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사포럼이 ‘손정도 목사의 신앙과 삶’이란 주제로 국회헌정기념관에서 13일 오후 2시에 개최됐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손정도기념사업회, 홍문종 의원실이 공동주최했다.
먼저 설교로 강릉중앙감리교회 이철 감독은 “느헤미야는 자기 삶을 내려놓고, 이스라엘 성전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며 “느헤미야처럼 손정도 목사도 그랬고, 그는 이 시대의 귀감”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교파를 뛰어넘어 예수 사랑을 전했던 손정도 목사님을 조명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손정도 기념사업회 상임회장 이강전 장로는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장을 역임했고, 독립국가의 헌법을 제정하는데 일조한 손정도 목사”라며 “그는 화합의 리더십을 추구한 진정한 리더”라고 강조했다.
이어 포럼 시간이 이어졌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 교수가 ‘손정주 목사의 만주선교와 김성주와의 교류에 대한 검토’를 전했다. 여기서 김성주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다. 이 교수는 “손정도 목사는 상해 임시 의정원 의장이며, 동시에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며 “만주에서 선교하다가, 김일성과 접촉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김일성의 아버지는 김형직 이었고, 김형직은 숭실학교 때 손정도 목사와 인연이 있었다”면서 “손정도 목사는 이런 인연으로 길림교회에서 김일성을 친 자식처럼 돌보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김일성이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말한 대목을 인용해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두고 ’친 아버지와 같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때문에 이 교수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만큼은 손정도 목사를 칭송하고 있다”고 했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구체적으로 손 목사의 일대기를 설명하며, 이 교수는 “평양 대부흥은 그의 인생 여정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1909년 미 감리연회의 만주 선교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남았다”며 “1919년 상해에서 현순 목사를 만나, 3.1운동의 외교적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이듬해 4월 13일 임시의정원 의장에 취임했지만, 상해 임정의 계속된 분열로 23년에 절연했다”고 밝혔다. 하여 그는 “서울 정동교회에 복귀해, 만주 길림으로 다시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그는 “손정도 목사는 24년 기독신보 ‘만주선교의 요구’란 글을 통해, 만주 조선인들의 영적·사회적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져, 교회적 책임을 환기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이 글에서 볼 수 있듯, 손정도 목사는 만주에서 조선인들 영혼에 대한 연민이 농밀했다”며 “철저히 복음 전도자로서 만주 선교의 삶을 바쳤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그는 “이를 민족 독립 운동으로만 해석하는 건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손정도 목사는 24년부터 31년까지 만주 길림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김일성을 27년부터 29년까지 만나게 된다.
이 대목에서 그는 북한 측의 기록을 반박하며, 논지를 전개했다. 북한 측 기록은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가 시무했던 길림교회에 출석해, 공산주의 운동을 진행했다”며 “손정도 목사도 김일성의 공산주의 운동을 후원했다”고 명시했다. 이에 이상규 교수는 동경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를 빌려 북한 측 기록이 다소 과장됐음을 지적했다.
와다 하루키는 “북한 현대사는 오직 영원한 주석인 김일성을 신화화하기 위해,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그에 맞춰 왜곡 진술했다”고 비판했다. 또 김일성 연구가인 故 서대숙 한신대 교수는 “김일성의 초기 생애의 많은 중요한 특성들은 통치자로서의 정치적 조작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20년대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도 증오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다”고 강조했다. 가령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살부회를 만들어, 민족주의자들을 살해했다”며 “이로 인해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에 피살당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인 손정도 목사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역설했다.
따라서 그는 “북한 측 자료는 다소 허구”라고 꼬집었다. 다만 그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빌려 “손정도 목사가 숭실학교 동문의 아들인 김일성을 아들처럼 대우해줬다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일성이 길림교회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했다는 회고록 내용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특히 그는 “북한의 종교적 자유를 부인하기 위해 교회를 이념 투쟁의 산실로 거짓 기술한 것”이라며 ‘김일성의 의도된 왜곡 기술’을 비판했다.
