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낮에 뜨는 달> 속 철학
철학과 23학번 김유빈
웹툰 <낮에 뜨는 달>은 한준오라는 인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의사에게 심정지로 사망을 선고받고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도중, 이상한 일이 하나 벌어진다. 준오의 시체가 들어있을 관이 덜컹거리며 움직인 것이다. 죽었을 것이 분명한 준오가 되살아나고 웹툰의 주인공인 강영화와 만나며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분명 준오와 영화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난 준오는 오직 영화에게만 살갑게 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준오의 몸속에 있는 ‘영혼’은 실은 준오가 아닌 삼국시대에 가야를 정벌하던 신라의 귀족 ‘도하’이며, 영화의 전생인 대가야 장군의 여식 ‘한리타’와 혼인한 관계이며, 리타가 도하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도하는 죽은 뒤 혼령이 되어 1500년, 리타가 19번을 환생할 동안 쭉 리타의 곁을 맴돌았으며, 리타를 원망함과 동시에 사랑하고 있었다.
도하가 리타의 환생인 영화의 주변 인물, 준오의 몸에 들어감으로써, 하나 둘 갈등이 해결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전생인 리타와 도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게 되고 리타가 도하를 죽인 이유를 도하에게 알려주며 리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도하는 영화의 곁을 조금 더 지키다가 근심도, 분노도, 의아함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천도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불교관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불교관의 ‘전생’, ‘환생’ 그리고 유교의 ‘영혼관’을 중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리타는 다시 환생할 때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며 죽는다. 영화가 어릴 적 거울 속에서 도하를 보고선, 거울을 무서워하자 영화의 부모님은 영화를 용한 무당이자 스님에게 데려간 적이 있다. 스님은 영화가 겪고 있는 것은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인간이 윤회하며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절차를 밟게 된다는 불교관이 모티브가 된 내용이다. 리타는 그 현세에서 ‘악업’을 쌓았기에 내세에서 불행을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리타와 도하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풀어나가 도하가 천도함으로써 어쩌면 리타의 악업이 지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타의 전세, 내세, 속세에 있어 악업이 그뿐이라고 하긴 힘들겠지만, 리타와 영화를 얽어매던 가장 큰 업이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타인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리를 다하고 생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에서는 무아설을 바탕으로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이 작품에선 명확하게 영혼의 존재를 다루고 있다. 이는 도하가 죽은 뒤, 리타와 리타가 환생한 인물의 곁에서 혼령으로 머무는 모습과 도하가 준오의 몸을 차지함으로써 몸의 주도권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준오의 영혼에서 쉽게 살필 수 있다. 이는 유교의 ‘영혼관’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도하는 리타에게 살해당한 후 원령이 되어 쭉 이승에 머물며 리타의 곁을 맴돌았다. 원령은 그 원한이 풀려야만이 저승으로 천도할 수 있다. 이는 도하가 1500년 동안 리타의 곁을 맴돈 이유에 대해 작품에 2가지 관점을 부여한다. 첫 번째는 도하의 원혼이 1500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리타의 곁을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계속 리타의 곁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또한, 작중 도하는 인간에게 선한 영향과 악한 영향을 번갈아 끼치며, 선령과 원령에 있어 그 경계선이 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도하는 리타를 이해하게 되며 모든 원한이 풀려 천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영화가 리타의 마음을 도하에게 전한 것이 제사의 역할을 했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원령을 원령을 천도하는 무속이 많이 발달했기에 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웹툰, <낮에 뜨는 달>에서 다루는 불교의 윤회와 유교의 영혼관은 모두 권선징악적 성향을 띄고 있으며, 현세에서의 삶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가 작품으로 하여금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강영화 역시 전세의 자신에게 매몰되어 ‘한리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강영화’로 살아가길 선택했다. 전세의 업보로 인한 불행으로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아갔다. 현세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이 정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첫댓글 우리는 신체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각기관 가운데 시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과 지금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육체에 깃든 다양한 시간대의 자아를 하나로 통합해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형 수술을 해서 외양이 달라지거나, 노화로 모습이 달라졌을 때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꼭 육체만으로 그 사람이 같은지 아닌지를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나를 보증해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분과학문적 입장에서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영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의식을 잃어버린 사람, 또는 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런 점을 물어가다 보면 나는 누군인가,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대답에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