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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 : 3 -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 고전 1 : 4 – 예수 안에서
고전 1 : 3 -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와 평강에 대한 신약에서의 개념은 구약시대와는 달리 그 개념이 더욱 완전하게 드러났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은 삶에서 누리는 분복으로서의 추구할 가치로 여겨졌지만, 신약은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인데 기쁨이라는 <카라>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평강은 <에이레네>이며, 히브리어로는 <솰롬>인데,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 따라서 평강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뜻하며 이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기까지 하셨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이란 삶에서 누리는 분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은혜와 평강을 뜻한다. 즉, 사도는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의 보전과 영적인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또 평안은 사람이 은혜로 구원받은 결과로 누리는 복이다. 죄인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했다. 악인에게는 평안함이 없다.
* 사 48: 22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평안하게 해주셨다.
* 마 11: 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평안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을 다 포함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참된 평안이 있다.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이 구절은 전형적인 바울의 인사 형식이다.
당시 헬라 세계의 일반적인 인사말은 삼인칭을 사용했지만, 바울은 일인칭이나 이인칭을 사용하여 훨씬 가까운 친밀감을 표현하였다.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본장의 1절부터 9절까지 아홉 번이나 반복되었다.
바울의 문체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핵심 되는 단어를 계속하여 되풀이하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보여준다.
전치사 '좇아(*, 아포)는 하늘의 은사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3]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런 형식의 인사말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다.
* 롬 1: 7 -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갈 1: 3 -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엡 1: 2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빌 1: 2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은 바울 사도의 '구원의 복음'을 요약한 표현이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평화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평화, 그리고 자신과의 내적 평화로서 화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은혜'(*, 카리스)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값으로 계산 불가한 것을 대가 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리고 '평강'(*, 에이레네)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 '샬롬'(*, '평화')에서 온 말로 분쟁과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축복이 있어서 풍요로운 영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Morris).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은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 고후 8: 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엡 2: 8, 9 -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 롬 5: 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우리로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 엡 2: 14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본 절에서 바울은 비록 은혜와 평강을 얻는 방편인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믿음을 소유한 모든 자에게는 이 은사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만 온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이 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
* 롬 3: 16-17 -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 사 48: 22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 사 57: 21 -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예수께서 참 평안을 주셨다.
* 마 11: 28-29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이라는 말 속에는 마음의 평안뿐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도 포함되어 있다.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평강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계속 사모하며 늘 받아 누리자.
2. 항상 하나님께 감사 ( 1 : 4 - 9 )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다.
그는 감사한 이유를 좀 더 설명한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과 지식의 풍족함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증거, 즉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케 되게 하셨음을 감사하였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즉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셨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사실들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다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실들이 긴 시대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믿어지는 이유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 책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위에 근거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확신했다.
둘째, 그는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고전 13: 13).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믿는 것이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행하는 것이며, 소망은 주의 재림과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의 소망이요 큰 힘과 위로이다.
셋째, 그는 주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1: 6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속(救贖)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 요 6: 39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요 10: 28 -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롬 8: 30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자들을 다 찾으실 것이며, 그가 찾아 구원하신 자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로 훈련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담대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그가 한번 우리를 불러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도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고전 1 : 4 – 예수 안에서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본 절의 의미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적 의미를 살펴보자.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 164회나 나타나며 옥중 서신(獄中書信)에 특히 많다.
본서에서도 11회나 쓰였다(2, 4절, 3: 1. 4: 10, 15, 17, 15: 18-19, 22, 31).
2]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恩惠, Grace)의 원어 '헨'은 '하난'(불쌍히 여기다,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시 4: 3)와 고생하는 자(시 6: 2)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사랑, 은총, 긍휼 등을 의미한다.
* 시 4: 3 -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 시 6: 2 -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 창 30: 27 -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 출 33: 12 -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곧 사랑과 긍휼, 공의임을 뜻하는 '헤세드'(렘 9: 24)와는 달리 먼저 은혜를 받는 자가 경건하며 의로운 자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하는 단어이다.