장신대 임희국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뒤이어 장신대 임희국 교수가 ‘손정도 목사의 상해 임시정부 수립(1919) 참여를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그는 “1919년 3.1 독립 선언 이후,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중론이 일었다”며 “이듬해 상해 신한청년당, 동제사 등의 주도로 상해 임정이 수립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3월 26일 손정도 목사는 현순목사와 함께 중국인 정치인들을 만나, 외교를 펼쳐갔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상해 임정은 신한청년단을 모체로 했지만, 설립 과정 중 독립 운동 지사들의 주도권 다툼이 심했다”며 “4월 9일 손정도 목사와 이광수는 임정 수립 일정을 제시하며, 화합을 기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4월 13일 이동녕이 의장직을 돌연 사임하며, 손정도 목사가 의장에 취임했다”고 덧붙였다.
이 대목에서 그는 “상해 임정이 세워졌을 당시, 손정도 목사는 ‘대한민국’을 이름 지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대한’은 일본에 빼앗긴 국가주권을 되찾는다는 뜻”이며 “‘민국’은 황제국가에서 인민이 주권을 지닌 민주주의를 국체로 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임희국 교수는 임시정부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1조는 민주공화제 선포했고, 2조는 대의제를 적시했다.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등을 명시하며 7조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신의 뜻’이라고 했다.
특히 임 교수는 “민주공화제 개념에 주목하고 싶다”며
“왜냐면 이는 당시 일본은 전제 군주제였고,
중국의 헌법에서 찾아볼 수 없던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대한민국 임시 헌장의 민주 공화제는 동북아 최초로,
헌법에 넣은 사례”라며 “이는 1945년 건국의 기반이 됐다”고 역설했다.
논의를 확장해, 그는 민주공화제 개념이
장로교회 헌법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당시 의정원 다수가 장로교인”이라며
“장로교회가 헌법 원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임시헌장 제정을 주관한 조소앙은 개신교인”이라고 덧붙였다.
때문에 그는 “민주 공화제는 ‘모든 인민이 균등하게’라는 주권재민을 바탕으로 한
대의민주주의”라고 강조하며, “결국 공화제의 핵심은 평등사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장로교회가 대한민국에 대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실례는 언제부터일까?
임 교수는 “1904년 연동교회가 자리한 연지동은 천민 출신이 많았다”며
“대부분은 연동 교회 교인이 됐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연지동 천민 출신인 고찬익은 투표를 통해 연동교회 장로로 선출됐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그는 “연동교회의 투표 원리는 장로교 원칙에 따른,
조선 반상철폐를 이끈 시초”라며 “평등사회를 이루는 대의민주제의 시작이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연동교회는 신식 사립학교를 설립해 대의민주제를 교육했다”며 “독립협회 출신 사대부들이 여기에서 교육받았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그는 “상해 임정 수립에 참여했던 독립 인사들은
대의민주주의 개념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치적 참여를 자제하면서,
동시에 의료·교육을 통한 간접선교를 지향했다”고 했다.
이로서 그는 “만민의 평등을 기반으로 한 대의민주제는 장로교회 헌법의 중심”이라면
“교회의 3.1운동은 대의민주제에 반하는 일제 군국주의에 저항했던 행동”이라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상해 임정 수립의 의정원 대부분이
상해한인교회 교인들”이라며
“여기서 분파된 대한적십자회의 대표를 손정도 목사가 맡았다”고 덧붙였다.
전 감신대 이덕주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전 감신대 이덕주 교수가 ‘안창호와 손정도’를 발제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와 손정도 목사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던
당시 보수적 신앙인들과 달랐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윤리적 완덕을 중시한 보수적 신앙을 고수했지만,
동시에 사회개혁·사회 참여 등의 진보적 성향을 띄기도 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손정도 목사는 길선주 목사와 다르게,
목회, 부흥, 전도를 사회 참여적 형태로 확대시켰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손정도 목사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계시를 받았다”며
“그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민족이 성령 충만이 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면 조선이 독립을 이뤄진다’였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그는 “손정도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서 만주로 가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따랐다”고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손정도 목사는 도산 안창호와 상해 임정을 수립하는데,
3년 동안 같이했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상해 임정은 민족주의·사회주의, 창조파·개조파 내부 분열을 겪었다”며
“안창호와 손정도는 하나로 만들기 원했지만, 실패해 상해 임정과 절연했다”고 전했다.
