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6일(토)
* 시작 기도
주님...
밤새 오염된 이 죄인의 영육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무화과옷이 아닌 가죽옷 곧 그리스도의 옷으로 입어 날 건져주소서.
세상의 정욕과 탐심이 나를 둘러엎을 때 나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우리 주님밖에 없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나를 두르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날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밤새도록 쉬지 않고 비가 내립니다.
이 빗소리가 참 귀에 듣기 좋습니다.
하오나 이 비로 인하여 힘들어 할 이들도 있을 수 있사오니 저들을 주의 장중에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3:1-13
제목 : 변명하는 아담 하와 그리고 나. 그러나...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나의 묵상
아들의 생명을 얻어 영생의 존재는 아니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품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또한 부부 사이에 아름다운 교제를 통하여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렇게 잘 나갈 때에 뱀으로 위장한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며 미혹을 시작한다.
이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들 중에서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
원래 ‘간교’라는 말은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아마도 성경을 번역했던 우리의 선배 목사님들이 뱀이라는 징그러운 짐승의 선입견을 가지고 번역을 했기 때문에 간교하다는 말로 표현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간교하다’라는 말은 아주 순수하고 순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룸’이다.
그런데 이 ‘아룸’은 2:25절에 나오는 ‘벌거벗다’는 말의 히브리어 ‘아루밈’과 같은 말이다.
아루밈은 복수형인데,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벌고벗고 있기 때문에 복수형으로 쓰였을 뿐, 이 말의 단수형 ‘아룸’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벌거벗은 것처럼 속이거나 무엇을 덧칠하지 않고 아주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뱀이 바로 이런 순수하고 순전하여 사람과 가장 친숙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마치 오늘날 인간과 가장 귀엽고 친숙한 애완견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이처럼 사람에게 가장 친숙한 짐승인 뱀에게 들어가서 하와를 미혹하기 시작한다.
이 뱀이 여자에게 묻는다.
질문을 해도 아주 교묘하게 묻는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
이 뱀의 질문은 하와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기 딱 좋게 질문을 한다.
뱀으로 위장한 사탄도 이미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하는 하와는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다.
“아냐, 우리가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어. 그러면 너희가 죽을 수도 있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는데 이를 추가했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죽을까 하노라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빼버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뱀은 여자에게 바짝 다가앉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아.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너희더러 먹지 말라고 하는 거야.”라고 교묘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들은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까 그 열매가 어찌나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고 또 하나를 따서 남편에게도 주어 그로 하여금 먹게 하였다.
이것을 먹고 난 아담과 하와는 이전과 다르게 정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벗은 것이 보여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옆에 있던 무화과잎을 따서 그 부끄러운 곳을 가렸다.
이 때부터 ‘가림의 문화’가 시작되었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그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곳을 가린 그들은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갑자기 두려워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린 무화과옷은 사실 치마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학고르’라고 하는 벨트이다.
옷이 흘러내리지 말라고 매는 벨트 그것으로 가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몸뚱아리에 가린다고 벨트 하나만 걸친 모습은 그야말로 꼴불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은 가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그런 벨트로라도 가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에 있는 나무 사이로 숨었다.
자기들이 동산에서 숨어봤자 어디로 숨을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동산에 있는 나무 사이였던 것이다.
거기에 숨어 있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애타게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찾아 나서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이에카’이다.
이는 ‘네가 있어야 할 곳이 내 품이지 않느냐? 그런데 네가 나의 품을 떠나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이다.
하나님이 그들이 어디 있는 줄 몰라서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실존 곧 존재가 있어야 할 곳을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질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답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렸냐고 하시면서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를 먹었느냐고 물으신다.
아담은 이에 대하여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의 변명이 가관이다.
그가 먹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열매를 나에게 주어서 먹었다.”고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여자가 주어서 먹었는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라는 것이다.
결국 그 변명의 최종목적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여자에게 물으신다.
너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뱀이 나를 꾀어서 내가 먹었다고 말을 한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그들의 변명 속에 내가 있다.
나의 추함과 더러움 그리고 교묘함이 가득 숨어 있다.
끊임없는 변명은 나를 더욱 수치스럽게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수치스런 상황을 모면하고자 이런저런 거짓말로 포장하고 덮는다.
내 안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아담의 변명이 있고, 하와 속에 숨어 있는 뱀의 가증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때, 내가 죽을 죄를 졌노라고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거기가 어디라고 언감생심 하나님에게까지 그 책임을 전가하는가?
변명하고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요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다름 아니라 나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시간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아담을 비롯한 오고오는 모든 세대를 향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을 따라 나도 그 십자가로 올라간다.
그리고 변명과 책임전가로 일관하던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도 우리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의 그 무덤에 함께 장사되기를 원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목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에 나도 그 영원한 새 생명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누리며 살아야 하지만, 여전히 아담 안에 있는 본성인 옛 사람의 포로가 되어 죄에 넘어지고 자빠지는 자로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나는 나의 죄를 직시하고 주님의 보혈만이 나를 정결케 할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로 서야하는데 순간순간 내가 당할 수치를 벗어나고자 틈만 나면 변명과 책임전가를 밥 먹듯이 행했던 나를 고발한다.
이제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소망이 없다.
정말로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며 오늘도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우리 주님의 품속에서 하늘이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동안 나의 의로 살려고 했고 그 결과 자기주장의지를 쏟아냈던 나를 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말에 솔깃하여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하와의 자기 의는 곧 나의 죄입니다.
하와와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했던 아담의 죄 또한 내 안에 가득가득 채워져 있는 나의 죄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찬양을 올립니다.
나도 우리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그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도 그 십자가에 나의 옛 사람을 못 박습니다.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나도 걸어가기 원합니다.
내 뜻대로 말고 오직 우리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소서.
변명을 일삼는 자가 아니라 죽을 자리에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서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