* 렘 9: 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이 없다면 구원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 같은 사랑에 대한 인간 측의 적극적인 반응과 노력이 함께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 롬 3: 10-12 -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계 3: 20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1) 구약에서의 은혜
구약에서 은혜를 의미하는 단어는 ‘헨’(창 6: 8, 에 5: 8, 잠 3: 34, 전 10: 12)과 ‘라하밈’(rahamim)과 ‘헤세드’(창 20: 13, 창 24: 12, 출 15: 13, 룻 2: 20, 렘 32: 18, 단 1: 9, 욘 2: 8) 등이다.
① ‘헨’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말한다.
* 시 4: 3 -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 시 26: 11 -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시 6: 2 -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 시 25: 16 -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② ‘라하밈‘은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한다.
* 출 34: 6 -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 시 51: 3 -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③ ‘헤세드’는 인자한 하나님의 본성을 말한다.
* 시 112: 4 -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 렘 9: 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단어는 ‘헨’(hen)인데, 이것은 원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보여준 호의’를 뜻하는 말이었다.
구약에서는 신약에서처럼 분명하게 은혜에 대한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지만, 은혜는 분명히 구약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선택과 그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한, 은혜에 대한 분명한 표현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에서 발견된다.
* 출 34: 6-7 -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2) 신약에서의 은혜
헬라어 ‘카리스’(charis)는 일반 헬라어에서는 사람을 끄는 매력 또는 아름다움(잠 1: 9), 친절한 혹은 호의적인 태도(눅 4: 22), 어떤 친절에 대한 감사를 의미했다.
* 잠 1: 9 -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 눅 4: 22 -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좋아했으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상이나 호의를 기대하지 않는 관용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어를 ‘선물’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곧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속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란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구속적인 사랑을 말하는 데 사용되었고, 특별히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했다.
* 롬 5: 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은혜는 죄인에게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엡 2: 4-5 -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은혜는 긍휼보다 좀 더 적극적이다.
* 딤전 1: 2 -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딤후 1: 2 -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마지막을 대부분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 2)라고 기록했다.
은혜의 본질적 의미를 살펴보자.
롬 3: 20-21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율법 대신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신적 성취(동적 사역)를 의미함을 알아야 한다. 곧 칭의(Justification)를 뜻한다.
또한 롬 3: 2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구속(Atonement, Redemption)은 헬라어로 <뤼트로시스>인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한 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이 없다면 인류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인간이 용서받으려면 누군가 죄가 전혀 없는 존재가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삯을 지불해야 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속전(Ransom)의 원리이며, 헬라어로는 <안틸뤼트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는 죄인 아닌 자가 없으므로 남을 위해 대속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존재이므로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로부터 풀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다 지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속한 인류에게 임한 사망의 저주를 풀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곧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의 삯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만족시키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3]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사말에 이어 수신자들을 위한 감사를 드린다.
* 롬 1: 8 -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빌 1: 3-7 -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 골 1: 3-8 -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혹자는 본서에서의 감사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비난한 본서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풍자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격려와 칭찬을 자주 하곤 했다(Morris).
비록 고린도 교인들의 삶에 많은 결함이 나타났을지라도 그들은 다른 고린도 시민들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Lightfoot).
따라서 바울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테'(*)와 '감사하노니'(*, 유카리스토)는 현재형으로 쓰여 바울의 계속적이고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시사한다.
바울은 그가 가르쳤던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 엡 1: 16 -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빌 1: 3 -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원문에는 본 절의 첫머리에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열거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자 그분에게서만 유래하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Grosheide).
항상 감사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바른 모습이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 18).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에는 감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도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거기에 내포된 복들을 생각하면 감사할 것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은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의 이유이다.
비록 역경의 현실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는 절대 실패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 롬 8: 28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3: 20-21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율법 대신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신적 성취(동적 사역)를 의미함을 알아야 한다.
또한, 롬 3: 2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다면 인류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롬 6: 23에서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하였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모두 죄를 범한 자들이므로 롬 3: 23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 그 결과 롬 5: 12에서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는 사망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들을 무조건 용서하실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용서받으려면 누군가 죄가 전혀 없는 존재가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삯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속전(Ransom)의 원리이며, 헬라어로는 <안틸뤼트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는 죄인 아닌 자가 없으므로 남을 위해 대속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존재이므로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을 통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로부터 풀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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