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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14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山에 올라가 앉으시니 弟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心靈이 가난한 者는 福이 있나니 天國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1-3)
서론: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산상보훈(山上寶訓), 산상수훈(山上垂訓), 또는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이란 명칭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근처에 있는 어떤 산(山)에 올라가서 말씀하신 데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는 기독교 윤리의 심오한 사상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산상수훈을 "기독교 윤리의 대헌장"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와, 그리스도인의 인생관, 그리고 종교의 영적인 세계와 내면적인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고 있는 윤리와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산상수훈의 서두에 나오는 여덟 가지 복을 '팔 복'(八福)이라고 하는데 팔 복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참된 복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본질과 성격에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는 가는 길이 다르고 인생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 복을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심령(心靈)이란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헬라어 '프뉴마'는 영혼, 혼, 마음,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심령은 인간 내면의 영적 세계와 정신적 영역으로 영혼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동시에 인격의 바탕과 토대가 됩니다. 주경학자인 '벵겔' 선생님은 심령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自我)"라고 정의했습니다. 심령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이며 인격의 핵심과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본문에 '가난'의 뜻으로 사용된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본문에 '가난'이란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프토코스'입니다. 프토코스는 신약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프토코스'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도 사용되고(마태복음 19:21) 거지와 같이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누가복음 16:20). 그러나 헬라인들은 이 말을 가장 가난한 상태에 있거나, 물질적으로 전혀 여유가 없는 상태, 완전히 텅 비어있는 빈털터리 상태의 극빈자에게 사용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란 말로 사용된 헬라어 '프뉴마'는 영혼, 마음, 정신 등 영적이고 정신적 영역을 지칭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영적인 관계에서 가난과 궁핍을 느끼는, 신령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를 영적인 가난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마치 인간의 궁핍과 물질적인 가난을 예찬한 것과 같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성경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탐심과 탐욕을 경고하고 경계할 뿐 한 번도 물질 자체를 악하고 나쁜 것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물질은 인간이 쓰기에 따라 천사의 손길이 될 수도 있고 악마의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질 자체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지나친 탐심도 경계해야 하지만 물질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비판적이고 물질을 죄악시하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자가 재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고, 부자의 재물이 공로가 될 수 없다면 가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다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아니며, 가난이나 궁핍이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재물로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도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처럼 가난한 자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갑니다. 민중신학(民衆神學)이나 해방신학(解放神學)은 가난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자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하고 위로한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 진리에 역행하는 태도입니다. 신앙에서 가난은 미덕도 아니고, 신앙에 유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신앙생활에서 가난이 영성(靈性)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근거 없는 가난의 미학에서 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허물과 부족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궁핍과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구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은 먹어도 배가 고프지만 배가 부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신앙 세계에서 영적 진리의 문제도 그와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스스로 다 자랐다고 자만하고, 배울 것이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며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고 우쭐댔지만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했습니다. 신앙에서 영적 자만은 치료할 약이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푼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자만은 자기 허물과 수치를 모르는 푼수의 태도입니다. 자기의 허물과 부족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아는 사람은 결점을 고칠 수 있고, 결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성공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느냐? 마음이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있고, 마음으로 무엇인가 믿고 의지하는 데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하고, 마음이 비워져 있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이 먹을 음식을 찾고, 목마른 자가 마실 물을 찾는 것처럼,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면 세속적인 것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예수를 믿지만 실제로는 권세나 사회적인 지위를 믿고 의지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권세도 없고 영원한 지위도 없습니다. 우리 정치사에서 권력의 정상에 앉았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그 권력자들의 말로가 어떻습니까? 권력처럼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권력도 아니고, 권력이나 권세라고 할 수도 없는, 사무적인 권한이나 책임감 같은 것을, 권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이란 어떤 개인의 권세가 아니라 자기가 맡은 직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국가와 국민이 위임한 한정된 재량권입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처럼 어떤 직무와 직책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있을 뿐 권력이나 권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면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세속적인 것을 믿고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면 재물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사람에게 실제 이상의 자만심을 갖게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가진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물질이란 잣대로 헤아리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17, 이하에는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사려고 한 '시몬'이란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려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시몬'란 사람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이 권능이 내게도 임하게 하여 내가 안수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시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줄로 알았으니 네가 은과 함께 망할 것이다"고 책망했습니다. 이처럼 재물을 가진 사람은 신앙의 문제까지 물질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물질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무례함과 교만이 있습니다. 물질을 믿고 돈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돈'이라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수 없고 믿음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이란 우상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떻게 가난한 심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면 물질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명성이나 외모나 미모나 건강이나 학문이나 무엇이든지 성도는 그런 것들을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가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다음, 그가 평소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고 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믿기 전에 자랑으로 여겼던 것들을 분토와 배설물처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도의 마음이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한 자부심과 자만심에 안주하고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진실할 수 없고 가난한 심령이 될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자랑이나, 세속적인 조건이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합니다. 노아나 모세나 다니엘처럼 믿음이 깊고 경건의 극치에 이른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절감하며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권세나 물질이나 세속적인 어떤 것을 의지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반대는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가장 한심하고 불쌍한 신자, 교회에서 말썽 부리는 사람은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자기 믿음이 최고라는 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은 심령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의 대표적인 무리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진짜로 의롭고 경건해서 부요한 자들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기 의에 도취한 자칭 의인들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면 심령이 부요한 자는 복이 없는 자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심령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버려야 하고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세속적인 자랑거리를 버려야 합니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항상 진실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가 인간의 참된 행복을 소유합니다.
참된 행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것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 받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하지만 진정한 복이 무엇이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복이나 행복에 대해서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행복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관이란 사람의 외모와 성격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구하는 복이 다르고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다릅니다. 참된 복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있다가 내일은 없어지고, 쉽게 얻었다가 쉽게 소멸하는 것은 결코 참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불완전한 복도 참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분적으로 만족하며, 어떤 상황과 특별한 환경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건강, 미모, 권세, 물질, 지식, 이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복의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남녀간의 부적절한 관계로 얻는 성적쾌락도 불완전한 행복의 한 형태입니다.
진정한 복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와 같은 것들의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불의한 재물로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부자보다 가난해도 하나님 앞에 죄 짓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서 상대를 모함하고 불의와 불법을 자행한 사람의 성공은 참된 성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성공과 출세를 위해 하나님 앞에 죄악과 심판의 바벨탑을 쌓아 올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죄악과 불의를 멀리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물질이나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또한 순종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인간이나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불의한 욕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세상의 정욕과, 시기와, 교만과, 증오와, 혈기와 같은 것들을 버리고 깨끗이 비워져 있어야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의 죄악과 불의한 생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런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 아니라 불의한 심령이요, 죄악에 부요한 심령입니다.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그릇도 세상의 잡다한 것들이 가득 차 있으면 그 그릇에는 더 이상 물건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세상의 것 버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몸부림 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성도 여러분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시기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 드립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