하였다는 것은 이 말고도 여러가지 증거들이 있다. 다윗의 삼십 용사들 중에서 오로지 브나야 혼자만이 다윗과 솔로몬을 이어서 섬기며 열왕기서와 역대서에 등장한다. 열왕기서와 역대서 기자들은 브나야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제사장이었고 압살롬의 반역에서도 다윗을 섬기던 아비아달 조차도 솔로몬이 아니라 아비아달 편에 섰었다. 그러나 브나야는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함께 솔로몬의 편에 섰었다. 이는 단순히 왕위 쟁탈을 위한 편가르기가 아니다. 솔로몬의 편에 선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친히 후계자로 삼았으므로, 이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의 뒤를 이을 왕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도니야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할 때, 당시 상황은 솔로몬에 매우 불리하였을지라도, 솔로몬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브나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솔로몬의 편에 섰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브나야가 비록 성경의 메인 인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브나야는 비록 삼십 용사들 중에서는 최고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 확장해서 본다면 브나야야말로 최고의 장수의 반열에 든 장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로몬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 열왕기상 3:16-28
두 창녀에 대한 솔로몬의 재판은 너무도 유명해서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본문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아니, 이미 누군가가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잘 알다시피,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구하여 받은 후 첫 재판으로 두 명의 창녀를 재판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굳이 두 창녀에 대한 재판인가 하는 점이다. 두말할 나위없이, 솔로몬이 구하여 받은 하나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이 너무나 크고 위대한 것이다. 오죽하면 솔로몬이 잠언에서 자신의 지혜를 하나님 자신으로까지 칭할 정도이다. 즉, 솔로몬이 받은 지혜는 하나님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첫 재판의 대상인 창녀들은 어떠한가? 당시로 따져본다면 창녀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 아닐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내에 창녀들이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어쩌면 저 두 명의 창녀들은 마치 라합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이방인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굳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왕의 권위로 담당할만한 재판은 아니다. 도리어 하급 관리에 이 재판을 넘겨도 그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만한 그런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지혜로, 이 비천한 창녀들의 재판을 기꺼이 본인이 담당한 것이다.
이 소식은 아마도 이스라엘 경내에 매우 큰 이야기거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왕이 참으로 할 일이 없나보다라거나, 참으로 한심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이, 그것도 일천 개의 번제를 드릴 때 받은 하나남의 지혜로 한다는 첫 재판이, 아주 크고 어렵고 막중한 재판이 아니라 겨우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창녀들의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뜬 소문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로 이 낮고 천한 창녀들의 재판을 담당한 것은, 그 재판 과정뿐만 아니라 그 비천한 대상 한 명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지혜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다. 즉,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성품은, 인간의 기준으로 귀하고 천한 것을 따지지 않고 아무리 큰 것이라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으면 무조건 크고 웅장한 사역을 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낮아보이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 귀해보이지 않는 것에는 굳이 자기들이 받은 귀한 은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받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 취급 못받는 창녀들의 일까지도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성령께로부터 받은 여러 은사들은 얼마나 더 사소해 보이는 일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배교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이로되 네가 내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아버지가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 열왕기상 2:26-27
아도니야가 솔로몬이 받을 왕위를 찬탈하려고 할 때, 아도니야 편에는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이 있었다. 그러나 아도니야의 왕위 찬탈이 수포로 돌아가고, 아도니야가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다윗의 수종을 들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줄 것을 요구하자, 이에 깊게 빡친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죽이고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고 군대장관 요압도 죽인다.
그러나 다윗 이후 왕권 다툼으로 보이는 이 사건이 왜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야 했는가? 수 천 년 전, 머나먼 나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도대체 오늘날 우리, 특히 믿는 신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내 생각에 아도니야 편에 섰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의 최후는, 아마도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믿음을 중도에 포기하는 배도자의 표본으로서 삼고자 하신 것은 아닐까 싶다.
당시 솔로몬 vs. 아도니야는 선 vs. 악, 의 vs. 불의, 순종 vs. 불순종의 대립 구도라고 볼 수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에게 뒤를 이을 왕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아도니야에게는 그러지 않으셨다. 단지 아도니야는 사람 보기에 매우 심히 준수한 자여서 그 아비 다윗이 아도니야에게 단 한 번도 서운한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만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솔로몬의 편에 선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이고 오늘날에는 믿음을 계속하여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도니야 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서도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솔로몬이 그를 파면하면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평생에 다윗을 섬겨 왔으며 심지어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할 때에도 그 고난에 동참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막판에, 다윗이 죽을 때가 가까워졌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 대하여 하신 약속을 저버리고 인간의 기준으로 심히 준수해 보이는 아도니야를 택한 것이다. 비록 아비아달은 죽음은 면하였으나, 그는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되어 쫓겨나게 된다. 이는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랜동안 신앙으로 인해 고난을 경험했더라도, 어느 순간에 또는 삶의 마지막 때에 모종의 이유로 신앙을 저버리고 배도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그가 여러 신앙의 고난을 당했더라도 그것은 배도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또한 그가 아무리 교회에서 제사장과 같은 중책을 담당하고 있었더라도, 배도하는 순간에 그 섬김은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아도니야 편에 섰던 군사령관 요압은 어떠한가? 그는 다윗의 사촌이었으며 자신의 평생동안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이다. 고생한 것만 따진다면 제사장 아비아달보다 요압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을 섬기던 시절에 온전히 다윗에게 순종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한 자였다. 그리고 다윗이 죽어갈 때, 이제는 순전히 자신의 성향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보다 인간이 보기에 심히 준수한 아도니야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결국 요압은 아도니야가 살해될 때 같이 죽는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제단 뿔을 잡아보기도 했으나 긍휼함을 얻지 못하였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누구보다도 더 열심을 내면서도, 상습적으로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따르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교인들의 배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습적으로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부당하게 도전하는 교인일수록 그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내 배도할 위험성이 더 크며, 그럴 경우 그들이 당하게 될 최후는 요압보다 더 처참할 것임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다.
신자들 각자가 소유한 신앙의 연륜은 교회로나 신자 개인으로나 매우 소중한 자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신앙의 연륜이 신자 자신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아비아달이나 요압과 같이, 평생을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한순간에, 아니면 드디어 배도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나의 신앙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p.s)여기서 언급한 교회의 ‘정당한 권위’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고 가지게 되는 권위를 뜻한다. 이는 중세 로마카톨릭이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인간의 전통과 유전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중세 로마카톨릭과 같이 인간의 전통과 유전을 정당한 권위로 포장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마땅히 성경의 권위로 배격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