따라서 그는 “손정도 목사는 만주로 넘어가 이상촌 운동을 펼쳤지만,
이 또한 일본의 방해 및 사회주의·민족주의 갈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한편 손정도 목사와 안창호 선생은 당시 팽배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은 어땠을까?
이 교수는 “그들은 29년 팽배했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민족 구원이라는 당위라면 같이 손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손 목사는 무장 투쟁의 사회주의, 맑스 개념을 반대했다”며
“초기 사도행전적 교회 공동체에서 비롯한 개념을 주창했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손정도 목사는 ‘스스로 걸레’라고 하며, 낮아지면서 함께 화합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논찬자로는 전 한성대 총장 윤경로 박사가 수고했다.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역시 독립투사의 삶을 살았다.
해석은 1895년 두 살위인 박신일과 결혼하고 22세 때
향시鄕試를 보러 평양으로 가던 중 우연히묵게 된 목사 집에서 크리스토교 교리와
서구 문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과거를 포기한 채 귀향했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마저 부숴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올라왔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된 문요한(Dr. John Z. Moore) 목사의 목사관에서 일하면서
숭실중학과 전문학교를 다닌다.
1910년 목사가 되어 평양감리교선교사에서 시무하다 만주 파견 선교사로 선정되었다.
1912년 안동, 길림, 간도 지방을 순회하며 선교활동에 몰두하던 중 가쓰라 일본수상 암살 모의로 체포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1921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교통총장을 지내며 만주 지린에서 농업공사를 설립했다.
손정도는 힘없이 떠도는 동포들을 도와주었는데,
자신의 친구인 김형직이 사망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된 아들 김일성(북한 전 주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을 자기 집에 함께 살도록 했다.
손정도는 자녀들에게 ‘걸레의 삶’을 강조했다고 한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므로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했다.
손정도는 고문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1931년 2월 19일 지린의 동양병원에서 별세했다.
②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
손원일孫元一은 대한민국의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었다.
손원일은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나 유문중학을 다니다가 원광중학으로 옮겨 졸업했는데
김일성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손원일은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후 중국 해군의 원양항해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40년 동화양행이라는 회사의 상하이 지점장으로 나갔다가 광복되던 날 귀국하여
정긍모, 민병중, 김일병 등과 해군 창설에 앞장섰다.
손원일은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관훈동에서 해방병단을 창립,
대한민국 해군의 요람을 일군다.
“해군은 신사紳士여야 한다”고 믿은 그는 한자 “十一을 세로로 쓰면 ‘士’가 된다”는 점에 착안,
창설일을 ‘士’ 자가 계속되는 11월 11일로 정했다.
이는 육군과 공군에 앞서 가장 먼저 창군한 기록이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40세 때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데
6.25 전쟁 중에는 해병대로 하여금 경남 통영 탈환작전을 성사시켜 ‘귀신 잡는 해병’이란 별명을 얻게 하기도 했다.
1953년 6월 해군중장으로 예편한 뒤 그해 8월 제5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국방장관이 되어서는 미국으로부터 7억 달러의 원조를 받아내 10개의 예비사단을 창설하는 등 국군 현대화의 초석을 다졌다. 행정면에 있어서도 국군묘지 창설, 군목제도의 활성화, 전시연합대학과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외 위탁교육제도의 신설 등 인재양성에도 공헌하였다.
1956년에는 서독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외교 일선에서 국위 선양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의 각종 국제대회에 대표로 참석하는 등 1인 10역의 눈부신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 홍은혜씨는 해군 초창기에 해군 간부 부인들을 중심으로 군함 구입을 위한 범국민적 성금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을 작곡하기도 해 ‘해군의 어머니’로 불려오고 있다.